소설리스트

로그인 더 헌터-168화 (168/325)

#18. 상속자들.

#18. 상속자들.

굳이 갈 필요 없는 원정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원 부대에 이름을 끼워 넣으며 비행기에 올라탔다.

‘정치질보단 쌈박질이 낫지.’

이선희는 그리 생각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이륙을 시작한 비행기는 빠르게 고도를 높여 가고 있었다.

그녀가 랭커가 된 이후, 더 이상 직접적으로 시비를 거는 이들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 대신 뒤로 귀찮은 눈치 싸움이 시작됐는데, 한국 최초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단순히 혜성 길드 내부적인 문제를 넘어, 한국 길드 전체적인 영역에서 불편한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다.

특히, 그녀를 정치적인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움직임도 상당해서, 이래저래 스트레스가 받는 상황이었는데, 마침 딱 적당한 시기에 바깥바람을 쐴 만한 명분이 생긴 것이다.

지구 반대편이니 갈 이유가 없지만, 이야기야 꾸미기 나름이었다.

신참 랭커가 초반부터 빼는 건 좋지 않다는 식으로 말을 맞출 생각이었다. 게다가 굳이 이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랭커의 위치에서 대격변을 겪어 보고 싶은 이유도 컸다.

대격변이란 것 자체가 자주 찾아오는 사건이 아닌 만큼, 쉬이 접하기가 어려운 현장이었다.

과거, 한차례 경험해 본 적이 있지만, 그 무렵에는 한창 성장 중이었던 터라, 제대로 체험을 했다고 보긴 어려웠다.

짐작건대 그런 이유로 찾아드는 랭커들도 꽤 있을 거라고 봤다.

그런 경험마저도 없는 랭커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팀원 없이 혼자 움직이는 건 오랜만이네.’

그녀의 출전으로 인해, 혜성은 굳이 전력을 더 보탤 필요가 없어졌다. 일인 군단이라 불리는 랭커를 출동시킨 만큼, 따로 병력을 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번에는 김연희 역시 따라붙지 않았다.

그녀의 보좌가 아닌, 1팀의 팀장이란 역할을 수행 중이기 때문에, 이렇게 갈라지는 상황도 발생하는 것이다. 게다가 따로 남아서 혜성에서 허튼짓을 하는지도 감시할 필요가 있었다.

창밖으로 어느새 점이 되어 가는 건물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이선!

그 역시 자신의 소식을 들었으리라. 그를 떠올리다가 저도 모르게 쓰게 웃어 버렸다.

‘꼭… 도망치는 것 같네.’

최근, 자꾸만 보고 싶어지는 마음이 커지는 걸 느끼고 있는 탓일까?

괜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괜한 생각일까?

묘한 피로감에 눈을 감아 버렸다.

* * *

산타카타리나!

그 마굴의 외곽, 하나둘 대격변을 위한 경계선이 펼쳐졌다.

이미 주변 도시들은 비상 경계령이 떨어지며, 모든 민간인들의 대피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불순한 목적으로 찾아들었던 이면의 문제아들은, 그들 피난민 틈에 교묘히 끼어서 자리를 벗어났지만, 이와 반대로 정의 수행을 위해 찾아드는 헌터들도 상당했다.

비어 버린 공백만큼 새로운 물결로 채워지는 가운데, 하나둘 진짜배기라 할 만한 이들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먼저 커다란 화제를 이끈 건, 아무래도 이곳 브라질을 대표하는 랭커 마르셀 루이스였다.

“마르셀이 첫 타잔가.”

“아무래도 자국에서 발생한 사건이니까.”

“휘유… 인상 살벌하네.”

“오자마자 통제 들어가는 건가?”

“쯧! 귀찮게 됐네.”

랭커의 등장이니만큼 그 자체만으로도 주변이 들썩이기엔 충분했다.

당장 그 본인의 실력은 랭커들 중에서는 말석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브라질을 대표하는 영웅이니만큼, 이곳 던전에 한해서만큼은 그의 발언권이나 영향력 등은 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를 무시하려 드는 이들도 상당할 터, 그 때문에 더더욱 발 빠르게 움직이며 자리를 잡고 통제에 들어갔다.

먼저 밑밥을 깔아 놓으며 사전 작업을 하며 우위를 점한 것이다.

그 때문일까?

“허어… 여우 같은 놈.”

“산타카타리나 정도면 빼먹을 게 많은데… 쯧! 한발 늦었네.”

“브라질 정부 측에서도 팍팍 밀어줄 게 뻔하고.”

“하나밖에 없는 랭커니까.”

인접 국가를 비롯해서, 가까이 있던 랭커들도 바삐 도착하지만, 그즈음에는 이미 마르셀의 통제력이 경계 지역 전체에 뻗어 있었다.

그가 비록 랭커라고는 하나, 순수하게 그 개인의 능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로서, 이는 브라질 정부 그리고 함께하는 여러 단체의 서포터로 이뤄진 장악력이었다.

자연히 후발 주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며 영향력을 뺏고 견제하는 구도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대격변을 앞에 두고서도 똘똘 뭉치기보단, 갈기갈기 찢어져서 어수선하니 제멋대로 행동들을 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오합지졸이란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가관이군.”

조용히 들어와 있던 데일은 그 모습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짧은 시간 동안 판을 짜고 각종 연출을 구성한 것만이 아니라, 이동도 거듭하며 직접 무대에 올라 배역까지 마련한 것이다.

덕분에 빠르게 도착해서 돌아가는 모양새를 전부 관찰할 수 있었는데, 엉망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직접 나서서 상황 통제를 하진 않았다. 그가 WHA의 협회장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지금의 그는 일반 헌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영광을 앞세워, 대격변에 대한 소식을 발 빠르게 전파하고, 이처럼 각국 헌터들이 모여들 수 있도록 무대를 마련한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충분히 제 역할을 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나마도 존슨의 요청이 있었기에 한 것이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대격변이고 뭐고, 소파에 누워 TV로 감상이나 했을 터였다.

게다가 맘에 안 드는 풍경인 건 사실이지만, 저들이 각성자라는 이유만으로 상당 부분 관대해지는 면도 있었다.

‘쯧쯧… 귀엽게들 노는군.’

이면의 문제아라 할지라도 각성자들에 관해선, 적당히 눈감아 주는 건 일도 아니었다. 바로 그 같은 성향 때문에, WHA가 군데군데 곪아 버린 것이기도 했다.

돌아가는 모양새를 살피던 것도 잠시, 그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채, 다가올 대격변의 순간을 기다렸고, 형제와의 재회를 기대했다.

* * *

홀로 대격변을 컨트롤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르르 쏟아지는 상급 괴수들은 넓은 공간에 걸쳐서 밀물처럼 밀려들기 때문이다.

잠깐만 한눈을 팔아도 몬스터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버리는 터라, 장시간 이를 전부 커버 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실제로도 균열을 넘어오는 몬스터를 전부 해결할 수는 없었다.

단지, 그 와중에도 문제가 될 만한 녀석들을 집중적으로 해결하려 노력하는 것, 그게 존슨이 지금껏 해 오던 최선의 방법이었다.

거기에 추가로 한 가지 더,

“어그로!”

그의 외침과 함께 프링쿨스가 하울링을 터트렸다.

아우우우우우~!

그 순간 광기에 젖어 사방으로 흩어지려던 몬스터들이 프링쿨스를 향해 일제히 돌아섰다.

이전에는 존슨이 따로 챙겨 다니는 어그로 전용 아티팩트를 사용했지만, 균열 너머에서 테이머의 컨트롤을 받는 터라, 오늘은 아티팩트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프링쿨스 덕분에 이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하울링에는 아티팩트보다 뛰어난 도발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근에 그가 자랑하는 마석 결계술을 사용해 놓은 만큼, 단숨에 이곳을 빠져나갈 만한 몬스터는 몇 없었다.

뿐만 아니라 랭커들이 직접 방위를 잡고 활약 중이다 보니, 그 뒤로 넘어가는 게 쉽지도 않았다.

크워어어어어….

반대로 안으로 들어오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벽을 넘은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무려, 일곱의 마석 결계술!

그가 펼칠 수 있는 최고 결계술의 바로 밑 단계로서, 한참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야 겨우 완성할 수 있는 수준의 마석 결계술을 단시간에 펼친 것이다.

짐작건대 공을 들인다면 아홉 개의 벽도 뚫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레이드 클래스의 고위종이라 하더라도, 쉬이 넘어오기 어려운 터라, 안팎으로 크게 치이는 사태는 면할 수 있었다.

그 대신 균열을 넘어오는 몬스터들의 처리 속도가 늦춰질 경우, 내부에 쌓이는 숫자가 늘어나며 일행들의 부담감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속도 붙여! 밀리지 마! 라인 지켜! 좀 더… 버텨….”

게다가 이렇게 쉴 틈 없이 속도를 내야 한다는 점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랭커 파티라고는 해도 마족의 분신과 전투를 치른 직후였다. 겨우 기본 컨디션만 맞춰 놓은 상황이 아니던가.

빠르게 체력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의외였던 건, 랭커도 아니면서 마족과 결전을 치렀던 마루의 활약이었다.

‘아직도 저렇게 팔팔하다고?’

‘분명, 곧 죽을 것 같았는데, 어느새 저만큼 회복했다고?’

‘허… 도대체 회복력이 얼마나 좋은 거지?’

이반나와 프링쿨스 그리고 토비는 일제히 마루에게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진땀을 빼며 속도를 맞추는 그들과 달리, 한결 여유 있어 보이는 마루의 모습이 반전으로 다가온 것이다.

연공법과 그 추가 효과에 대해 모르는 그들로선, 마루의 회복력이 괴물처럼 보이는 게 당연했는데, 이들과는 다른 의미로서 마루에게 놀라고 있는 이도 있었다.

‘…말도 안 돼!’

그건 바로 레오였다.

‘멀티 스킬 각성자라고?’

상황이 상황인 만큼 마루는 더 이상 자신에 대해 숨기지 않았고, 그로 인해 레오는 마루의 능력을 살필 수 있었으며, 그 때문에 손발이 꼬이고야 말았다.

너무 놀라 호흡이 흐트러진 것이다.

특히나 충격적인 건, 단순히 더블 스킬로 멀티 각성자의 기준을 채운 게 아니라, 어마어마한 숫자를 내보이며 스킬들의 연계를 선보이고 있단 점이었다.

마치 레오 본인과 같다고나 할까?

‘아니, 어쩌면 나 이상일지도….’

다행스럽게도 이들은 최고의 베테랑으로 구성된 랭커 파티였고, 그런 만큼 레오가 보이는 순간의 실수 정도는 충분히 커버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체력이 빠진 직후에는 쉽지 않겠지만, 레오의 실수는 초반부에 나왔던 터라, 문제가 크게 부각되는 일은 없었다.

레오는 이후 틈틈이 마루를 곁눈질하며 그를 살폈다.

‘저건… 염력? 탱커 계열도? 미친! 지금 설마, 성력인가?’

연달아 전율적인 광경이 이어지며 그를 놀라게 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몸뚱이는 그 와중에도 착실히 제 일을 하며, 두 번의 실수는 용납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밀물 타임이 끝나며, 짧은 휴식 시간이 찾아왔다.

‘뜨끈뜨끈하네.’

마루는 자리를 잡고 앉은 채, 뒷목을 슬쩍 쓸었다. 후방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시선을 감지한 까닭인데, 이는 전투 중에도 꾸준히 이어졌던 눈길이기도 했다.

‘레오….’

그의 집요한 시선을 느끼며, 슬쩍 존슨을 바라봤다.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하는데, 히쭉 웃는가 싶더니 이를 무시하며 이반나와 깨 볶기에 여념이 없었다.

“달링~! 고생했지? 어구구… 예쁜 다리에 알 배기겠네. 있어 봐. 내가 마사지 좀 해 줄게.”

“여기하고 여기도.”

이반나 역시 슬쩍 콧소리를 내며 호응하는 게 보였다.

“맡겨만 줘!”

존슨의 열렬한 추종자인 프링쿨스와 토비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감당하기 어려웠던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쉬는 가운데, 레오가 다가왔다.

“무슨 일?”

마루가 편안히 물었다.

초면이나 다름없지만 존슨과 형제라는 점, 그리고 나이 차 등을 고려해서, 대략적인 호칭 관계가 정리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영어권 국가에도 나름의 예의라는 게 있다 보니, 레오도 그를 대할 땐, 좀 더 정중한 어법을 사용하고는 했다.

주저하는가 싶던 레오는 마루가 먼저 말문을 열어 준 덕분에, 가까스로 궁금했던 걸 끄집어낼 수 있었다.

“아저씨는… 혹시, 실버 박사님을 아시나요?”

거기서 마루는 직감했다.

‘들켜 버렸나?’

밀물 타임 내내 관찰을 거듭하는 것 같더니, 기어이 그와 PP 사이의 연관성을 눈치챈 듯싶었다.

이에 슬쩍 존슨을 보는가 싶던 그가, 잠시간의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만난 적도 있지.”

아니나 다를까. 한참 이반나와 깨를 볶던 존슨의 고개가 그에게로 돌아오는 게 보였다. 생각지도 못한 정보였으리라.

그 놀란 모습이 고소해 슬쩍 실소를 날려 준 뒤, 레오를 향해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

레오의 동공 가득 지진이 일었다.

‘정말… 실버 박사의 유산을?’

쉬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 때문에 저도 모르게 존슨을 바라보고야 말았다. 이 자리에서 실버 박사와 가장 큰 친분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이 닿자, 존슨이 놀라는 와중에도 고개를 끄덕여 주는데, 이에 레오는 재차 기겁하며 마루를 돌아봤다.

마루는 경악에 물든 레오의 얼굴을 마주 보며 문득 생각했다.

실버 박사의 재산!

‘으음… 요놈이 내 최대의 난적인가?’

뜻밖의 상속 전쟁이 예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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