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유산.
#2. 유산.
실버 박사의 유산을 이어받은 정통 계승자였다.
당연히 관심이 안 갈 수가 없었다.
“멀티 스킬이란 말이지.”
데일의 물음에 레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요즘 좀 우쭐했었는데, 덕분에 아주 제대로 찌그러졌네요.”
그 말에 데일이 헛웃음을 지었다. 근래 어깨에 뽕이라도 넣은 듯, 쉼 없이 으쓱거리던 제자였건만, 아주 제대로 추욱 처진 게 보였다.
내심 고소를 지어 보인 그가 존슨의 새로운 의형제, 정마루를 조용히 관찰했다.
존슨과의 해후에 취하느라 제대로 된 인사로 나누지 못한 게 아쉬웠다. 어째서인지 마루 측에서도 먼저 다가오려 하지 않았던 터라, 그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접근하기보단, 잠시 시간을 두고 살피면서 상대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중요했다.
남다른 두뇌 회전을 통해서 특출난 관찰력을 획득했고, 이를 토대로 관련 스킬마저 얻어 내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마루를 유심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적잖은 정보를 취득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비각성자로 15년을 버텼다고 했었지.’
만약 그가 헌터의 꿈을 꿨던 시간까지 포함한다면 어찌 될까?
‘대부분 유년기에 히어로가 되고 싶어 하니까.’
혹여 늦더라도 청소년기가 끝날 무렵에는 한 번쯤 꿈꿔 보기 일쑤였다.
‘적어도 3~4년 정도는 더 추가한다고 치면. 얼추 20년가량을 비각성 헌터의 삶에 맞춰 온 건가.’
전장을 살피다가 저 멀리 후방으로 시선을 두는가 싶더니, 얼굴 한편에 그늘을 드리우는 모습에서, 그의 과거를 새삼 상기하게 만들었다.
비각성자에 더 친화적이지만 상관없었다.
언제나 그러하듯, 각성자라는 이유만으로도 데일은 상대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었다.
그런 것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실버 박사의 유산!’
각성자를 우선시하지만, 세상은 비각성자가 더 많았다. 그 때문에 과거 그는 실버 박사의 연구를 적극 지지했었다.
[각성자가 부족하면, 늘리면 되지!]
그에 안성맞춤인 게 바로 실버 박사의 연구였다. 제자 레오에게 그 유산의 결과물을 직접 체험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요상한 체조 같은 걸 알려 줘서 뭔가 싶었는데, 그걸 하고 나니까 몸에 활력이 돌더라구요.
그처럼 머리가 아닌 몸 쓰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던 만큼, 레오 역시 마굴을 나설 즈음에는 ‘활력의 춤’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포스가 아닌 신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게, 아무래도 각성자가 아니라 비각성자를 위한 체조 같던데요.
그 부분에서 실버 박사의 연구라는 확신을 얻었다.
로그인 더 헌터!
실버 박사가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던 헌터 육성 프로그램이 바로 비각성자를 위한 공부이지 않던가.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소용돌이치고,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났을 즈음, 관찰을 마치며 걸음을 내디뎠다.
“반갑습니다. 정마루 씨죠?”
입꼬리도 한껏 올렸다.
대외적으로 보여 주는 가식적 미소가 아니었다. 눈앞의 사내야말로 그의 이상을 이뤄 줄 존재이기에, 정말 진심으로 기쁘게 웃음을 짓는 거였다.
그가 정중히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드리안 데일이라고 합니다.”
마루의 국적을 상기하며, 허리도 살짝 숙여 줬다.
* * *
조금은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아드리안 데일!’
앞서 존슨을 통해 소개받을 기회가 있긴 했지만, 괜히 부담됐던 터라 자리를 피했었다.
하필이면 그 혼자였던 터라, 더 거북했던 면도 있었다.
이반나의 경우에는 러시아 측 헌터들을 향해 움직였고, 프링쿨스는 앞서 도착한 팀원들을 찾아 이동한 까닭이었다.
그런 이유로 마루 역시 한국 측 헌터들을 알아본다며 적당히 발을 뺀 것인데, 설마 저쪽에서 먼저 찾아올 줄이야.
아드리안 데일!
WHA의 2대 협회장이며,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사내였다. WHA가 지금의 규모를 이룬 것도 전적으로 데일의 힘이라 할 수 있었다.
여전히 세계 최강국이라 불리는 미국, 그곳의 대통령보다 더 거대한 영향력을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 그게 바로 아드리안 데일이었다.
일선에서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니, 현역 시절에는 어떠했겠는가.
영웅적 가치로는 존슨이 한참 우위에 있다지만, 이를 제외하고 본다면 모든 부분에서 데일의 손을 들어 줄 터였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존슨은 만화 속 히어로 같은 존재고, 데일은 현실의 권력자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 때문에 존슨과의 만남은 동심을 일깨우는 감각이었다면, 데일과의 만남은 묘한 답답함과 불편함을 동반하고 있었다.
물론, 이를 드러낼 수는 없었음에, 애써 미소를 그려 보이며 손을 맞잡고, 짧게 인사를 나눠야만 했다.
“정마루라고 합니다. 협회장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직접 뵙게 될 줄이야.”
영광이네 어쩌네 하며 미사여구를 좀 늘어놓고 있을 즈음, 데일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괜히 격식 차릴 것 없습니다. 존슨처럼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그리고 협회장 자리에서 물러난 지도 한참이니, 그냥 데일이라고 불러 주세요. 존슨처럼 형님이라고 표현해도 좋습니다.”
그 말에 마루가 잠시 생각하다 이야기했다.
“그러려면 협회장… 데일… 형님이 먼저 말을 편하게 하셔야죠.”
“하하! 시원시원해서 좋네. 그렇게 하지.”
데일은 그리 말하며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는데, 캔 맥주가 들려 나오고 있었다.
“이런 휴식 타임에는 남들 몰래 한 캔 따는 게 제맛이지.”
그러며 따악 캔을 따서 시원하게 들이켜는데, 거기에 넘어간 듯 마루도 결국 한 캔 따야만 했다.
그와 동시에 의문을 느꼈다.
캔 맥주는 소형이 아닌 대형이었는데, 이 커다란 게 무려 두 개나 품에 들어가 있었다는 점에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를 읽은 것인지, 데일이 슬쩍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이듯 말했다.
“비밀인데, 공간 확장 아티팩트를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거든.”
있다 없다 말만 많았던 그 특별한 아티팩트가 언급된 것이다.
당연히 깜짝 놀랄 이야기였건만, 마루는 의외로 태연한 반응을 보여 줬고, 이에 데일의 눈가에 이채가 스쳐 갔다.
“별로 안 놀라네?”
“아… 놀랐죠. 그냥 혹시, 그 비슷한 걸 가지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잠깐 하고 있어서. 하하!”
사실은 그보다 대단한 아공간을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었지만, 자신의 리액션이 부족했다 생각하며 조용히 반성했다.
하나 데일은 다른 방향으로 착각해 버렸다.
“뭐, 그림자 사슬을 얻었으니까. 그리 놀랄 일은 아닌가? 듣기로는 사슬 내부에 개별 공간이 있다던데, 정말 그런 거야?”
마루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좀 전의 리액션을 둘러대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던 터라, 얼씨구나 하며 노를 저었다.
“하하! 그… 그렇죠. 이게 정말 특수한 기능이라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벌써 알고 계셨네요?”
새삼 그림자 사슬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적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제 막 획득한 아티팩트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관련해서는 차후에 알아보면 될 일이었다.
데일이 웃으며 말했다.
“협회장 자리에서 내려온 지는 꽤 됐어도, 여전히 들어오는 정보는 상당하니까.”
그러면서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거기서 ‘실버 박사의 유산’에 관한 호기심이 두 눈 가득 넘실대는 걸 느꼈다.
이미 그의 접근에서 짐작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게다가 마수지대를 나오면서 존슨에게 따로 언질을 받지 않았던가.
―어쩌면 데일이 널 찾아갈지도 모르겠다.
실버 박사의 유산은 그만큼 데일에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관련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물으니, 존슨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네가 알아서 해야지. 유산의 주인은 너야. 네 맘대로 하면 돼.
그 이야기를 떠올리며 마루가 입을 열었다.
“실버 박사의 유산, 욕심나십니까?”
너무도 단도직입적인 그 물음에 데일의 눈가에 언뜻 당혹감이 스쳐 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세 표정을 컨트롤한 그가 웃으며 말했다.
“욕심? 별로.”
마루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남다른 감각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 생각까지 읽는 건 불가능할지라도, 마치 거짓말 탐지기처럼 상대의 말 속에서 진위 여부 정도는 파악하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이런 감각이 데일의 대답을 진심이라 전하고 있었다.
“사실, 아예 욕심이 없다면 거짓이겠지. 하지만 그 종류가 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를 거야.”
그러더니 묻는다.
“레오 녀석에게 듣자 하니, 일행들에게 독특한 체조를 가르쳐 줬다고 하던데, 아마도 그게 실버 박사의 유산 중 하나겠지?”
“…예.”
“그걸 가르쳐 준 이유가 뭐지?”
“당시 상황이 필요로 했으니까요.”
이에 데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됐어. 네가 실버 박사의 유산을 혼자 싸매고만 있진 않을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렇게 주변에 베풀 거라면, 난 크게 욕심부리지 않을 거야.”
마루가 적잖이 놀랐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허… 내 이미지가 대체 어떻게 전해진 건지.”
그 말에 괜한 민망함이 들었던지, 마루가 급히 표정 관리를 하며 시선을 피했다.
“실버 박사의 유산을 이어받았다면, 그분의 유지도 이어받아 줬으면 좋겠다. 나는 그거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어.”
“유지라면….”
“로그인 더 헌터! 그분의 유언이나 마찬가지야. 알지?”
이에 마루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뭔가를 결심한 듯, 데일을 향해 물었다.
“뭐, 적을 거 있습니까?”
“스마트한 시대야.”
그리 말한 데일이 폰을 꺼내서 건네는데, 이에 메모장을 켠 마루가 그 위에 뭔가를 적어 내려갔다.
내용을 확인한 데일이 물었다.
“이게, 뭔가?”
“보시면 알잖아요.”
“웬 사이트 주소인 건 알겠는데… 이건, 리튜브인가?”
마루가 히쭉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추천, 구독, 좋아요까지. 잘 부탁드릴게요.”
아직까진 아리송하기만 한 터라, 데일은 멍청하니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데일은 진영으로 돌아오는 내내 마루에 대한 생각을 놓지 않았다.
맘 같아서는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울 수 없었던 탓에, 결국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다른 랭커들처럼 모습을 드러낸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주시하는 눈동자가 상당한 까닭이었다.
그래도 짧게나마 나눈 대화 속에서 많은 걸 알아챌 수 있었는데, 개중 놀라웠던 건 공간 확장 아티팩트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림자 사슬?’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였다.
이는 남다른 관찰력으로 마루의 동공에 떠오르는 당혹감을 읽은 뒤, 그가 적당히 주워들은 이야기 하나를 떠올리며 길을 열어 줬을 뿐이었다.
‘혹시, 관련 아티팩트가 있는 걸까?’
한편으로는 묘한 기대감도 있었다.
‘어쩌면 스킬일지도 모르겠네.’
뭐가 됐건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그만큼 실버 박사의 유산이 대단하단 결론으로 이어지면서, 자신의 바람이 이뤄질 확률 역시 높아질 터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그의 손으로 이뤄내지 못한다는 정도랄까?
지난 세월의 노력이 아깝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만 얽매여 살아왔던 건 아니기에, 미쳐 날뛸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이런저런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도 하고 있었다.
‘존슨 그 녀석을 통해서 슬쩍슬쩍 챙겨 주면 되겠지.’
그러다가 마루가 적어 줬던 주소를 떠올렸다. 남다른 두뇌 덕분인지 어느새 견적이 뽑히고 있었다.
‘리튜브라….’
슬쩍 입꼬리가 올라갔다.
‘…재밌겠네.’
* * *
마루는 저 멀리, 마수지대의 경계 너머로 시선을 던져 보냈다.
‘열두 번의 웨이브라.’
이레귤러를 벗어난 이후로도 6차례 이상 밀물 타임이 이어졌다는 의미로, 그만큼 많은 수의 군세가 저 깊은 곳에서 진군을 시작한다는 뜻이기에, 긴장감이 바짝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저들 군세의 수뇌부로 생각이 닿았다.
‘마족….’
흥미로운 건 그들에 대한 정보 역시도 실버 박사의 유산 안에 담겨 있단 점이었다.
퍼펙트 플레이!
대격변과 관련한 핵심 정보라 할 수 있는 마족, 그들에 대한 기본 정보가 PP 내부에 숨겨져 있었다.
“빨리 3차 전직을 해야겠네.”
그 시점부터 마족 퀘스트가 시작되며, 관련 정보들이 하나둘 오픈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귀국하면 한동안은 PP에만 집중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