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그림자 사슬.
#9. 그림자 사슬.
이반나와 프링쿨스 그리고 토비!
그들 세 랭커는 일찌감치 전장에 뛰어들었다.
마굴에서의 격전으로 인해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보니, 큰 전투보다 자잘한 소전투에 투입해 전장의 흐름을 조율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프링쿨스와 토비의 경우에는 몸 상태가 정상이더라도 어지간하면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을 터였다.
이면의 헌터!
그들 활동 영역의 문제로 인한 경계선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개입도 충분한 효과는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았다고는 하나, 알 만한 이들은 다 아는 게 랭커라는 존재였고, 이곳의 헌터들은 그만한 정보력은 갖추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때문인지 프링쿨스와 토비의 개입으로 군데군데 사기가 올라가는 모습들이 비쳐졌다.
그렇게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프링쿨스들과 달리, 이반나의 경우에는 러시아 측 병력들과 함께 행동하고 있었다.
이반나는 전장을 휘젓는 한편, 저 뒤편을 살피며 랭커들의 움직임을 체크했다.
‘쓸데없이 생각들만 많아서는… 쯧!’
서로 먼저 나서는 걸 기다리는 것이다.
아무래도 상대가 마족이니만큼, 정면 대결은 쉽지 않을 터, 누가 어떤 활약을 했건 간에,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마지막에 웃는 자였다.
이를 알기에 서로 눈치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인데, 뜻밖의 변수로 인해 더는 그럴 수 없게 됐다.
아이언슈트!
마루가 먼저 움직인 덕분에, 저들도 마냥 눈치만 보고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 * *
브라질의 랭커 마르셀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전방으로 나섰다.
“어쩔 수 없나.”
자국에서 발생한 사태에서 끝까지 뒷짐만 지고 있을 순 없었다.
물론, 그는 다른 랭커들과 다르게 전장을 지휘하며, 자국 헌터 및 병력들을 통제하는 데 정신이 없긴 했다.
뿐만 아니라 이선희의 개입에 호응하며 제법 날뛰지 않았던가. 만전의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단 움직여야 한단 결론이었다.
손해를 좀 보더라도 자국을 위한 희생이 필요했다.
‘어쩌다 보니 제물 노릇이나 하게 됐군. 후….’
사실, 랭커들의 눈치 싸움에는 마족과의 상성 상극을 구분하기 위한 뜸 들이기의 과정도 섞여 있었다.
누군가 먼저 선공을 친다면?
이를 지켜보며 자신에게 맞는 타입의 마족을 찾아 움직이는 것이다. 마족과의 전투는 랭커들에게도 목숨이 달린 일이다 보니, 더욱 신중해지는 것이다.
마족과의 눈치 싸움만이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치열한 견제가 이뤄지고 있다고 봐야 했다.
그렇게 마르셀이 마족들을 향해 움직였다.
강화계의 신체 변형 각성자 중, 몇 안 되는 거리 공격이 가능한 능력자로서, 그 방법이 실로 괴이했다.
“오옷! 마르셀이다.”
“나온다. 고무고무~!”
“크고 아름다운!”
“피스토올~!”
헌터들이 그를 발견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 마르셀이 양손을 크게 뒤로 젖혔다가 뻗었다.
그 순간, 마치 거짓말처럼 그의 팔이 쭈욱 늘어나더니 수십 미터 거리를 격하며 마족을 향해 날아갔다.
투두두두두두두두….
작정하고 한 놈을 찍은 채, 매섭게 연타를 내지르는데, 마치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주먹질에 헌터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 * *
한껏 날 선 초감각 덕분일까?
마루는 저 멀리 랭커들의 개입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겨우 시작했네.’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눈앞의 마족에게 집중하며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쉬이익… 쉬이이익….
바람 계열의 능력인 듯, 보이지 않는 공격을 쉼 없이 휘둘러 오는데, 초감각이 아니었더라면 초반부터 적잖은 피해를 입었을 터였다.
특히, 일반적으로 쏘아 내는 장풍 계열이 아니라, 마치 채찍처럼 길게 휘감겨 오는 탓에, 더욱 까다로운 면이 있었다.
저 번거로운 바람 채찍은 그냥 휘두르며 타격을 먹이는 게 끝이 아니었다.
‘거지 같은 흡입력!’
실수로 걸려드는 순간, 마치 문어 빨판처럼 달라붙으며 그를 붙잡고 늘어지는 것이다. 그 때문에 아슬아슬한 회피도 자제해야 했다.
채찍 주변에 흡입력이 강하게 작용 중이다 보니, 멋대로 궤적을 틀며 달라붙기 때문이다.
게다가 휘감기고 난 이후, 바람을 타고 올라오는 게 있으니, 숨 막히도록 뜨거운 화마였다.
그림자 사슬의 절묘한 커트 능력이 아니었더라면, 크게 손해를 봤을 터였다.
크흐흐흐….
연신 뒷걸음질을 치는 마루의 모습에, 자신의 유리함을 아는 것인지 마족의 입가에 꼴 보기 싫은 미소가 한가득 걸렸다.
새삼스레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게 참으로 다행이다 싶었다. 당황하는 모습이 외부에 드러나지 않기 때문인데, 저 멀리서 그를 주시하는 카메라에 이런 부분이 촬영되는 건,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실제로 당장 비쳐지는 흐름만으로도 여러 게시판에는 부정적 반응들이 이어지고 있기도 했다.
―아… 어째 깝치는가 싶더라.
―까부리의 최후!
―솔직히 마족하고 1대 1은 오버지.
―데뷔전이 제삿날인가?
―아직 속단하지 말자.
―승부는 끝나기 전까진 모르는 거다.
―믿습니다. 아이언슈트!
물론, 가면 너머 동공의 흔들림으로 인해, 눈앞의 마족은 그의 감정 변화를 세심히 체크할 수 있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확실히 분신체와는 차이가 있는 걸까?
마루 본인도 이전과는 달리 랭커급에 오르며 급성장을 했다지만, 반전 타이밍을 제대로 잡지 못한 채, 조금씩 밀리고 또 밀리더니, 어느새 일방적인 구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나마 초감각을 통한 절묘한 회피기가 없었더라면, 일찌감치 무대의 막이 내려갔을지도 몰랐다.
이 같은 모습에 몇몇 랭커들이 고소하단 표정으로 개입 타이밍을 쟀다.
“건방진 놈! 꼴 좋다.”
“까불더니, 고작 저 정도인가?”
“마족 놈은 원소 계열 능력을 지닌 것 같군.”
“한 팔 거들고, 빚이나 씌워 놔야겠네.”
그렇게 각을 재고 있을 때였다.
푸욱! 퍼버버벅!
마족의 절묘한 공격이 마루를 관통하며 치명상을 입히는 게 보였다. 그림자 사슬을 뚫은 얼음 칼날이 신체를 앞뒤로 꿰고 있었다.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신음성과 비명을 교차하는 찰나, 기회를 잡은 마족이 과감한 돌격으로 거리를 좁혀 왔다.
불과 얼음 등을 양손에 휘감은 채 달려드는 모습이 실로 위협적이었다.
“저렇게 갑자기?”
“빌어먹을!”
각을 재던 랭커들이 급히 신형을 쏘아 보내고, 그 순간 반전이 일어났다.
뻐버버벅!
마치, 언제 다쳤냐는 듯 너무도 태연하게 마족의 공격을 카운터 치며, 그대로 연격을 쏟아 내는 마루의 모습이란, 지켜보던 이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는 마족 역시 다르지 않았다.
기회를 잡았다고 여기며 단번에 승부를 내려 했건만, 그게 설마 반격의 서막이 될 줄이야.
급히 몸을 빼내려 하지만, 마루는 이를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근접전의 스페셜리스트인 몽크의 모든 재주를 발휘하며, 놈을 물고 늘어졌다.
코앞에서 휘둘러지는 불과 얼음이 그를 태우고 얼렸지만, 마루는 이를 무시하며 저돌적으로 밀어붙였다.
마치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으며 마족을 두들겼고, 그 결과 마족의 양팔에서 불과 얼음이 사그라지고 또 녹아 버렸다.
어느새 일방적인 폭력을 쏟아부으며 곤죽으로 만들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반전에 모두가 벙쪄 있는 가운데, 예상치도 못한 타이밍에 너무도 이른 승부가 났다.
“푸하아아아아!”
길게 숨결을 토해 내며 마루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 오연한 시선으로 주변을 쭈욱 돌아봤다.
마족만이 아니라 랭커들까지, 전부 그 눈빛 앞에 움찔하는 게 보였다.
이는 TV 너머로 상황을 지켜보던 수많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 포스 넘치는 모습은 절로 숨죽이게 만드는 존재감이 가득했다.
―아… 기저귀 좀 갈고 올게.
―까부리니 뭐니 하던 놈 나와?
―믿었다. 아이언슈트.
―와~! 마족을 혼자 잡았다고?
―저 정도면 충분히 최강을 논할 만하네.
―최소 Top10에는 놔야 하는 거 아님?
―인정!
―아니, 대체 저런 실력자가 어디 숨어 있었던 거야?
마루는 들썩이는 주변의 분위기를 만끽하며, 조용히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설계가 제대로 통한 쾌감이 전신을 강타했다.
‘됐다!’
상황 반전을 이뤄 낸 비장의 카드를 떠올렸다.
그림자 사슬!
앞서, 트윈헤드 오우거와의 전투 이후로도, 대격변의 최전선을 달리며 단기간에 수많은 전투를 치렀고, 그만큼 많은 몬스터들을 때려잡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그림자 사슬의 비밀 기능도 알게 됐다.
‘사신의 낫 기능이려나?’
아직 명확히 정의를 내릴 순 없었지만, 어차피 사신의 낫이 그림자 사슬에 흡수된 만큼, 굳이 둘을 분류할 필요는 없다 여겼다.
어쨌든 그렇게 알게 된 특수 능력, 그건 실로 놀라웠다.
스킬 탈취!
처치한 몬스터들의 능력을 흡수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수를 처리했느냐에 따라 그 퀄리티가 달라지는데, 마루는 전장의 최전선을 달리며, 단기간에 어마어마한 수의 몬스터를 처리했다.
그림자 사슬에는 충분한 능력치가 세이브된 상태였다.
앞서, 트윈헤드 오우거와 힘겨루기를 할 때, 그림자 사슬이 괴력을 더해 줬던 건, 이런 식으로 쌓인 능력치가 발휘된 것으로, 마굴에서 나오며 처리했던 몬스터들의 괴력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보너스 같은 능력으로서, 게임 외적으로도 멀티 스킬의 조건을 갖추게 된 것이다.
‘소모성이긴 하지만.’
일정 횟수를 사용하면 저장된 능력이 사라지긴 하나, 앞서도 언급했듯 그림자 사슬이 취한 목숨은 상당했다.
‘정말로 기깔나는 아티팩트를 얻었어!’
사실, 이는 그림자 사슬이 아닌 사신의 낫의 능력으로서, 원래라면 주변 사기를 빨아들여 능력을 갈취하는 것인데, 그림자 사슬을 거치면서 약간의 변형이 발생한 상태였다.
주변에 뿌려진 사기가 아닌 직접적으로 죽음을 부여한 몬스터의 스킬을 탈취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강화’ 효과도 사라졌는데, 그 대신 사기 흡수로 인한 정신 오염의 부작용도 함께 해소된 터라, 마루는 걱정 없이 스킬을 갈취하고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림리퍼가 사용할 땐, 사신의 낫이 그림자 사슬과 개별적으로 존재했지만, 지금은 그림자 사슬의 하위 개념으로 흡수된 터라, 이런 식의 변형이 발생한 거였다.
능력치의 축적 속도는 이전보다 늦춰지고 조건도 더 까다로워졌지만, 그 대신 안정감이 더해진 것이다.
물론, 이런 부분은 마루 입장에서는 알 수 없는 내용이기도 했다.
마족과의 1대 1 전투?
언뜻, 무모한 도전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칩도 없이 판을 벌이고 패를 던진 건 아니었다.
그림자 사슬의 방어력과 사신의 낫의 공격력!
나름 확실한 카드였다.
‘컨디션이 별로라서 단기 결전을 한 건데. 후우… 다행히 통했네.’
밀리고 밀리는 구도 그리고 기어이 허락한 관통상까지, 이 모든 것들이 조커를 뽑기 위한 미끼였던 것이다.
[감각 차단]
몬스터 특유의 ‘광폭화’ 모드를 끌어 올린 뒤, 관통상의 고통을 씹어 버렸고, 이를 통한 괴력 증가와 [잠력] 스킬의 연계 등, 반전을 위한 승부수까지 띄웠다.
스스스스….
관통상 덕분에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건만, 오래지 않아 뚝 끊기는 게 보였다.
트롤을 비롯하여 여러 회복 계열 몬스터들의 능력치가 발휘된 것이다. 그 덕분에 불과 얼음으로 인한 부상도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당연히 이 장면 역시 카메라에 찍히고 있었고, 세계는 쉼표 없는 경악성을 이어 가는 중이었다.
―와… 다중 스킬에 회복력까지?
―아니, 정말로 인간 맞냐?
―저 속도면 거의 트롤급이네.
―Top10이 아니라 Top5는 봐야겠는데.
―아이언슈트 피규어 떡상 각?
―존버는 승리한다.
―주문 들어간다.
마루는 차분히 숨 고르기를 하며 몸 상태를 체크했다.
[컨디션 : 3]
‘어째, 머리가 어질어질하더라니.’
중상으로 구분될 만큼 다운된 것이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나, 짐작하건대 광폭화 모드의 여파가 가장 클 거라 여겼다.
흥미로운 건 그림자 사슬의 움직임이었다.
‘센스 좋네!’
무릎이 덜덜 떨리면서 그대로 쓰러지고 싶은 상황이건만, 그림자 사슬이 멋대로 움직이며 그를 버티고 세우는 중이었다.
마치, 그의 생각을 읽고 반응해 주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편하게 기대고만 있을 뿐이건만, 알아서 포스 넘치는 자세가 구현되고 있었다.
새삼 보통 아티팩트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가운데, 더욱 놀라운 상황이 연달아 펼쳐졌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그의 모습에, 몇몇 몬스터들이 슬금슬금 거리를 좁히는가 싶더니, 돌연 폭발적인 움직임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그림자 사슬이 움직였다.
퍼버버벅!
마치, 그의 움직임을 복사하기라도 한 듯, 똑같은 방식으로 움직이며 카운터를 치더니, 단숨에 달려들던 놈들을 제압하고 그 숨통까지 끊어 놓았다.
그러더니 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다시금 본래의 오연한 자세로 돌아오는데, 이 순간만큼은 마루도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건 뭐야?’
새삼스레 그림자 사슬에 대한 의문이 가득 쌓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