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드레이크?
쌍둥이는 간만에 현실 바람을 맞으며 산책을 하고 있었다.
“흐아… 한동안 버스 운행만 오지게 했더니, 눈은 뻑뻑하고 머리가 빡빡하다.”
임지현의 이야기에 임수현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거의 폐관 수련급이었어. 길드에서도 안 했던 폐관을 게임에서 하게 될 줄이야. 으으….”
“그나저나 갑자기 운행 중단이라는 게, 아무래도 우리 예상이 맞는 거 같지?”
“어. 특수 칭호가 아니라 특수 직업이 확실해.”
그렇지 않고서야 2.5차 전직 퀘에서 갑자기 운행을 중단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전직 퀘스트라 불리지만, 실질적으로는 중간 점검 단계라고 할 수 있었던 터라, 퀘스트 자체적인 제약이 그리 크진 않았다.
당연히 버스를 받아가며 퀘스트를 처리하는 것도 문제 될 게 없건만, 마루는 그들에게 휴가를 주며 혼자서 2.5차 전직 퀘스트에 돌입했다.
“대체 얼마나 특별한 직업이기에, 혼자서 쩜오 퀘스트를 집는 거야?”
임지현의 의문에 임수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거기까진 그들도 알 수 없는 영역이었다. 마루에 대한 관심도가 남다른 탓인지, 임지현은 꾸준히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입에 담았다.
“어느 던전으로 갔을까?”
“보니까 혼자 깨야 하는 것 같아 뵈던데, 아투소 던전이나 루지덴 필드 두프리안 호수 정도겠지.”
2.5차 전직 중 가장 난이도가 낮은 장소들이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임지현이 우스갯소리를 하듯, 장난스런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설마, 용곡을 간 건 아니겠지?”
용곡이란 용의 계곡의 줄임말이었다. 임수현이 실소하며 말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거길 누가 가. 정식 파티도 안 가는 장손데.”
그렇게 꺄르륵 웃는 쌍둥이들은 몰랐다.
맨정신으로도 용곡에 발을 들이고, 꾸역꾸역 심처까지 기어간 사내가 있다는 걸, 그들은 결코 알 수 없고, 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 * *
드레이크!
거의 끝판 왕 같은 존재로서, 기본적으로 항마력이 높다 보니 마법도 잘 안 통하고, 그 외피도 두터워 물리력도 쉬이 뚫기가 어려운 데다가, 회복력도 트롤급이라서, 어지간한 상처는 금세 회복해버리고는 했다.
뿐만 아니라 공격 시에 마법을 부리는 건 기본이고, 그 강대한 몸뚱이를 이리저리 굴려대는 근접 전투에도 능했다.
혹시라도 저 큰 덩치를 보며 올라타면 끝이라 여기면 오산이었다.
놈은 비늘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터라, 근접하더라도 비늘이 가시처럼 돋아나며 요란한 공격을 하는 탓에, 대부분 랜덤 트랩 수준의 난관에 허덕이다 카운터를 맞으며 물러나는 게 보통이었다.
여러모로 까다로운 상대인데, 그중에서도 ‘용의 계곡’ 드레이크는 특히 더 골치 아픈 녀석으로 불렸다.
이유는 놈을 사냥할 경우, 드래곤의 흔적이 깨어나기 때문이다.
용아병!
저 전설 속 드래곤의 가디언으로서, 드래곤의 이빨을 땅에 심으면 깨어나는 존재였다.
만약, 용의 계속에서 드레이크를 죽인다면, 놈의 시체에서 전설 속 용아병이 일어나는데, 골치 아프게도 용아병의 전투력은 드레이크 못지않았다.
‘보스 잡았더니 히든 보스가 숨어있는 꼴이지.’
냉정히 평가한다면 드레이크보단 조금 밀렸다. 하지만 상황이 용아병의 손을 들어 줬다.
드레이크를 잡느라 지칠 대로 지쳐버린 상황에서, 갑자기 놈과 동급인 용아병이 깨어나 칼을 들이민다?
파국이었다.
그 때문에 일반적인 150레벨의 2.5차 전직 퀘스트에선, 파티 수준이 아닌 레이드 수준의 규모로 움직이며, 대대적인 계곡 정화 작업이 이뤄지는 게 보통이었다.
기본 파티로 이곳을 깨려면, 적어도 200레벨은 찍어야 됐다.
물론, 이곳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면으로도 2.5차 전직 퀘가 마련되어 있는 만큼, 대부분 최대한 쉬운 방향으로 루트를 잡고 움직이고는 했다.
용의 계곡에 인적이 드문 건, 그런 이유라 할 수 있었다.
‘하… 나도 그런 루트면 참 편할 텐데.’
아투소 던전, 루지덴 필드, 두프리안 호수 등등, 쉬운 난이도의 퀘스트 장소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하필이면 가장 골 때리는 퀘스트가 ‘강제’로 부여됐다.
‘토 나오네.’
마루는 이번 첫 도전에선 드레이크를 상대하며, 다음 도전에 대한 연구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어버렸다.
-수호자, 그대 태초룡의 계약자여. 나를 이겨라.
‘…갑자기?’
몸 상태를 생각해 봤을 때, 적어도 서너 차례 이상 들이받아야 어느 정도 견적이 나올 것 같건만, 뜬금없이 첫 도전에 저런 이야기라니.
당혹감에 빠져있는 그를 향해, 드레이크가 말했다.
-회복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하지?
“기다려줄 생각이냐?”
-언제 또 그대와 만날 기회가 생길지 모른다.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에 드레이크가 그 큰 눈으로 주변을 쭈욱 돌아보며 말했다.
-여긴 진실과 허구가 섞인 환상계. 하지만 나는 진실한 존재로서 아주 잠시 이 껍데기를 빌려 강림한 것뿐이다.
‘진실, 허구? 껍데기?’
마루가 머릿속으로 짧은 정보를 가지고 빠르게 짜 맞추기를 시작했다.
실버 박사와의 만남과 이런저런 루트를 통해 조금씩 쌓인 정보들이 그 위로 덧씌워지며, 그럴싸한 그림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아바타?”
-그 표현도 맞겠군. 나는 이곳 환상계가 아닌, 다른 현상계의 존재라 내게 허락된 유희는 한정적이니, 그대 수호자는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마루는 드레이크가 뭔가를 건네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혹시, 나한테 줄 거라도 있어?”
-그렇다. 하지만 이곳 환상계의 ‘법칙’에 따라, 너는 사냥을 해야만 물건을 취할 수 있다.
“…적당히 죽어주면 안 되나?”
드레이크가 고개를 저었다.
-내 존재가 강림함으로써, 법칙은 더욱 강하게 이 몸을 옥죄고 있다. 정당한 승부를 통해 그대는 선물을 얻게 될 것이다.
강림이란 단어 때문일까?
마루는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대체 정체가 뭔데?”
-드래곤! 그대를 후원하는 ‘이름 없는 신’께 은혜를 입은, 최후의 고룡이다.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드… 드래곤?’
마른침을 꼴깍거리며 드레이크를 바라봤다. PP에도 드래곤이 있다.
아니, 있다고들 믿었다.
최초에 게임이 오픈하던 당시, 마치 이벤트처럼 대륙 각지에서 드래곤들이 출현하더니, 산처럼 거대한 동체로 세상을 휘젓고 다녔기 때문인데, 실버 박사는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환영. 진짜는 아직 구현하기가 어려워서, 적당히 그럴싸한 이미지만 보여준 거야.]
그런 이유로 현재 PP에 드래곤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중에 서버가 좀 더 커지면, 그때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서버라는 건 엔트라넷으로써, 드래곤의 존재감은 그 특별한 서버로도 쉬이 감당할 수 없는 규격을 가졌다는 것이다.
[다른 세상에서는 반신이라고 불리는 존재야. 적어도 보조 서버 하나 정도는 새로 개설할 수 있어야지.]
박사와의 이야기를 떠올리던 중, 문득 걸리는 게 있어서 재차 물었다.
“최후의 고룡… 이시라구요?”
저도 모르게 존대가 튀어나오는 건,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된 탓이리라.
-내 세계에 남은 마지막 드래곤이 바로 나일지니, 그대를 후원하는 분 덕분에 격상의 기회를 얻어, 세상의 흐름을 비껴가는 중이다.
드레이크, 최후의 고룡은 마루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원래는 그대의 준비가 좀 더 확실해진 뒤에나 강림했을 것이나. 앞선 공격에 담긴 신룡의 기운이 너무 강대해, 원치 않는 오류가 발생해 버린 듯하구나.
마루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만, 그가 청룡 주작의 연계기인 화룡출수를 뽑아내고, 그로 인해 한 방 크게 먹었을 때, 드레이크의 눈빛은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었다.
그게 바로 고룡 강림의 순간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강림해버린 상황으로써, 다음 강림에 대해서 확신을 할 수 없는 터라, 이번 기회에 확실히 승부를 보게 하려는 거였다.
-태초룡께서 함께하실 때 등장하고 싶었건만.
준비가 확실해진 순간이란, 초롱이와 마루가 호흡을 맞출 때였다.
“초롱이가 보고 싶으면 지금 소환해 드리죠.”
-안 된다!
고룡이 그 큰 고개를 저어 보이며 말했다.
-나의 등장으로 인해, 이 주변은 ‘법칙’의 영향을 받아 특수 관리 지역이 되었다.
소환 불가 지역이 된 것이다.
그 말에 뒷머리를 긁은 마루가 화제를 전환하고자 슬쩍 운을 띄웠다.
“그런데 굳이 여기서 강림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좀 더 여유 있는 장소도 많잖아요.”
-이곳은 용의 숨결이 짙은 곳, 오직 이곳만이 내 격을 감당할 수 있다.
그나마도 압축하고 또 압축한 뒤, 겨우겨우 욱여넣은 수준으로, 드레이크의 육신으로도 장시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짐작하건대 너무 과한 2.5차 전직 구간의 ‘강제’ 퀘스트의 경우, 고룡과의 만남을 위해 설계된 게 아닐까 싶었다.
-최대한 빨리 회복하는 게 좋을 거다. 정당한 승부를 명목으로 법칙의 제한을 잠시 막아두고 있지만, 오래지 않아 이 같은 편법도 끝날 터. 회복에 집중해라.
그러잖아도 이미 연공법을 돌리고, 따로 물약도 열심히 들이붓는 중이었다.
마루는 어느 정도 몸 상태가 회복되는 걸 느끼며, 다가올 전투를 준비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막막하기만 했다.
‘드래곤이라니. 아니, 드레이크도 골 때리는데 드래곤은 또 뭐야? 대체 어떻게 상대해야 되는 건데? 마법도 엄청 쏴 대겠지? 어떤 기술을 쓰려나? 하… 골치 아프네.’
이런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걸까?
-전투는 이 육신이 직접 할 거다. 이 작은 그릇으론, 내 의식의 조각을 담아내는 것도 한계라서, 전투 같은 격렬한 행위는 무리다. 나는 그저 몸뚱이에 조언만 할 뿐, 그대는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강림했다지만 육신을 맘대로 조정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잠시 의지의 발현을 하는 수준으로써, 아바타인 드레이크의 의지도 함께 살아 있는 상태였다.
-내 본신이 움직인다면, 고블린의 몸뚱이로도 그대를 짓밟는 건 어렵지 않다.
자존심을 박박 긁는 소리에 발끈하려 했지만, 이어지는 내용이 그를 얌전하게 만들었다.
-아득한 억겁의 세월, 고블린으로 살았던 시절도 만 년 정도는 되는 것 같군.
마루는 그 정도 시간이라면 벌레 몸뚱이에 들어가도 자신이 짓밟힐 것 같단 생각에 합죽이가 됐다.
‘단순 유희로 만 년이라고?’
눈앞의 고룡이 얼마나 아득한 존재인지 뇌리에 때려 박는 순간이었다.
얌전히 회복에만 전념했다.
* * *
삼족오의 길드장 김수호는 흥미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혜성, 적호. 저 둘이 함께 자리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그러며 다른 길드의 수장들도 눈에 담았다.
‘염라, 구미호, 산신, 창룡!’
거기에 삼족오까지 더하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7대 길드의 길드장이 전부 모였다고 할 수 있었다.
문득, 김수호의 시선이 구미호 길드로 향했다.
‘저기는 좀 애매하긴 하네.’
다른 길드는 한 명의 대표를 앞세우지만, 구미호 길드는 무려 아홉의 대표가 함께 어울리는 길드였다.
그들을 ‘아홉 꼬리’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어쨌든 그 때문에 딱히 한 명으로 정의 내릴 수가 없었다.
오늘 나온 건, 대외적으로 가장 유명세가 있는 구미호 길드의 박미소였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그가 또 다른 대형 길드를 떠올렸다.
사실, 정식으로 한다면 10대 길드로 통하지만, 그중 3개 길드는 이번 모임에서 제외됐다.
순수한 한국파 토종 길드가 아닌, 외국에서 들어온 길드로써, 한 다리 정도만 걸쳐 있는 게 아니라, 아예 본사를 해외에 따로 두고 있는 길드들이었다.
‘그리폰, 제우스, 바빌론.’
해외에서 들어오고 있는 수많은 요원에게 대문을 활짝 열어 보이며, 오히려 지원을 아끼지 않는 이들이기도 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그들 세 길드는 모임에 초대하지 않은 것이다.
“모두 모인 것 같은데, 슬슬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죠.”
적호 길드의 젊은 수장인 강호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됐다.
일행 중에서 가장 어리고 영향력도 작다.
하지만 이 자리를 만든 주최자인 만큼, 그에게 마이크가 주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외적의 침입,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길드장들의 눈가에 서늘한 안광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