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백록담.
#4. 백록담.
과거, 세계적인 영웅 인디안 존슨마저 줄행랑을 치게 만든 장소, 그곳이 바로 한라산이며 백록담이었다.
‘형님도 빤쓰런을 했는데, 내가?’
마루는 멍하니 저 먼 한라산 꼭대기만 올려다봤다. 존슨이 벽을 넘기 전의 역사지만, 그 무렵의 존슨도 아직 까마득한 수준 아니던가.
그 때문에 백기를 들며 물러나려는 순간이었다.
“지금이 딱 좋은 시기야.”
현무암의 이야기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다음 기회를 노릴 생각인가 본데, 쉽지 않을 거야.”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자네 의형제 덕분이지.”
존슨의 얼굴이 스쳐 갔다.
“아주 시원하게 한바탕하고 간 덕분에, 저기 백록담 주변이 난리가 났었던 모양이야.”
긴 세월 이곳을 살펴 왔던 존재가 바로 그였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는 순간, 이곳 제주도의 모든 풍경들이 이야기가 되어 귓가로 스며들고는 했다.
덕분에 저 먼 정상과 그 주변의 상황도 한눈에 그려졌고, 이를 고스란히 전해 줄 수 있었다.
“자네 의형제 덕분에 숨죽이던 놈들이 들고일어났거든.”
상황을 설명하자면 이랬다.
앞서, 존슨이 한라산의 지배자를 피해 도망친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무작정 도주만 한 건 아니었다.
한판 제대로 부딪쳤고 그로 인해 내상을 입었던 것인데, 그 과정에서 한라산의 지배자 역시 멀쩡하긴 어려웠다.
무려, 그 인디안 존슨이 마루의 집에 얹혀살며 요양을 할 정도의 부상이었다.
세계를 대표하는 초인이 그냥 당해 주기만 했을 리는 없었고, 한라산의 지배자 역시 제법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마굴이란 장소는 기본적으로 ‘약육강식’의 세상이었다.
“불법 체류자들이 너무 많아. 쯧!”
혀를 찬 현무암의 모습에 마루의 시선이 저 멀리, 백록담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한라산의 지배자는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 수많은 도전자를 맞아야만 했다.
원래대로라면 좀 더 일찍 회복이 돼야 했으나, 도전자들에 의해 부상은 제대로 회복될 틈도 없이 악화되기만 한 것이다.
“보아하니 얼추 도전자들을 전부 물리친 모양이야.”
현무암이 물었다.
“만약 저 녀석이 전부 회복하게 된다면, 자네 의형제가 보여 줬던 수준은 돼야 한판 벌일 수 있을 텐데….”
거기서 말끝을 흐린 현무암이 눈빛으로 이어 물었다.
[…가능하겠나?]
마루는 생각했다. 과연 자신이 존슨의 경지까지 다다르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3차 전직?’
그즈음 된다면 스탯의 총량으로 밀어붙여서 어찌어찌 비빌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랭커라는 위치에 오르고 보는 세상이 넓어지니, 스탯만으로 강함의 척도를 매길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압도적인 스탯은 충분히 균형을 비틀 수 있겠지만, 존슨이란 존재를 두고 비교한다면, 감히 ‘압도’라는 단어를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비빌 수 있다라….’
나쁘진 않다. 하지만 좋지도 않았다.
비빈다는 건, 넘어선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존슨도 줄행랑을 쳤던 상태였다. 견주는 정도로는 부족했다.
완전히 넘어설 수 있는 수준이 필요했다.
‘으음….’
고민이 거듭되는 가운데, 자꾸만 생각이 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지금 이 타이밍을 놓치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야?’
당장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했다.
인디안 존슨!
지인 찬스를 이용하는 것이다.
한라산의 지배자는 도전자들을 물리치느라 상태가 최악이지만, 존슨은 그동안 벽을 넘어 진정한 의미로서의 초월자가 됐다.
그를 불러온다면 한 방에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으음… 그래도 그건 좀…….’
뒷머리를 긁적이던 마루가 물었다.
“혹시, 제가 붙으면 가능성이 있어 보이나요?”
현무암이 마루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적어도 도망치는 건 문제없을 것 같군.”
그 순간 결정을 내렸다.
‘일단, 도전해 보자!’
존슨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한 번 들이받아 본 뒤 결정할 일이었다.
‘원래 동네 싸움에서도 형 부르려면, 한 대는 맞아 주는 게 예의니까. 맞기도 전에 형 부르는 건 양아치지.’
그렇게 한라산 등정이 시작됐다.
* * *
어쩌면 혹시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후…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개코는 자신을 둘러싼 이들을 확인하며 쓰게 웃어 버렸다.
혜성!
그들은 한솥밥을 먹는 식구들이었다. 저들이 왜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들켰구나.’
아이언슈트에 관한 정보 일부가 저들에게 넘어갔으리라. 루트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키홀이 그러했듯, 지난 사건의 잔가시들이 저 깊은 감옥에 남아서 기어이 그의 목구멍을 찌른 것이다.
‘어째, 느낌이 싸하더라니.’
개코 역시 그들에 대한 생각 때문에, 외부를 경계하면서도 내부에서 터질 폭탄에 대한 찜찜함을 감출 수가 없었건만, 아니나 다를까 결국 이렇게 터져 버렸다.
주변을 쭈욱 둘러보며 생각했다.
‘어디에서 왔으려나.’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혜성에서 공깃밥 깨나 갈아 치웠다. 게다가 애초에 정보 분야에서 활동하던 터라, 돌아가는 분위기를 읽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룹과 길드!
일단 그렇게 구분할 수 있는 혜성의 파벌 싸움을 알고 있었다.
그 최전선에 있는 건, 길드장 구준영과 혜성의 대표 초인 이선희였는데, 기존에는 이선희 측이 상당 부분 밀리는 감이 있었지만, 그녀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랭커가 된 뒤, 이제는 이선희 측이 우위를 잡고 있었다.
과연, 그들 두 세력 중 어디서 그를 잡으러 온 걸까?
몇몇 눈에 익은 얼굴들이 보였지만, 그것만으로는 저들 파벌까지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다.
‘누굴까?’
그 답은 오래지 않아 나왔다.
또각… 또각….
선명한 하이힐 소리와 함께,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 포위망이 갈라지며 등장하는 여인이 있었다.
‘괭이… 여제구나!’
이선희의 최측근인 김연희였다.
그녀의 등장과 동시에 포위망이 넓혀지는가 싶더니, 사방으로 어지러이 흩어졌다. 짐작건대 이 주변을 쭈욱 훑어가며 차단막을 설치하고 있으리라.
마른침을 꼴깍 삼키는 개코를 향해 김연희가 말했다.
“왜 왔는지 알지? 좋은 말씀 좀 전해 봐!”
번뜩이는 안광 앞에 넙죽 엎드렸다.
* * *
크워어어어어!
캬아아악!
역시 한라산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고 해야 할까?
“훅… 후욱… 후우….”
마루는 한껏 지친 얼굴로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때려잡았다. 하나같이 쉬운 놈들이 없었다.
대격변의 순간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였다.
존슨의 이야기처럼 제주도 마수지대는 그 영역이 한정된 만큼, 내부 몬스터의 밀집도를 비롯해서 등급 수준이 상당했다.
고르고 고른 정예들만 살아남은 느낌이었다.
앞서, 존슨과 한차례 이곳에 도전했던 적이 있지만, 그 무렵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생각해 보면 당시에는 존슨이 그의 수준에 맞춰서 루트를 잡아 줬고, 적절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던 만큼, 지금과는 여러모로 상황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번에도 혼자 행동하는 건 아니었다.
“흘… 젊은 친구가 왜 이렇게 골골대나.”
뒤에서 속을 박박 긁는 동행자가 있었다.
“어허, 몸 사리는 겐가? 좀 더 파이팅 넘치게 달려드는 걸세.”
그렇잖아도 피로감이 상당하건만, 현무암이 꾸준히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가 수시로 귓밥을 채워 넣으며, 고막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더욱 성질나는 건, 그의 지시가 틀린 게 없단 점이었다.
그냥 긁으려 한마디씩 하는 것도 있지만, 상당 부분은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었다.
“이거 원, 쫄보였구만. 거기선 들이받았어야지. 엉덩이 빼고 때리면 힘이 실리나? 허리를 넣게나. 허리를 쭈욱 넣으라고, 그렇게 허리 빼다간 나중에 소박맞아. 내소박이라고 모르나?”
머리가 지끈거렸다.
“금과옥조(金科玉條) 같은 조언이니까 잘 새겨듣게나.”
뜻은 좋지만 마루에겐 다른 의미로 와닿았다.
‘멘탈에 금 가고 옥죄는 느낌이라서, 금과옥조인가.’
속으로는 투덜대는 와중에도 결국 현무암의 조언을 따라갔다. 어찌 됐건 틀린 말이 하나도 없던 탓이었다.
그 모습에 현무암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돌하르방의 신호가 날아들고, 하루가 채 지나기 전에 도착했었다. 이틀까지 염두에 뒀던 마루의 예상을 한참 웃도는 시기였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 나서기보단, 잠시간 기다리며 관찰하기를 선택했다.
‘곧 다가올 암흑기를 생각하면, 좀 더 단단해질 필요가 있지.’
그런 이유로 지난 일주일간 마루의 고생을 지켜만 봤다. 그의 한계를 보고 싶었다. 밑바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자 했다.
의도적으로 돌하르방의 신호를 증폭시켜, 좀 더 넓은 범위의 몬스터들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돌하르방은 일종의 결계 역할을 하는 터라, 과거 몬스터들이 제주도에 뿌리를 내리던 당시, 가장 먼저 처리되었던 게 바로 돌하르방이었다.
그런 돌하르방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물건이 바로 현무암이 머물던 거처였다.
당연히 보통 파장을 지닌 게 아니었고, 간간이 저 위쪽 한라산의 고위종도 관심을 보일 정도였다.
하산 루트를 탄 놈들을 슬쩍 유도해서 마루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의 이 같은 마수로 인해, 지난 일주일간 마루가 거친 고생이 곱빼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켜본 결과, 제법 괜찮은 평가를 내릴 수 있었다.
특히, 제 한계를 직시하며, 발을 빼려던 타이밍을 정확히 잡았던 점을 높이 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바로 그 부분에 안타까움도 느꼈다.
‘오랜 시간 비각성자로 눈치를 봐 왔다고 했지.’
따로 알아보려 할 필요도 없이, 워낙 유명 인사가 되어 버린 터라, 마루에 관한 정보는 간단한 웹 서핑만으로도 주루룩 살필 수 있었다.
‘장점이 단점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
전투 과정 중에도 관련한 부분이 몇몇 드러났다.
‘가드를 너무 바짝 세운단 말이야.’
안정감이냐 소심함이냐.
‘그 차이를 확실히 하게 해 줘야겠지.’
물론, 마루 역시 과감한 선택도 할 줄 알았다. 일주일간 지켜본 결과가 그랬다. 하지만 부족하다 여겼다.
때문에 조금 무리한 일정을 잡아 줬다.
한라산의 지배자.
‘엉덩이 빼고 상대할 놈은 아니니까.’
딱 좋은 상대라고 여겼다.
그의 시선이 슬쩍 위로 올라갔다.
‘저쪽에서도 눈치를 챘으려나.’
아주 잠시 백록담을 훑고 내려온 그가 마루를 향해 외쳤다.
“거, 지금은 엉덩이 좀 빼야지. 넣을 때 뺄 때 모르면 소박맞는다니까.”
“으아아아아아~!”
마루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 * *
너무 좁은 땅덩이였다.
하루하루 커져 가는 군세와 넓혀 가는 영역에 비해, 머물 수 있는 공간은 너무 한정되어 있었다.
제주도!
그 영역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바다를 넘어 저 멀리 너른 대지를 향해 군침을 삼켰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바다로 나아가는 길목에 너무 커다란 방파제라 할 만한 존재가 자리하고 있던 것이다. 그건 몬스터라는 파도가 넘어가는 걸 막는 거대한 방벽이었다.
―현무암… 으득!
실로 아득한 세월을 품은 존재였다.
[돌아가라!]
천지가, 세상이 명령하는 기분이었다.
그 아찔한 음성에 더해, 억겁의 계절이 담긴 눈빛까지 마주한 순간, 결국 굴복하며 발길을 돌려야만 했고, 그렇게 백록담에 몸을 웅크려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절대적 존재의 흔적이 사라진 걸 느꼈다.
―드디어!
이 창살 없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다.
―부상만 회복되면 바로….
하지만 이게 웬일?
그간 발톱을 숨겨 왔던 놈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빌어먹을 인간 놈 때문에, 으득!
뜻밖의 불청객으로 인해 적잖은 내상을 입은 상황이건만, 이를 기회라 여긴 놈들이 이빨을 드러냈다.
그로 인해 부상은 악화되었고, 적잖은 시간까지 허비해야만 했다.
그렇게 겨우 상황을 정리했다 싶었더니, 이건 또 뭔가?
―돌아왔다고?
사라졌다 여겼던 현무암을 발견했다.
한데, 뭔가가 달랐다.
그 때문에 당혹감 속에서도 꾸준히 관찰을 거듭했고 이내 답을 알 수 있었다.
―약해졌구나!
방파제의 높이가 상당히 낮아진 것이다. 그 이유도 오래지 않아 파악했다. 함께하고 있는 인간 사내의 품에서, 현무암의 흔적이 느껴졌다.
―힘을 물려줬구나. 큭큭큭큭!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저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단 자신이 있었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그간 쌓였던 분노가 폭발했다.
쿠르르르르릉….
백록담의 하늘 위, 시꺼먼 먹장구름이 일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