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사자유희(死者遊戱)!
#9. 사자유희(死者遊戱)!
현무의 기운 덕분일까?
주변 가득한 사기를 감지할 수 있었고, 그 흐름을 인지하게 되었으며, 하나의 현상을 목도하기에 이르렀다.
“설마, 육신은 눈속임이고, 검이 본체였을 줄이야.”
마루는 그리 말하며 자신이 봤던 걸 떠올렸다.
현무암이 펼친 만상결계에 의해 자유를 얻었던 ‘사기’들이건만, 검을 중심으로 새로운 영역을 재구축하고 있던 것이다.
아주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한번 인지하고 나자 꾸준히 신경을 건드리면서, 그에 대해 집중하게 만들어 버렸고, 이를 집요하게 관찰한 결과, 사기를 먹고 박동하는 검의 울음을 들었다.
그렇게 검의 비밀을 알게 됐다.
-어… 어떻게 들킨 거지?
한의 물음에 마루가 슬쩍 현무암을 보며 말했다.
“생의 끝에 현무가 있다는 거, 못 들었냐?”
그렇게 말하며 검면을 가볍게 두드렸다.
따앙….
청아한 울림이었다.
“제법 쓸 만하겠네.”
하지만 이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마루가 밑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때? 군침 좀 돌지?”
그 순간 마루의 발아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치열한 격전 끝에 그의 그림자에 몸을 누인 그림자 사슬이 반응하고 있었다.
마루가 물었다.
“감당할 수 있겠어?”
당연하다는 듯 한층 크게 일렁이는 그림자 사슬의 모습이 보였다. 이를 본 한이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
―사자유희(死者遊戱)! 사… 살려 다오.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 제발 살려 다오. 이렇게 죽을 수 없다. 부디… 으으….
마루가 턱을 쓸며 물었다.
“뭘 얼마나 할 수 있는데?”
―내가 일으킨 군세를 봤겠지만, 나를 살려 주면 언제든 군단을 이룰 수 있다. 게다가 내겐 뇌신의 힘도 있어서, 집이 회복되면 언제든 벼락을 부릴 수 있게 될 거다.
한은 열심히 자신을 어필하며 생존을 갈망하는데, 이를 가만히 듣고 있던 마루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목줄도 없이 풀어놓긴 어렵지.”
―계… 계약을 하자.
“함부로 지장 찍는 거 싫어하는데. 게다가 뭘 믿고 계약을 해? 언제 뒤통수칠 줄 알고.”
―엔트라넷이 중개를 하면 된다.
뜻밖의 내용이 튀어나왔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몬스터가 엔트라넷을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실로 신기한 일이었다.
―다른 세상에서 넘어왔다고는 하나, 그것도 옛말이다. 이곳에 머문 세월만 강산이 두 번은 바뀌고도 남을 정도다.
마기를 품고 있고 여전히 세계의 불순분자로서 머물고 있는 만큼, 온전히 이 세상의 일원으로 인정받긴 어려웠다.
하지만 머문 기간이 제법 되는 터라, 적어도 임시 체류증 정도는 발급받을 수준은 됐고, 그런 이유로 엔트라넷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거기에도 조건이 붙기는 했다.
―적어도 종의 한계를 넘어야 한다.
경지에 이르러서 인지의 한계가 확장되어야 엔트라넷의 임시 이용권이 허락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런 부분들이 마루를 움직였다.
“미안하다.”
몸을 숙여 그림자 사슬을 다독이는 모습에서, 한은 자신이 살아남았음을 깨달았다.
불만인 듯 그림자 사슬이 일렁거렸다. 틈틈이 솟구친 그림자가 한의 검신을 두드리고 가는데, 이에 몸서리를 친 한이 다급히 이야기했다.
―사자유희라면, 여기 백록담의 사기를 먹이로 줘도 충분할 거다. 이대로 풀어놓으면 흩어져버릴 기운이니, 사자유희에게 먹이로 줘서 달래 주는 걸 추천하마.
그 말에 마루가 의아한 듯 물었다.
“아까부터 사자유희라고 하는데, 그거 혹시 그림자 사슬을 말하는 거냐?”
―그림자 사슬… 그렇군. 그렇게 불리기도 하지. 하나 저것의 본래 명칭은 사자유희다.
마루는 새삼 한의 정보가 상당하단 생각에, 그를 살려 놔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자신의 필요성을 어필하려는 듯, 한이 열심히 설명을 늘어놨다.
―사자유희는 저승을 다스리는 통치자들 중 하나가 인계에 유희를 나갈 때 사용하는 망토로서, 갖가지 형상으로 변화할 수 있는 신기라고 알려져 있지.
그 말에 마루는 그림자 사슬의 다양한 변형들을 떠올렸다. 한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사자유희가 본명이면, 그림자 사슬은 뭐야?”
―그건 별거 아니다. 어느 마법사의 수작에 사자유희가 인계에 붙잡혔는데, 그때 그림자의 사슬에 긴 시간 속박되어 있어서, 그 세상에서 하나의 이명으로 남게 된 거지.
저승의 통치자는 인계에서 힘이 제약되는 터라, 사자유희를 빼앗겼다고도 했다.
―대마도사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로, 인계를 대표할 만한 강자였기에, 저승왕은 보물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군.
마루는 턱을 쓸며 한을 바라봤다.
그림자 사슬, 사자유희에 대해 꾸준한 관찰을 거듭하며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건만, 마침 해답지를 지닌 존재가 손에 들어왔다.
“좋아. 계약하자.”
―미… 믿고 있었다구!
한의 검신이 감격에 부르르 떨렸다.
우우우웅….
손끝을 타고 오르는 그 선명한 울림을 느끼며 말했다.
“일단, 말투부터 고쳐야지?”
―……?
“다나까 체라고 아냐?”
검신이 재차 떨었다.
우웅… 웅… 우우웅….
전과는 다른 의미의, 서글픈 울림이었다.
* * *
생각지도 못한 등장이었다.
“어떻게 여기 있는 거냐?”
존슨이 서늘한 음성으로 물었고, 이에 마계 대공 사일론이 웃으며 답했다.
“빤할 걸 왜 묻나. 넘어왔으니 있는 거지.”
“…….”
수많은 오지를 탐험하며 이레귤러의 발생을 미리 방비하려 노력하지만, 세상은 넓고 험지는 넘쳐 나다 보니 이를 놓칠 경우도 상당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세계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측정기로 인해, 대격변을 놓치기란 어려웠다.
그 때문에 더더욱 존슨의 표정이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혹시 그도 모르는 대격변이 발생했나 싶었던 것이다.
이를 읽어 낸 듯, 사일론이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마계 대군이 넘어온 건 아니니까. 그렇게 긴장할 거 없다.”
“…무슨 뜻이지?”
“넘어온 건 나 혼자뿐이라고.”
“믿을 거라고 생각하나?”
사일론은 어깨를 으쓱였다. 존슨의 입장을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못 믿겠으면 말고.”
그러면서 또 이야기했다.
“최근 열었던 통로를 재활용한 거라서, 보다시피 내 몰골이 좀 우습게 됐지.”
존슨은 측정기가 조용한 이유를 깨달았다. 대격변이 발생했던 장소는 그 잔여 기운이 강하게 남아서, 측정기의 역할이 상당 부분 약화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대격변이 발생했던 장소는 수많은 감시자가 자리하고 있는데, 그런 이들의 시선을 속이며 넘어왔다?
‘대격변은 아닌가.’
아직 안도하긴 일렀지만, 작게나마 심박 수가 낮아지는 걸 느꼈다.
호흡을 진정시킨 존슨은 찬찬히 사일론의 전신을 훑었다.
‘꼬맹이 모습이라니. 방심시키려는 건가?’
외형적으로는 이전 분신체의 모습도 크게 위협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반인반마!
태생적 특징 때문인지 마족보단 인간에 가까운 외형을 지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인외종으로 여기게 만들었던 건, 남다른 기세와 카리스마였다.
하지만 지금의 사일론은 그 같은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안으로 갈무리하고 있는 것도 같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왠지 이전 분신체와는 전혀 다르단 느낌을 줬다.
추가적으로 외형적인 부분에서도 일부분 분위기를 깎아 먹고 있기도 했다. 잠시 그를 지켜보던 존슨이 물었다.
“…분신인가?”
“꼴이 우습게 됐지만, 이번엔 본체다.”
사일론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어렸다.
“본모습은 전에 봤던 분신체와 별반 차이가 없다.”
이를 의아하게 보는 존슨의 표정에서 그 생각을 읽은 듯, 사일론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왜 이렇게 쪼그라들었나 싶지?”
“솔직히 궁금하군.”
이어진 내용이 놀라웠다.
“반란군에 당했다.”
“…뭐?”
사일론이 존슨을 보며 말했다.
“이유를 꼽자면, 너한테 패한 게 결정적이었지.”
그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책임져라. 대적자여.”
“…What?”
벙찌는 상황이었다.
* * *
엔트라넷을 통한 계약이 성사되었다.
방법은 실로 간단했다.
“엔트라넷!”
―엔트라넷!
각자 접촉한 상태에서 서버에 접속한 뒤,
“계약을 작성한다!”
―계약을 작성한다!
서류를 써 내려가면 된다. 정말 별거 없었다.
물론, 한 가지 번거로운 부분이 존재하긴 했는데, 이는 바로 제3자의 증인이 필요하단 점이었다.
다행히도 현무암이 그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흘… 공짜로?”
불행히도 현무암이 그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듣자니 주머니 사정이 꽤 좋아졌다던데, 어떻게 시꺼먼 걸로다가 카드 하나만 쏴 보게나.”
어찌 알았는지 마루와 실버 박사의 관계를 언급하며 손가락을 비비는데, 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응해야만 했다.
밖으로 나가서 계약을 맺으면 되는 건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르지만, 증인의 조건이 아주 특수했다.
[계약자들과 ‘최소’ 동급이어야 한다.]
골 때리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밖으로 나갈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칭호 : 도전자]
컨디션이 떨어질수록 전체 스탯이 상승하는 특수 효과에 의해, 일단은 멀쩡하게 행동하고 있었지만, 오래지 않아 기력이 쭉 빠지면서 드러누울 터, 그렇게 되면 한의 검신이 어떻게 행동할지 몰랐다.
그런 이유로 일찌감치 도장을 찍어 놔야 했다. 안 찍기로 했으면 모를까. 계약서 작성을 시작한 이상 재빠른 일 처리는 필수였다.
그렇게 ‘주종’ 계약이 이뤄졌다.
“앞으로 잘해 보자.”
―…예. 주인님. 잘 부탁드립니다.
마루가 옅게 떨리는 한의 검신을 두드리며 물었다.
“검집은 언제쯤 다시 생기는 거냐?”
―1년 정도는 기다리셔야 합니다.
“그게 없으면 번개는 못 쓰고?”
―충전식이다 보니… 아무래도 어렵습니다.
온몸을 저릿하게 만들던 뇌전을 떠올리니 괜히 몸이 달았다.
“더 빨리 검집을 만들 방법은 없냐?”
―뛰어난 장인의 손을 빌린다면, 시일을 단축시킬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마루는 강하나를 떠올렸다. 한과 같은 특별한 검의 집을 씌우는 일이었다. 충분히 도전이자 모험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궁금한 걸 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런데 왜 굳이 검집이 필요한 건데?”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했다. 본체인 검이 여기 있는데, 굳이 껍데기에 연연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에 대해 한은 이야기했다.
―따로 나눠서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뭐?”
―비유하자면, 검은 혼이며 집은 백이니, 영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없다면, 결국 반푼이 밖에 안 되는 법입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마루가 물었다.
“그럼… 너… 지금 반푼이냐?”
―어라? 이야기가 그렇게 됩니… 까?
마루가 눈매를 얇게 뜨며 한을 내려다봤다. 그 서늘한 눈빛에 한의 검신이 부르르 떨렸다.
* * *
만 개의 파도를 가라앉히는 피리.
만파식적(萬波息笛)!
신라 시대를 대표할 만한 전설적인 신물로서, 전해지기로는 이는 대나무 피리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이 신비로운 피리를 불면 적의 군세가 물러가고, 가뭄에는 비를 부를 수 있으며, 아픈 이들은 낫게 하고, 요동치는 물결은 평온케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다양한 파랑과 혼란을 잠재우고 해결하길 기원하는 신물, 그게 바로 만파식적이라 불리는 피리의 기원이었다.
“그럼, 이게 바로 그 만파식적이라는 겁니까?”
마루는 그리 물으며 현무암을 바라봤다.
그그그극….
―끄아아악~!
이에 현무암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설처럼 온갖 문젯거리를 해결할 만한 능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파도 하나는 제대로 잡을 수 있지.”
마루는 신기한 얼굴로 제 손에 들린 만파식적을 바라봤다.
끼기기긱….
―끼히이익!
끼기긱….
―끄아학!
그들 대화 사이사이 끼어드는 기묘한 잡음이 있었는데, 이는 한에게 가해지는 체벌과 비명이었다.
마루는 현재 바위에 대고 한의 날을 사정없이 긁는 중이었다.
“그건 언제까지 할 생각이냐?”
문득, 현무암이 그에 대해서 묻자, 마루가 단호히 대답했다.
“요놈이 이빨을 잘 터니까. 이참에 날 좀 뭉개 놓을까 합니다. 쥐뿔도 없는 게 주둥아리만 놀려서 계약 따낸 거잖아요. 이거 완전 사기 아닙니까?”
고로 열심히 날을 가는 중이었는데, 워낙 특별한 존재다 보니 날이 쉬이 나가질 않았다.
“이미 지장을 찍어 버려서 물릴 수도 없고. 쯧!”
마루는 그리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 한이 지니고 있는 ‘정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 여겼다. 애초에 그 정보 때문에 계약을 맺은 것이지 않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행동하는 건, 일찌감치 확실하게 기선을 제압해 놓으려는 조치였다.
‘원래, 초장에 조져야 오래가는 법이지.’
교관의 경험을 살리며, 아주 착실히 조교 하는 중이었다.
[컨디션 : 2]
곧 버프 효과가 사라질 터, 몸져눕기 전에 확실히 다져 놓을 생각이었다.
끼기기긱….
―끄아아앙!
끄그극….
―흐앙… 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