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만파식적(萬波息笛)!
#10. 만파식적(萬波息笛)!
마루가 마지막 기력을 짜내면서 명령했다.
“반푼이, 오늘부터 네 이름은 반칼죽이다.”
성은 반이요 이름은 칼죽이니, 한은 그렇게 반칼죽으로 개명됐다.
딱 거기까지 지시를 내린 뒤 마루는 쓰러졌다. 이내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시야가 흐릿해지는데, 컨디션 2점대의 여파가 밀려오고 있음을 알았다.
스탯이 차르륵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버프가 해제되고, 전신 가득 어마어마한 압력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끄으으음….”
지난 세월, 밑바닥을 구르며 무수히 많은 부상을 입어 왔다. 때로는 생사의 경계를 넘는 게 일상이었던 시절도 존재했다.
이면에 한 발 걸치며 진창을 걷던 시기, 그때는 특히 더 치열했고 처절했다.
몬스터의 발톱에 복부가 꿰뚫린 일, 도탄이 폐부에 박혀 헐떡이며 전장을 기었던 사건, 팔을 제물로 몬스터의 눈깔에 총탄을 먹였던 기행 등등, 생각해 보면 참으로 다이내믹한 시간들이었다.
괴수만이 아니라 사람과의 다툼으로도 비슷한 사건 사고가 잔뜩 있었다. 새삼 생각해 보건대 여태껏 살아 있는 게 용하다 싶었다.
어쨌든 그 모든 경험과 경력이 모여, 안전한 루트를 살필 수 있는 베테랑을 탄생시킨 것이다.
때문에 나름대로 고통에는 익숙하다 자부했다.
그런 기억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통증이 육신 전방위에 걸쳐서 밀고 올라오는 걸 느꼈다.
눈꺼풀은 무겁고 시야는 흐리며 정신은 아득하건만, 쉬이 기절할 수가 없었다. 꾸준히 이어지는 고통이 조금씩 강도를 높여 가며 그를 붙잡아 놓고 있었다.
‘아… 이래서… 컨디션 2점대는 조심하라는 거구나.’
유언장을 써야 할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쓰고 싶은 수준이라는 의미를 이제야 이해하게 됐다.
‘이제 족 되는 일만 남았구나.’
그렇게 각오를 다질 때였다.
우우우웅….
알 수 없는 울림의 손끝에서부터 밀려들었다.
‘칼죽?’
아니다. 그건 오른손이었다. 지금 이 울림은 왼손이었고, 거기에 들려 있는 건?
만파식적!
놀라운 건 그 울림을 타고 밀려드는 서늘한 한기였다.
고통으로 뜨겁게 달궈지며 메말라 가고 있는 전신에 한 가닥, 아찔한 물줄기가 흘러드는 걸 느꼈다.
깜짝 놀라 만파식적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피리를 불거라. 개구리야.”
무슨 소린가 싶어 현무암을 바라보는데,
“흘… 모르냐? 삘릴리~ 개굴개굴 삘릴릴리~!”
현무암이 대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건 20세기 무렵에 유명세를 떨쳤던 개구리 만화의 주제가였다. 마루도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났다.
의미를 파악하고자 현무암을 바라보는데, 그가 재차 이야기했다.
“뭐 하느냐? 피리를 불어라.”
그러더니 히쭉 웃으며 마루에게 손짓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마루는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그 손짓을 따라 피리를 입에 가져다 댔다.
어떻게 부는지 방법도 모르지만 일단 힘껏 숨결을 불어 넣었다.
오랜 과거, 유년기 시절 리코더를 불던 기억을 되새기며 한껏 노력해 봤지만,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올 리가 없었다.
“그렇게 취구를 주둥이로 삼키는 게 아니야. 살짝 깨물듯이.”
시기 적절히 이어지는 현무암의 조언이 그를 이끌었다.
“어설피 전부 잡으려 하면 안 돼. 그냥 부는 데 집중해. 첫술에 배부르랴. 당장 연주할 것도 아닌데, 무슨 운지를 그렇게 하고 있어. 그냥 손가락은 편하게 놔, 활짝 열어 놓는 거다. 단순하게 ‘소리’만 낸다는 생각으로, 그냥 주둥이만 가볍게 대고 ‘포~’ 하고 부는 거다.”
그렇게 현무암의 목소리를 쫓았고,
삐이이이….
오래지 않아 긴 세월 잠들어 있던 만파식적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전신을 관통하는 상쾌한 바람이 있었다. 뒤이어 전신을 압박해 오던 고통이 조금씩 씻겨 내려가는 걸 느꼈다.
만파식적!
문득, 그와 관련한 전설 한 자락이 뇌리를 스쳐 갔다.
[이 신비로운 피리는 아픈 이들을 낫게 하고….]
흐릿한 정신이 점차 선명해지고, 자세도 좀 더 각이 잡히기 시작했다.
삐이이이이이~
한결 선명해지는 만파식적의 소리가 백록담을 가득 채우고, 이내 산줄기를 타고 한라산을 넘쳐흐르더니, 제주도 전역으로 넓게 또 장엄하게 퍼져 나갔다.
단음이되 만 가지 파랑을 지닌 묘한 울림이었다.
“흘… 기지개 한번 시원하게 켜는구나.”
현무암이 두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며 웃었다.
* * *
혜성과 삼족오 길드에서 각기 랭커가 탄생했다.
그로 인해 각 대형 길드에는 비상이 걸렸는데, 혜성 하나를 견제하는 게 아니라, 무려 2개의 대형 길드를 견제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진 까닭이었다.
그나마 해외파 길드의 경우에는 상황이 좀 나았다.
저들 본사를 통해 랭커와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토종 길드의 경우에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바깥과의 연결 고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해외파 길드에는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이런 부분 때문에 한때는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이 제법 돌 때도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당장은 해외에서 들어오는 여러 헌터들로 인해, 어설피 견제하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 아니던가.
여러모로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강용호 회장은 결단을 내렸다.
“피닉스를 복귀시킨다!”
강호구가 내민 설계에 도장을 찍었다.
태호 그룹 그리고 적호 길드가 본격적으로 옛 악연을 향해 화해의 손짓을 시작한 것이다.
[전 광호 길드장의 숨겨진 민낯?]
[강만기 그의 비밀은 무엇인가?]
[시대의 피해자. 피닉스?]
[영웅? 악당?]
일단 의혹을 던져 주는 걸로 충분했다.
―요즘 들어 피닉스 기사가 꽤 보이는데, 이거 뭐냐?
―건너 건너 썰로는 방한 소문이 있다더라.
―아… 그래서 피닉스 이야기로 돌 좀 굴리는 거?
―그렇겠지. 일단 기본 조회 수는 보장하잖아.
―어그로 하난 확실하지.
그러며 틈틈이 미끼를 던져 주며, 포커스를 강만기와 피닉스의 대립 구로로 맞춰 나갔다.
―숨겨진 민낯이란 게 뭐야?
―그런 소문 있잖아. 피닉스가 한국 떠난 게 강만기 때문이라고.
―태호 직계니까. 하려면 뭔들 못 하겠냐.
―하기야. 이제야 피닉스지. 그땐 그냥 루키 정도였으니.
아무래도 과거 그들의 활동 영역이 태호의 테두리 안쪽이었던 만큼, 태호 그룹이 언급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그 내용은 최소한으로 통제하도록 수많은 요원들을 투입시켰다.
―내 생각엔 태호도 억울할 듯.
―WHY?
―피닉스잖아!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재능이었다던데, 길드 미래의 재목이 사라졌으니, 태호 그룹도 얼마나 억울하겠냐. 듣기로는 그것 때문에 한때 비상이었다더라.
―그런 소문이 있긴 했지.
적당히 풀칠을 하고 발을 뺐다. 그것만으로도 알아서 포장지는 씌워지고 또 씌워지며, 살을 찌울 터였다.
그러면서도 포커스가 빗나가지 않게, 꾸준히 강만기를 등판시켰다.
―듣기론 질투심 때문에 이선을 쫓아냈단 말이 있어.
―강만기도 보통 재능이 아닐 텐데.
―피닉스하고 비교하면 많이 딸리지.
―그건, 인정!
―황새와 뱁새 수준.
기사들은 여전히 의혹만을 제기할 뿐이지만, 다양한 커뮤니티를 체크하며 의혹을 의심으로 만들 소스들을 던져 줬다.
그랬다더라. 아마도. 어쩌면… 등등, 수많은 의문들이 차곡차곡 쌓이며 의혹을 의심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강용호 회장은 이런 반응들을 수시로 보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닉스를 잡고, WHA와의 관계도 새로 쓴다.’
세계 헌터 협회라고 칭하는 WHA지만, 결국 그들의 가장 큰 지분은 미국에 있다 보니, 이선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WHA에 새로운 입김을 불어 넣는 것도 마냥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 터였다.
결국 태호에 랭커가 들어선 게 아닌 만큼, 이런 식으로 다리를 넓게 걸쳐 놓으며 판을 비틀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쯧… 만기 그놈에겐 미안하게 됐지만.’
간만에 피우는 담배 한 대로 아들을 향한 미안함을 날려 보냈다.
어차피 그에게 자식은 많았다.
“훗….”
문득, 자신의 마지막 아들이 떠올랐다.
‘괘씸한 놈!’
강호구가 어떤 계획을 품고 있는지, 어떤 모략질을 하는지 그 야망이 어떠한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뒷배가 제법 든든해서 그로서도 제법 파악하긴 어려웠다.
강용호의 첫 번째 부인!
암흑가에서 상당한 거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면 깊숙이 발을 담그고 있어서 그로서도 쉬이 상대할 수 없는 여인이었다.
그런 여인이 강호구를 비호하고 있었다.
때문에 막내를 파악하기란 여간 힘겨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파일로 정리된 정보가 아니더라도, 그냥 아는 게 있었다.
‘흘… 건방진 놈!’
말년에 제대로 호랑이를 낳았노라, 불쾌감 속에서도 어깨가 들썩였다.
* * *
만파식적은 실로 신비한 물건이었다.
[컨디션 : 4]
2점대까지 떨어졌던 컨디션을 무려 2단계나 올려 준 것이다. 그때부턴 아무리 피리를 불어도 컨디션이 올라가진 않았지만, 4점대가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살 만한 느낌이었다.
2점대의 컨디션을 끌어 올리는 건, 4~5점대에서 6~7점이 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포션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가능할까 싶은 이적이었다.
존슨에게서나 구할 수 있을 법한 최상위급 포션을 마치 물처럼 들이부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그 때문일까?
‘신물이구나.’
마루는 만파식적이 일반적인 아티팩트의 영역을 넘어서는 아주 특별한 물건임을 알았다.
그가 허리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칼죽이 너 이 쉐끼, 아주 꿀을 빨았구나.”
―…….
칼죽은 조용히 침묵했다. 그 말이 정답이기 때문이다. 저 특수한 신물의 힘을 제대로 부린 적은 없었다.
‘옛 본래의 모습이었다면 모르겠지만.’
망령들을 해치며 타락해 버린 지금은 만파식적의 힘을 끌어내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그나마 ‘옛 모습’의 흔적이 남아, 만파식적을 ‘인형’의 척추에 꽂아 넣을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작은 작업만으로도 인형은 전에 없는 완성도를 자랑하며, 그야말로 최강의 데스 나이트로 군림할 수 있었다.
‘저 늙은이만 아니었어도….’
칼죽이는 현무암을 향한 원통한 마음이 새록새록 솟구쳤지만, 혹여 들킬까 무서워 급히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야만 했다.
―과연, 저승왕의 신물답습니다.
그 말에 마루의 시선이 그림자 사슬, 사자유희에게로 향했다.
허락이 떨어지고, 그의 그림자를 벗어난 사자유희가 백록담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기를 흡수하고 있었다.
본래 죽음을 관장하는 저승왕의 신물이었던 탓일까?
사자유희는 빠른 속도로 백록담의 사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칼죽은 이를 보며 자신이 이곳을 영역으로 휘두를 때와 버금가는 속도라며 내심 감탄했다.
그 덕분일까?
오랜 시간 칠흑빛으로 물들어 있었던 백록담의 풍경이 조금씩 그 속살을 드러내며, 색상의 다채로움을 하나하나 늘려 가는 게 보였다.
연신 꿀렁거리는 사자유희의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즐거워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짐작건대 오랜 시간 칼죽이 쌓아 온 농도 짙은 사기로 인해, 전에 없는 포만감을 느끼는 중일 터였다.
마루는 그 모습을 조용히 구경하다, 칼죽을 향해 물었다.
“데스 나이트는 생전에 대단한 기사였다고 하던데, 너도 그런 거냐?”
생전의 이루지 못한 한이 차고 넘쳐서, 종래에는 이처럼 죽음의 기사로서 다시 태어난다고 알려져 있었다.
상황이야 어찌 되었건, 일단 그가 거둬들인 식객이 아니겠는가. 그런 만큼 그 원한의 깊이를 헤아려 보고자 던진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
―전 원래 검입니다.
“…응?”
마루가 의아한 얼굴로 제 손에 쥔 칼죽을 내려다봤다. 이에 칼죽이 재차 이야기했다.
―데스 나이트는 제가 부리는 ‘꼭두각시’였을 뿐입니다. 일종의 스킬 같은 거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확실히 칼죽은 ‘검’이 본체였다.
“어… 리치들의 라이프 베슬 같은 게 아니라?”
―예. 그냥 검입니다.
놀랄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민망하지만 한때는 성검이라고 불렸던 적도 있습니다.
“…뭐라고?”
―헤헷! 부끄럽습니다.
그러며 검신을 바르르 떠는데, 묘한 홍조가 검신에 떠오르는 건 뭐란 말인가.
“…What?”
벙찌는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