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해를 품은….
#11. 해를 품은….
뜻밖의 내용이었다.
“성검… 이라고?”
―크흠!
민망한 헛기침과 함께 검신이 한층 더 붉게 물든 게 보였다.
“데스 나이트가?”
―크흐흠!
“언데드를 부리면서?”
―커흐으음!
헛기침이 연달아 이어지는 가운데, 칼죽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 이래 봬도 용사님께서 사용하던 성검이었습니다. 크흠!
마루가 어이없다는 듯 검을 흔들었다.
그 순간 픽 하고 새 나오는 검은 아우라가 보였다. 거기서 죽음의 기운이 물씬 풍겨 나오고 있었다.
사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게, 성검?”
―…크흠!
헛기침이 쉬지 않고 이어졌다.
그 무렵 끼어든 게 바로 현무암이었다.
“고놈이 헛소리하는 건 아닐 게다.”
이에 마루가 의아한 듯 그를 돌아봤다.
“내가 왜 고놈을 내버려 뒀을 거라고 생각하냐?”
“…아!”
현무암은 그가 볼 수 없는 무언가를 봤다는 것이다.
“그냥 얌전히 제주도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으로 튀어 나가려 하는 녀석을 살려 놓은 건, 고놈이 보통 녀석이 아니라서 그런 게지.”
“…그게 한눈에 보입니까?”
“나도 대번에 알아본 건 아니야. 흘….”
현무암의 시선이 만파식적에게 향했다.
“신물이 얌전히 있기에, 뭐가 있겠거니 싶어서 관찰을 좀 했지.”
칼죽은 성검이었던 무렵의 기억으로 인해, 만파식적을 인형의 척추에 박아 넣을 수 있었고, 그 부분이 현무암을 궁리하게 만든 것이다.
“…그럼 정말로 이 녀석이 성검이라는 겁니까?”
“아마도….”
이 부분에선 현무암도 확신까진 내리지 못했지만, 비슷한 무언가라 여기는 듯싶었다.
성검이었다는 과거야 어찌 되었건, 일단 칼죽이 사기를 휘두르고 있다는 건 팩트이기 때문이다. 눈앞의 현상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마루는 결국 칼죽에게 답을 요구했다.
―그… 성검이긴 한데, 정통파가 아니라서.
“뭐?”
칼죽의 설명을 들어 보니 이러했다.
정통적인 성검이란, 신이 직접 하사하는 아주 특별한 물건이란 것이다.
―아니면 오리하르콘과 같은 신의 눈물을 직접 정련한 물건들을 정통파 성검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칼죽은 전혀 달랐다.
―용사님께서 선택하시고 직접 신위를 불어 넣어서, 격을 올린 경우죠. 예전에는 이단이라고 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시대가 어수선해지면서 그럭저럭 인정받았습니다.
편법이라 할 수 있었지만, 당시 시대 상황이 그러했다고 한다.
―정통파 성검들은 대부분 빛을 잃었고, 용사님을 견제하는 무리들에 의해서 몇 안 남은 성검도 감춰지고 숨겨졌습니다.
이에 용사가 외쳤다.
[썅! 더럽고 치사해서 내가 하나 만든다.]
―헤헷… 입이 참 걸쭉하신 분이셨습니다.
신분제의 세상에서 용사는 하층민 출신이었고, 그 부분이 용사를 견제하는 세력을 늘렸다고 했다.
직접 요정족을 찾아가 미스릴이라는 숲의 정수를 구한 뒤, 불화산의 장인들에게 제작을 맡기고, 바다의 속삭임으로 열기를 잠재웠다.
그리고 신위를 발휘하니, 거기서 탄생한 게 바로 칼죽이었다.
마루는 혹시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너 원래 이름이 뭐냐?”
이에 칼죽이 묘한 기대감이 섞인 음성으로 답했다.
―베르도아 치토르 드래픽이라고 합니다. 해를 품은 검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해란 신성을 뜻하는 걸로, 용사님께서 직접 신위를 베풀었단 뜻인데, 너무 길면 줄여서 해품검이라고 해도 됩니다. 헤헤…!
마루는 묘한 얼굴로 검신을 살피다가 답했다.
“그냥 반칼죽으로 하자.”
―…네.
“싫냐?”
―아닙니다. 충성! 충성! 충성!
칼날을 뭉개 놨던 게 도움이 됐던 듯, 대답이 바로바로 나왔다. 워낙에 특수한 금속이다 보니 결국 날을 뭉개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조교는 제대로 된 듯싶었다.
특히, 사자유희의 그림자에 넣었다 뺐다를 반복했던 게 결정적이었던 것 같았다.
―앙… 흐앙! 히잉….
요상한 신음성에 짜증이 나서 했던 선택인데, 효과가 직빵이었다.
―히이이익!
실로 바람직한 비명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이어진 이야기가 실로 흥미로웠다.
―용사님은 세계를 구한 뒤 마계까지 진출하시는데, 사실 이는 귀족 놈들이 벌인 개수작으로, 뒤로 마족 놈들과 손을 잡고 용사님 일행을 처단하려 한 것입니다.
이게 왜 흥미로운가 하니,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마루는 묘한 얼굴로 칼죽을 내려다봤다.
* * *
사일론은 이야기했다.
“나는 사천왕 중에 최약체다!”
어디선가 들어 본 아주 익숙한 대사를 외치는가 싶더니, 시원하게 딸기 스무디를 원샷하는 것이 아닌가.
“캬아~! 한 잔 더.”
“어… 음, 그래.”
그렇게 한 잔을 더 주문하고 오자, 사일론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실력으로는 최강이라 자신한다. 하지만 세력은 최약이지.”
이유인즉,
“알다시피 나는 반쪽짜리 마족이거든.”
반인반마의 혈통이 마족들의 반감을 샀다는 것이다.
“강자존! 웃기고 있네. 쯧! 말하다 보니 열받네.”
성이 난 듯, 대뜸 존슨의 음료까지 뺏어다가 원샷을 해 버렸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또 가관이었다.
“이딴 걸 무슨 맛으로 마시는 거야? 향만 좋지, 맛은, 웩!”
확실히 에스프레소는 처음부터 익숙해지긴 어려운 음료긴 했다.
‘아니, 것보다….’
“그 모습으로 커피는 좀 자제하자.”
존슨은 그리 말하며 새삼 사일론의 모습을 살폈다. 누가 봐도 꼬꼬마가 아니던가. 솔직히 말해서 좀, 아니 상당히 귀여운 외형이었다.
현재 그는 이 갑작스러운 만남으로 인해, 웨딩 플래너도 돌려보낸 상황이었다. 그 귀한 시간을 미뤄 둔 만큼 사일론에게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뽑아내고자, 이렇게 나름 접대를 하는 중이기도 했다.
“으음… 디저트라는 거 참 좋군.”
사일론은 에스프레소의 쓴맛을 케이크로 달래고 있었다. 생김새만이 아니라 입맛도 확실히 애들 입맛인 듯싶었다.
“마계에선 맛볼 수 없는 달달함이야. 큭큭큭큭!”
나름 음흉하게 웃고 있는데, 그게 또 귀엽다는 게 함정이었다.
‘끄응….’
존슨은 적개심이 점차 사그라지는 걸 느끼며, 급히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일론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번에 분신으로 넘어간 것도, 세력이 약해서 선택된 거지. 쯧!”
그렇게 분신체를 인간계로 보낸 것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네놈한테 패한 뒤, 분위기가 묘해졌지.”
인간족 혼혈이 제 머리 위에 있다는 것에 불만이 가진 마족들이 상당했던 터라, 사일론의 패배를 미끼로 아귀처럼 달려들었다.
추가로 분신체의 여파는 본체로 이어지는 탓에, 사일론의 본체도 일말의 피해를 입어 약화된 상태이기도 했다.
사일론을 노리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건만, 그런 놈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말로만 떠들며 화제를 끌어모으던 놈들이, 이내 불길이 제법 거세다는 걸 깨닫고는 과감히 칼날까지 뽑아 들었다.
그 결과,
“이렇게 웃기는 몰골이 돼 버렸네.”
지금처럼 약화가 된 것이다.
“마계 어디를 돌아봐도 숨을 곳이 없더라고.”
그래서 마계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게 바로 이곳이었다. 대격변이 끝나고 얼마 안 지난 까닭일까?
“균열의 흔적이 아주 작게 남아 있었지.”
본체로는 넘어올 수 없고, 분신은 의미가 없기에, 이를 건너기 위한 조치로서 스스로를 약화한 것인데, 거기서 한차례 웃었다.
“흐흐! 기왕 약해지는 거, 남는 힘 쫙 빼놓고 왔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강의 일격을 마계에 떨어트리고 왔다면서, 크게 폭소를 터트렸다.
“아마 난리가 났을걸. 큭큭큭큭!”
그 타이밍이 재차 음료가 나왔고, 이번엔 기분 좋게 원샷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사일론이 말했다.
“자, 그러니까 책임져라.”
멍청하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존슨이 잠시간의 생각 끝에 물었다.
“내가 널 어떻게 믿지?”
“훗! 당연히 믿으라고 못 하지. 그냥 정당한 거래를 한다고 생각해라.”
“거래?”
“정보가 필요할 텐데.”
사일론이 케이크 접시를 혓바닥으로 싹싹 깨끗이 핥으며 말했다.
“마계 정보. 그나저나 이거 맛나군. 하나 더 시켜 봐.”
침으로 번들거리는 접시를 내밀며 하는 소리에, 존슨이 새삼스러운 얼굴로 사일론을 바라봤다.
‘커… 커엽….’
탱글한 볼살이 찔러 보고 싶은 마력이 있었다.
* * *
마루는 만파식적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남은 건 백호의 신물인데. 이걸로 찾을 수 있는 겁니까?”
이에 현무암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청룡, 주작, 현무. 이렇게 세 가지 신물과 달리, 백호의 신물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
여의주는 백두산에서 주작의 신물은 히말라야에서, 그리고 현무의 신물은 이곳 한라산에서 긴 세월을 머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백호의 신물은 달랐다.
“다른 문지기들과 달리, 백호의 신물은 나도 명확한 위치는 몰라. 워낙 이리저리 떠도는 걸 좋아하기도 하지만, 백호의 신물을 지키는 문지기가 좀 특이하거든.”
“특이하다고요?”
“우리처럼 홀로 긴 세월을 지켜 오는 게 아니야.”
“그럼…?”
“대를 거치면서 새로운 문지기를 찾아서 대물림을 한다고 봐야지. 가장 최근에 봤던 지킴이가 500년 전쯤이었나? 시간상으로 봤을 땐, 새 지킴이로 교체됐을 것 같군.”
오랜 옛적, 하늘의 문이 닫히며 신수라 불릴 이들은 사라졌다. 하지만 이후로도 꾸준히 영물이라 할 만한 존재의 탄생은 있었다.
“그 숫자가 계속해서 줄어들고, 예전에 비한다면 수준도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그 정도는 문제 될 게 없지.”
백호의 신물이 부족함을 채워 주기 때문이다.
“워낙 떠도는 걸 좋아해서 서로 부르는 명칭도 다르지.”
현무암은 ‘문지기’라 표현되는데, 이는 한 개 ‘구역’을 통째로 커버하기에 그리 불리는 것인데, 백호의 신물 주인은 이와 달랐다.
“신물만 지키는 거라서, 따로 ‘지킴이’라 부른다네.”
한참 듣고 있던 마루가 물었다.
“그래서 이걸로 어떻게 찾을 수 있는 건데요?”
“찾는 게 아니라, 부른다고 봐야겠지.”
“불러요?”
“만파식적은 각종 파랑을 잠재우는 걸로 알려졌지만, 반대로 파랑을 일으키는 것도 가능하지.”
그러며 이야기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속성과 달리, 지킴이는 바람을 타고 노는 걸 좋아하거든. 게다가 물가에서 헤엄치는 것도 즐기지. 파도를 타는 것도 취미일 거야.”
“지킴이는 대물림된다면서요.”
“신기하게도 취미는 항상 같더라고.”
“그게… 그럴 수 있는 겁니까?”
“아마도 신물이 지닌 특성 같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아니면 지킴이들의 취향이 신물에 묻어서 대물림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도 다른 신물의 속사정은 잘 모르니까. 어쨌든 새로 교체가 됐더라도, 지킴이의 패턴이 달라질 건 없다네.”
그런 고로,
“만파식적으로 바람의 노래를 연주하면, 거센 태풍이 발생할 거야.”
지킴이는 그 태풍을 쫓아 달려올 터였다.
“세계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니까.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한 차례씩 연주를 해 보다 보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걸세.”
만파식적이 힌트는 될 수 있되, 정답은 될 수 없는 게 바로 그런 이유였다. 이리저리 발로 뛰면서 직접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만히 듣고 있던 마루는 한 가지, 치명적인 함정을 깨달았다.
“연주라고요?”
“학원 끊게나.”
“아….”
멍청하니 턱을 떨치던 마루가 어렵사리 정신을 수습한 뒤, 떨떠름한 음성으로 물었다.
“바람의 노래라는 건, 따로 악보가 있는 겁니까?”
“자네의 연주 실력이 수준에 이르면, 만파식적이 길을 알려 줄 걸세. 그러니 열심히 연습해서 실력을 키워 보게나. 나도 간만에 만파식적의 연주가 듣고 싶어졌으니까.”
현무암이 그리 말하며 마루의 어깨를 두드렸다.
“기대하겠네.”
그리 말한 뒤, 기분 좋은 얼굴로 백록담을 쭈욱 둘러보며 미소 짓는 게 보였다.
“이 풍경도 오랜만이군.”
시꺼멓던 백록담의 풍경 가득 선명한 색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사자유희가 이곳 가득 넘실대던 사기를 전부 빨아들인 것이다.
어느새 마루의 그림자로 돌아온 사자유희가 기분 좋게 넘실대고 있었다.
아직 생명의 흔적은 비치지 않아 삭막한 감이 있었지만, 어두운 기색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눈이 즐거웠다.
현무암은 흥겨운 콧노래를 부르며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다양한 식물의 씨앗들이었다.
이를 이리저리 던지는가 싶던 그가 마루를 향해 말했다.
“잠깐 좀 줘 보겠나.”
그렇게 만파식적을 받아 가는가 싶더니, 이내 연주를 시작했다.
삐이~ 삐리리… 삘리리리~!
이어지는 청명한 울림이 백록담을 휘감는 가운데, 잠시 후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씨앗이 빠른 속도로 성장을 하는 것이 아닌가.
‘허….’
마루가 재차 턱을 떨치며 그 풍경을 감상했다.
칠흑빛의 사기가 거둬졌다고는 하나, 삭막한 감이 있던 백록담 위로 형형색색의 색감이 덧씌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파아아악….
그렇게 연주하길 한참, 죽음으로 가득하던 백록담은 어느새 생명력 충만한 제주도의 명소가 되어 있었다.
현무암이 조금은 지친 얼굴로 만파식적을 돌려주며 물었다.
“이 정도 연주는 해야 할 게야. 어때, 할 수 있지?”
그의 말에 마루는 당장 학원을 등록하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