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나팔.
#22. 나팔.
무려 다섯의 랭커가 장량과 함께하고 있었다.
“뭐 한다고 이렇게 우르르 몰려와?”
존슨의 물음에 장량이 웃으며 답했다.
“세계 최강이라는 존슨을 알현하는 길인데, 대우가 박해서야 쓰나.”
“개소리한다.”
“듣자 하니 옥토퍼스로 회를 쳤다던데, 타우린 때문인가? 얼굴이 활짝 폈네.”
“왈왈!”
이래저래 몇 차례 전장을 겪었던 전우이다 보니, 욕설 몇 마디 정도는 웃으며 넘길 수 있었다. 그런 옛 인연 때문에 장량이 앞장서서 대화를 주도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진짜 찾아온 이유가 뭐야?”
“짐작하고 있잖아?”
“아이언슈트?”
장량의 미소가 한층 진해졌다.
“듣자 하니 예식장 알아보고 있다던데, 드디어 이반나와 맺어지는 모양이군. 축하하네.”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이었지만 존슨은 태연히 이를 받았다.
“그건 땡큐!”
“상하이에 큼지막한 별장 한 채 어때?”
“뇌물?”
“선물이지.”
“못 본 사이에 많이 능글맞아졌네.”
그리 말하며 조금은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존슨의 모습 때문일까?
장량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하필이면 마주한 눈동자 동공 너머로, 그의 젊을 적 모습이 스쳐 간 까닭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존슨의 미소와 눈빛은 과거 장량을 쫓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부분이 존슨을 더욱 씁쓸하게 만들었으리라.
“재수 없는 건 여전하군.”
장량이 쓰게 웃으며 존슨을 디스하는데, 그 모습이 오히려 존슨의 미소를 진하게 만들어 줬다.
이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장량이 물었다.
“아이언슈트에 대해 알고 있지?”
“모른다고 해도 안 믿을 거잖아?”
“그런 소릴 하려면 같이 영상을 찍지 말았어야지.”
“흐… 그거 돈 받고 찍은 거다. 공짜 아니야. 그냥 비즈니스로 주고받는 관계일 뿐이라고.”
장량이 썩소와 함께 가운뎃손가락을 들었다. 이에 존슨이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에 실소한 장량이 물었다.
“아이언슈트와 만남을 주선해 줬으면 하는데. 어때?”
“내가 어떤 대답을 할 거라고 생각하냐?”
“안 된다고 하겠지.”
“아니. 모른다고 할 거야.”
비즈니스 관계라는 주장을 끝까지 밀고 가겠다는 것인데, 장량이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브라더라며.”
“비즈니스 브라더.”
“왈왈!”
이번에는 장량이 개소리를 내는 가운데, 그의 뒤편에서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랭커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저딴 헛소리를 계속 들어 줄 필요가 있나?”
“호… 아이언골렘.”
존슨이 사내의 이명을 입에 담았다.
앞서, 산타카타리나 대격변 이전까지 ‘아이언’이 붙는 이명 중 가장 유명했던 사내로서, 바로 옆 나라 일본을 대표하는 랭커 중 한 명이었다.
“이름이… 오… 오노키?”
“오로키다!”
“맞아. 그랬지.”
짜증 어린 얼굴로 존슨을 보던 오로키의 덩치가 부푸는가 싶더니, 그의 피부가 변화하는 게 보였다. 아이언골렘이란 이명을 부여해 준 그의 스킬이 발동된 것이다.
정당한 명분 없이 격돌하는 건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오로키 역시 이를 잘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스킬을 발동시킨 건, 나름대로 압박을 하기 위한 조치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우우우웅… 우웅….
다른 랭커들 역시 기세를 피워 내며 존슨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존슨이 그 기세를 홀로 받아 내며 물었다.
“이거, 지금 협박하는 건가?”
오로키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그가 바로 앞에 있건만 너머의 장량에게 대화를 거는 모습이 신경을 건드린 것이다.
일부러 하는 행동임을 알기에, 장량은 쓰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착각이야. 누가 감히 제로 원을 상대로 협박을 할 수 있겠어.”
이에 존슨이 실소하며 말했다.
“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데.”
장량의 표정이 굳었다. 불길한 예감을 받은 까닭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터엉!
강렬한 쇳소리와 함께 오로키의 거구가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 게 보였다.
“너무 무서웠어. 그래서 나도 모르게 주먹이 나가더라고. 이 정도면 명분도 맞고, 어때? 정당방위 맞지?”
“…아니라고 하면?”
“너도 맞지!”
그러며 주먹을 이리저리 흔들어 대는 존슨의 모습에 장량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며 슬쩍 쓰러진 오로키를 바라봤다.
‘말도 안 되는군. 그 오로키가 한 방에 갔다고?’
스킬이 풀린 것인지, 부풀었던 체형이 쪼그라들며 강철의 피부가 평범한 살굿빛을 찾아가는 게 보였다.
아이언골렘이라 불리는 오로키는 그 이명이나 외형에서 알 수 있듯, 탱커에 특화되어 있는 랭커였다. 아무리 기습이라 할지라도 그를 일격에 격침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 때문일까?
‘당황하고 있군.’
장량은 주변 기세가 흐트러진 걸 느꼈다. 다른 랭커들 역시 그와 비슷한 심경이란 의미였다.
이를 분명히 알 것이건만, 존슨은 오히려 한껏 어깨를 움츠리며 겁먹은 것 같은 포즈를 취하며 주먹을 흔들어 댔다.
“어이쿠 무서워라. 자꾸 손이 미끄러질 것 같네.”
“후….”
장량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앞으로 나섰다.
“…장난은 그쯤 하지. 오로키에게 손을 쓴 건 실수였어. 이 일로 일본에선 너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어.”
이에 존슨이 물었다.
“그래서, 뭐? 어차피 난 무국적자에 무법자잖아. 아! 앞으로 일본에는 입국 못 하는 건가?”
나름의 협박이었다. 몬스터 웨이브를 비롯한 대격변의 위험은 세계 어느 곳이나 공통되게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던가.
한데, 존슨과 같은 영웅이 발길을 안 한다?
“후….”
장량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어 버렸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네 주변 사람들만 피곤해지는 거 몰라?”
슬쩍 마루에 대한 언급을 한 건데, 이에 존슨이 웃으며 말했다.
“흐흐… 이상한 소릴 하네. 내 형제들은 남을 피곤하게 하면 했지, 피곤해지는 스타일은 아닌데. 몰랐구나?”
“…오만하군. 너무 오만해.”
재차 고개를 저어 보이는 장량의 모습에 존슨이 어깨를 으쓱였다.
“겸손이나 떨 위치는 아니잖아. 세계 최강이라며. 좀 건방져도 되지. 그리고 내가 정말 오만한 거라고 생각해?”
“무슨 말이지?”
“내 형제들 중에, 제 앞가림 못 하는 놈이 있던가?”
그러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데, 이를 본 장량은 묘한 불안감에 가슴이 들썩이는 걸 느껴야만 했다.
* * *
트랩퍼!
그 이명이 제법 부담스러웠던 까닭이었다.
각종 함정을 통한 공격이란 건 본연의 능력과는 별개로 구분되는 것이니만큼, 목표물의 등급이 ‘B급 A형’이라 할지라도, 결코 연관 지어 생각해선 안 됐다.
그의 트랩은 전문가들도 감탄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는 재주로서, 당장 알려진 바로는 A급 중에서도 최상위권으로 봐도 무방하단 이야기가 있었다.
특히, 존슨의 전매특허로 불리는 마석 결계술까지 익히고 있는 만큼, 또 어떤 변수가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함정의 특징상, 이동은 불가하지만 고정된 장소에 한해서만큼은 가히 폭발적인 능력치를 보여 주는바, 목표물의 거처라 불리는 이곳에선 더더욱 조심할 필요성이 컸다.
워낙 미스터리한 함정들이 잔뜩 깔려 있는 터라, 항간에선 트랩퍼의 거처를 두고, 인세의 던전 혹은 레어라는 말이 돌고 있을 정도였다.
골 때리는 건 이곳을 클리어하더라도, 그럴싸한 보상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랄까?
물론, 랭커 그룹에게는 나름의 보상이 있었다.
인디안 존슨과 아이언슈트!
실제 보상을 위한 미끼 수준이겠지만, 일단 바늘에 끼워 찌라도 올리고 싶다면 트랩퍼의 레어를 클리어하는 게 중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스터리한 함정으로 인해, 조심스레 접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
“쪽팔리게 이만한 인원이 모여서 쪼잔하게 굴 거야?”
이면을 대표하는 랭커, 옥토퍼스가 등장하며 판을 어그러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또 상당히 자극되는 내용이기도 했다.
다른 랭커들 역시 이런 식으로 움츠리는 모양새가 맘에 안 들었던 까닭이었다.
자존심이 긁혀 버렸다.
“그렇게 자신만만하면, 선두에 서면 되겠네.”
몇몇 랭커가 역도발을 했고, 데카가 거칠게 가슴을 두드리며 외쳤다.
“그래. 함정 따위 내가 다 씹어 먹어 주마!”
방어 계열 8중첩 버프로 몸뚱이를 극한까지 강화시킨다면, 어지간한 랭커의 정타도 우습게 받아넘길 수 있을 터, 그는 강력히 진입을 주장했다.
버프의 저장 및 준비가 끝난 만큼, 호기롭게 앞으로 나설 수 있었다.
“간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다른 랭커들도 결국 따를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예상보다 빠른 D―day가 결정됐다.
* * *
애애애애애앵….
마루는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돌발 게이트 경보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슬슬 올 것 같더라니.’
한편에서 아이들을 보고 있던 이선이 굳은 얼굴로 마루를 돌아봤다. 하필이면 초롱이와 루미가 있는 와중에 사건이 발생했다는 생각에, 그의 얼굴 가득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이에 마루가 손을 뻗어서 진정하라 한 뒤, 짧은 수신호로 메시지를 전했다.
―일단 쉬고 있어요.
눈빛으로 반응이 왔다.
―괜찮겠냐?
자신감 넘치는 미소로 답해 주며 조심스레 밖으로 나온 뒤, 옥상으로 올라갔다.
점차적으로 가까워지는 경보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불청객들을 요리하기 위해 따로 경보음을 울렸던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단지, 이번에는 이면의 불청객들이 먼저 경보를 울렸다는 점이었는데, 사실 이 부분도 마루의 계획 아래 있었다.
발록!
그에게 넘어간 USB는 공짜가 아니었다.
물론, 발록이 마루에게 값을 치를 이유는 없었다. 그는 그 값으로 존슨에게 키메라에 관한 정보를 넘기지 않았던가.
하지만 존슨이 마루에게 치러야 할 값은 남아 있었다.
그게 바로 지금의 알람이었다.
존슨은 이면의 마당발이라 알려진 랭커 멀록을 통해, 저들 이면의 랭커 그룹에게 약간의 바람을 집어넣은 것이다.
―남의 앞마당에서 사건을 너무 크게 키우면 안 돼.
―일을 너무 키우면, 바깥 놈들도 움직일 수밖에 없어. 한국에 들어와 있는 랭커들 숫자 알지?
―이 나라는 여전히 총기 규제가 남아 있을 만큼 치안이 남다른 나라야. 잡음을 줄이려면 민간 피해는 최소화하자고.
―사람들 쫓아내고 편하게 사냥해.
죄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던 터라, 그들도 수긍하며 이렇게 경보음으로 개전의 나팔을 분 것이다.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다급히 밖으로 튀어나오고, 이내 상황을 확인한 듯 일제히 대피소 방면으로 뛰기 시작했다.
각종 스킬로 초감각을 한층 더 활짝 열어 놓은 채, 사람들의 피난 과정을 살폈다.
우우우웅….
이선에게서 문자가 왔다.
―애들도 같이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저 피난 행렬에 섞여 들기를 원했지만, 마루는 고개를 저으면서 문자를 찍었다.
―지금 밖에 쭈욱 둘러싼 거, 범죄자들이야. 뭔 짓을 할지 모르잖아.
데카가 끼어 있기에 그럴 확률은 낮지만, 일부러 이 부분을 강조하며 이야기를 진행했다.
실제로 그럴 확률이 제로가 아닌 이상, 자제하는 게 좋다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여차하면 역소환을 통해 PP로 돌려보내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상황을 정리한 뒤, 마루 역시 결전을 준비했다.
그 첫 번째로 가면을 장착하고 몸뚱이를 부풀렸다.
아이언슈트!
최종 보스가 중간 지점에서 튀어나온 격이랄까?
마루는 화제의 랭커로 변한 뒤, 두 번째 준비를 위해 검을 뽑아 들었다.
“잘해야 한다.”
―맡겨 주십시오!
그와 동시에 칼죽이가 꼭두각시를 만들어 냈다.
데스 나이트!
저 멀리 떨어지는 석양을 등지고 선 죽음의 기사가 마루를 향해 절도 있게 한쪽 무릎을 꿇어 보인 뒤, 거리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스킬 분배!”
그 같은 외침과 함께 몇몇 스킬을 조작하는데, 그와 동시에 마루는 묘한 탈력감이 전신을 휘감는 걸 느껴야만 했다.
이는 스킬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으로, 그 위치는 정확히 그의 발아래였다.
사자유희!
돌연 그의 그림자가 일렁이는가 싶더니, 이내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건 마루 본인이었다.
분신!
사자유희의 특별한 재주 중 하나였다.
B급 A형 정마루!
총기 계열 능력자라는 특징을 살린 스킬들을 잔뜩 투자해서, 사자유희에게 ‘존재감’을 부여한 것이다.
몽크와 무관한 스킬을 가득 배웠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스킬의 숫자만큼 분신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탓에, 최대한 많은 스킬들이 필요했다.
“서포트 잘 부탁한다.”
그의 말에 사자유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만족스레 웃어 보인 뒤, 그도 거리의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