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통신보안.
#23. 통신보안.
데카가 선두에 나섰다고는 하나, 그 홀로 길을 여는 건 아니었다.
트랩퍼의 함정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준비된 전문가들이 따로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로서도 답이 안 나오는 부분을 데카가 해결해 주는 식으로 가닥이 잡힌 것이다.
“신기한 일이야. 딱 헌터들만 골라서 함정이 발동되다니.”
“민간인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더라고.”
“아무래도 비각성자와 각성자를 구분하는 느낌인데.”
“비각성 헌터 한 명 집어넣어 보면 확실하겠지.”
전문가들까지 모여 해체를 하는 한편, 이런저런 의견들을 꾸준히 나누는 중이었다.
이미 며칠 전부터 도착해서 나름대로 돌아봤던 터라, 일의 진척 속도는 빨랐다. 아쉬운 점이라면 그들 모두 각성자들인 터라, 저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온 이들이 없단 점이었다.
비각성자로 구성된 전문가들도 있었는데, 안쪽으로 들어간 뒤 소식이 없었던 터라, 관련 정보를 당장 확인하기란 쉽지 않았다.
짐작건대 사로잡혔을 확률이 높아 보였다. 실제로도 마루와 이선이 잘 포박해서 따로 창고에 가둬 둔 상황이기도 했다.
마루가 먹고 자며 생활하는 거처는 한군데뿐이지만, 이 동네 전체에 걸쳐 이런저런 벙커가 제법 있었다.
당장 그가 사는 건물에도 몇몇 빈방을 계약해서 무기 보관소로 활용 중이지 않던가.
그 같은 장소들이 임시 수감소로 활용되고 있던 것인데, 상황이 종료되면 혜성의 감옥으로 넘길 예정이었다.
“호오… 여기 이 감시 카메라를 기준으로 각성자의 포스를 체크해서 저 쓰레기통 옆의 트랩이 발동하는 형식인가.”
“맙소사! 현대 기술과의 접목을 이 정도로 훌륭히 해내다니.”
“이걸 한 개인이 했다고?”
“대대적으로 움직인 게 아니라?”
감탄이 쉴 틈 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들의 뒤편,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는 최후방의 경계라인 사이로, 죽음의 그림자가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서걱….
‘컥!’
신음성도 나오지 않을 만큼 절묘한 일격과 함께,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던 요원의 숨결이 끊어졌다.
그렇게 무너져 내리는 시체 위로, 죽음의 기사가 다가왔다.
―일어나라!
사자의 명령과 함께 망자의 어깨가 들썩이더니, 이내 멀쩡히 눈을 뜨는 것이 아닌가.
명이 이어졌다.
―가라! 가서 네 죄악의 무게만큼 악몽을 전파하라.
그 말과 함께 다시 살아난 요원이 정해진 위치를 벗어나더니, 다른 동료가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를 조용히 지켜보던 죽음의 기사, 반칼죽이 나직하게 불만을 토로했다.
―적당히 썰어 버리면 될 것을, 번거롭게 하는군.
이는 마루의 명에 의해서 행해진 조치로서, 저들 이면의 요원들을 상대하면서, 무분별한 살생을 금지한 것이다.
―엔트라넷 때문에 쓸데없는 정보가 넘어가 버렸어.
좀 더 정확히는 PP의 구현 기능에 의한 부작용이었는데, 이를 살핀 마루는 칼죽이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들을 명확히 구분 지을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마루는 명령했다.
[악인들만 잡아!]
이면을 살아가는 이들 대부분이 범법자고 악인일 확률이 높지만, 개중에는 억울하게 들어온 이들도 상당했고, 때론 개심의 여지가 있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놀랍게도 칼죽에게는 이를 살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저지른 죄악의 무게를 볼 수 있고, 그 와중에도 한 줌 개심의 빛과 선한 의지를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성검!
과거의 추억이 남긴 잔재였다.
좀 전, 그에게 죽었다 살아난 요원은 사실 살아난 게 아니라, 언데드로서 깨어난 것일 뿐이었다.
마치 영화 속 좀비들처럼, 특수한 전염성을 지닌 언데드이기도 했는데, 차이점이 있다면 무작정 전염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먼저, 죽음은 필수였고, 거기에 마루의 지시를 따른 선악의 구별도 추가되니, 번거로움이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 판단은 칼죽에 의해 이뤄진다.
―적에게 자비라니. 이해할 수가 없군.
알 수 없는 소리도 했었다.
[네크로맨서는 자비로운 이미지가 있거든.]
아리송한 내용만 가득해서, 그냥 생각하는 걸 멈추고 해야 할 일만 착실히 하기로 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을 살려 준다는 점이 맘에 안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고개를 젓는 와중에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주인님….’
오랜 과거, 아직은 검신 가득 빛을 발하던 시절, 그 빛의 중심에 있던 존재의 그림자가 뇌리를 스쳐 갔다.
용사!
너무나 아득한 옛일이건만, 여전히 선명하게 각인된 그 얼굴, 미소, 웃음소리 등등, 아주 잠시 아련해지는 걸 느꼈다.
‘자비가 넘치는 분이셨지.’
아직 마계에 있을 때 들었던 소식이 생각났다.
‘조카분이 살아 계시다는 소릴 들었는데.’
용사의 누이, 전사의 아들이 마계에서 대단한 위치까지 올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최초, 용사의 기본기를 잡아 줬던 게 전사의 공부였던 만큼, 그 아들의 성공 소식에 일견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과연, 용사님의 핏줄!’
타락해 버린 비루한 몸뚱이지만, 다시금 그 핏줄에 몸을 맡기고 휘둘리고 싶단 갈망이 남아있었고, 그 때문에 마계로 복귀하고자 했다.
하지만 상황이 꼬여 버렸다.
‘마족 놈들에게 날을 세우는 건 좋지만.’
그 정점에 있을 용사의 핏줄을 떠올리자니, 맘이 편치만은 않았다.
한숨을 쉬니, 검은 아우라가 해골을 뚫고 나왔다.
후욱….
그렇게 한 차례 흑연을 뿜어내니 기분이 조금 괜찮아졌다.
어느 틈엔가 석양이 지고, 진한 어둠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는 게 보였다. 흐릿한 별빛과 적막으로 물든 거리는 스산한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죽음의 기사는 어둠에 휘감긴 거리 속으로 스며들었다.
* * *
데카는 짜증 어린 얼굴로 전문가들을 바라봤다.
‘빌어먹을! 쓸데없이 뭐 하는 짓거리들이야.’
8중첩 버프를 두른 채, 탱크처럼 밀어붙이면 되건만, 굳이 저들을 부려 가며 시간을 끄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른 랭커들의 의견을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특히, 이 판은 저들이 만든 무대가 아니던가. 뒤늦게 참여해서 이리저리 흔들어 놓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과한 행동들이긴 했다.
D―day마저 앞당겨 버린 건, 사실 선을 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도 준비한 게 있는데.
―트랩퍼는 환각 계열도 부릴 줄 안다고 하더라.
―이미 포위망도 갖췄잖아.
―사냥감 어디 안 가니까. 차분히 천천히 즐겨.
랭커들의 말마따나 급할 이유가 없는 건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데카도 결국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장량을 비롯한 외부 랭커들의 지원까지 더해지는 터라, 상황은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휘유… 끝까지 고집부리면 어쩌나 했는데.’
‘저 골칫거리!’
‘덕분에 트랩퍼의 함정들을 제대로 볼 수 있겠어.’
‘여기서 나온 결과물은 서로 공유하는 거 잊지 말고.’
전문가라 불리는 집단은 각 랭커들의 휘하에 있는 연구원들로서, 이들은 마루의 함정을 비롯하여 존슨의 마석 결계술까지,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이곳 ‘레어’를 분석하고 해체하며, 트랩퍼의 재주를 빼먹으려는 부차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최우선 과제는 역시 아이언슈트로, 그를 사로잡기 위해서 외부 랭커들도 지원을 한 것인데, 거기에는 외부의 여러 단체들의 은밀한 입김도 스민 상황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트랩퍼의 설계도를 훔쳐보며 조심스러운 전진을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엇! 저거…?”
누군가의 경악성이 터져 나오고, 일행들의 시선이 한 방향으로 넘어갔다.
“아이언슈트?”
“…진짜인가?”
“일단, 체형은 맞는 것 같은데.”
“저게 왜 저기서 나와?”
놀랍게도 거기에는 이들이 최종 목표물인 아이언슈트가 서 있던 것이다.
상당한 거리가 있었지만, 이들 중 그 정도 거리감을 보지 못할 이들은 없었다. 랭커만이 아니라 이를 수행하는 요원들마저 하나같이 A급의 실력자들이기 때문이었다.
던전 입구에 보스가 서 있는 상황, 모두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당황하며, 그 진위 여부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데카가 외쳤다.
“구경만 할 거야?”
천둥 같은 외침이 일부 정신을 깨웠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딴 건 일단 잡아 놓고 확인해!”
과연, 그 말이 정답이라 여긴 듯, 랭커들이 다급히 걸음을 내딛는데, 함께하던 연구원이 그들을 말렸다.
“조심하십시오!”
“너무 당당히 나온 게 이상합니다.”
“함정일 수 있습니다.”
“저 손짓, 마치 일부러 유인하는 느낌입니다.”
“침착하셔야 합니다!”
그들 말이 틀리지 않다 여긴 것일까?
‘저 태도는 뭐지?’
‘이만한 전력을 보고도, 굳이 나선다고?’
‘함정이구나!’
‘으음… 골치 아프게 됐군.’
그들이 고민하는 사이 데카는 성큼 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다.
“쪽팔리게 굴지 마! 머릿수가 몇 갠데, 그렇게 쫄아 있어? 함정 따위, 내가 다 깨부숴 준다니까!”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서 트랩이 발동하며 데카를 덮치지만, 방어 버프를 한계치까지 두른 그에게 피해를 입히긴 어려웠다.
퍼퍼퍼펑… 퍼엉… 쿠르르르르르….
그 든든한 뒷모습 때문일까?
결국 랭커들도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
연구원들이 신음하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엇?”
“…사라 …졌어?”
“어디로 간 거야?”
“맙소사!”
일종의 경계선이라고 해야 할까?
저 앞으로 철길이 나 있었는데, 랭커들이 그곳을 넘어간 순간, 마치 거짓말처럼 증발해 버린 것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와중에, 저 멀리 아이언슈트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흩어지는 게 보였다.
‘당했다!’
연구원들은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걸 느꼈다.
* * *
마루는 관측 스킬인 태양의 눈을 통해 멀리 진입하는 이들을 쭈욱 훑는 한편, 최근의 과거 한 자락으로 사고를 이동시켰다.
제주도!
그곳에서 만파식적과 반칼죽을 얻고 현무암과 헤어지던 무렵의 상황이 시야 한편에 펼쳐졌다.
―다시 만나 뵈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파식적의 사용법을 알았다지만, 이는 백호를 찾기 위한 힌트일 뿐 정답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찾지 못할 경우도 염두에 둔 채, 다시금 현무암을 찾아 조언을 구하고자 한 것인데, 그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선 또다시 제주도를 찾고, 여러 날을 전투로 보내야만 하는 걸까?
그에 관한 현무암의 대답은 간단했다.
―핸드폰!
현무암도 현대 생활에 완벽히 적응한바, 그렇게 번호 교환을 하며 헤어졌다.
그가 갑자기 지난 기억을 떠올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니, 저 한편에서 손을 흔드는 현무암을 발견한 까닭이었다.
이면의 랭커들이 그룹을 이루는 걸 보며, 적잖은 부담감을 느꼈던 터라 긴급 SOS를 요청한 것이다.
―공짜로?
‘끄응….’
마루는 괜히 속이 쓰려 오는 걸 느꼈다.
아무래도 실버 박사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만큼, 더 이상 돈 때문에 궁핍해질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지난 세월의 습성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지갑이 열릴 때마다 뜨끔해지는데, 현무암은 한 번 요청할 때마다 몸값이 너무 비쌌다.
―제주도 하면 생각나는 동물이 뭔가?
―말… 입니까?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가 황당하게 이어졌다.
―내가 한때는 말을 참 잘 몰았지.
―말 한 마리 사 드려요?
―현대적인 말로다가 한 대 뽑아 줄 수 있지?
현대적? 한 대? 그 절묘한 단어들에서 떠오르는 ‘차량’이 있었다.
―폐….
―폐인가?
―폐라니… 요.
비싸도 너무 비쌌다.
푸욱 한숨을 쉬면서도 폐활량 건장한 놈으로 한 마리 뽑아 줘야만 했다.
그 결과,
[만상결계]
백록담 위로 펼쳐졌던 환상의 결계가 그의 거처 주변으로 장엄하게 깔리는 걸 볼 수 있었다.
마루의 함정술과 존슨의 마석 결계술?
솔직하게 말하자면 현무암의 저 장대한 재주 앞에선 애들 재롱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었다.
최근 존슨이 깨우쳤다는 마석 결계술의 상위 버전이 떠올랐다.
마정결계!
아직까진 마석과 마정석을 교차해서 펼치는 수준이라 했는데, 전부를 마정석으로 교체하고, 그 숫자를 가득 채워 넣는다면, 그때는 현무암의 만상결계에도 비벼 볼 수 있지 않을까?
잠깐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현무암이 몸값에 어울리는 재주를 펼쳐 보였다.
[만상결계 ― 신세계]
그 순간 마루의 거처 주변으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건물 사이사이 갑자기 새 생명이 싹트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나무가 자라고 가지가 뻗어 나가며 수풀을 형성하더니, 어느새 그의 동네는 울창한 밀림이 되어 있었다.
태양의 눈을 통해 불청객들이 당황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이를 알고 있던 마루도 새삼 놀랄 정도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의 시야에만 떠오르는 알림창이 하나 있었다.
[퍼펙트 플레이(베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 안에서 자유로운 장소는 한군데뿐이었다.
그의 거처!
‘갑자기 방송 끊기면 애들이 난리 칠 테니.’
통신보안은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