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드래고니안.
#9. 드래고니안.
PP의 3차 전직 업데이트가 이뤄지고, 어느새 1년이란 시간도 훌쩍 넘겨 버렸다. 2년 차를 향해 달려가는 이 시점, 여전히 3차 전직자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3차 전직 더럽게 힘드네.
―업적하고 공헌도 작업도 개 같은데, 경험치 노가다는 사람 미치게 한다.
―PP가 피를 더블로 말려서 PP인가?
―1~200레벨까지 경험치만큼 다시 쌓아야 하는 거니까.
―레벨이 레벨이다 보니 경험치 쌓으려면 고위 필드만 돌아야 되는데, 대형 길드들이 독식하고 있어서 그것도 힘들고, 에휴….
―결국 해답은 던전인데, 거긴 사망률이 너무 높음.
―족 같다.
그러던 찰나 뜻밖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중간계의 대적자들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환란을 조장하는 배후 세력의 등장?]
[베일에 싸여 있던 미지의 대륙?]
[마계 업데이트?]
그간 말만 무성하던 업데이트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수많은 유저들의 심장이 널뛰기 시작했다.
몇 안 되는 3차 전직자들 사이에서 조금씩 풀려나오기 시작하던 떡밥, 그 정체가 드디어 몸뚱이를 드러내려 하는 것이다.
―슬슬 레벨 제한선 상향할 시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갑자기 신대륙이라고?
―3차 전직자도 몇 없는데, 벌써 제한선 상향이라고? 그건 좀….
―뭐가 어찌 됐건, 그동안 떡밥은 꽤 풀리긴 했잖아.
―햐… 마계 오픈되면 레벨 작업 좀 쉬우려나?
―듣기로는 3차 전직자만 넘어갈 수 있다고 하던데.
―썅! 그러면 의미가 없잖아.
―건너 건너 건널목 소문이니까 아직 모르는 거다.
―빨리 업데이트됐으면 좋겠다.
―언제라고 정확히 나온 건 없고?
그에 대한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건 한 명밖에 없었다.
“빨리빨리 성장하라고.”
실버 박사는 그리 중얼거리며 한 개인의 화면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는데, 거기에는 업데이트 예정으로 한참 떠들썩한 마계의 풍경이 가득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소마’가 보였다.
사일론!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 중이었다.
* * *
“으아아아아아~!”
사일론은 성난 외침과 함께 포효했다.
간만에 레벨이 하나 오른 까닭이었는데,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알람이 있었다.
[싱크로율이 상승합니다.]
이게 뭘 뜻하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육성 시스템의 고유 특성을 생각해 봤을 때, 그에게 해가 되는 일은 없을 터였다.
“헉… 헉… 허억… 헉….”
그는 바닥에 너부러진 채, 조금 전 처리한 마수를 바라봤다.
일반적인 PP의 시스템이라면 이쯤 해서 아이템을 남기고 사라졌을 테지만, 이곳 신대륙 마계는 아직 시스템적인 정비가 끝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적용이 안 된 것인지, 그도 아니면 새로운 시스템을 준비 중인 것인지, 사후에도 사체가 끝까지 남아 있고는 했다.
가끔 사라질 때도 있었는데, 그건 마물의 특징과 맞물리는 거다 보니, 시스템이라 확신하긴 어려웠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정령형 마물들이 대표적으로서, 사망과 함께 세계의 일부가 되어, 빠른 속도로 풍화되는 특징이 있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 한다면 아이템 시스템은 멀쩡히 남아 있단 점이었다.
이를 획득하기 위해선?
‘후… 귀찮게 하네.’
사일론은 작은 몸을 이끌고 마수에게 다가간 뒤, 익숙하게 발골 작업을 시작했다.
이 업계의 스페셜리스트라 불리는 마루도 이를 봤더라면 감탄을 넘어, 기립 박수까지 했을 정도로 놀라운 솜씨며 속도였다.
실제 소마 시절에 밥 먹듯 했던 작업이다 보니, 마수 한 마리를 해체하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쯧!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자꾸 끄집어내는군.’
그렇게 마수를 헤집다 보면, 툭 하니 떨어지는 물건이 있는데 그게 바로 아이템이었다.
이를 챙긴 뒤, 추가적으로 그 몸뚱이는 부위별로 나눠서 분류하니, 손쉽게 각종 식량까지 구비할 수 있었다.
마수 고기를 챙기며 생각했다.
‘그래도 소마 시절보단 낫네.’
인벤토리라고 불리는 특수 아공간으로 인해, 식량 부분은 걱정 없이 챙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 그의 유년기에는 어렵사리 구한 식량도 딱 먹을 만큼만 챙기고 대부분은 내다 버려야만 했었다.
혹시라도 피 냄새를 맡고 쫓아오는 마수들이 있을까 두려워, 최대한 멀리 내던졌을 뿐만 아니라 뒷정리까지 필수였다.
‘아공간 하나로 삶의 질이 달라지지.’
마계에서도 제법 힘이 생긴 뒤에나 얻을 수 있던 게 아공간이건만, 여기서는 시작부터 함께하는 것이다.
옛 생각에 빠지던 것도 잠시,
“젠장!”
욕지거리가 튀어나와 버렸다.
소소한 부분에서 기쁨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에서, 지금 이 상황에 완벽히 순응해 버렸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 모든 상황들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이번 사태로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었다.
‘어머니….’
이젠 그 얼굴마저 제대로 기억나지 않을 만큼 긴 세월이 흘렀건만, 여전히 가슴 한편이 뜨끈해지는 단어였다.
그 특별한 존재를 떠올리는 건, 소마 시절로 돌아오면서 다시금 옛 궤적을 밟아 나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모친에게 배웠던 공부!
어느 순간부터는 뒤로하게 되었던 전투법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 까닭이었다.
‘핏속에 깃든 야생의 본능이 깨어난 이후부터였지.’
이를 완전히 잊어버린 건 아니었지만, 상당 부분 본능으로 대처되면서 전투법에 많은 변화가 발생했었다.
그 때문인지 기본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마치 걸음마를 처음부터 다시 떼는 것 같았고, 그러다 보니 바르게 서는 법, 걷는 법, 뛰는 법 등등, 지금껏 잊어 왔던, 어쩌면 놓쳐 왔을지도 모를 그런 것들을 하나씩 되새기며, 새롭게 깨우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형태로 몸에 새겨지고 있기까지 했다. 대공의 위치에 오른 만큼, 눈높이도 과거와는 달라졌고, 그만큼 모든 공부를 한층 높은 관점에서 살피게 되는 것이다.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왠지….’
본래의 육신을 되찾았을 때,
‘…더 강해질 것 같은데.’
작게나마 발돋움을 할 수 있을 듯싶었다.
그 때문일까?
자연스레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마왕!’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츄릅….
정말로 도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슬그머니 군침이 돌았다.
* * *
저 드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아찔한 시선이란, 절로 오금이 저리는 느낌이었다.
마루는 무릎에 힘을 빡 주며 쏟아지는 눈길을 담담히 받아 냈다.
물론, 속내는 좀 다르긴 했다.
‘더럽게 무섭네. 눈빛으로 레이저도 쏘겠다.’
어찌 보면 위기의 순간이라 할 수 있었지만, 이 와중에도 평정 유지가 가능한 이유는 간단했다.
사자유희!
그 나름대로 필살의 회피기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는데, 여차하면 공간 이동으로 도망가면 된다는 생각이 그에게 여유를 부여하고 있었다.
용군주의 등장으로 알게 된 점이라면, 앞서 고블린과 오크들이 얌전을 떨었던 이유였다.
‘진짜 군주와 신하 같네.’
기다렸다는 듯이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다른 고위종들도 어설피 이를 따라 하는 게 보였다. 이를 통해서 용군주의 절대적인 지배력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유독 백두산 마수지대가 내부 진입이 어려운 이유까지 단번에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심처는 완벽히 용군주의 영역인 듯싶었다.
용군주는 묘한 눈으로 마루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마루 역시 이를 피하지 않고 받아 내면서, 뜻밖의 눈싸움이 이뤄지는 가운데, 문득 용군주의 입이 열렸다.
―기이한 일이군.
언어로써 표현됐지만 의미는 텔레파시로 전달되었다.
그 때문에 언어로 전해 듣는 것보다 선명하게 상대의 ‘격’을 느낄 수가 있었다. 텔레파시라는 게 애초에 기운과 의지의 결정체이기 때문이었다.
‘미쳤네!’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저절로 마른침이 꼴깍 넘어가는 건, 눈앞의 존재에게서 뜻밖의 그림자를 발견한 까닭이리라.
존슨과 사일론!
그 같은 절대자들과 꼭 닮은 격이 텔레파시를 타고 전해진 것이다.
등허리를 타고 오르는 아찔한 전율 속에서, 용군주의 텔레파시가 연달아 이어졌다.
―분명, 인간이 맞는데. 동족의 향기가 느껴지는 이유가 뭐지?
두 눈을 얇게 뜬 용군주가 마루를 관찰하듯 그의 전신을 훑어 나갔다.
마루는 그 시선 앞에서 마치 전라로 노출되는 걸 넘어, 전신이 해체돼선 뼛속까지 드러나는 것 같은 감각을 맛봐야만 했다.
사실, 용군주는 자신의 ‘레어’에서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집사’들이 보내오는 특수 신호가 잠자리를 방해하면서, 결국 눈을 뜨며 기지개를 켜야만 했다.
고블린과 오크!
그 둘의 기세가 확 꺾여 버리는 걸 느낀 것인데, 이에 의아해서 날아온 결과, 놀랍게도 동족의 향기가 진하게 풍겨 오는 것이 아닌가.
집사들이 기를 못 쓸 만도 했다.
그녀가 지닌 ‘용의 기운’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인데, 그런 이유로 드레이크 앞에서도 기세가 확 죽는 경향이 있었다.
―흐음… 분명 인간인데.
무려 ‘용안’까지 발동하며 살펴봐도 동족으로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저 기이한 인간을 감싸고 있는 아우라는 분명 동족의 것이었고, 그 때문에 더더욱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에 마루는 상대가 용아병 칭호로 인해 감각의 오류를 일으키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쩐다….’
아무래도 당장 달려들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던 만큼, 일단 대화를 신청해 봐야 하는 걸까?
그 역시 생각지 못한 용족의 등장에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로 인해 잠시간 갈등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직접 확인하는 게 확실하겠군.
뜬금없는 소리와 함께, 돌연 시야에서 용군주의 모습이 사라졌다.
오싹!
섬뜩한 감각에 급히 몸을 굴렸다.
콰아아아아앙….
그가 서 있던 장소가 폭발하는 게 보였다. 황급히 몸을 날리지 않았더라면 저기에 휘말렸으리라.
파아악!
용군주의 신형이 흙먼지를 헤치며 날아들었다.
‘젠장!’
마루는 급히 이에 대응하며 몸을 움직였다.
이미 용아병 칭호에 용투기 스킬까지 발동 중이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조금 전 일격에 제대로 짓뭉개졌을지도 몰랐다.
[사신변환 ― 현무]
일단 방어력을 앞세운 상태에서 몸을 바쁘게 움직였다.
빠바바바바박….
틈틈이 존슨과 대련을 해 온 덕분일까?
어찌어찌 반응하며 방어를 할 수는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반격은 꿈도 꿀 수가 없었다.
반칼죽은?
‘칼 뽑을 틈도 안 주네.’
사실, 억지로 발검을 할 수는 있었지만, 그렇게 뽑아 든다고 해서 얼마만큼 효과를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지난 불청객 사건 이후로 상당한 기력을 소모해 버린 탓인지, 칼죽이는 수시로 수마에 빠져들고는 했는데, 이는 일종의 회복기라 할 수 있었다.
마지막에 본 드레이크를 일으킬 때 이미 무리한 상황이었건만, 거기에 더해서 브레스까지 뽑아내 버렸으니, 후폭풍이 생각 이상으로 컸던 것이다.
‘고블린이나 오크 정도라면 모르겠는데… 쯧!’
상대가 상대인 만큼 어설픈 상태의 칼죽이를 뽑는 건, 오히려 사태만 악화시킬지도 몰랐다.
사자유희의 공간 이동 스킬인 사자전환 스킬도 힘들었다.
‘젠장! 진짜로 큰일 났네.’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선, 한 호흡 가량 발동을 위한 여유 시간이 필요했다.
일종의 캐스팅 타임이라 봐야 하는데, 게임 속 능력치로 봤을 때 차후 이 시간도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이나, 지금 당장은 한 호흡의 한계를 넘을 수 없었다.
‘기회가 있을 때 빠졌어야 하는 건데.’
갈등이 이어졌다.
‘사자유희를 불러?’
그가 넘어갈 때와 달리, 사자유희가 그가 있는 자리로 넘어올 때는 딜레이가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갑주를 두툼히 해서 조금이라도 더 방어력을 높인 뒤, 상황을 대처하는 게 좋을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유일한 탈출구를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숨 막히는 압박감에 잠시 마음이 약해진 모양이었다.
―제법이구나!
흥이 오른 것일까?
용군주의 외형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그 머릿결이 불꽃처럼 일렁거리며 타오르는 가운데, 불길 사이로 솟구치는 용형의 뿔이 보였다. 마루의 것처럼 아우라로 이뤄진 게 아닌, 제대로 된 형태의 뿔이었다.
―제대로 해 보자!
포효와도 같은 외침과 함께, 한층 거세진 용군주의 공격이 마루를 괴롭혔다.
[사신변환 ― 주작]
잘 방어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고드는 대미지가 상당한 터라, 이처럼 회복력까지 앞세워 가며 버틸 수밖에 없었다.
‘하… 막아도 딜이 들어오다니.’
그러다가 문득 떠올렸다.
‘젠장! 이러다간 두들겨 맞다가 죽어나겠네.’
샌드백 신세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도박이 필요했다.
‘죽이 되건 밥이 되건, 한 방 때리고 보자!’
마루는 각오를 다졌다.
그 와중에 몸뚱이 중 한 군데는 망가져 버릴 확률도 높았지만, 일단은 도박이라도 해서 한 호흡 여유를 얻어 내는 게 중요했다.
입술을 짓씹으며 아껴 뒀던 스킬을 발동했다.
[사신변환 ― 청룡]
그리고,
태풍이 멎었다.
만파식적으로 불러왔던 비바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그를 거칠게 몰아치던 용군주의 폭풍 같은 공격들이 멈췄다는 의미였다.
막 [개벽권] 스킬로 컨디션을 확인하던 찰나에 발생한 일이었다.
‘무슨…?’
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듯, 마루가 벙찐 표정으로 멍청하니 용군주를 바라봤다.
용군주도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한데, 그 눈빛이 묘했다.
살짝 풀려 있다고 해야 할까?
얼굴에 띈 홍조까지?
불길한 예감이 몰려오는 가운데, 용군주의 입이 열렸다.
―달링?
숨이 멎어 버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