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마룡.
#11. 마룡.
줄을 잘못 섰다고 해야 할까?
중국의 영웅으로 불리는 금강귀 장량을 비롯해서, 그와 함께 존슨을 압박했던 다섯의 랭커들은 전부 본국으로 귀환됐다.
감히 랭커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지만, 그들도 자신들의 실책을 알고 있는 터라, 얌전히 부름에 응한 것이다.
그 와중에 뜻밖이었던 건, 성질이 남다른 일본의 오로키마저 순순히 귀국했단 점이었는데, 짐작하건대 존슨에게 한 방에 뻗어 버린 게 여러모로 충격이 컸던 듯싶었다.
어쨌든 그렇게 빠져나간 자리를 대신하듯 다른 랭커나 실력자들이 방한했다.
일본처럼 랭커가 둘인 경우에는 다른 랭커가 넘어왔지만, 그게 아닌 국가에선 나라를 대표할 만한 길드의 대표자가 직접 움직인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였다.
트랩퍼!
랭커 대전을 버텨 내는 말도 안 되는 방벽, 그 기적 같은 결계술은 자존심을 굽혀서라도 얻어 내야 할 보물이었다.
반드시 계약을 따내기 위한 각오로 수많은 요원들이 넘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들려오는 소식이 있었다.
―혜성이 계약을 따냈다!
발걸음을 재촉하게 만들었다.
* * *
마루는 떨떠름한 얼굴로 아이를 소개했다.
“오… 오늘부터 너희와 함께 지내게 될, 라미라고 해.”
이에 작은 소녀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앞으로 잘 부탁해.”
마치 천사처럼 예쁜 소녀였고, 이에 초롱이와 루미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응! 응!”
그리고 이를 조용히 지켜보던 이선은 눈빛으로 물었다.
―뭐냐?
―묻지 마세요.
마루는 시선을 피함으로써 대답을 회피했다. 마땅히 대답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용군주!
저 작은 소녀가 백두산 마수지대의 지배자라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애초에 비밀로 하기로 약조하기도 했다.
―나도 서방님과 함께하겠어.
어쩌다 보니 용군주가 기다리던 ‘달링’이 초롱이라는 걸 알게 돼 버렸다.
그간 그녀가 느껴 왔던 운명이란 건, 여의주 속에 잠들어 있던 초롱이의 흔적이었고, 마루는 그 껍데기를 지니고 있었기에 달링으로 착각해 버린 것이다.
물론, 여의주는 껍데기이며 동시에 알맹이였지만, 초롱이의 입장에서만 놓고 본다면, 껍데기란 표현이 더 들어맞긴 했다.
―퉤! 짝퉁한테 쓴 애칭과 호칭이라니. 내다 버리겠어.
그렇게 침까지 뱉어 가며 라미아는 새로운 단어를 입에 올렸으니, 그게 바로 ‘라미’와 ‘서방님’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혓바닥까지 잘라 버릴 기세였던 터라, 절로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였다. 정말로 자르게 된다면 그녀의 것이 아니라, 마루 본인의 걸 자를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용족이 아니라, 마족인 것 같은데….’
사실, 마루는 백두산에서 이야기가 요상하게 진행되려는 걸 직감했을 때, 다급히 사자전환을 통해 공간 이동으로 줄행랑을 쳤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
―감히, 나한테서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니?
마루가 기다려 온 ‘님’이라 착각하며 팔짱을 꼈을 때, 이미 그에게 ‘마킹’을 해 놨다는 게 아닌가.
뒤를 밟혀 버린 것이다.
그즈음 마루는 정말로 생사결을 결심할 정도로 각오를 다진 뒤, 재차 그녀와의 일전을 펼쳐야만 했다.
결과는?
피닉스 보육원에 전학생이 소개된 걸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었다.
―함부로 까불지 말렴!
아주 작살이 났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형님보다 윗줄이야.’
존슨이라고 해도 용군주를 감당하긴 어렵다는 것이다.
게다가 차후 잠에서 깬 칼죽이를 통해 용군주의 정체를 들었을 땐, 감히 덤빌 생각이 싹 사라지기도 했다.
―히익! 저 마녀가 왜 여깄씀까?
‘마족이 아니라 마녀?’
백두산에서 그 난리가 났는데도 꿀잠을 취한 모양인지, 뒤늦게 난리 법석을 떠는데, 이에 호기심이 일어 물으니 놀라운 대답이 이어졌다.
―방랑하는 무녀라고, 마룡 드라이크라 불리는 신격의 핏줄임돠.
어찌나 놀랐던지, 말투 가득 당혹감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신격?”
―실제로 신위를 얻은 건 아니지만, 반신의 영역을 한참 벗어났다고 알려진 존재가 있씀다. 아는 이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고룡임다.
“고룡?”
―최후의 고룡이라고도 불리는데, 신화가 끝나가는 세계에 남아 있는 마지막 드래곤이라고 함다.
그즈음 느낌이 왔다.
“최후의… 고룡?”
왠지 묘하게 귀에 착 달라붙었다.
―꽤 유명함다. 억겁의 시간을 살아오면서, 다양한 유희로 차원 침략자들을 골탕 먹이기도 했는데, 그중에서 특히 유명한 거라면, 고블린으로 마왕군을 패퇴시킨 사건이 있씀다.
‘…고블린?’
―예. 그렇씀다. 원래는 신격을 얻어 버려서 인간사에 개입할 순 없어야 하는데, 풀타임 폴리모프라고 완전히 종의 한계에 자신을 가두는 특수한 유희가 있다고 함다.
이 경우에는 인과율의 족쇄에 스스로를 가둘 수 있었다.
―종의 한계가 명확할수록 족쇄가 강해지는데, 그래서 최약의 몬스터라 불리는 고블린으로 유희를 즐겼다고 함다.
제약만큼 인간사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귀에 익어.’
―듣기로는 고블린으로 한 만 년 정도 유희를 하다 보니, 그 볼품없는 몸뚱이로도 마왕을 씹어 먹었다는데. 솔직히 거기까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분명 다차원에서 유명세가 있는 거물의 혈통임다.
마루의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게 있었다.
[칭호 : 용아병]
과거, 그 칭호를 전해 줬던 존재도 딱 저와 같은 역사를 지니고 있지 않았던가.
고블린으로 그를 짓밟을 수 있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소리에, 괜히 더 자존심이 상해서 뇌리에 깊이 남아 있는 스토리였다.
―전승으로는 어느 ‘이름 없는 신격’의 도움을 통해서, 존재의 격을 넘어섰다고 함다.
그 순간 느낌이 왔다.
‘이름 없는 신!’
칭호를 전해 줬던 그 고룡의 핏줄인 것이다.
물론, 그처럼 이름이 없는 신들이 하나일 거라 정의할 순 없지만, 스토리라인까지 절묘하게 얽혀 있는 점에서, PP에서 만난 고룡이 맞다고 여겼다.
선물이야 사실 여의주의 주인, 이름 없는 신의 안배로 전해진 것이지만, 마루 개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은혜를 입었다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렇잖아도 상대가 안 되는 상황에, 이런 스토리까지 끼어 버렸으니, 전의가 상실되는 건 순간이었다.
이즈음 용군주, 라미가 집사라고 부르는 ‘가디언’들을 고블린과 오크로 세워 놓은 이유도 이해하게 됐다.
부친 취향이 고스란히 전해진 게 아닐까 싶었다.
‘핏줄은 핏줄이구나….’
칼죽이는 추가로 무시무시한 이야기도 늘어놓았다.
―저 마녀는 마계에서도 무법자로 유명함돠 마계를 헤집고 다니면서 말썽을 피워 대도, 감히 그녀를 감당할 만한 마족이 없었씀다.
그녀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뒷배가 무시무시했던 것이다.
―대공급의 마족들도 쉬쉬했는데, 저 마녀는 위기의 순간에 마룡 드라이크를 육신에 강림할 수 있어서, 대공들도 쪽팔린 상황을 피하려고 내버려 뒀단 이야기도 있씀다.
마왕이 나설 경우에는 마룡도 본체가 아닌 이상 어쩔 수 없을 것이지만, 이를 알기 때문인지 절묘하게 마왕의 영역을 빙 둘러서 피해 다녔다고 한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마루는 몸서리를 쳤다.
‘어우….’
선물을 받았던 만큼, 언제고 다시 한번 만나고 싶은 존재가 바로 그 최후의 고룡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장에서 원수로 보고 싶단 의미는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잘 부탁드립니다.”
마루는 정중히 이선에게 골칫거리를 떠넘긴 뒤, 걸음아 날 살리라며 줄행랑을 쳤다.
“야!”
등 뒤로 피닉스 보육원의 원장, 이선의 성난 외침이 들려왔지만, 마루는 마치 파쿠르의 달인처럼, 건물을 타 넘으며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렇게 중개인이 떠난 뒤 라미는?
“우리 친하게 지내는 거야.”
초롱이에게 바짝 붙어서 열심히 헤죽거리는 중이었다.
목표를 달성한 그녀에게, 마루는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후후… 앞으로 잘 키워서, 꿀꺽… 호호호홋!”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는 라미의 모습 때문일까?
초롱이는 새 친구가 반가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두렵다는 생각을 해 버렸다. 그 같은 기색을 눈치챈 라미가 급히 표정을 수습하며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오다가 샀는데 같이 먹을래?”
“우와아아~!”
경계심?
젤리 하나면 박살 낼 수 있었다.
* * *
마계!
그곳의 동서남북을 지배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항간에는 사천왕이라고도 불리는 마계 대공들이었다.
왕이라는 호칭은 오직 하나, 마계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마왕에게만 허락된 칭호였지만, 언젠가부터 그들에게 왕의 칭호가 따라붙기 시작하더니, 마왕은 스스로를 한 차례 더 격상시키며, ‘대’마왕이라 부르도록 천명하기에 이른다.
사일론은 그에 대해서 이처럼 설명했다.
“차원 침공을 하는 세계가 우리만 있는 게 아니야.”
마계라 불리는 세상은 하나가 아니라면서, 다른 차원의 마계에는 이미 대마왕와 여러 마왕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단 호칭을 높이는 걸 시작으로, 격의 상승을 준비하는 거지.”
그러면서 언급한 게 민간 신앙이었다.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이들 중, 격이 맞는 이들은 정말로 신격이 부여되며, 신앙으로 추대되는 경우가 있거든. 이걸 일종의 신성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지.”
그런 식으로 꾸준히 언급하다 보면, 실제로 ‘대’마왕급의 격이 쌓일 수 있단 것이다.
“재밌는 건, 이런 식으로 세계가 입을 모으면, 가짜도 진짜가 된다는 거야.”
격이 만들어지고 그게 온전한 형태를 갖췄을 때, 뜻밖의 탈피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 순간 ‘초월’하게 된다고 했다.
“신의 아들이 신의 격을 품어서, 승천해 버리는 거지.”
그 타이밍에 존슨의 농담이 이어졌다.
“아앗! 하늘 높이, 가 버렷….”
사일론의 싸늘한 눈빛에 땅바닥 속으로 깊이 가 버렸지만, 어쨌든 그렇게 신예 마신의 탄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같은 설명에 꾸준히 언급되었던 존재, 마계의 지배자이며 신의 핏줄이라 불리는 절대자.
[대]마왕!
그가 흥미로운 눈으로 자신의 발아래 엎드리고 있는 거구의 마족을 내려다봤다.
“북쪽의 새 주인이라고?”
“예! 도플갱어 바르만 일족의 수장, 하르칸이라고 합니다.”
대마왕이 물었다.
“흠… 대부분 멸족당한 것으로 알았는데, 너만 한 존재가 아직 남아 있었다니. 재미있구나.”
“남쪽 왕의 비호로 인해, 일족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환마족의 일원으로서 유독 인간을 미식하는 취미로 인해, 차원 침공에 가장 앞장서던 일족이 바로 도플갱어 일족이었다.
유독 인간의 형태를 따라 하기 쉬우며, 그들의 재능을 훔쳐 내기도 쉬웠던 터라, 특히 더 매력적인 사냥감이기도 했다.
그 때문일까?
마계에 존재하는 반인반마의 혈족들 역시 그들의 주된 먹잇감이며 유희거리로 낙점되곤 했는데, 바로 그 부분이 이들 일족을 멸족의 순간까지 몰아붙이는 결과를 낳았다.
북의 지배자, 마계 대공 사일론!
반인반마의 신화라 불린 절대자의 등장으로 인해, 말 그대로 쓸려 나가 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과거 사일론의 역린을 건드린 바가 있었다.
[감히 어머님을 흉내 낸 죄, 사형!]
그 결과, 수많은 도플갱어가 갈기갈기 찢겨 죽었고, 한때는 그로 인해서 환마족 전체와 큰 전쟁을 치르기도 했을 정도였다.
남쪽 왕의 비호로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는 간단했다.
환마족!
그중에서도 특히 세가 강하다는 몽마의 수장이 또 다른 마계 대공이자 남쪽의 왕이었다.
대마왕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물었다.
“이번에 사일론을 쫓아낸 것도 네 계략이라 들었다.”
“남은 일족이 사활을 걸고, 마왕님의 명예를 더럽히고 마계를 오염시킨, 추잡한 불순분자를 쫓아낸 것일 뿐입니다.”
예로부터 바람을 잡고 분위기를 조장하는 건 도플갱어 일족을 최고로 쳤는데, 이번 사건에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한 것이다.
마왕이 작게 실소를 내뱉었다.
“더럽다라… 큭큭큭!”
마왕이 물었다.
“내 핏줄이 추잡하단 것이냐?”
“…….”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던가?
일순, 하르칸이 두 눈이 부릅떠지는 가운데, 대마왕이 물었다.
“삐뚤빼뚤한 가시가 가득해서, 아주 못나고 고약한 손가락이지만, 그래도 싸질러 놓은 핏줄인데 이걸 잘라 냈으니, 내 너를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그 물음에 하르칸은 굳어 버린 채, 입만 뻐끔거릴 뿐이었다.
“큭큭큭큭….”
대마왕이 비릿하게 웃으며 권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거대한 어둠이 하르칸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