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간장.
#12. 간장.
사일론은 아주 가끔 생각하고는 한다.
‘내 반쪽 핏줄은 어떤 놈일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으로서, 모친에 대해서는 짧게나마 유년기를 함께했기에 모를 수 없었지만, 기이하게도 부친에 대해서는 도통 알 수가 없던 것이다.
아쉽게도 모친 역시 관련해선 통 입을 열지 않았던 터라, 그로서도 알 길도 없었다.
단지, 별 볼 일 없는 마족은 아닐 거라 여겼다.
모친에게 배운 전사의 공부로 유년기를 버텨 내고, 차후 시간이 지나고 성장하면서 핏줄에 담긴 짐승의 본능이 깨어났을 때, 생각보다 뛰어난 야성의 감각을 느꼈고, 이를 통해서 자신이 제법 굵직한 혈통이란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에게 깃든 재능이 모친의 것 하나였다면, 결코 마계 대공의 자리까지 오르진 못했으리라.
‘살아남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겠지만.’
어느 정도 직위를 차지했을 거란 확신도 있었지만, 절대자의 자리까지 오르는 건, 나머지 반쪽의 재능도 힘을 실었기에 가능했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반쪽의 핏줄을 향해선 좋은 감정이 없었다.
‘후우… 어떤 놈인지. 걸리면 작살을 내 주고 싶었는데.’
마계의 마기에 중독되어 평생을 고통받다가 떠난 모친을 떠올리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고는 했다.
그에게는 유일하게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이면서, 동시에 가장 서글픈 아픔의 기억이기에, 더더욱 반쪽을 향한 원망이 큰 것이다.
이를 고스란히 전해 주고 싶었건만, 안타깝게도 부친에 대한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약육강식의 살벌한 마계 법칙으로 짐작하건대, 어디선가 강자존의 규칙에 의해 일용할 양식이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굵직한 혈통이라도 결국 강자의 한 끼 식사가 되는 세상이 바로 마계가 아니던가.
“후우….”
사일론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근래 들어서 유독 쓸데없는 잡념이 많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부 이 거지 같은 상황 때문이지.’
소마 시절로 돌아가며 발생한 연쇄 작용이리라.
특히, 그가 거의 멸족시키다시피 한 도플갱어가 수시로 튀어나오며 괴롭혀 대니, 더더욱 과거 회상에 빠져드는 것일지도 몰랐다.
게임인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지, 현 마계에선 보기 드문 도플갱어가 한가득 널려 있었다.
유년기를 악몽으로 물들였던 놈들인 탓일까?
“빌어먹을 새끼들!”
욕지거리가 절로 튀어나오는 가운데, 한 가지 맘에 드는 건 있었다.
“큭큭큭큭… 요것들 찢어발기는 맛이 어땠는지, 새록새록 기억나는군.”
그러며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데, 언뜻 저 마계의 드높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그런 모습이었다.
* * *
PP의 아버지라 불리는 존재, 실버 박사는 사일론을 모니터링하는 한편으론, 신대륙 마계의 완성도를 꾸준히 체크했다.
그러면서 PP의 여러 커뮤니티 반응도 확인하는데, 일반적인 인터넷은 접속하기가 어렵지만, 엔트라넷과 연결된 커뮤니티라면, 얼마든 살필 수 있었다.
―신대륙 언제 나옴?
―솔직히 슬슬 새 시나리오 적응할 때 됐지.
―3차 전직자 몇 나오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푸는 건 아니지 않나?
―선두 그룹하고 격차가 너무 벌어질 것 같은데. 좀 천천히 순차적으로 연계하는 게 맞을 듯.
그러며 어떤 방식으로 신대륙 업데이트를 진행할지 고민했다.
‘역시, 한 방에 올리는 건 무리겠네.’
사일론이 과업 퀘스트를 달성하려면 한참 남기도 했고, 그로 인해서 마계의 완성도 역시 상당히 더딘 면도 있었다.
하지만 너무 긴 시간을 기다리게 할 수도 없었기에, 그는 결론을 내려야만 했다.
“순차적인 방법으로 가는 게 맞겠네.”
물론, 그가 선택을 내렸다고 해서 그대로 이뤄지는 건 아니었다.
정식 서버의 관리자라 할 수 있는 존재.
인공지능 레이나!
그녀와 의견을 나눈 뒤 결정되는 것으로, 알파 세계의 인공지능 ‘알파0~9’이 신을 따라 한 기계에 가깝다면, 레이나는 상당 부분 기계를 흉내 내는 신격이라 할 수 있었다.
좀 더 상위의 존재인 것이다.
코드네임은 최종 형태라 해서 ‘오메가’였지만, PP라는 게임의 신격에 어울리진 않는다는 이유로, 레이나라는 이름을 따로 붙인 거였다.
놀랍게도 이 이름을 선택한 건, 레이나 본인이기도 했다.
개인 의지가 확고한 것이다.
그런 특별한 인공지능에 의해 개성이 부여된 세계가 바로 PP였고, 그만큼 현실감이 넘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알파들을 통해 레이나와 마계 업데이트에 관한 의견을 나눴고, 게임 디렉터인 그의 의견을 십분 반영하며, 곧 정식 업데이트에 관한 상세 공지가 올라갔다.
* * *
혜성의 의뢰로 이뤄진 결계 설치 작업이었다.
각 길드에는 그들 고유의 결계진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혜성 길드는 이를 과감히 마루에게 오픈했다.
마루의 결계술이 그들이 지닌 것 이상의 가치가 있단 판단에서 내린 결론으로서, 덕분에 마루는 뜻밖의 공부의 기회까지 가질 수 있었다.
‘호오… 이런 식으로도 발동할 수 있는 건가?’
마석 결계술과는 다른 방식으로서, 전문 스킬을 지닌 헌터에 의해 형성되는 결계들이 많았기에, 이를 따라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이를 통해서 일종의 영감은 받을 수 있었고, PP 내에서 비슷한 종류의 스킬들을 연상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초감각이 놀라운 건, 마석 결계술과는 궤를 달리하는 스킬로 이뤄진 결계술이건만, 거기에서도 어느 정도 흐름을 읽어 낼 수 있단 점이었다.
과거에 붙었던 제퍼드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하… 이런 재주를 선천적으로 타고났다니.’
게다가 생긴 것도 연예인 뺨을 양쪽으로 두드리고도 남을 정도였으니, 여러모로 사기 캐릭터였단 생각이 들었다.
마루는 그렇게 결계술을 학습했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이던가. 바로 PP를 통한 스킬의 다양성이니만큼, 이처럼 불가해한 영역의 공부들도 허투루 보고 지나지 않을 수 있었다.
꼭 같지는 않아도 닮은꼴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트랩퍼로서의 입지도 더욱 탄탄히 다질 수 있는 것이다.
아이언슈트와 트랩퍼!
차후 계획하고 있는 이중생활을 위해서라도, 양측의 균형을 잘 맞춰 놓을 필요가 있었다.
마루가 결계 설치 의뢰를 받아들였다는 소문이 돈 까닭일까?
“허… 가드가 상당하네.”
“어떻게 구경 좀 했으면 싶은데.”
“쯧! 나중에 끝난 다음에 훔쳐볼 수밖에 없나?”
“아쉽구만. 아쉬워!”
슬며시 고개를 내미는 구경꾼들이 상당했다.
개중에는 네임드급 단체의 요원들도 제법 있었는데, 관련 스킬을 각성한 전문가나, 아예 그 방면의 공부를 하는 학자들도 여럿 끼어 있었다.
물론, 혜성은 마루의 요청에 의해 그의 작업장 주변으로 단단한 바리케이드를 쳐 놓은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더더욱 관심도가 올라가기도 했다.
“얼마나 대단한 걸 하고 있어서.”
“듣자 하니 다운 버전이라던데, 그것도 숨겨?”
“더럽게 비싸게 구네.”
“지금 몸값이 금값이긴 하지.”
미스터리한 부분이 부각되니, 더더욱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기도 했다.
결국에는 저들 나름의 관찰 루트가 생길 것이나, 당장은 신비주의 콘셉트처럼 저들을 자극하는 탓에, 나날이 마루의 존재감이 상승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세계는 아이언슈트에게, 이면은 트랩퍼의 환상 속에, 이래저래 속앓이를 하고 있는, 참으로 신비로운 현상이 이어지는 나날이었다.
그 같은 가지각색의 눈초리 속에서, 마루는 꿋꿋이 결계 작업과 PP의 레벨 작업 등을 반복하는데,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존슨에게서 문자가 날아들었다.
―특수 조건 발동하자.
그 내용에 마루의 표정이 굳어졌다.
제자 임시안의 스킬에 관한 이야기인 까닭인데, 특수 조건이 의미하는 건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간을 썰자!]
마루는 간만에 작업들을 뒤로한 채, 예정된 동선에서 벗어났다.
* * *
승급과 성장을 위한 사냥이었다.
그 시간이 싫을 리가 없었다.
특히, 그토록 원하던 각성과 함께 이어진 헌팅이지 않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맘이 편치 않았다.
그 때문일까?
임시안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는 날들이 늘어 버렸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존슨이 물었다.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냐?”
처음에는 별거 아니라며 둘러댔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별거 있잖아. 자꾸 그렇게 똥 씹은 표정으로 있을 거면, 진짜로 똥물을 먹여 버릴 거니까. 당장 뭣 때문인지 불어.”
결국 존슨의 강압에 버티지 못한 듯, 임시안의 입이 열렸다.
“다솜이 누나 때문에요.”
“아….”
그걸로 충분했다.
생각해 보니 청춘사업이 한창일 때가 아니던가.
특히, 강렬한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레오가 등장해서 판을 흔들어 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무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 속이 문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초반에야 [간장개장] 스킬이 주는 압박감으로 인해, 헌팅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만들어졌다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에 적응하고 작게나마 여유도 생기니,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것이리라.
존슨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 간절한 열망을 그도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기나긴 세월을 이반나만 바라보며 가슴 졸였던 경험이 있지 않던가.
그로 인해 쌓이는 스트레스를 여러 던전이나 대격변의 전조 현상 속에, 정의라는 이름으로 쏟아 냈던 경험도 상당했다.
입맛을 다신 그가 물었다.
“따로 포스가 폭발하는 느낌은 없고?”
승급 현상에 관한 질문으로서, 갑작스레 이를 묻는 이유가 뭘까?
“아직이요.”
고개를 젓는 임시안의 모습에 존슨이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경험치가 넘어가는 건 확실한데.’
몬스터를 사로잡으면 포스라고 불리는 기운이 임시안에게 흘러 들어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지금껏 사냥한 수가 상당했고, 임시안의 등급을 생각해 봤을 때, 이미 승급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숫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승급의 징조가 없다는 건?
‘특수 조건 발동이 확실하네.’
상황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 가다간, 요 녀석 피가 마르겠어.’
임시안의 청춘사업을 위해서라도 미뤄 뒀던 선택지로 시선을 돌리기로 했다.
그 때문일까?
“스승님?”
임시안이 깜짝 놀란 얼굴로 전방을 바라봤다. 사냥이 끝나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뜻밖의 반가운 얼굴이 등장한 것이 아닌가.
“쉬어 쉬어.”
마루가 손을 흔들며 일어나려는 임시안을 말렸다. 딱 봐도 지친 몰골이건만, 괜히 인사한다며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한차례 제자의 어깨를 두드려 준 뒤, 존슨을 향해 물었다.
“오늘부터 하자고?”
“그래.”
미뤄 둔 선택지에 발을 들이기 위해선, 일단 스승의 동의를 구할 필요가 있었다.
추가적으로 존슨 못지않은 초감각을 지닌 마루와 함께하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고 싶은 마음도 컸기에, 이처럼 마루를 불러들인 거였다.
존슨과 마루는 여러 변수를 계산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데,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임시안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혹시, 뭘 하시려는 거예요?”
그 물음에 답한 건 스승인 마루였다.
“당사자도 알아야겠지.”
“…예?”
“아무리 생각해도 넌 성장을 위해 퀘스트가 붙어 있는 것 같다.”
“퀘스트요?”
“가끔 단순 사냥만으로는 성장이 안 되는 케이스가 있거든.”
“그러면….”
“짐작하고 있잖아.”
사실, 임시안도 알고 있는 바였다. 애써 무시하고 외면하면서 눈을 가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간 좀 먹자.”
아니나 다를까. 설마 싶었던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임시안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가는 가운데, 마루가 달래듯 제자를 다독이며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진 마. 단계별로 올라갈 생각이니까. 네가 생각하는 최악은 정말로 답 없을 때나 찔러 볼 거야. 어지간하면 답이 안 나와도 미뤄 보겠지만.”
“최악… 이요?”
“빤하잖아. 사람 간 먹는 거지.”
순간, 임시안의 표정 가득 물음표가 떴다. 그게 최악이라면 차악을 비롯하여, 인도적인 선택지가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의 모습에 존슨이 실소하며 끼어들었다.
“네 스킬의 특성이 ‘능력자의 간’을 먹는 거라며.”
“…예.”
“거기 어디에도 ‘사람의 간’이라는 표현은 없는 것 같은데,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니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인 걸까?
“아…!”
임시안의 동공이 부릅떠지고 입이 쩍 벌어졌다. 예상치 못한 구원의 빛을 발견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희망이 꽃피는 느낌이랄까?
“너무 좋아할 거 없어. 우리는 네 스킬의 특성이 보여 준 빈틈을 파고들려고 하는 거야. 일종의 시스템 오류를 놓고 딜을 하는 거니까.”
존슨이 당근을 던져 준 만큼, 마루는 채찍질을 했다.
“대개 게임에서 이런 오류를 잘못 사용하면, GM(게임 마스터)한테 제재 씨게 박히는 거 알지?”
언뜻 광명이 비추는가 싶던 임시안의 얼굴에 그늘이 끼는 모습이 보였다. 이에 존슨이 재차 당근을 흔들었다.
“그래도 엔트라넷은 제법 융통성이 있는 편이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
그 말에 다시금 그늘이 일부 걷히는데, 마루가 이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풀어지지도 말고.”
다시 어두워지는 임시안의 모습에 존슨과 마루가 슬쩍 시선을 나눴다.
‘이거….’
‘…재밌네!’
안색이 이리저리 변화하는 게, 무슨 CG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 때문인지 그들은 적절히 당근과 채찍을 부려 가며, 한동안 임시안을 골리면서 휴식 시간을 알차게 써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