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마자~ 용!
#16. 마자~ 용!
PP가 상당히 특수한 가상 현실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그 기본 시스템은 ‘게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 때문일까?
사자유희!
게임 내에서는 전환술을 통한 도주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PP 안에서 이뤄지는 사망은 ‘가짜’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볍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컨디션 다운!
급격하게 망가지는 몸 상태로 인해, 한동안 일상이 어그러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항상 경계는 하고 있었다.
단지, 그 수준을 최고 등급으로 분류하지만 않을 뿐이었다. 게다가 사자유희는 그저 단순한 도주용으로 사용하기에는 그 효용성이 너무 뛰어났다.
방어력의 상승은 기본이며, 스탯 및 스킬의 뻥튀기 작업까지 가능하니, 여러모로 전투력의 상승을 불러올 수 있는 것이다.
한데, 단순 도주에만 사용한다?
‘그런 아까운 짓은 할 수 없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익살자….’
분명 쉽지 않은 상대인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도주로에 발을 들이는 건 옳지 않았다. 게다가 충분히 해 볼 만한 상대라는 생각도 있었다.
이를 위해서 더더욱 사자유희의 보조가 절실했다.
사자유희는 갑주의 형태로써 방어력을 높여주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좀 전 그의 사냥에 멋대로 숟가락을 올렸던 익살자들을 찾아냈듯, 지금도 꾸준히 그늘 속을 살피며 그의 탐색을 지원하고 있었다.
어둠에 숨는 걸 좋아하는 저들 익살자 입장에선, 그야말로 하드 카운터 아티팩트라 할 수 있는 게 바로 사자유희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긍정적인 건 아니었다.
과거에 탈곡기의 작업장을 헤집어 놨던 것과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탈곡기는 일단 필드 전역의 유저들을 상대로 작업을 쳤던 것이라면, 저들 익살자들은 지금 이 순간을 기점으로, 오직 단 한 개체, 마루만을 상대로 칼을 뽑아 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수 대 다수의 격전이던 탈곡기 사건과 달리, 이번에는 다대일의 전투를 염두에 둬야 했다.
“그냥 당해 줄 생각은 없지만….”
마루는 그리 중얼거리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칼죽이를 바라봤다.
겉으로는 멋들어진 데스 나이트의 모습을 한 채 고고한 모습으로 서 있었지만, 거기에 속으면 안 된다.
칼집에 곱게 꽂혀 있는 모습에서, 취침 중이라는 게 전해졌다.
“기상!”
그 순간 데스 나이트가 짧게 몸서리를 치는가 싶더니, 뒤이어 검을 뽑아 드는 게 보였다.
―으음… 음냐냐… 근무 중 이상 무!
늘어지는 헛소리를 보아하니, 역시나 졸고 있던 모양이었다.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어 보인 마루가 사자유희의 또 다른 효용성을 꺼내 들었다.
“기운 좀 나눠 줘.”
그 말에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이는 실로 기이한 일이라 할 수 있는 부분으로서, 사자유희는 현무의 신물인 흑화한단으로부터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사기로 전환하는 것도 가능했는데, 칼죽이는 그게 불가능했다.
아무래도 저승왕의 신물이 지닌 특수한 기능으로 여겨졌다.
과거, 현무암이 백록담에서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생명의 끝에 현무가 있느니라.]
짐작하건대 ‘생과 사의 경계’라는 기준점, 그 부분에서 저승의 기운과 어떤 본질적인 연결점이 있다 여겼다.
생각해 보면 사자유희가 그에게 귀속된 것도 바로 이 현무의 기운 때문이지 않던가.
어쨌든 이로 인해서 사자유희는 칼죽이의 상태를 어느 정도 해소해 줄 만한 포션 역할이 가능했다.
단지, 사자유희가 이를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이렇게 기운을 빼고 난 뒤엔, 탐욕스럽게 흑화한단을 요구하는 탓에, 마루도 자제하는 면도 있었다.
지금은 긴급 상황이니만큼, 좀 더 사자유희를 다채롭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과연, 효과가 있는 걸까?
―호랑이 기운이… 오오오옷!
시름시름 앓는 듯싶던 칼죽이의 기운찬 외침이 들려왔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과할 만큼 충전이 된 모양이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마루가 만파식적을 입에 문 뒤, 바쁘게 연주를 시작했다.
전투에 앞서 다양한 버프들을 미리 깔아 놓으려는 것인데, 그의 이 같은 행동에서 의도를 읽은 것일까?
조심스레 거리를 좁혀오던 익살자들이 마치 한 줄기 화살처럼, 각 은신처에서 쏘아져 나오며 마루를 덮쳐들었다.
“어억! 저거, 뭐야?”
“익살자다!”
“헉! 저런데 숨어 있었어?”
“이거, 리치킹이 위험한 거 아니야?”
숨죽이고 있던 관전자들의 동공이 부릅떠졌다. 그만큼 뜻밖의 기습이었던 것인데, 이미 익살자의 등장을 짐작하던 이들도 깜짝 놀라야만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루 주변을 샅샅이 훑던 그들이건만, 이미 탐색을 했던 장소에서 익살자들이 대거 튀어나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상황의 급전개는 지켜보는 이들을 숨 가쁘게 만들었다
그 존재를 아는 이들은 새삼 익살자의 명성을 상기하며 몸서리를 치는 순간이기도 했다.
바로 그 순간 반전이 일었다.
“오오! 역시 리치킹이다.”
“쉽게 안 당하네.”
“언데드들 커버 끝내주네.”
“배치가 어째 습격 루트를 차단하는 것 같은데.”
“설마, 알고 있던 건가?”
가능성이 높다 여겼다.
“워… 탐색 스킬 등급이 얼마나 높은 거야?”
“배치도 보면, 전술계도 마스터한 것 같은데.”
“그건 당연하겠지. 테이밍 계열도 전술은 기본 퀘스트에 끼어 있는데, 저 정도 병력 움직이려면, 상위 전술 마스터급은 돼야지.”
관전자들은 익살자의 등장에 놀란 것 이상으로 마루의 대처에도 감탄을 거듭했다.
놀랄 만큼 적절한 배치도를 통해서 익살자들은 동선이 어그러졌고, 그 때문에 기습의 묘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각기 언데드에게 발목이 잡힌 채, 개별적인 전투를 이어 갈 수밖에 없었다.
암살자가 대인전을 한다?
이미 그들은 한 수 잡힌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실제로 익살자들은 적잖이 당황하는 중이었다.
‘이… 이런, 젠장!’
‘대충 뽑아 놓은 놈들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단번에 가드로 전환한다고?’
‘빌어먹을! 함정이었어.’
‘전술 등급이 대체 얼마나 높은 거야?’
각기 레벨과 경험치 등이 상당하다 보니, 당장 큰 손해를 보고 있진 않지만, 이마저도 얼마나 이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익살자들은 하나같이 특수 직업으로 이뤄진 암살자 집단이었다.
이는 암살자라는 포지션을 놓고 본다면 확실히 우월한 감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상위 등급으로 올라갈수록 암습에 특화되는 경향이 커지는 터라, 이런 대인전에서의 영향력은 점차적으로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는 건, 그들 각자가 남다른 경험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인데, 이런 상황을 위해 추가적으로 부캐릭을 통해 이런 부분들을 커버할 만한 경험치들을 쌓아 놓는 것이다.
하지만 캐릭터 본연의 상성으로 인해 대인전의 퀄리티가 낮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부분이 바로 특수 직업의 장점이며 단점이라 할 수 있었다. 직업군에 너무 특화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마루의 몽크처럼, 다양한 직업군의 스킬에 침을 바르는 게 아니라, 오직 그들 직업군과 연관된 스킬만이 허락되기 때문이다.
레벨의 상승에 따라, 하위 레벨 때 배워 놨던 스킬을 버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PP에선 직업의 귀천이나 격차가 여타 게임에 비해 덜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었다.
과연, 점차적으로 언데드 군단에 밀리는 구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직업의 특수성으로 인해 밀리는 것도 있지만, 언데드 군단의 말도 안 되는 재생력도 크게 작용했다.
‘칼에 찔려도 그냥 달려드니.’
‘빌어먹을 언데드!’
‘상성이… 최악이잖아.’
‘애초에 건드는 게 아닌데.’
대개 언데드 계열을 멈추는 방법을 꼽으라고 한다면, 신성한 무구를 통해 사기와의 연결을 끊어 버린 게 대표적이었다.
하나 이들 익살자들은 신성한 무구보단, 오히려 사기 넘치는 무구가 더욱 우선시되는 편이었고, 그 때문에 여러모로 상대하기가 곤란한 면이 있었다.
‘최선은 안 돼!’
‘차선밖에 없나.’
익살자들은 리치킹이란 목표물을 뒤로한 채, 일단 언데드의 머리를 박살 내는 걸 우선순위로 잡았다.
그 경우 대부분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게 보통이지만, 강렬한 사기를 받은 언데드의 경우에는 몸뚱이만 남아도 발악하는 경우가 많았다.
‘제발 한 방에 죽어라!’
그럴 땐 몸뚱이까지 확실히 분쇄해야 하는데, 하필이면 현재 달려들고 있는 놈들이 그런 부류에 속했다.
‘빌어먹을! 듀라한도 아니고.’
‘목 없이도 뭐 이리 팔팔해?’
두개골이 박살 난 언데드들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결국 공세를 멈추며 쓰러졌다.
‘그나마 최악은 아니네.’
‘차선에 차악이라니.’
하지만 그 잠깐의 지연 시간으로 인해 익살자들은 고역을 치러야만 했다.
마치,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는 듯, 더욱 거세게 몸부림을 치며 달려들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들을 더욱 미치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스릉….
어디선가 들려오는 섬뜩한 발검 소리와 함께, 칠흑빛의 시꺼먼 검광이 덮쳐드는데, 리치킹에게 본격적인 유명세를 안겨 준 존재, 데스 나이트의 검격이었다.
놀랍도록 매서운 터라, 남다른 경험치의 익살자들도 제대로 받아 내기가 어려웠다.
만전의 상태라 해도 감당하기 어렵건만, 언데드의 공세 속에서 허우적대는 와중에 이런 공격을 받아 낸다?
서걱!
‘족… 같네….’
허수아비처럼 너무도 쉽게 익살자의 목숨이 끊어지고 수확됐다. 저들이 언데드의 목을 베었듯, 데스 나이트는 저들 익살자의 목을 깔끔히 베어 냈다.
골 때리는 상황은 바로 거기부터였다.
―일어나라!
데스 나이트의 명령이 떨어지면, 그 순간 익살자의 시체는 목 없는 기사 듀라한이 되어 깨어나는데, 생전의 특수 직업 특징을 최대한 잘 살린, 암살계의 스페셜리스트로 부활하는 것이 아닌가.
이들은 옛 동료의 등 뒤를 노리며 절묘한 기습을 이어 나가는데, 그렇게 물고 물리는 수확의 시간이 이어진 결과, 익살자들은 자신들의 최대 이점인 특수 직업의 상위 은신술을 제대로 활용하기가 어려워졌다.
듀라한으로 깨어난 익살자들 역시 은신의 프로들이었고, 그런 만큼 포인트를 골라내며 역으로 그들을 습격하고 있었다.
한 개인의 힘으로 이면의 거인, 익살자를 압도하는 구도가 완성되고 있었다.
일인군단!
관전자들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단어였다.
* * *
라미는 초롱이와 함께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 와중에 제법 많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다.
‘아버님께서 이름 없는 신이시구나!’
머나먼 과거, 자신의 부친인 드라이크에게 은혜를 베푼 존재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역시, 우리는 운명이었어!”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몽롱한 표정을 짓는 라미의 모습에 초롱이와 루미가 잠시 경계의 빛을 내비쳤지만, 이번에는 캐러멜로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마냥 듣기만 한 건 아니었다.
“우와아아~! 너도 용족이구나.”
라미 본인의 이야기도 잔뜩 들려줬는데, 개중 가장 환영받은 내용은 역시나 동질감을 부르는 용혈이었다.
드래곤과 드래고니안이라는 차이점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원적 피의 끌림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아직 어려서 아는 게 많진 않구나.’
초롱이가 세상에 눈을 뜬 지 1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도 알았다. 아무래도 지난해, 안배가 작동하면서 깨어난 듯싶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머문 생명의 시간이 아득함을 알았다.
‘태초룡!’
그녀 부친의 은인 ‘이름 없는 신’이 처음으로 잉태한 생명체인 것이다. 최초 탄생의 시간은 그녀를 삶을 아득히 뛰어넘을 터였다.
‘어쩌면 아버님보다도….’
초롱이의 존재 목적도 아주 잘 알았다.
“이 세계의 파멸을 막기 위해.”
나직하게 내뱉은 그 대사에,
“이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초롱이가 응답했고,
“사랑과 진실, 어둠을 뿌리고 다니는!”
루미가 화음을 넣었다.
“유산군의 감초, 귀염둥이 악당!”
남매가 박자를 맞춰 외쳤다.
“난 롱이, 난 루미!”
이리저리 포즈까지 취하는 남매.
“우주를 누비는 우리 유산군에겐.”
“아름다운 미래! 밝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더니 라미를 바라보며 눈을 빛내 왔다.
‘어… 어쩌라고?’
당황한 그녀의 모습에 남매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닌가.
입만 벙긋거리는 라미의 모습에 초롱이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루미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우리 신입. 공부 좀 해야겠다옹.”
초롱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마자~ 용!”
“일단, 호로로부터 시작해 볼까.”
그렇게 라미의 눈앞에 신세계가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