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치트?
#17. 치트?
[아이디 : 바이시클]
이는 PP의 최고 등급으로 분류되는 정보 중 하나인, 익살자 길드 수장의 정체였다.
게임의 초기부터 시작해 온, 말 그대로 골수 고인물 유저로서, 초창기부터 뜻밖의 특수직을 비롯해서 특별한 아이템 등으로 무장하며, PP 이면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쌓아 올린 인물이었다.
항간에는 그에게 ‘암살왕’이라는 별명까지 붙여 줬을 정도니, 그 수준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물론, 퍼펙트 플레이 이면에서만 떠도는 이야기이긴 했지만, 그래도 암살 업계에선 언제나 한 손에 꼽히는 인물인 건 확실했다.
그렇게 대단한 위치에 있다지만, 그가 바이시클 한 캐릭터에만 전념한 건 아니었다.
흔히 말하는 고인물 유저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다양한 직업군에 손을 대 봤고, 부캐도 제법 그럴싸하게 키워 놓기도 했다.
익살자라는 그럴싸한 세력을 지니고 있는 만큼, 부캐의 퀄리티도 상당한 수준으로 뽑아 놓을 수 있었다.
개중에는 바이시클과 익살자를 위해서 키운 보조 캐릭도 있었는데, 이는 하나의 길드를 이끄는 이들이라면 거의 필수적으로 이행해야 하는 절차나 다름없었다.
전술 및 전략 그리고 지휘!
군권에 관한 공부를 하며 통솔력을 키우는 것이다.
전문 직업군만이 알 수 있는 정보들이 상당하다 보니, 부캐릭터로 군사 관련 직업은 필수였다.
방법은 따로 왕국의 말단 병사부터 시작해서, 최소한의 지휘권을 획득할 수 있는 위치까지 승급 절차를 거치는 거였다.
그러다 운이 트인 이들의 경우, 유저로서 작위를 얻고 영지도 하사받고는 하는데, 이는 극히 드문 경우라서 어지간한 랭커들도 크게 기대하는 부분은 아니었다.
대개 경비대장 정도만 돼도 충분한 경우가 많았다.
어찌 됐건 그런 이유로 바이시클은 제법 전장을 보는 눈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괴상하게 돌아가는 전장의 상황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어설피 대충 배치한 줄 알았더니… 개미지옥이었나.’
그 역시 이번 작업장을 멀찍이서 구경하고 있던 만큼,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는데, 다른 간부진이 만든 무대다 보니, 그저 뒷짐을 진 채 관전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면 크게 창피를 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결국 앞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길드장 버프 ― 익살자]
[폐쇄호흡]
암살자들의 은신 능력을 높여주고, 이동 시 기척을 한층 은밀하게 만들어 주며, 호흡 통제가 제대로 될 경우에는 공격력 상승까지 발생시키는 버프였다.
[연쇄살인]
죽음의 기척이 늘어날수록 손에 쥔 비수의 예리함이 늘어나는 버프로서, 언데드를 처치하는 숫자만큼 공격력이 올라갈 터였다.
이 외에도 몇몇 버프가 더 있지만, 이는 아껴 두기로 했다.
‘상대가 안 좋아.’
하필이면 언데드라는 점이 문제였다.
나머지 버프는 길드원만이 아니라 필드 자체에 풀어내는 종류로서, 일종의 어둠의 기운을 뿌려 두는 것인데, 역으로 언데드의 밑밥이 되어 버릴 확률이 높았다.
바이시클은 눈살을 찌푸리며, 소소하게나마 개별적인 버프를 몇몇 간부급 요원에게만 추가로 더 뿌려 줬다.
여기에 소모되는 건 일종의 특수 코인으로서, 길드 활동에 의해서만 쌓이는 값비싼 포인트였다.
‘아깝지만, 지금은 아낄 때가 아니니까.’
자칫 한 개인에게 압도당하는 볼썽사나운 꼴을 보일 수 있음에, 투자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투자해야 하는 것이다.
맘 같아선 직접 나서서 필드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애써 눌러 참았다.
혹시 모를 사태도 염두에 둬야 하는 까닭이었다.
지금 상황이 ‘일반’ 길드원들의 작업장에서 발생한 사건이라 한다면, 주변 시선에도 어느 정도 손해는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쪽이야 좀 팔리겠지만.’
당연하게도 이번 작업장을 담당하던 간부진은 아주 작살을 내 놓을 생각이었다.
‘하필 리치킹을 건드려서는.’
건드릴 거면 들키지나 말던가.
그도 아니면 완전히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하는데, 역으로 압도당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이래저래 꼬여 버린 상황으로 인해 한동안 이면에서 망신당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속이 쓰려 왔다.
* * *
마루는 단숨에 전장의 변화를 읽었다.
‘호….’
익살자들의 움직임이 한층 예리해진 건 기본이고, 그들의 기척마저 더욱 은밀해진 것이다.
마루는 한껏 감각의 날을 키워서 주변을 살폈다.
따로 언데드의 통제를 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전술적인 부분에서 그가 지시하는 건 하나도 없었다.
모든 건 칼죽이의 검명 아래에 이뤄지는 단결일 뿐이었는데, 그저 단순히 칼질만 잘하는 게 칼죽이의 전부라고 보면 큰 오산이었다.
용사의 검!
그 포지션은 그저 마족을 잘 썰고, 마왕을 물리치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때로는 성녀와 같은 위치에 서서 전장 전체를 돌아보며, 광활한 버프를 뿌려야 할 때도 있었고, 어쩔 땐 전장의 중심이 되어, 마치 마에스트로처럼 검 끝에 지휘권을 달고 휘두를 줄도 알아야 했다.
특히, 성기사라 불리는 이들의 경우에는 오직 용사의 검만을 바라보며 출전을 준비하는 경우가 일상이지 않던가.
용사와 함께 쌓아 올린 경험치는 고스란히 칼죽이의 검신에 녹아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 절대적 존재감이 여러 권력자들의 질투를 산 탓에, 결국 마계로 내몰렸던 것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렇게 특별한 지휘자가 바로 칼죽이었다.
마루도 나름대로 PP를 통해서 전술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왔지만, 진짜 전장에서 만 단위 이상의 병력을 통솔하던 칼죽이에 견줄 바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마루의 역할은?
초감각과 사자유희의 연계를 통해, 곳곳에 숨죽이고 있는 익살자들의 포인트를 잡아 주는 것으로, 칼죽이는 그렇게 제공된 정보에 따라 개미지옥의 완성도를 높여 가는 중이었다.
사실, 좀 더 고전할 거란 예상을 했었다.
하지만 이 무슨 반전일까?
‘너무 쉽잖아?’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터였다.
먼저, 익살자들의 직업적 특성이 너무 강했던 점이나, 칼죽이의 전술 및 지휘력이 상상 이상이었던 점 등등, 이런저런 요소가 잘 버무려지며 시너지 효과가 났고, 덕분에 뜻밖의 단물이 밀려드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게 꿀 빠는 거지.’
추가로 하나 더!
그는 슬쩍 스탯창을 확인했다.
[레벨 : 185]
[힘 : 295+5(+100)] [지능 : 300(+100)]
[체력 : 293+2(+100)] [정신력 : 295+5(+100)]
[민첩 : 290+5(+100)]
[스탯 : 0]
이번 상황을 통해 새삼 상기하게 됐다.
‘1,490스탯!’
3차 전직자가 1,200스탯이라는 걸 상기해 본다면, 그의 스탯은 확실히 규격 외라는 점이었다.
순수 레벨만 놓고 본다면, 3차 전직자보다 58레벨이나 더 높은 것이다.
만파식적의 버프 효과가 뻥튀기되기에 충분했다.
‘하… 쉽다. 쉬워. 이렇게 쉬울 줄이야.’
그렇다고 해서 마냥 편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죽엇!”
남다른 감각마저도 피하며 파고드는 익살자의 요원들이 있던 것인데, 짐작하건대 익살자의 간부급으로 여겨졌다.
실제로도 그들은 이 전장의 지휘권을 지니고 있던 이들로서, 상황이 꼬여 버린 터라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마루의 목을 베어야만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에 반전이 발생했다.
“우와아앗! 저거, 뭐야?”
“리치킹이 아니라 데스 나이트였나?”
“리치 나이트?”
“몸놀림 미쳤다!”
관전자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림처럼 파고드는 익살자들의 암습을 더욱 환상적인 몸놀림으로 빠져나가는 마루의 회피기, 이후에 이어지는 카운터까지, 말 그대로 예술이란 표현이 아깝지가 않을 정도였다.
“저거 피리인 줄 알았는데.”
“워… 복날의 개 잡듯 두드리네.”
“타구봉법이냐?”
“비 와도 먼지 뿜뿜일 듯.”
마법계라고 생각하고 있던 마루가 너무도 능숙하게 암습을 받아 내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반격을 넣고 난 뒤, 이어지는 화려한 몽둥이찜질이란, 타격계의 스페셜리스트가 따로 없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몸서리를 치게 만들 만큼 자극적이었다.
“아니. 피리가 어째 더 커진 것 같은데?”
“실제로 커졌네.”
“대체 정체가 뭐야?”
“하데스의 신물이라니까!”
이들의 외침처럼 만파식적에도 변화가 있었다.
“늘어나라 여의~ 식적!”
마루의 외침에 따라 마치 봉처럼 늘어난 만파식적은 그의 손짓을 타고 화려한 봉술을 선보였다.
타닥! 탁! 타다다닥….
이는 만파식적의 특별한 기능 중 하나로서, 굳이 스킬이라 할 것도 없이, 시전자의 덩치에 맞춰서 크기 조절이 가능한 기능을 이런 식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실로 희박한 확률일 뿐이지만, 말도 안 되는 거인이라도 만파식적을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신물의 단단함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부분이기에, 훌륭한 병기의 역할도 가능했다.
퍽! 뻑! 쩌억! 짜악!
다양한 효과음이 터져 나오며, 달려들었던 익살자의 간부들을 말 그대로 작살을 냈다.
‘끅… 이런, 말도 안 되는… 컥! 억! 윽!’
‘마법사가 이런… 괴력… What? 끄악!’
‘급소만 치는 건 뭔데?’
‘눈, 코, 입… 그… 그만, 아악!’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진다.’
‘눈… 아! 나, 죽어!’
생각지도 못한 반전은 여러모로 충격이 되어, 수많은 관전자들을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아니, 근접전에서 저럴 수 있나?”
“마법사가 아니라 마검사 수준인데?”
“마봉사!”
“봉술 쓰는 거 봐. 몽크라 해도 믿겠네.”
“미쳤다! 완전 치트다.”
“리치트킹?”
“리치트킹!”
그렇게 새로운 이명이 완성되며 모두가 환호성을 터트리는 와중에, 이 축제의 현장에서 슬금슬금 발을 빼는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저… 저 미친놈!’
익살자의 수장 바이시클은 기겁하며 마루를 바라봤다.
‘분명히 눈이 마주쳤어!’
어찌 찾아낸 건지 모르겠지만, 정확히 그가 있는 은신처에 눈길을 보내온 것이다.
등허리가 쭈뼛 서는 걸 느꼈다.
PP의 초창기부터 뛰어온 고인물의 감각은 그게 착각이 아니라 외쳐 댔고, 더 나아가서 발각 루트마저 유추하게 해 줬다.
‘…버프를 읽은 건가?’
그의 광범위 버프를 역으로 추적하며 은신처를 발견해 낸 것으로 보였다.
‘맙소사! 그게 가능하다고?’
몸서리가 쳐질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대단한 탐색 스킬을 가지고 있기에….’
초감감과 사자유희의 연계기였다.
사실, 바이시클은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을 경우, 직접 나서서 이 웃기지도 않는 무대의 막을 내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욕먹을 상황이라면, 적어도 체면치레는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
상대 수준이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저 괴물 같은 놈!’
간부진을 때려잡는 몸놀림을 통해서, 상대의 수준을 대번에 알아봤다. 거기에 언데드 군단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최상위 랭커급!
100위권 정도가 아니라, ‘최소’ 양손 양발을 합친 수준에는 들어갈 만큼, 절대적인 실력자라는 견적이 나온 것이다.
“…어쩌면 10위권도….”
말 그대로 천외천이라 불리는 이들의 영역까지 언급됐다.
전력을 다한다면?
‘잡을 수 있을까?’
확신하기 어려웠다.
자칫, 기습의 묘를 살리지 못한다면?
‘추잡하게 몰매 맞다 뒈지는 거지.’
최상위권의 랭커라도 한 방만 제대로 걸린다면 승부를 볼 자신이 있었지만, 바로 그 일격을 넣는 게 어려웠다.
‘어차피 욕먹을 거…… 튀자!’
체면치레를 못 하게 된 것이 아쉽지만, 나섰다가 그마저도 망쳐 버린다면 더욱 최악이 될 터, 바이시클은 빠르게 견적을 냈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패배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암살왕?
사람들은 그를 무시무시한 별명으로 부르지만, 그의 본질은 극도의 안전제일을 추구하는 소심파 유저였다.
그 때문에 길드 규모도 불필요한 터치를 받지 않을 수준으로만 키운 것이지 않던가.
소수 정예!
이는 생존을 위한 나름의 노하우였다.
‘뭐라고 변명을 늘어놓는담.’
슬금슬금 필드에서 빠져나가는 그의 머릿속으로 차후의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우리는 밤의 귀족, 암살자다!
―정면 대결은 멍청한 짓이다.
―타깃을 잡고 움직인다.
―우리답게! 익살스럽게!
가장 익살자다운 복수를 보여 주면 모두 해결될 일이었다.
무한 PK!
익살자에는 아주 특수한 스킬을 지닌 이들이 존재했다.
[스킬 : 피의 복수]
자신을 죽인 유저를 타깃으로 지정한 뒤, 복수할 때까지 쫓아다니는 스킬인데, 조금 전 당했던 간부진 중에 그 스킬을 지닌 이가 있었다.
익살자가 이면에서 악명을 떨치게 된 건, 바로 이 무한 PK 덕분이었는데, 오직 길드원만이 아는 특수 스킬이다 보니, 외부인들에겐 더욱 공포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이면의 한편에서는 익살자의 길드장이 PP의 고위 간부라서, 유저의 접속 정보를 빼돌린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당장은 시끄럽겠지만, 무한 PK만 시작되면….’
이래저래 안전장치가 세팅되어 있는 것이다.
‘문제는….’
바이시클의 시선이 관전자들을 쭈욱 훑었다.
저들 중 몇몇 특수 기법으로 촬영을 하는 이들이 분명히 있을 터였다.
‘…저놈들인가.’
간만에 귀찮게 됐다면서, 관련 정보 업체에 돈깨나 퍼부어야 할 거란 생각에, 벌써부터 속이 쓰려 왔다.
* * *
전투가 이어지던 중, 마루는 사자유희에게 뜻밖의 알람을 전해 받았다.
[스킬 ‘피의 복수’가 사자유희에게 굴복합니다.]
‘응? 뭔 복수?’
의아해서 그 내용을 확인했을 때, 마루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고 말았다.
츄릅….
‘얼씨구!’
입꼬리가 구레나룻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