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동아줄.
#20. 동아줄.
간만에 나누는 진득한 대화이기 때문일까?
“너는 드라이크의 뜻을 아느냐?”
라미는 분위기를 잡는다 싶더니, 대뜸 제 부친을 언급하며 질문을 던져 왔다.
이 뜬금없는 진행에 마루가 벙쪄 있노라니, 라미가 자문자답처럼 알아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발음상의 차이일 뿐, 이곳에서 칭하는 드레이크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지.”
“…어?”
그제야 마루의 눈가에 의문이 떠올랐다.
‘드래곤이… 드레이크?’
고고하며 자존심 높은 드래곤이 그런 이름으로 불린다?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이 잘못된 건가 싶어서 두 눈 가득 물음표를 띄우고 있노라니, 라미가 웃으며 그의 상식을 잡아 줬다.
“드래곤은 타고나기를 반신의 씨앗을 품은 존재라서, 그 자존심들이 보통이 아니다.”
아무래도 마루가 아는 바가 잘못된 건 아닌 듯싶었다. 그래서인지 이 뜬금없는 진행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이 물씬 피어오르며, 라미의 이야기에 한껏 귀를 기울이게 됐다.
“원래 남에게 밝힐 이야기는 아니지만, 너는 ‘그분’의 선택을 받은 ‘가디언’이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짐작건대 ‘이름 없는 신’과 그의 칭호인 ‘용아병’을 언급하는 듯싶었다.
“좀 전에도 말했지만, 드래곤은 선천적으로 반신의 가능성을 품고 태어나는 존재다. 하지만 그 때문에 너무 높은 ‘종의 한계’마저 지니고 있지.”
라미가 물었다.
“미물들의 장점이 뭔 줄 아느냐?”
마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낮은 눈높이만큼 넘어야 하는 벽의 높이도 낮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웃음과 함께 이야기했다.
“한 걸음씩, 마치 계단을 올라가듯이, 도약하며 벽을 넘는 법을 그 짧은 인생 동안 끝없이 경험하는 거지. 한계에 부딪치는 모험심과 도전 정신, 우습게도 그걸 재능으로 부여받는 게지.”
물론, 그 도전 정신을 끝없이 이어 나가며, 진정한 ‘종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자’들은 극히 드물기는 했다.
“하지만 드래곤은 타고나기를 높은 존재감을 부여받는 탓에, 벽 역시 아득히 높지.”
그 때문에 대부분의 드래곤은 종의 굴레 속에서 머물다가 반신으로서 삶을 마무리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살아간다. 그 뿌리 깊숙이 조화와 조율의 상징에 대한 각인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신의 사자로서, 세계의 안정을 위해 빚어진 태초의 생명체들이지 않던가.
세상이 알아서 굴러가기 시작하면, 하나둘 자취를 감추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순리에 따라 역사와 신화의 한 자락이 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신의 사자라는 것, 반신의 굴레라는 건, 그렇게 엄청난 거다.”
때로는 그 존재감을 드러내며, 세계의 주민들에게 신앙을 받은 뒤, 본연의 격을 키우는 이들도 있었다.
하나 안타깝게도 이는 세계의 규모가 중요했다.
“아버님의 세상은 이곳처럼 수십억 인구가 살아가는 세계가 아니거든.”
겨우 안정화에 접어들며 성장을 가능성을 노려보는 수준으로서, 이곳 세상의 기원전 일상 규모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마계처럼 인구 밀도가 낮더라도, 개개인의 존재감이 높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니까.”
민간의 신앙에 기댈 수도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라미의 부친, 드라이크 역시 최후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했다.
최후의 고룡으로서, 용족의 멸족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인해, 어느 이름 없는 산자락에서 고요히 침묵하며 잠을 청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용족이기에, 그가 할 수 있는 건 기나긴 고독 속에서 하늘만 바라보는 것뿐이었고, 그 때문에 더욱 긴 수면기를 준비했고, 그렇게 꿈속을 유영하다가 특별한 존재를 만날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이름 없는 신’이었다.
“그분이 물었지.”
[어찌하여 하늘만 보는 것인가?]
마룡 드라이크는 답했다.
[벽 너머에 하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름 없는 신이 웃었다.
[땅굴도 팔 줄 알아야지.]
실로 아찔한 이야기였다.
[위만 볼 게 아니라, 아래도 보게나.]
그렇게 화두를 남긴 뒤 떠나갔고, 드라이크는 충격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원래 아버님의 이름은 ‘베오닉 비오데가닉’이었어.”
라미는 부친의 이름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인데, 기이하게도 그 속에 드라이크가 빠져 있었다.
“아버님은 벽을 넘는 게 아니라, 지나치기 위해서 땅굴을 파기로 했지.”
종의 한계를 넘기 위해서, 저 높은 하늘을 향한 도약이 아닌 땅속 깊숙이 다이브를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방법은?
“스스로 격을 낮추는 거야.”
먼저 이름부터 바꿨다.
드라이크!
이름이라는 건 본질이며, 그와 동시에 존재의 의미인 탓에 전체를 바꾸는 건 불가하기에, 그 안에 하위의 격을 심은 것이다.
그렇게 미들네임으로 드라이크가 새겨졌다.
“아버님은 최후의 고룡으로서, 수차례 자신의 세상을 구원하셨지.”
순간 마루는 의아해졌다.
“…마룡이라며?”
묻고서도 아차 싶었다. 자식 앞에서 부친을 그리 칭하는 게 무례임을 상기한 것이다. 하지만 라미는 크게 신경 쓰는 얼굴이 아니었다.
태연히 이야기를 이어 나가며 대답할 뿐이었다.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역천을 저질렀기에 마룡의 칭호가 붙은 거야. 스스로 격을 낮춘 거니까.”
조율과 조화 그렇게 순리를 타고나는 게 드래곤이 아니던가. 이를 벗어났으니 역천인 것이다.
미들 네임만 지어 붙이는 걸로 끝이 아니었다.
“스스로 드레이크가 되신 뒤, 그대로 긴 삶을 보내셨지.”
언뜻 유희처럼 보였지만, 이는 도전이자 모험이었다.
그녀가 물었다.
“외장 하드가 꽉 차면 맨 처음 뭘 하지?”
갑자기 현대 기술로 넘어와서 당황했지만, 이내 대답했다.
“압축… 인가?”
“그렇지. 아버님도 마찬가지였어. 반신의 격을 하위 개체인 드레이크의 몸뚱이에 맞춰서 압축시켰지.”
그게 성공했을 때?
“다시금 한 단계 낮은 격으로 폴리모프를 한 뒤, 완전히 그 삶에 녹아들며 한 차례 더 격을 압축시켰고.”
그렇게 조금씩 꾸준히 쉼 없는 반복을 거듭한 결과, 어느새 산처럼 거대하던 드래곤의 영혼은 저 작은 고블린의 몸뚱이에 맞을 정도로 압축되기에 이른다.
“고블린의 몸뚱이로 만 년 정도 지냈을 때, 문득 깨달으셨지.”
[더는 의미가 없겠구나.]
다시금 몸을 불릴 시간이 온 것이다.
내려왔던 역순으로 올라가기 시작하는데, 압축을 푸는 게 아니라 압축된 존재감 위로, 새로운 존재감을 덧씌우는 형식으로 몸집을 부풀렸다.
비어 버린 공간에 새로운 파일들을 채워 넣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채우는 게 아니라, 이 역시 압축 파일이었다.
실로 기나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
“최근에 드디어 드레이크의 몸뚱이까지 격을 키우셨지.”
비록 덩치는 비루해졌을지라도, 존재감은 전혀 달랐다.
굳이 비유하자면?
‘실전 압축 근육 같은 느낌인가?’
마루는 그리 생각하며 계속 귀를 기울였다.
“여전히 인계에 머물러 계시지만, 그 존재감은 세계를 넘어 차원 곳곳에 닿을 정도라서, 어지간한 신격들도 아버님께는 깨갱하는 게 현실이지. 훗!”
그 부분에서 라미는 마치 제 일이라도 되는 양, 목에 힘을 빳빳이 주며 어깨를 으쓱이고 있었다.
이쯤 해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지?”
이에 라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
“그분의 가디언이란 놈이 바짝 겁먹어선 거북목을 하고 있으니까. 좀 풀어 줘야겠다 싶더라고.”
마루가 뜨끔한 얼굴로 라미를 바라보며 재차 물었다.
“…그게 네 부친과 무슨 상관인데.”
사건이 발생하면 마룡이 직접 강림해서 무대 매너라도 보여 주는 걸까?
그도 아니면 따로 지원이라도 보내는 걸까?
라미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말했다.
“하… 아직도 포인트를 못 잡았네.”
“뭐?”
의아해하는 마루를 향해 그녀가 물었다.
“내가 한 이야기의 요지가 뭐야?”
남다른 스탯 덕분에 뇌 기능이 한껏 발달한 이후, 오랜만에 바보 취급을 받는 느낌이었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마루가 급히 머리를 굴리며, 좀 전까지 들었던 드라이크 전기를 되새기며 분석했다.
“…어?”
혹시 하는 마음에 그가 물었다.
“반신의 격?”
“그리고?”
“역천?”
“빙고!”
라미가 재차 물었다.
“자, 마왕은 어떤 존재지?”
마루는 벙찐 얼굴로 답했다.
“신의… 아들?”
예상치 못한 이야기의 흐름이었다.
그 때문일까?
“무려 마왕이라고 불리는 놈이, 얌전히 고개만 박고 있을까?”
그녀의 이어진 물음에 마루는 입을 쩍 벌렸다.
정신줄이 살짝 가출하는 순간이었다.
‘신의 아들… 어둠의 자식….’
이 세계, 특히 한국에선 조금 다른 뜻으로 쓰이는 그것, 그 명칭이 자꾸만 뇌리를 떠돌았다.
‘나는 어둠의 장남….’
무려 몬스터 특수 부대 출신인 마루였다.
헛생각은 그렇게 한참을 더 의미 없이 이어졌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라미는 사라지고 없었다.
시계를 보니 만화를 할 시간이었다.
* * *
마계를 떠들썩하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마계 북부!
그곳의 지배자가 바뀐 것이다.
놀랍게도 그 주인공의 정체도 하나의 이슈가 됐다.
도플갱어!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던 일족의 수장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북부의 권좌에 엉덩이를 걸치는 것이 아닌가.
“멸족한 거 아니었어?”
“갑자기 복제기?”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나?”
“허… 무능의 마인이 싹 쓸어버린 줄 알았는데.”
“어디 있다가 튀어나온 거야?”
“사일론을 쫓아낸 게 저놈들 계략이라며?”
“복귀식 한번 화려하네.”
당연하게도 마계의 여러 인사들은 새 북부의 주인에 대한 정보를 바쁘게 수집하기 시작했다.
“흠… 무능의 마인이 재주는 부족해도 실력은 진짜였는데.”
“비겁한 방법이긴 하지만, 그래도 놈을 쫓아내다니. 제법이군.”
“반인반마 주제에 대공이랍시고 까부는 게 꼴도 보기 싫었는데. 잘됐군. 도플갱어 놈들도 맘에 안 드는 건 마찬가지긴 하나, 반쪽짜리 반푼이 놈보다는 낫겠지.”
“북쪽 왕의 이름이 뭐라고?”
“하르칸!”
전 마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주인공, 하르칸은 일족의 원수가 누리던 모든 것들을 발아래 두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결국… 우리가 이겼다!’
너무도 긴 시간 인내하며 기다린 결과였다.
“크큭, 큭… 크하하하하하!”
가슴 터질 것 같은 시원한 광소가 터져 나오며, 과거 사일론의 것이었던 대전을 크게 흔들었다.
쿠르르르르릉….
곳곳에 금이 가는 게 보였다. 이에 화들짝 놀란 하르칸이 기세를 급히 다스렸다.
‘안 되지. 안 돼!’
일족의 승리를 상징하는 전리품이었다.
어느 정도 개조가 있을 수는 있지만, 박살 내는 건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두고두고 즐기며 만끽해야 할 대전이었다.
물론, 사일론이 아직 살아 있긴 하지만, 어차피 본신의 능력 대부분을 잃어버렸으며, 저 멀리 인간계로 쫓겨난 상황이었다.
더 이상 위협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게임 끝이지. 큭큭큭큭….’
권좌에 앉아 가만히 승리의 맛을 만끽하던 것도 잠시,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었음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마왕님의 핏줄이었단 말이지.’
이는 사일론에 관한 내용으로서, 생각지도 못한 정보로 인해 죽음을 각오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게 웬일?
[네 영혼을 내게 바쳐라.]
그에게 살 길이 내려왔다.
하르칸은 넙죽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며 외쳤다.
[이미 제 영혼은 존엄하신 마신님의 것입니다!]
어려울 것 없는 이야기였다.
바로 그 부분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아니, ‘내게’ 바쳐라.]
그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기까진, 아주 잠시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허억!]
뒤늦게 의미를 깨달았을 때, 마왕이 재차 물었다.
[바치겠느냐?]
칠흑빛의 마기가 사납게 일렁이는 걸 보고 있노라면, 답은 정해져 있음을 깨달았다.
거부했다간 죽음이었다.
[제… 제 영혼을 ‘대’마왕님께 바치겠나이다.]
마왕의 칠흑빛 마기가 그를 뒤덮었다. 공격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공격일지도 몰랐다.
그의 영혼을 갈취하고 구금하며 억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 구역의 대공들 역시 대마왕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는 분명하나, 영혼을 바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대마왕의 노예가 된 것이다.
개가 된 것이다.
좀 전까지 기쁨에 폭소하던 게 거짓말처럼, 그는 딱딱히 굳은 얼굴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마왕이 바라는 바를 짐작한 까닭이었다.
‘역천….’
하늘을 뒤집고 새 하늘이 되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두려워 떨었다.
그리고 흥분감에 떨렸다.
과연, 그가 잡은 건 썩은 동아줄일까?
아니면 금 동아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