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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역천.

#21. 역천.

대마왕은 자신의 성 꼭대기에 서서, 저 드높을 하늘 위 칠흑빛 먹장구름을 올려다봤다.

“어둡군.”

그러다가 나직하니 한 소리 했다.

“너무 칙칙해.”

긴 세월 수많은 세상을 침공하고 점령하며, 또 침략 중이었다.

실로 아득한 시간이었다.

그래서일까?

“이 풍경도 이젠 지겹군.”

언제 어느 때였던가.

문득, 깨달았다.

열심히 공략하고 일궈 내며 수확해도, 그 모든 게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아 버렸다.

그 때문일까?

‘잠자는 시간이 늘었지.’

신의 아들이나 사자라 불리는 이들, 반신의 조각을 품은 존재들은 타고난 관측자였다.

덕분에 꿈을 통해서 여러 차원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만났고.’

슬쩍 웃음이 나왔다.

[방황하는 애들이 왜 이리 많누?]

지금도 그 음성이 선명했다.

[너 역시 하늘만 보는구나.]

도통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던 존재였다.

멋대로 그의 꿈속에 발을 들인 불청객이었지만 쫓아낼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귀찮기도 했고….’

묘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던 점도 컸다.

분명, 그보다 격이 높은 존재일 것이건만, 기이할 만큼 위협적인 느낌이 없었다. 도리어 만만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오히려 그런 게 더 위험한 건데. 큭….’

잠시 실소가 나왔다.

어쨌든 그 기이한 만남 속에서 여러 대화가 오갔고, 그날 이후 마왕은 더 이상 꿈에 빠져들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이즈음부터였으리라.

‘역천을 꿈꾸게 됐지.’

꿈을 현실로 불러왔기에, 더는 잠들 필요가 없던 것이다.

문득, 대마왕이 웃었다.

“큭큭큭큭… 그러고 보니, 여전히 이름도 모르는군.”

참으로 기이한 만남이었고 그만큼 특별했건만, 불청객은 존재의 격만 드러냈을 뿐, 이름은 알려 주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이름은 밝히지 않고 떠났다.

“…이름 없는 신인가. 큭!”

한 차례 더 실소를 흘린 그가 최근에 발생했던 사건 하나를 떠올렸다.

‘사일론….’

그의 핏줄이었다.

동시에 신기한 존재였다.

‘설마, 인간의 피를 이어받은 녀석이 살아남을 줄이야.’

핏줄이라고는 하나 그의 아이는 사일론 한 명이 아니었다. 그는 다양한 모습과 형태로 변신하며, 마계 곳곳에 유희를 다녔었고, 그만큼 많이 놀아나기도 했다.

덕분에 마계 곳곳에 그의 핏줄이 있었다.

하나, 그 어떤 녀석도 사일론처럼 성공한 존재는 없었다. 기껏해야 한 개 구역에서 이름깨나 날리는 정도?

대륙 규모의 명성을 떨친 건, 황당하게도 반푼이라 불리던 사일론 한 명뿐이었다.

가장 실망스러운 자식이었다.

마왕의 핏줄이란 건, 마신의 혈통이란 의미이기도 하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천적으로 ‘무능’한 아이였다.

짧은 생을 끝으로 대지의 양분이 될 거라 여겼다.

하지만 이게 웬일?

‘전사….’

아이의 모친이 떠올랐다.

무려 용사의 누이라고 알려진 여인이었다. 용사가 제 온몸을 불사르며 퇴로를 열어 준 까닭일까?

그녀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나 인간계로 돌아갈 통로는 막혀 있었던 터라, 마계를 방황해야만 했다.

우스운 건, 그 통로를 막은 건 마족이 아닌, 저 차원 너머 인간의 권력자들이란 점이었다.

‘큭… 탐욕스러운 돼지 놈들.’

인간의 몸으로 견뎌 내는 마계의 삶이란 실로 가혹한 것이었는데, 마왕은 바로 그 지치고 약해진 여인의 빈틈을 파고들며, 그녀 옆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그건 여느 때와 같은 ‘유희’였다.

[용사의 누이를 품는다!]

실로 군침이 도는 먹잇감이었다.

그렇게 잠시 그녀와의 시간을 즐겼고, 그 결과 새 생명이 싹터 버렸다.

사일론!

일단 그도 부모이기에,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는 틈틈이 곁을 지켜 줬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능력이 없는 아이!

지킬 가치를 못 느꼈기에 떠난 것이다.

하지만 이게 웬일?

사일론은 살아남았다.

그 강건한 전사가 아이를 품에 안고서 지켜 내고 키워 낸 것이다.

물론, 그 시간은 길지 못했다.

‘마계의 마기는 순수 혈통의 인간이 견뎌 낼 만한 게 아니지.’

이는 용사의 동료이자 누이로서 명성을 떨쳤던 전사라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마왕의 가호도 사라졌으니, 더더욱 힘겨웠으리라.

하지만,

생존법을 전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아이는 살아남았고, 전설이 됐다.

반인반마의 신화!

무능의 마인!

등등, 아이는 여러 기적을 보여 주며, 당당히 격을 높이더니 대륙의 한 자리를 차지해 버린 것이다.

만약의 가정일 뿐이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내게 도전할 수 있었다면….’

간혹 그를 향해 남몰래 날을 세우던 눈빛이 떠올랐다.

기회만 주어졌다면?

‘…분명 도전했겠지!’

“큭큭큭큭….”

우습고 또 우스웠다.

“핏줄은 핏줄인가.”

역천을 꿈꾸는 패륜의 왕은 그 자식마저 패륜을 꿈꾸고 있던 것이다.

“푸하하하하하!”

오랜만에 폭소를 터트린 그가 칠흑빛 하늘을 올려다봤다.

“누가 먼저 이루는지, 한번 겨뤄 보자!”

저 시꺼먼 먹구름을 걷어 내길 꿈꾸며, 그는 오늘도 역천의 길을 걸었다.

* * *

PP의 각종 커뮤니티는 익살자와 관련된 이야기로 연일 화제가 끊이지 않았다.

게임의 초창기부터 활약해 왔던 이면의 암살 집단이다 보니, 그간 묵혀 놨던 이야깃거리가 넘쳐 났던 것이다.

숨죽이던 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보따리를 풀어놓으니, 쉴 틈 없이 알찬 구성으로 라인업이 갖춰지며, 구경꾼들을 게시판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그로 인해 죽어나는 건 다른 이면의 범법 집단이었다.

“하… 미치겠네. 익살자 놈들 때문에 이게 무슨 지랄이야.”

“우리 이름 나올까 봐 모니터링이라니.”

“업체들만 노났네.”

“제발 좀 조용히 지나가자.”

익살자들 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면의 길드들은 대부분 비슷하게 신비주의 콘셉트를 잡는데, 이번 사건을 기점으로 익살자와 함께 이면의 범법 집단들도 함께 부각되기 시작하니, 이를 커트하기 위해서 눈꺼풀이 삭을 정도로 모니터에 집중해야만 했다.

“빌어먹을 익살자!”

“죽을 거면 혼자서 죽을 것이지.”

“왜 하필 리치트킹을 건드린 거야?”

“건드렸으면 밟아야지. 밟힐 건 뭔데?”

“으아아아! 두고 보자 바이시클.”

자연 익살자에 대한 원망의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된 바이시클은 조용히 숨죽이며 눈치만 보고 있는 중이었다.

‘씨발! 족 같은 리치뻐킹! 리―치킨!’

그 역시 원치 않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많은 이들이 아는 바와 같이, 익살자는 패했고 그는 무릎을 꿇었다. 게다가 머리를 박고 굴욕적인 그랜절 사진까지 커뮤니티에 올리지 않았던가.

리치트킹 말했다.

[살고 싶으면 대가리 박아.]

그렇게 찍히고 박제됐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막장까지 치달은 지금까지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된 거야?’

첫 패배 이후부터 뭔가가 뒤틀렸다.

[오늘부터 1일이야.]

로그아웃이 발생하기 전, 들었던 그 뜬금없는 대사의 의미를 깨닫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음 접속과 함께 찾아온 불청객이 있던 것이다.

죽음의 기사!

첫 패배의 순간, 그의 목을 베었던 리치트킹의 사자였다.

그렇게 두 번의 죽음과 함께 경계심이 싹텄다.

‘설마?’

아니나 다를까.

세 번째 접속에도 죽음의 기사가 찾아왔고, 그는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황당하다고 해야 할까?

매번 나름대로 발악을 하건만, 상대는 너무도 손쉽게 그의 멱을 따 버렸다. 무려 익살자의 길드장이자 암살왕의 이명까지 있는 그가, 너무도 쉽게 데스를 당한 것이다.

그 순간 깨달았다.

천외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다.

‘리치트킹만 최고위 랭커급이 아니라, 놈이 부리는 언데드까지 별세계라고?’

더더욱 어이가 없는 건,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익살자의 간부들 역시 비슷하게 사망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접속 정보라도 알고 있는 것인지, 기다렸다는 듯 찾아와서 목을 베고 가는 것이다.

죽음을 수확하는 사자의 등장 앞에, 익살자의 간부진들은 대륙 곳곳에 흩어져 있는 모든 요원들을 불러들인 뒤, 한데 똘똘 뭉쳐서 항전을 준비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죽음의 기사가 대량의 언데드와 함께 등장하는 것이 아닌가.

그즈음 확신할 수 있었다.

‘정보가 새고 있다!’

어떤 루트를 통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익살자의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불신이 싹트는 와중에도 전투는 시작됐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길 수 없어….’

죽음의 기사와 함께 등장한 언데드의 숫자는 사실 그렇게까지 많은 편은 아니었다.

최초 리치트킹을 화제로 몰아넣었던, 그 대규모의 군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소규모의 부대였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가 말도 안 되는 최정예였다.

언뜻 허술해 보이는 장비였건만, 그 위로 익살자 간부진의 비수가 미끄러지는 걸 봤을 때, 기겁하며 전율해야 했다.

‘영웅급 장비!’

그 정도는 돼야 저런 미스 터치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맙소사! 죄다 영웅급 장비로 세팅을 했다고?’

뿐만 아니라 일부러 이를 숨기고자 장비의 외형을 허술하게 만들어 놨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 이 미친 새끼!’

그렇게 익살자는 패배했다.

하나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 여기며, 연결되어 있는 다른 집단을 모아서 다시금 대항하는데, 그 순간 익살자의 모든 길드원들은 두고두고 전율할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스륵… 서걱!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돌연, 바이시클의 등 뒤에서 죽음의 기사가 그림처럼 솟아나 검을 휘둘렀고, 그렇게 우두머리의 머리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먼지로 화해 사라지는 바이시클의 신형 너머로, 죽음의 기사 역시 제 할 일은 마쳤다는 듯,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암살왕!

진짜가 나타났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들 상대야말로 진정한 죽음의 지배자라는 걸 인지하는 순간이었고, 동시에 전의가 크게 상실되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고 또 버텨 보려 했다.

‘젠장!’

바이시클이 입술을 짓씹으며 전방을 바라봤다.

오늘도 역시라고 해야 할까?

“하… 제발…….”

울상이 된 그의 전방에 죽음의 기사가 서 있었다. 접속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나타난단 말인가.

익살자들을 살찌운 전유물이 그를 향했다.

무한 PK!

그 빌어먹을 행위가 그의 목을 옥죄고 있었다.

“살려….”

서걱!

“…주….”

그렇게 오늘도 죽음을 수확하며 사라지는 사자의 모습에, 숨죽여 지켜보던 익살자의 요원들이 조용히 몸을 떨었다.

얼굴 없는 공포가 그들을 휘감았다.

* * *

―다녀왔습니다.

칼죽이의 쾌활한 외침에 마루가 칼집을 두드려 줬다.

“고생했다.”

아주 비싼 기름으로 광을 내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익살자의 수장 바이시클에 대해 떠올렸다.

[패배를 인정합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머리까지 조아리고 심지어 그랜절까지 하니, 마루는 히쭉 웃으며 이야기했다.

[좋아. 익살자는 용서해 주지.]

그 말이 뜻하는 건?

바이시클만을 향한 무한 PK였다.

‘환장할 노릇이겠지.’

PP는 하위 유저일 때는 사망으로 인한 페널티가 그리 대단치 않았다.

물론, 소유 중인 아이템이 랜덤으로 떨어지긴 하나, 이는 2차 전직 이후의 페널티와 비교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2차 전직 이후부터 사망을 하게 된다면?

1. 착용 중인 아이템 드롭

2. 접속 대기 시간의 증가.

3. 경험치 획득량의 감소.

골치 아픈 요소가 무려 2개나 추가되는데, 사실 이 역시 무게감이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라고 한다면?

‘페널티가 중첩이 되는 게 문제지.’

그리고 그 같은 문제가 한 달가량 지속되면, 골치 아픈 4번째 페널티가 등장한다.

4. 레벨 다운!

바이시클이 일찌감치 머리를 박은 이유였다.

무한 PK가 이어질 경우, 결국 레벨이 떨어질 것이고, 종내에는 3차 전직 혜택도 고스란히 짓밟혀 버릴 터였다.

선두 그룹에서 탈락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 때문에 일찌감치 견적을 뽑고 그랜절까지 한 것이건만, 마루는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마침 딱 좋은 먹잇감이지 않던가.

‘경고용으로 딱이지.’

익살자라는 거함을 무너트렸고, 이는 다른 거인들에게 긴장감을 주기에 충분한 효과가 있었다.

짐작건대 더는 그를 귀찮게 하는 이들이 없을 터였다.

현실의 아이언슈트!

PP의 리치트킹!

그 양쪽에서 그는 나름대로 확실하고도 확고한 포지션을 잡아 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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