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런던!
#15. 런던!
너무도 당혹스러운 이야기였다.
PP의 알파 버전, 이 세계에 대한 진실을 들었기 때문에, 그게 또 하나의 세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님을 알았다.
한데, 그걸 물려준다?
실버 박사의 전 재산을 물려받던 것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충격이었다.
어지간한 일로는 놀랄 일이 없을 거라고 여겼건만, 이런 식으로 예상을 아득히 벗어나게 될 줄이야.
멍청하니 정신줄을 놔 버린 마루의 모습에 실버 박사가 웃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내 권한을 전부 준다는 건 아니야. 일종의 서브 마스터라고 해야 하나?”
그나마 마루를 진정시킬 만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물론, 대단한 권한이 있는 건 아닐세.”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곳 세상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거지.”
찬찬히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조금씩 진정이 되는 걸 느꼈다.
실버 박사가 말하는 건 간단했다.
‘언제든지 사냥을 할 수 있다고?’
그게 PP와 다를 게 무어냐 하겠지만, 충분히 다른 의미가 있었다.
이래저래 눈치를 봐야 하는 PP와 달리, 이곳 알파 버전의 세계는 그런 시선에서 자유롭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세계의 수십억 유저와 필드를 나눠서 먹는 것과 달리, 알파 세계는 오직 그만을 위한 사냥감이 널려 있었다.
‘여기라면….’
용아병을 비롯하여 여러 스킬의 훈련장으로 쓰기에 딱 좋은 조건이었다.
3차 전직 보상!
마루는 언제고 실버 박사가 이야기했던 걸 떠올렸다
[자네가 만약 각성자라면, 게임 내에서 그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네. 스펙도 현실에 맞춰서 조정할 수 있게 되지. 게이머 입장에서야 다운그레이드겠지만, 헌터 입장에선 이야기가 또 달라지지.]
그 말인즉,
[현상과 환상의 경계가 일부 허물어지거든.]
그리고 이는 틀리지 않았다.
‘더 이상 게임과 현실을 나눌 필요가 없지.’
이전까지 마루는 스킬의 숙련도 작업을 PP에서 한 번, 현실에서 또 한 번, 그렇게 두 번에 걸쳐 작업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번 전직 혜택을 통해, 그는 이 같은 경계가 무너졌다.
앞서 실버 박사가 언급했듯, 원래는 일정 수준 이상의 각성자가 게임에서 현실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지만, 마루는 이미 지니고 있는 혜택이 아니던가.
거기서 더 나아가 경계선을 완벽히 허물어 버린 것이다.
‘번거롭게 이중 작업을 할 필요가 없어졌지.’
하나 최근 들어서는 얻어 내는 스킬마다 평범한 게 없다 보니, PP 내에서 맘껏 숙련 작업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조금만 힘을 써도 우르르 몰려오는 유저들로 인해, 한자리에서 진득하니 스킬 숙련도 작업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하나 이곳 알파 버전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PP와는 다른 버전이지만 같은 서버를 공유하니, 이곳의 성장도 자네의 레벨 작업에 도움이 될 걸세.”
확신을 더해 주는 실버 박사의 이야기에 절로 미소가 진해졌다.
“게다가 여기엔 아직 오픈되지 않은 몬스터들도 상당하니, 미리 예습하는 재미가 있을 거야.”
PP의 몬스터들은 현실에 등장한 놈들을 기준으로 업데이트가 되지만, 알파 버전의 세상에선 그런 게 없었다.
실버 박사가 관측하며 알아낸 몬스터들을 바로바로 끌어 올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곳에서 나름의 생태계를 구성하며, 차후 PP로 전이시키는 준비를 갖추는 것인데, 마루는 박사의 특전으로 아직 등장하지 않은 몬스터에 대한 정보로 미리 구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이곳에도 마계는 있으니까. 맘껏 즐겨도 된다네.”
언제나 PP보다 한발 빠른 세계이니만큼, 신규 콘텐츠 역시 풍부했다.
두근두근….
마루는 절로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그 모습에 작게 실소를 흘린 실버 박사가 물었다.
“어떻게, 마음에 드나?”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마루의 얼굴 가득 환한 미소가 번져 갔다.
* * *
런던의 날씨는 변덕이 심해 햇빛을 보기 쉽지 않다는 말이 있는데, 그런 이야기와 달리 공항에서 내려 밖으로 향했을 때, 놀라울 만큼 맑은 하늘과 태양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 하늘도 트랩퍼를 환영하는 모양이네요.”
클레어의 이야기에 마루가 슬쩍 미소를 띠었다. 비행기에서 단잠을 자며 실버 박사와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기에, 마냥 즐거운 감도 있었다.
그 밝은 표정에 클레어 역시 표정이 한층 밝아지는데, 안타깝게도 이 훈훈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분명 하늘은 맑건만, 알 수 없는 안개가 지면을 강타하고 있던 까닭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기현상에 전부 이유가 있을 터, 마루의 얼굴이 슬쩍 굳어지고 클레어의 눈가에 옅은 경련이 일었다.
정상적이지 못한 안개였다.
그게 뜻하는 바는 하나밖에 없었다.
‘스킬!’
두 랭커의 남다른 감각은 안개 사이로 스며드는 불쾌한 흐름을 읽어 냈다. 다행이라 한다면 클레어가 마루의 이런 기색을 읽어 내진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녀와 꼭 같은 타이밍에 안개가 스미는 걸 찾고, 그 흐름을 읽어 냈다는 걸 들켰더라면,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에 충분했을 터였다.
잠시 안개를 살피는가 싶던 클레어가 마루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불청객들이 온 모양입니다.”
그녀는 단번에 이 불쾌한 상황의 주체를 짐작해 냈다.
현재 영국의 상황으로 봤을 때, 원치 않는 문제아들이 일으킨 말썽일 확률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레메게톤!
클레어는 잔뜩 굳어진 얼굴로 핸드폰을 들고, 비상 알람을 눌렀다.
‘설마, 이렇게 과감한 수를 쓸 줄이야.’
공항 근처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을 호위대를 향해 은밀한 신호를 보낸 것인데, 이에 맞춰서 잠시 후 다가드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멋들어진 정장을 입은 영국 신사들이었는데, 왠지 모르게 영화 속 요원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각 잡힌 모습들이 인상적이었다.
한데, 이들을 보는 클레어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당했구나!’
호위대 숫자가 반절 가량이나 줄어 있는 것이다. 그들 역시도 동료의 수가 부족할 걸 느낀 듯, 언뜻 당혹감을 드러내는 게 보였다.
암살 계열의 전문가, 그중에서도 레메게톤을 상징할 만한 상위 스킬 범죄자들이 움직였을 확률이 높았다.
선글라스 덕분에 티가 안 났지만, 오랜 시간 봐 왔던 클레어는 단번에 요원들의 동요를 알아챘다.
짧은 수신호로 그들을 진정시키고, 호위대의 경계 배치를 지시했다.
이 벌건 대낮에 무슨 수작을 부리겠나 싶지만, 작정하고 움직이는 놈들이었다.
게다가 은은히 밀려드는 안개 사이로 저들의 의지 역시 전해지고 있었다.
살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호위대원 중 일부는 시민의 안전을 위해 잠시 떨어져서 움직여야 할 터, 상황은 이래저래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안색을 잔뜩 굳히고 있을 때였다.
차각… 착… 차라라락….
옆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고, 이에 돌아보니 마루가 장비를 착용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쌍권총을 비롯하여, 어느새 완전 무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게 다 어디서?’
등짐에 저 많은 장비가 있었나 싶을 만큼, 마루의 무장은 완벽 그 자체였다. 당장 던전을 뛰어도 될 정도였다.
놀라는 클레어를 향해 마루가 말했다.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으니까. 괜한 압박감에 악수를 둘 필요 없습니다. 하시던 대로 하시면 됩니다.”
기이하게도 묘한 안정감을 주는 이야기였다. 무슨 스킬이라도 쓴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는데, 별다른 기운의 파장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사실 스킬의 영향이었다.
[오페라][싱어―쏘울][공기소리반반]
음유 시인의 계열의 하위 스킬 연계로서, 따로 기운을 통해 무언가를 하는 게 아닌, 말 그대로 발성법을 비롯하여 언어 전달력에 힘을 실어 주도록, 기본적인 목청을 가다듬는 것이기에, 랭커급의 감각으로도 뭔가를 느낄 수는 없었다.
대단한 효과도 아니었다.
좀 더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정도였지만, 클레어와 같은 베테랑에게는 그 작은 효과만으로도 충분한 진정제 역할을 했다.
그녀는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반드시 지켜 드리겠습니다.”
호위대원 몇몇을 따로 마루 개인에게 붙인 뒤, 그녀는 또 다른 알람을 눌렀고, 이는 즉각적인 현상으로 이어졌다.
애애애애애앵….
돌발 게이트 경보가 울린 것이다.
공항을 오가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게 보였다.
“헉! 여기서 돌발 게이트라고?”
“던전지대 아니었나?”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빌어먹을! 일단 공항으로 들어가.”
“대피소, 대피소로 갑시다.”
공항 내부에 따로 대피소가 마련되어 있는 것도 있지만, 저 안쪽에는 개별적인 병력도 준비된 터라, 지금 상황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이기도 했다.
클레어의 선택에 몇몇 호위대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돌아봤다.
누군가 외쳤듯이, 이곳은 던전지대며 안전지대였다. 게이트가 출몰하지 않는 장소라는 것이다.
대피소도 그저 형식적일 뿐이지 않던가.
이런 장소에서 게이트 알람을 울렸다는 건, 차후에 골치 아픈 상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단 의미였다.
하지만 이면의 문제아들이 어떤 짓을 할지 모르는 만큼, 무리한 선택을 해서라도 무대를 비우는 게 나았다.
‘엘피나를 믿자!’
트리니티 여왕의 옛 이름을 떠올리는 것도 잠시, 그녀는 호위대에게 지시를 내리며 바삐 이동을 시작했다.
과연, 작업을 제대로 해 놨다는 것일까?
‘망가졌군.’
따로 그들의 이동을 위해 준비된 차량이 하나같이 망가진 게 보였다. 외형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지만, 타이어가 전부 죽어 있었다.
잠시 버킹엄까지의 거리를 쟀다.
그들과 같은 각성자에게 있어서는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물론, 짧다고 볼 수도 없었고, 그런 만큼 한바탕 어우러지기엔 충분한 공간이기도 했다.
안개 사이로 전장의 공기가 올라왔다.
* * *
키홀의 수장이며 이젠 레메게톤의 대표자라 불리는 사내, 바이퍼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들려오는 알람에 귀를 기울였다.
애애애애애앵….
“트리니티 여왕이 고생깨나 하겠군.”
만약 클레어가 알람을 울리지 않았더라면, 그가 따로 조작해서 울릴 생각이었다.
시민들을 위해?
그럴 일은 없었다. 이면의 주민에게 그런 자비 따윈 없었다. 단지 상황을 꼬아 놓기 위함이었다.
무려 던전지대에서 울린 게이트 알람이었다.
트리니티 여왕이 어떤 식으로 변명을 늘어놓건 부정적인 이미지가 한 겹 쌓일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리고 이는 레메게톤이 진출하는 데도 한 겹의 장막이 되어 주리라.
실소를 흘리던 것도 잠시, 그는 다가올 전장을 준비했다.
‘클레어!’
한때는 골 아플 정도로 마찰을 일으키며 부딪쳤던 여인이었다.
제퍼드가 이반나와 얽히는 일이 많았다면, 그는 클레어와 설키는 일이 많았다.
유럽 전역에 걸쳐서 날뛰던 동생과 달리, 영국에 자주 방문하며 말썽을 일으켰던 탓에, 자연히 클레어와의 마찰이 잦았던 것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본다면 그의 패배라고 봐야 할 터였다.
키홀의 근거지가 영국이 아니라는 점, 여러 갈래로 나뉘어 유럽 전역에 퍼졌다는 점, 최종적으로 클레어와 달리 그는 벽을 넘지 못한 채 뒤처져 버렸다는 점까지, 이래저래 입맛이 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그는 키홀보다 한층 크고 단단해진 레메게톤이란 거탑을 짊어지고 있었고, 더 나아가서 클레어와 마찬가지로 랭커라는 실질적 괴력마저 지닌 상황이었다.
이미 한차례 그녀와 격돌하며 스스로에 대한 확신도 얻었다.
무승부!
무려 그 클레어와 동수를 이룬 것이다.
여기서 더욱 놀라운 건, 그는 여전히 발전 중이라는 점이었다.
‘놀라운 힘이야!’
그뿐만이 아니라 회복력도 남달랐다.
지난 격돌 이후 클레어가 어디까지 회복을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그 후유증이 남아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는 이미 완치가 된 상황이었다.
“큭큭큭큭….”
절로 웃음이 나왔다.
과거에 그를 좌절하게 만들던 여인을 역으로 절망하게 만들 수 있다니, 그 표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질 지경이었다.
뿐만 아니라 현 여왕, 트리니티에게 커다란 빅엿을 먹여 줄 수 있단 생각까지 하니, 더더욱 즐거워졌다.
‘트랩퍼!’
그 귀한 손님을 중간에 가로챈다면 어떨까?
‘레메게톤의 초석을 다지는 데 잘 사용해 주마!’
왕실의 성벽을 보강하러 온 인사였건만, 그들 레메게톤의 방벽을 단단히 하게 된다면?
‘노예처럼 부려 먹어 주마.’
이 얼마나 재미있는 사건이 되겠는가.
“푸하하하하하!”
시원한 웃음을 터트리며 그가 신호를 보냈고, 그에 맞춰서 곳곳에 대기 중이던 레메게톤의 문제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부턴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