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식민지.
#23. 식민지.
사건이 발생하고 그리 많은 시간이 흐른 건 아니지만, 각 방송사는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해 가며 바쁘게 움직였고, 그 결과 빠르게 세계 전역으로 상황 전파가 이뤄질 수 있었다.
―워… 게이트가 몇 개나 터진 거야?
―몬스터들 규모 봐라. 거의 웨이브 수준 아니냐?
―방송 싹 돌려 봤는데, 대격변이라고 해도 될 듯.
게이트 알람은 영국 전역에서 터져 나왔지만, 실제 사건이 발생한 건 런던을 중심으로 그 비율이 가장 높았다.
다른 지역의 경우에는 대부분이 오류로 보고됐다.
하지만 실제 몬스터가 출몰한 지역도 없진 않아서, 길드를 비롯한 영국 내 헌터 전력이 사방으로 분산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방송사 입장에서는 시청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전체가 아닌 가장 화제가 되는 구역을 집중 조명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고, 그렇게 선택된 전장은 현 영국 체제의 심장부라 불리는 장소였다.
―버킹엄 나온다.
―오오오오! 트리니티 여왕님.
―얼마 만에 보는 집행검이냐.
―와… 진짜 아깝다. 여왕 업무만 아니었어도 일찌감치 S급 찍고 랭커로 승급했을 텐데.
―이반나하고 클레어 그리고 트리니티 여왕님까지. 1세대 미녀 3총사가 재능은 최고였지.
―요즘은 얼음여제가 그 라인 물려받음.
―이선희도 역대급 재능인 건 확실함.
―20대에 A급 찍고, 30대에 랭커니까.
―그나저나 트리니티 여왕님께서도 마냥 놀고만 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저 솜씨면 랭커라고 해도 되는 거 아니냐?
화면에는 여왕이 몬스터들을 쓸어버리는 장면이 비치고 있었는데, 호쾌하다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하급 몬스터니까 그렇지.
―저 정도는 나도 하겠다.
―그놈의 타작질! 윈도 솔져는 좀 꺼지고, 하급 몬스터라도 저 정도로 쓸어버리려면, 어지간한 솜씨로는 부족함.
―확실히 A급 수준을 넘는 듯.
―업무 때문에 물근육 됐을 줄 알았더니.
―뭘 모르나 본데. 저게 다 장비발임. 저기 반짝이는 갑주 보이지? 저게 바로 영국 왕실의 보물이라고 불리는 드래곤 스케일임.
―클레어하고 모습이 다른데.
―당연하지. 저게 양산품도 아니고, 모델마다 모양이 다른 건 기본 아니냐.
―명칭도 다름. 클레어건 실버 드래곤, 그리고 저건 골드 드래곤.
―금은 자매!
수시로 이야기가 옆으로 새는 가운데, 기이한 내용이 하나 올라왔다.
―BDC 방송 봐라. BDC가 진짜다!
―왜? 거기도 버킹엄인데. 다를 거 있나?
―다르다. 거기가 진짜다. 봐라. 무조건 봐라!
―뭔 헛소리야?
―거기 클레어 나옴.
트리니티 여왕 못지않은 영향력을 지닌 게 바로 클레어가 아니던가. 유럽을 대표하는 랭커이자 영국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절대자였기에, 자연스레 채널을 돌리는 이들이 늘었다.
―어? 버킹엄이 아닌데?
―공항 근처인 듯.
―것보다 저거 뭐냐?
―클레어가 중요한 게 아닌데.
―트루트리? 스톤 트루퍼? 바이어트? 블러드 울프?
―미쳤네. 라인업 뭔데?
지금까지 여러 방송국이나 BJ들이 보여 준 영상에선, 기껏해야 D~E급 정도의 하급 몬스터들만 줄줄이 이어졌었다.
갑작스러운 사태와 급박히 이뤄지는 현장 진행 상황으로 인해, 등급에 비해 위기감이 크게 언급된 것일 뿐, 화면 너머로 전해지는 박진감은 부족함 감이 있었다.
하지만 BDC의 방송에선 대뜸 A급 이상의 고위종들이 연달아 등판하며, 화면 너머로도 위기감을 전파하고 있었다.
BDC도 원래는 트리니티 여왕을 집중 조명 중이었지만, 클레어를 비롯해서 다수의 고위종 출현으로 인해, 빠르게 메인이 바뀐 것이다.
“BDC의 파스톰 기자입니다. 현재 이곳 히드로 공항 주변에는 레이드 클래스급으로 분류되는 고위종들이 다수 출몰하며….”
본능을 좇아 대박을 터트린 BDC의 각성 기자 파스톰은 카메라가 현장으로 돌아갈 때마다 두 주먹을 불끈 쥐어 가며, 소리 없는 승리의 포즈를 취하고는 했다.
이번 사건을 통해 라이벌들을 크게 제쳤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기뻐하는 한편, 저 거리 가득한 고위종들의 등장과 놈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까지, 기자 정신이 번뜩이며 상황 파악을 위해, 눈과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이는 비단 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고위종이 튀어나오는 건 뭔데?
―설마, 게이트 알람이 아니라. 무슨 대격변이라도 발생한 건가?
―그렇다고 치기에는 다른 지역은 수준이 너무 낮잖아.
―뉴 타입 대격변인가?
―아니, 것보다. 저건 또 뭐냐? 몬스터들이 어째 클레어를 등지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그렇게 보이는 거 아니지?
―졸라 뜬금없긴 한데, 저기 몬스터하고 어깨 나란히 하고 있는 거, 혹시 트랩퍼 아니냐?
―형이 왜 거기서 나와?
기본 2~3미터급의 어깨들 틈에 있었던 터라, 마루가 드러나기까진 약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건어택이 왜 저기 있냐?
―그러게. 덩치들 사이에 껴 있어서 이제 발견했네.
―트랩퍼가 영국 왕실의 의뢰를 받았다는 소문이 있더만, 그게 정말이었누?
―졸라 뜬금없네.
한차례 마루가 화제가 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도 잠시, 사람들의 관심은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이들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저건 누구냐?
―나쁜 놈들!
―왜?
―클레어와 반대편에 있으니까!
―그게 정답이다.
커뮤니티가 이런 식으로 달아오르고 있을 때, BDC의 기자 파스톰 역시 뭔가를 눈치챈 듯, 안색을 하얗게 탈색시키는 중이었다.
‘이면의 주민!’
비록 기자라고는 하나 그 역시 각성자였다. 게다가 기자라는 신분으로 인해, 세계 이면의 비리에 대해서 주워들은 것들이 제법 되기도 했다.
그 때문에 클레어의 반대편이 있는 이들의 정체까지도 유추해 버렸다.
‘…레메게톤?’
이면, 그것도 영국의 이면에서 특히 화제가 되고 있는 집단이다 보니, 더더욱 모를 수 없는 단체의 이름이었다.
느낌이 왔다.
‘Oh, my goddess!’
이번 영상을 통해 기자로서의 성공은 보장됐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각성자로서는 거의 사망 선고가 떨어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면의 주민을 화면에 내보낸다는 건, 화면 속 주인공의 표적이 된다는 것과 같은데, 그 대상이 무려 레메게톤이라면?
‘하… 대박은 대박인데….’
독이 든 성배였다.
자연스레 그의 시선이 클레어에게로 향했다.
‘엘―소드 파이팅!’
그녀의 승리만이 유일한 동아줄이 될 거란 생각에, 어느새 보도마저 잊은 채 전장을 보며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전장에 변화가 발생했다.
* * *
자유를 얻고 잠시간 이지를 회복했다고는 하나, 몬스터화 되어 버린 까닭일까?
뮤턴트들은 실시간으로 솟구치는 광기를 통제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결과 일제히 광기를 폭발시키더니,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데자르와 레메게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이 미친놈들이 왜 이래?”
레메게톤의 요원들은 각자 베테랑답게 당혹감 속에서도 서로 진형을 맞추며, 이 뜻밖의 상황에 맞는 대응을 해 나갔다.
그러면서 기다렸다.
‘명령을!’
‘총장님?’
수시로 데자르에게 닿는 눈빛에서, 그 의사를 읽을 수 있었고, 이에 데자르는 실소하며 말했다.
“후퇴를 준비한다.”
요원들의 안색이 밝아지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그들 역시 바라던 일인 듯싶었다. 각자 경력깨나 있는 실력자들이기에 나름의 견적을 내고 있었고, 하나같이 부정적 결론을 내린 상태였던 것이다.
물론, 그냥 빠져나갈 생각은 없었다.
데자르가 마루를 한차례 바라보더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쪽에 그런 격언이 있더군.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라고.”
마루를 지난 그의 눈빛이 요원들과 얽혀 있는 뮤턴트들을 스치며 서늘한 한기를 흩뿌렸다.
‘감히 미천한 마물 따위가 이빨을 드러내?’
저 너머의 마계에선 감히 그의 눈빛도 마주칠 수 없는 존재들이건만, 그를 향해 울부짖으며 광기를 내비치고 있었다.
게다가 후퇴를 하더라도 도망치는 게 아닌, 당당히 발을 빼는 모양새를 남기고 싶었다.
화르르륵….
마치 불처럼 타오르던 포스에 그의 존재감이 덧씌워지며, 칠흑빛 마기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스킬 발현!
“이능 뭔데? 강화계 아니었어?”
“헉! 설마, 멀티 스킬?”
“크윽! 속박의 재주까지 있어.”
동생이 제퍼드와 달리 형인 바이퍼는 강화계로 알려져 있건만, 뜬금없이 자연계의 발화 능력을 선보이는가 싶더니, 호위대의 발목을 붙잡으며 순수 이능계의 능력까지 내비쳤다.
도플갱어!
그들 일족의 특징이라 할 수 있었다.
훔쳐 낸 인간의 재능만큼 많은 재주를 보유하게 되기 때문인데, 그 때문에 도플갱어 일족이 이곳 인간계에 군침을 흘리는 것이기도 했다.
데자르는 하르칸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멸족의 위기를 겪고 나서 깨달은 바가 있다. 마계에 떨어지는 잔챙이 인간들 정도로는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새로운 타깃이 된 인간계, 그곳을 먹자!
바로 인간계의 식민지화였다. 저들 재주를 훔쳐 먹고 사는 도플갱어 일족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최고의 놀이터라 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데자르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으음… 위험한 발상이십니다.
―그러니 대공의 좌를 얻어야 하는 거다. 이제는 정식으로 왕의 칭호까지 붙은 자리다. 만약 그 자리만 얻어 낼 수 있다면, 차원 하나를 식민지로 받아 내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다.
오래전, 하르칸은 그처럼 욕망을 불태웠고, 자신이 했던 말을 지키기라도 하듯, 정말 북마계를 손에 쥐며 왕의 칭호를 얻어 내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일족의 원수인 사일론에게 복수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 덕분일까?
하르칸의 말은 곧 법이 되었다.
‘인간계!’
그는 뮤턴트가 아닌 레메게톤의 요원과 왕실 호위대 그리고 클레어와 마루를 향해 쭈욱 훑었다.
츄릅!
도플갱어의 본능이 저들이 지닌 재능을 향해 군침을 흘리게 만들었다.
‘주군이 옳았어!’
이곳 인간계는 그들 일족에게 있어서 천국이 확실했다.
게다가 마루에게서 전해지는 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농도 짙은 향기란, 오랜 경험 속에서도 본 적 없는 재능의 소유자임을 느낄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이는 가운데, 애써 심장을 진정시키며 새 육신에 적응하기 위한 컨트롤에 들어갔다.
크워어어어억!
레메게톤의 요원을 뛰어넘으며 기어이 그에게까지 달려드는 뮤턴트의 매서운 발톱이 보였다.
휘익….
과감히 품으로 파고들며 이를 피해 냈다. 그 순간 사나운 이빨이 그를 물어뜯고자, 번들거리는 광기를 내비쳐 왔다.
그 순간 데자르의 팔뚝이 크게 부풀었다.
콰아아앙!
마치 거인의 것처럼 크고 단단해진 주먹이 뮤턴트를 이빨째로 박살 내며 짓이겨 버렸다.
“크으음….”
그와 동시에 데자르의 신음성이 이어졌다.
‘젠장! 약해 빠졌군.’
마족의 육신이 아닌 인간의 것이었고, 게다가 제대로 된 능력 전이도 이뤄지지 않았던 터라, 신체 변형 스킬을 보조하는 버프가 부족했다.
‘변형 계열은 자제해야겠네.’
좀 전의 일격으로 뮤턴트를 확실히 박살 낼 수 있었지만, 그로 인해서 오른팔의 근육이 완전히 걸레짝이 되어 버렸다.
회복 능력이 발동하며 빠르게 치유 중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에 들어오는 건 그의 팔뚝이 아닌 한 방에 짓이겨진 뮤턴트였다.
레메게톤의 요원들의 사기가 승천하고, 왕실 호위대원은 역으로 안색을 꺼멓게 죽이는 게 보였다.
그 순간 마루가 움직였다.
스스스스스스….
땅 밑으로 파문이 이는가 싶더니, 그를 중심으로 검은 장막이 대지를 타고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사자유희!
저승 왕의 신물이 죽음을 부정하는 눈앞의 존재에 대해 큰 불만을 토로하며, 그간 쌓아 놓은 기운을 한껏 쏟아 내고 있었다.
사자의 축복이 발끝을 타고 오르는 감각에 놀란 듯, 데자르가 기겁하며 다급히 몸을 띄웠다.
성력과는 또 다른 의미로 부담스러운 기운이기 때문이다.
이를 본 마루가 안광을 빛내며 사자유희에게 힘을 실어 줬다.
[사신변환 – 현무]
검게 물든 대지가 출렁이며 파도를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