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이면.
#25. 이면.
세계가 뒤집어졌다.
이면 세계!
런던 공항 사건을 통해, 그동안 감춰져 있던 음지의 비밀이 드러나 버린 까닭이었다.
“빌어먹을 바이퍼!”
“이 정신병자 새끼!”
“애초에 트리니티 여왕이 선을 지켰어야 했어.”
“영국 왕실과 레메게톤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었어. 선을 넘은 건 바이퍼지.”
각 단체들은 이번 사태를 어찌 잠재워야 할지, 마땅한 답이 나오질 않았던 터라 여러모로 골머리를 싸매야만 했다.
적당히 물타기를 하기에는 지난 사건의 농도가 너무 진했다.
특히, 격전의 막바지에 보여 준 한 방이 너무 컸다.
―랭커 셋을 혼자서 상대한다고?
―트랩퍼는 랭커가 아니지 않나?
―레어 안에서는 거의 랭커라고 함.
―트리니티 여왕도 랭커 아님.
―드래곤 스케일 입으면 랭커급!
―템발 살벌하네.
냉정히 판단한다면 아직 트랩퍼에 대해선 의문이 남았지만, 그렇다 해도 랭커 2인분 이상의 전력이라는 건 확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겨 내 버렸다.
그 여파일까?
―인디안 존슨하고. 누가 더 강할까?
―감히 제로 원하고 비교하려 드네.
―마족 셋을 멱살잡이하는 존슨 성님과 비교한다고?
―에헤~ 이. 선은 지키셔야지.
최강의 단어를 언급하는 이들이 하나둘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그만큼 당시 사건의 영향력을 높여 줬다.
―키홀? 레메게톤?
―정말로 이면의 세상이란 게 있는 거냐?
―사실, 전문 커뮤니티에서나 가끔 나오는 거긴 한데, 또 다른 세계에 관한 이야기는 꾸준히 언급되긴 했지.
―그동안은 개소리라면서 개까였는데.
―요렇게 판이 뒤집히네.
―성지 순례 다녀온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아주 단편적인 부분만 간혹 올라오는 정도였지만, 분명 외부의 민간에서도 틈틈이 다뤄지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단지 지금까지는 헛소리 정도로 치부되었다면, 이제는 그 모든 게 진실이 되어, 화제성을 높여 간다는 점이 달랐다.
어쨌든 그렇게 이면 세상이란 폭탄을 터트린 사내, 그 정체에 대해서도 다방면에 걸쳐서 이슈가 되고 있었다.
“허… 바이퍼 그자는 결국 레메게톤의 수장 자리를 지켰다고 하더군요.”
“일단 능력은 확실히 보여 줬으니까.”
“게다가 의외로 따르는 이가 제법 많다더랍니다.”
“정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했으니까. 그러니 제퍼드가 제 형을 그렇게 따른 것 아니겠나.”
“그나저나… 이름은 왜 바꾼 건지 모르겠군.”
“새 시대에 새 사람으로 태어난다나 뭐라나? 헛소리가 너무 거창해서 들어 줄 수가 없더군.”
“뜬금없긴 하네요.”
모두의 예상을 뒤엎듯, 바이퍼는 레메게톤의 총장 자리를 지켜 냈는데, 더 나아가서 확실하게 단체를 휘어잡는 놀라운 모습까지 보여 줬다.
그 와중에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었으니, 그게 바로 개명이었다.
데자르!
그는 자신의 이름을 새롭게 바꾼 것이다.
모두가 그 이해할 수 없는 헛발질에 고개만 저을 뿐이었는데, 유일하게 그 이유를 아는 외부인이 있었다.
“마족 맞네.”
사일론이 그리 말하며 서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에 존슨이 물었다.
“아는 이름이야?”
“본 적은 없어.”
그럼에도 정보는 있었다.
“족 같은 도플갱어 일족의 대가리들 중 한 명이야.”
“도플갱어라면…?”
“그래. 내 뒤통수 쳐 먹은 놈들이지.”
사일론은 모든 상황을 살핀 뒤 예상되는 바를 이야기해 줬다.
“아마도 그 바이퍼란 놈은 뒈졌을걸. 그래서 급하게 강림 의식을 진행했겠지.”
그 여파로 많은 부분에서 능력치가 깎였으리라.
“굳이 본신의 이름으로 개명한 건, 부족한 걸 조금이라도 채우기 위해서야.”
이름에는 존재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수차례 불린 이름은 영혼에도 그 의미를 새기며 물들이는 법, 사일론은 이야기했다.
“아예 몸을 갈아탄 모양인데, 혼에 새겨진 기억이 망각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재주를 가져오기 위한 꼼수지.”
도플갱어는 완벽히 그 인간의 삶을 살아야 하건만, 이런 식으로 이전 삶을 가져온다는 건, 그만큼 상황이 절박하다는 의미였다.
“능력치를 좀 회복하긴 하겠지만, 다른 부분에서 소실되는 게 있을 거야.”
가만히 듣던 존슨이 물었다.
“그 뒤통수쳤단 놈들에 대해서, 아는 게 적었던 것 같은데, 아니냐?”
이에 사일론이 쓰게 웃었다.
그 말처럼 그의 권좌를 탈취한 놈들에 대해, 그는 제대로 아는 바가 없었다.
과거에 멸족시켰다 여기며 방심했던 도플갱어 일족에게 뒤통수를 맞은 까닭에, 제대로 된 정보를 취급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련한 정보를 언급할 수 있는 건, 뒤늦게 조금씩 수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분명 그는 마계에서 쫓겨난 게 맞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너머의 세상과 연결 고리가 완전히 끊어진 건 아니었다.
당장 권좌가 탈취당하는 과정이 정상적이지 못하다 보니, 새로운 북마계의 왕에게 불만을 지닌 이들이 상당한 데다가, 사일론을 따르던 마족들도 상당한 편이지 않던가.
물론, 그가 반인반마라는 부분에 불만을 품은 이들도 넘쳐 났지만, 약육강식의 강자만이 살아남는 세계에서, 맨주먹으로 정상을 차지한 인물이다 보니, 그를 동경하는 마족도 득시글했던 것이다.
특히나 ‘무능의 마인’이라며, 말 그대로 별다른 특수 능력 없이 ‘맨주먹’밖에 없다는 특징으로 인해, 더더욱 하급 마족들을 환호하게 만든 존재였다.
그 때문일까?
“아직 날 따르는 놈들이 제법 있단 소리지.”
“설마…?”
“뭘 그런 눈빛으로 봐. 소환이나 강림식 같은 건 아니야. 엔트라넷에 계약서까지 올렸는데, 헛짓거리 할 수 있겠냐? 의심 좀 그만해라. 그냥 간단한 메시지로 정보 수집하는 정도다.”
비록 반쪽은 인간이라지만, 그는 마계에서 나고 자란 마계 토박이가 아니던가. 그 뿌리는 마계에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별다른 매개체 없이 저 너머로 통신을 연결하는 게 가능했다.
“하르칸 그놈한테 불만 있는 놈들이 상당하거든.”
추종자들이 남아 있는 만큼, 더더욱 연결하긴 쉬웠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꾸준히 마계의 정보를 전달받는 중이었는데, 그 중심에는 역시 도플갱어 일족이 있었다.
오랜 원한 관계에 더해 이번에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것까지, 갚아 줘야 할 게 너무 많았던 것이다.
본신의 능력을 되찾는 날, 다시금 마계로 넘어가서 당했던 걸 이자까지 두둑이 넣어서 두드려 줄 생각이기에, 미리미리 정보 수집은 필수였다.
존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이런 식으로 넘어오는 게 흔한 건가?”
“쉬운 건 아니지. 잠깐 분신처럼 멀티를 까는 게 아니라, 아예 본체가 넘어온 거니까. 육신을 버리고 왔단 뜻이거든.”
자연스레 떠오르는 궁금증이 있었다.
“그럼, 데자르인가 하는 놈은 인간이냐 마족이냐?”
사일론이 웃으며 말했다.
“흐흐… 인간도 마족도 아닌 잡종이지. 껍데기는 인간이지 알맹이는 마족이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에선 마냥 웃을 수 없었다.
“큭큭큭큭! 나보고 잡종이라고 비웃더니, 제 놈들은 개잡종이 됐네.”
그 부분에서 존슨은 사일론의 비참한 과거의 한 편린을 본 것만 같아, 슬쩍 안색을 굳혀야만 했다.
‘미운 정도 정이라더니.’
어쨌든 한동안 함께 지냈던 게 영향을 미친 듯, 사일론에 대해 마음을 쓰게 된 것이다.
특히,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인지, 경계심이 약해지는 면도 있었다.
사일론은 관련한 이야기를 하다 떠오른 게 있던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사이빈지 뭔지 하는 데서 나왔다는 이상 각성자들, 몬스터 전용 측정기에만 반응하는 놈들 있다고 했지?”
일반적인 각성 측정기에 반응하지 않아서, 혹시 인체 실험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지녔었는데, 기이하게도 신체적인 변화는 없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미스터리로 남았던 사건이 있었다.
“그건 갑자기 왜? 주종 계약의 여파라면서?”
“어쩌면 그놈들도 데자르하고 비슷할 수 있겠다 싶어서.”
“…아!”
존슨의 눈이 번쩍 뜨였다.
분명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라 여겼다.
“각성자가 되는 걸 간절히 원하는 만큼, 마음의 틈도 클 테고, 도플갱어 놈들의 노예로 전락하기도 딱 좋겠지.”
오랜 시절이 지났지만, 하루하루 놈들에 대한 복수심을 곱씹은 덕분인지, 과거 도플갱어 일족과 벌였던 격전들이 하나하나 생각나기 시작했고, 덕분에 놈들이 원하는 바도 짐작해 낼 수 있었다.
‘식민지 계획인가.’
그리 이상할 건 없었다. 기존 대공들도 정복 차원을 각자 지분에 맞게 휘둘러 오지 않았던가.
도플갱어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이곳은 최고의 양식장일 터였다.
‘큭큭큭… 앞길에 개 똥물을 뿌려 주마!’
사일론은 음흉하게 소리 없이 웃었고, 존슨은 이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 얼굴로 저렇게 웃으니, 참… 적응 안 되네.’
앞서도 말했지만, 사일론은 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귀여운 아이였다.
* * *
마루는 그야말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영국 왕실의 방벽을 강화하기 위해 특별히 초청된 귀빈이란 점도 있지만, 이번 사태를 통해서 그가 랭커급의 실력자라는 게 판명 났던 터라, 존재 자체에 대한 대우가 달라진 것이다.
그에게는 더 이상 자격증상의 급수는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이었다.
게다가 이번 사태에서 영국을 위해 싸워 준 부분까지, 왕실의 은인으로서 훈장을 비롯한 여러 보상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었다.
―트랩퍼를 잡을 수만 있다면, 훈장이 아까우랴.
―그래도 외국인, 동양인에게는 좀….
―지금 시기가 어느 땐데, 아직도 인종 차별?
―미쳤네.
―도랐네.
―이런 식으로라도 트랩퍼하고 관계 개선해 놔야 함. 게다가 이젠 랭커급으로 분류된다잖아.
―제로 원이 아무나 형제로 삼을 리가 없지.
영국 시민들도 환영하는 분위기였기에, 훈장에 대해서는 거의 확정됐다고 봐야 했다. 남은 건 몇 등급으로 내리느냐인데, 작위까지 올라가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으로 꾸준히 화제가 되는 중이었다.
기본적으로 1, 2등급 훈장부터 작위가 부여되기 때문인데, 당연히 3~5등급은 칭호도 안 붙는 단순 훈장일 뿐인 것이다.
한때는 3~5등급 훈장을 마구 남발하며, 그저 명목상의 보여 주기식 수상이란 말도 많았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될 수 있지 않냐며 말이 나오는 거였다.
특히, 상황이 이상하게 꼬여 버린 터라, 마루의 존재가 더욱 특별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기도 했다.
레메게톤!
그들이 대놓고 영국에 침을 바른 까닭이었는데, 마루의 방벽 강화의 수준이나 범위 등을 조금이라도 더 높이고 늘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대접을 해 주려 하는 거였다.
덕분에 요 며칠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마냥 쉬고만 있진 않았다.
알파 세계!
실버 박사를 통해 지분을 얻은 그곳 세상을 탐험하며, 경험치도 쌓고 각종 스킬에 대한 이해도 역시 넓힌 것이다.
그 와중에 아쉬운 점이라면?
‘젠장! 유료라니….’
접속할 때마다 통행권을 구입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엔트라 스토어에서 구입 가능했다.
속이 쓰린 부분이었지만, 그 대신 남들 눈치 볼 거 없이 마음껏 재주를 부릴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이용권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직 등장하지 않은 새로운 몬스터들도 다양하지 않던가.
그 자체로 신규 콘텐츠라고 분류해도 될 터였다.
그렇게 새로운 게임을 즐기는 한편,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지난 전투를 복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데자르….’
그로 하여금 이 짧은 휴식 시간마저도 알파에 접속하며 채찍질을 하게 만든 결정적 요소였다.
존슨에게 관련 정보를 전달받았고, 그 때문에 상황의 심각성 역시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놈들이 우르르 넘어온단 말이지.’
물론, 그 수준에서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스펙은 될 것이며, 다양한 스킬을 능숙히 활용하는 점까지, 까다롭다는 건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좀 더 성장하고 강해질 필요가 있었고, 그 때문에 자연히 떠오르는 게 있었다.
‘백호의 신물….’
검은 고양이 메로를 어떻게 꼬여 내는가인데, 이를 위해서는 오염된 여의주를 정화해야 한다는 점이 골치였다.
그 문제로 골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였다.
뜻밖의 방문객이 찾아왔다.
“오랜만에 뵙네요.”
레베카를 꼭 닮은 얼굴의 여인.
“…성녀님?”
마루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를 바라봤다.
성녀 레아가 영국 왕실을 방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