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밀 던전.
#1. 비밀 던전.
새로운 이름으로 개명을 하며, 새 인생을 살겠다고 선언한 사내, 키홀의 수장이며 레메게톤의 총장이고, 세계의 격변이 되어 버린 존재.
데자르!
많은 이들이 그가 정상에서 끌어내려질 거라 여겼다.
하지만 이게 웬일?
그는 여전히 키홀의 수장이었고 레메게톤의 총장이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여러 단체의 수뇌부는 입을 모아 이야기하고는 했다.
―역시 정치 솜씨가 좋아.
남다른 재주가 빛을 발했다고 여겼다.
레메게톤의 성립에 그가 지대한 공을 세웠다는 건, 알 만한 이들은 다 아는 사실이기에, 그 과정에서 적잖은 밑밥을 깔아 놨고, 그게 이번 사태에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는 것이다.
동생 제퍼드가 신체적인 재주가 남달랐다면, 그는 머리 쓰는 게 남다르다는 게 세간의 평가이지 않던가.
하지만 이는 크나큰 착각이었다.
“정치? 개소리!”
레메게톤의 한 기둥이자, 유럽 이면의 거인 중 하나, 인페르노 클랜의 수장 볼탄은 입술을 짓씹으며 현 상황의 진실을 꼬집었다.
“힘으로 밀어붙일 줄이야.”
그의 곁을 지키던 부클랜장 바이탄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설마, 바이퍼의 곁에 그런 실력자들이 숨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요.”
“한 방 제대로 먹었어. 키홀과 제퍼드를 앞세우고선, 뒤로 그런 충격적인 걸 준비하고 있었을 줄이야.”
이면의 세력들은 기본적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경우가 많았다.
외부 단체의 경우, 보이는 게 7이고 감추는 게 3이라 치면, 이면은 그 반대로 3대 7의 비율을 유지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하지만 키홀은 전혀 달랐다.
“그 정도면 보이는 게 1밖에 안 되겠던데요.”
이를 통해서 총장의 직위를 더욱 확고히 굳힌 걸로 끝이 아니었다.
“기어이 영국에다 간판까지 올리다니. 대단하네요.”
“제 입으로 한 말인데 지켜야겠지. 후… 그나저나 어째 연구소를 유독 많이 돌리는 것 같더라니만. 이런 골 아픈 상황을 만들 줄이야. 쯧!”
레메게톤의 기둥이 된 여러 클랜들은 이번 사태로 인해 총장을 끌어내리고, 새로운 수장을 세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도 전에 데자르가 먼저 진압에 나섰는데, 거기서 사용된 게 키홀의 감춰진 전력이었다.
“솔직히 냅다 들이받으려면 받겠는데….”
볼탄이 말끝을 흐렸다. 뒤 내용을 짐작한 바이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필이면 미끼가 너무 매력적이네요.”
“…그러니 말이야.”
분명 키홀의 숨겨진 전력이 대단하긴 하지만, 그게 레메게톤에 소속된 기둥들을 전부 압도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하… 전원 멀티 스킬 각성자로 이뤄진 부대라니.”
그야말로 대사건이었다.
“멀티 스킬의 비법을 전수해 준다는데, 어쩌겠습니까. 넙죽 엎드려야지.”
너무도 커다란 미끼였고, 그 때문에 각 클랜의 수장들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 입에 지퍼를 채워 버렸다.
그 결과, 데자르가 정치를 통해 상황을 정리했다는 소문이 돌게 된 것이다. 오히려 클랜의 수장들이 이를 부추기고 있을 정도였다.
“그나저나 그놈은 갑자기 웬 개명이야?”
“데자르라고 했죠?”
“이름만 바꾼다고 새 인생인가.”
“흠… 아무래도 바깥으로 나간다는 의지의 표명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헛짓거리 한번 요상하게도 한다.”
볼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사흑련의 반응은 어때?”
이번 사태로 이면의 세계가 크게 들썩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중에서 가장 큰 단체의 움직임을 주시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레메게톤에 앞서 아시아 이면의 패권을 쥔 단체로서, 차후 그들이 간판을 올리더라도 전체적인 규모나 체계 면에서는 사흑련에 한발 뒤처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이전 바이퍼와 제퍼드 시절에도, 사흑련과의 관계를 중요시한 것이 아니던가.
언제고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단기간에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거기도 꽤 소란스럽죠. 아무래도 바이퍼… 데자르가 레메게톤을 이면이 아닌, 바깥세상에 내보이려는 움직임을 보이니까요.”
사흑련도 언제까지 음지에서만 활동할 수는 없단 분위기가 조금씩 팽배해지고 있단 것이다.
이면의 주민들은 범죄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 스스로가 원한 경우도 있지만, 원치 않게 이면으로 떠밀려 온 이들도 상당했다.
그래서인지 알게 모르게 양지를 향한 갈망을 품은 이들이 적잖았다. 이번 사건은 그 같은 부분을 건드렸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걸까요?”
바이탄의 물음에 볼탄이 쓰게 웃었다.
“어쩌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생각하게 된다.
‘…머리를 잘 썼어.’
한 번 수긍하고 넘어가니, 오히려 그걸 원하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당장 볼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바깥세상인가.’
범죄자 딱지를 뗄 수는 없으리라. 애초에 떼고 싶지도 않았다. 정의롭게 눈치를 보며 사는 건 그의 성격과 안 맞기 때문이었다.
‘히어로는 될 수 없지만….’
하지만 빌런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름 없는 엑스트라가 아닌, 제법 그럴싸한 악역이 되는 건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 때문일까?
은근히 기대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 * *
마루가 깜짝 놀란 얼굴로 성녀 레아를 바라봤다.
“헉! 어떻게 여기에…?”
오랜 과거, 헨리 8세의 결혼 무효 소송을 시작으로, 크게 갈라서 버린 로마 교황청과 영국 성공회가 아니던가.
그들 사이는 여전히 상당한 거리감이 있는 관계였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꾸준히 화합을 입에 담아 왔고, 덕분에 근래에 이르러선 제법 그럴싸한 교류도 이뤄지는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녀의 등장은 특별할 수밖에 없었는데, 관계 개선이 이뤄지고 있기는 하나, 각 단체의 수장급이 만나는 일은 극히 드물었던 탓이었다.
성녀가 영국 왕실까지 발을 들였다는 건, 그만큼 이슈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깜짝 놀란 마루의 모습에 성녀 레아가 빙긋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영국 왕실의 요청으로 방문했답니다.”
더더욱 놀라운 소리였다.
관계 개선이 이뤄졌다고는 하나, 각국의 정점들이 수뇌부급의 지원을 요청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왠지 그 이유가 짐작이 갔다.
‘레메게톤 때문인가.’
기어이 영국의 한편에 그들 간판을 올렸다는 소릴 들었다. 놀랍게도 한 개 마을을 통째로 그들의 터전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인데, 그곳에 그들만의 성을 쌓으려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게 축복 의뢰가 들어왔거든요.”
성녀가 예상 그대로의 답을 내어 줬다.
결계와는 또 다른 의미로, 성녀가 내려 주는 축복은 성벽 강화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삿된 것들을 물리치는 힘도 있는 만큼, 몬스터들의 접근도 일찌감치 차단할 수 있었다.
역대의 모든 성녀들이 그 같은 재주가 있었지만, 이번 대의 성녀는 특히 그 재주가 뛰어난 터라, 요청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리라.
‘프랜차이즈와 진짜의 차이겠지.’
마루는 눈앞의 성녀가 기존 성녀와는 격이 다름을 잘 알고 있었다.
무려 성녀가 직접 등판했다.
그 때문에 영국 왕실은 교황청에 적잖은 손해를 봐야 하겠지만, 집 안에 밀고 들어온 불한당을 쳐 내기 위해선, 충분히 감수해야 할 부분일 터였다.
“내부에선 좀 더 많은 걸 얻어 내야 한다면서, 시간을 두고 움직이자는 말이 있었지만, 제가 억지를 부려서 이렇게 올 수 있었답니다.”
한데, 이어지는 내용이 또 놀라웠다.
“마루 님이 계실 때 오고 싶었거든요.”
그러며 슬쩍 얼굴을 붉히는 모습에, 마루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한때나마 핸드폰 배경 화면을 채우고 있던 얼굴이 저런 수줍은 모습을 눈앞에서 보여 준다?
심장이 멀쩡하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바람피우다 걸리면 뒤진다!]
그 순간 환청처럼 스쳐 가는 강하나의 음성에 화들짝 놀라며 몸서리를 쳐야만 했다.
이에 레아가 의아한 듯 물었다.
“회복을 위해서 쉬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아직 좀 불편하신 건가요?”
그러며 따로 축복을 내리느니 어쩌느니 하는데, 이를 말리느라 잠시 고생해야만 했다.
겨우 진정된 그녀가 마루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역시 왕실의 방벽을 강화하는 작업을 위해 요청된 거라서, 남들 눈치 볼 거 없이 마루 님을 만나 뵈러 올 수 있었어요. 후훗!”
다른 무엇보다 이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이 특수한 상황을 기회로 삼아, 마루와 공식적으로 안면을 트고, 차후 이어질 수 있는 만남에 대한 명분을 얻어 내는 것이다.
신의 계시를 통해 이뤄진 인연이다 보니, 대외적으로 밝힐 수 없어, 지금까진 레베카를 통해 소통이 이뤄지지 않았던가.
왕실의 방벽 강화 작업에는 제법 시간이 걸릴 터, 이번에 친분이 쌓였다는 걸 내세운다면, 앞으로는 맘 편히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교황청 내부에서 이런저런 의뢰를 해결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제한선이 낮아지는 건 분명했다.
“처음에는 반대하는 분들이 꽤 있었는데, 마루 님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기회라고 주장하니까. 결국에는 승낙해 주더라고요.”
교황청 역시 트랩퍼의 재주에 흠뻑 빠져 있는 상황이다 보니, 언제든 그에게 의뢰할 수 있는 연결 고리가 필요했고, 성녀에게 그 역할을 맡기고자 한 것이다.
―허어… 성녀님의 매력에 안 넘어올 사내가 없지.
―당연한 소릴! 당대의 성녀님이야말로 역대 최강이지.
―미모도 신성함도, 최고 존엄이시다!
―아아… 레아 공주님!
물론, 교황청의 이런 분위기는 레아도 모르는 이야기였지만, 어쨌든 그렇게 긍정적인 반응으로 이번 만남이 성사될 수 있었다.
레아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공식적인 친분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 다른 이유도 있답니다.”
“다른 이유라면…?”
왠지 느낌이 왔다.
“계시가 있었어요.”
역시나였다. 첫 만남 당시에도 계시를 계기로 마주하게 된 것이 아니던가.
최근의 고민거리 때문일까?
‘혹시… 어쩌면!’
마루의 눈이 반짝였다.
오염된 여의주!
이를 해결할 힌트를 들고 온 건 아닐지, 묘한 기대감으로 레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마루 님에게 아주 큰 정화의 힘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기대감이 한층 커졌다.
“제가 해결해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아직 제 능력으론 감당할 수 없는 것 같더군요.”
계시는 마루에게 길을 제시하는 이미지를 전해 왔다.
“현 영국 왕실을 대표하는 보물을 아십니까?”
“드래곤 스케일 아닙니까?”
“그것 외에도 하나 더 있지 않나요?”
“…집행검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레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국에선 집행검을 신검이나 성검으로 부른다고 하죠.”
한편에선 현대의 엑스칼리버라는 말까지 붙일 정도였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뭘까?
그 답은 오래지 않아 이어졌다.
“집행검을 구했던 던전, 그곳이 아직 남아 있다는 거 아시나요?”
깜짝 놀랄 이야기였다.
“클리어한 게 아니었습니까?”
그 보상으로 얻은 아티팩트가 집행검이라 여겼건만, 아직도 던전이 남아 있다?
“더욱 놀라운 걸 말씀드릴까요?”
괜스레 가슴이 들썩였다.
“바로 이곳, 왕실 지하에 그 던전이 있답니다.”
연달아 터진 충격적 이야기는 마루의 턱을 떨어트리게 만들었다. 쉬이 닫히려 하지 않는 그 모습에, 슬며시 웃어 보인 레아가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버킹엄은 던전지대잖아요.”
그 지대의 축이 되는 던전 중 하나가 바로 이곳 왕실에 숨겨져 있다는 소리였다.
“트리니티 여왕님이 윈저성보다 버킹엄에 더 자주 머무시는 것도, 바로 이 아래에 숨겨진 던전을 보호하기 위함이랍니다.”
뿐만 아니라 수호검이라 불리는 클레어가 대다수의 시간을 성에만 머무는 것 역시, 비밀 던전을 지키기 위한 조치였다.
“아마 거기에 마루 님께서 원하시는 답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는 영국 왕실의 최고 기밀이었고, 그런 만큼 입장 조건도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그 때문에 레아는 이야기했다.
“작위를 얻으세요.”
“…예?”
“그게 최소 조건이랍니다.”
갑자기 급피곤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