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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침식.

#14. 침식.

영혼 침식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한 번 죽으면 끝이다!’

데자르에겐 다른 일족과 같은 부활의 안배가 없었다. 육체와 달리 영혼만큼은 순수한 일족과 달리, 그는 영혼까지 오염된 까닭이었다.

그 때문에 마루의 개벽권을 마주한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튀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덮쳐드는 걸 느낀 것이다.

전력으로 가드하며 그 반동을 이용해서 최대한 멀리멀리 튕겨 나가는데,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덕분에 마루의 감시망도 벗어날 수 있었다.

‘크으으윽….’

일단 목숨은 건질 수 있었는데, 몸 상태가 엉망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어려워, 그대로 드러누운 채 은신계 스킬을 발동한 뒤, 열심히 긴급 구조 신호를 보내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은신까지 할 필요가 있겠냐 싶지만, 하필이면 위치가 좋지 않았다.

‘마굴로 떨어질 줄이야.’

그가 떨어진 곳은 런던에서 한참 떨어진 마수지대의 한 구역이었는데, 다행 반 불행 반이라고 해야 할까?

다행인 건 넘실대는 마기 덕분에 작게나마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점이었고, 불행이라면 역시나 사방 그득한 몬스터들의 위협일 터였다.

한껏 숨을 죽이며 신호를 보내는데, 이는 도플갱어 일족만이 들을 수 있는 신호였다.

생각보다 빨리 그의 신호가 닿은 것일까?

“긴급 구조 요청을 받고 왔습니다.”

한 사내가 그의 은신처로 다가오는데, 이를 본 데자르의 표정이 곱지 못했다.

“너… 넌…?”

얼굴은 처음 봤지만, 사내에게 흐르는 기운은 낯설지 않았다. 동공 위로 흐르는 기이한 그림자를 봤을 때, 자신이 생각하는 존재가 맞다는 걸 깨달았다.

“세… 세가?”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운 이름이군요. 지금은 비모라고 불러 주십시오.”

인간화가 이뤄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네가… 왜 여기에…?”

힘겹게 이어지는 물음에, 사내 비모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그 순간 데자르는 답을 얻어 냈다.

“하르칸님이 보냈구나….”

비모가 손가락을 튕겼다.

“역시, 눈치가 빠르다니까.”

왜 하필 비모일까?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건, 눈앞의 사내는 마계에서 그와 라이벌이라 할 만한 포지션을 잡고 있었던 탓도 있지만, 각자의 위치에 대한 거부감도 컸다.

데자르는 하르칸의 정면을 지키는 돌격대장이라면, 비모는 하르칸의 뒤를 지키는 존재로서, 한편에선 사냥개라고도 불리는 존재였다.

물론, 그게 나쁜 건 아니라고 여겼다. 하지만 비모의 사냥 대상을 상기하면, 쉬이 납득하기도 어려웠다.

도플갱어!

그의 이빨은 동족의 목덜미를 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그 사냥개가 자신의 눈앞에 등장했다?

결론에 이르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버려졌구나!’

두 눈에 불길이 타올랐다. 이 모습에 비모가 재차 웃으며 말했다.

“역시나 눈치가 빨라.”

그러더니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쯧! 영혼 침식의 후유증이 너무 크네요.”

비록 경쟁 관계였다고는 하나, 일족의 미래를 위해 얼마든지 협력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 때문에 더더욱 데자르의 상태가 안타깝기도 했다.

“예전이었다면 하르칸님의 뜻을 읽자마자 목을 바치셨을 텐데, 이제는 배신감과 분노를 먼저 내세우다니. 바이퍼라는 인간에게 제대로 당했군요.”

다가올 미래를 예감한 듯, 데자르가 사납게 기세를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기도 했고, 비모가 따로 조치를 취한 것도 있었다.

비모가 일종의 봉쇄 스킬로 데자르를 옭아맨 뒤, 데자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인간이 랭커가 아니라서 가볍게 봤는데, 설마 이 정도로 지독한 침식 효과를 낳을 줄이야. 이곳 인간들도 보통은 아니네요.”

그가 데자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따로 남길 유언은 없으십니까?”

어째서일까?

그 순간 앞의 결전을 떠올리게 되는 건?

‘아이언슈트!’

세계는 모를 그의 정체를 상기했다.

분명, 자신을 경험했기에 더욱 철저히 위장을 할 터, 그렇기에 관련한 정보는 큰 값어치가 있을 것이다.

데자르는 히쭉 웃으며 이를 홀로 삼켜 버렸다.

“엿이나 먹어라!”

이후 힘겹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주니, 비모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로 데자르를 덮쳤다.

콰드득… 우득… 뿌드드득….

이어지는 ‘포식’의 시간!

비모는 말 그대로 데자르를 씹고 뜯고 맛보며, 뼛조각 하나까지 전부 삼켜 버렸다.

[동족포식]

그가 일족의 사냥개가 될 수 있었던 스킬이 발동된 것이다.

하르칸의 요청에 의해, 급하게 이곳 세상으로 넘어와야만 했던 터라, 수많은 재능들을 내버리며 유약한 인간의 몸에 담겨야만 했다.

그로 인한 장단이 존재하긴 했다.

절대적인 격의 차이로 인해, 인간의 영혼을 압도하면서 바이퍼와 같은 침식을 겪을 필요가 없었다는 게 장점이었다.

하지만 단점도 만만찮았다.

그의 거대한 재능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비루한 몸뚱이다 보니, 앞서 언급한 것처럼 상당수의 재능을 버리고 온 것이다.

하지만 그 문제는 지금 이 순간, 깔끔히 해결됐다.

“푸후우우우우….”

포만감 속에 뱃가죽을 두드린 그가 히쭉 웃어 보이며 말했다.

“과연, 이렇게 많은 재능이라니. 훌륭하군. 최고야!”

데자르가 지니고 있던 스킬 중 상당수가 그의 것으로 흡수된 것이다.

아쉬운 게 있다면, 비루한 몸뚱이로 인해 전부가 아닌 일부만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굵직한 것들만 집중적으로 목구멍에 넘겼다.

지금 이 일부를 깔끔히 소화시키고 난다면, 더는 육신의 나약함에 고통받는 일은 없을 터였다.

그래도 본신의 능력에 비해 부족함이 큰 탓일까?

“문제아가 더 없으려나?”

묘하게 아쉬움이 남는 걸 느꼈다.

츄릅….

* * *

이제는 ‘대’마왕이라 불리는 마계의 정점!

그는 언제나처럼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시선은 어두운 마계의 창공에 향해 있으나, 바라보는 건 저 공간 너머, 차원의 경계에 닿아 있었다.

무엇을 봤음일까?

돌연,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몄다.

‘잘하고 있군.’

하루하루 경계의 균열이 커지는 걸 느끼고 있었는데, 지금도 한 차례 균열의 확장을 느낀 것이다.

그 이유도 짐작 가능했다.

‘금술이 효과를 보이는군.’

도플갱어 일족의 욕망이 제대로 세계 차원의 벽에 흠집을 내고 있는 것이다.

마계 일족의 영혼이 저 너머 세상에 스며들고 있었다.

인간을 완벽히 흉내 내는 도플갱어 일족이 제 본신을 버리면서 넘어간 거였다. 그만큼 모방의 완성도는 높을 터였다.

그 이질적인 존재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저쪽 세상의 일원이 되려 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발생한 기이한 오류는 하루하루 균열을 넓혀 갈 터, 종래에는 저들이 자랑하는 방벽에도 구멍이 뚫릴 것이고, 그때가 바로 본격적인 침공의 날이 될 터였다.

‘어서 빨리 그날이….’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 하늘을 바라보는 눈빛 가득 묘한 열망이 번뜩이고 있었다.

* * *

마루는 가족들에게로 향했다.

이 사달 속에서 많이 놀랐을 거라 여겼지만, 부모님들도 대환란의 시대를 겪어 오신 분들이다 보니, 의외로 침착하게 자리를 지키면서 대원들의 지시를 따라 줬고, 덕분에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이 아니더라도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나름의 안전장치를 해 놨기 때문이다.

―근무 중 이상 무!

반칼죽의 음성이 들려왔다.

‘고생했다.’

현재 마루가 가장 믿을 수 있는 가드가 가족들을 지키고 있던 것이다. 여차하면 직접 모습을 드러내서 지키라고 했는데, 여전히 은신처에 숨어 있는 걸 보면, 생각보다 큰 위협은 없었던 듯싶었다.

빠르게 건물 속으로 숨어든 것도 큰 역할을 했다. 마루가 잘 깔아 놓은 결계 덕분이었는데, 따로 성녀가 신경을 써 준 부분도 있었다.

이런저런 조치들이 효과를 보며 가족들의 안전을 지킨 것이다.

그의 등장에 근위대원들이 자리를 비켜 주는 가운데, 기다렸다는 듯 가족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뒤에서 총질이나 할 것이지, 거기가 어디라고 뛰어들어!”

시작부터 모친의 등짝 스매싱이 날아들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건어택이니 뭐니 하면서 명성을 드높이고 있지만, 그녀에게는 여전히 어리고 여린 아들일 뿐이지 않겠는가.

능력자가 됐다고는 하나, 그게 그저 총기류 각성이라고 해서 멀리서 저격만 한다는 생각으로 인해, 어느 정도는 안심하고 있었건만, 대뜸 총을 들고 전장의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닌가.

이미 몇몇 영상을 통해서 관련한 액션들을 접했었건만, 지금처럼 눈앞에서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철렁하는 기분이었다.

영상으로 접했을 때도 잔소리가 있었던 만큼, 등짝 스매싱 정도는 약과라 할 수 있었다.

“좀 전까지 현장 뛰느라 힘들었을 텐데, 나중에 체력 좀 차면 두드려. 그래.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부친이 모친을 말리고 달래면서 물어 왔다. 내용이 좀 이상했지만 어쨌든 상황 정리를 한 건 맞았다.

“어… 음… 멀쩡하죠.”

뒷머리를 긁적이는 그에게 형인 정가람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제법 쏘던데?”

“백발백중이야 왜 이래.”

“캬~! 나도 군 시절에 만발 좀 쐈지.”

“…이상한 걸 비비고 들어오네. 그리고 만발은 무슨, 형 취사병 아니었어?”

“취사병은 총 안 쏘냐?”

저렇게 따지고 들어오면 할 말이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형수와 조카에게로 향했다.

“많이 놀라셨죠?”

그 말에 형수 안미연이 정다솜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가씨가 곁에서 계속 안심시켜 줘서, 괜찮았어요.”

말은 저렇게 하나 적잖이 놀랐을 거라 여겼다. 이 같은 사태를 짐작했기에 가족들의 초대를 자제하려 한 것인데, 존슨의 이야기가 생각을 달리하게 만들었다.

[뮤턴트가 습격하더라.]

덕분에 청계산 마수지대 반파 사건에 존슨이 관여된 걸 알았다.

레메게톤의 과감한 행보에 놀라야만 했고, 한국에 머물더라도 안전한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집 근처에 결계 강화도 추가해야겠어.’

물론, 불문율에 의해서 가족들은 보호받는다지만, 그와 같은 포지션이 되면 그것도 확실한 게 아니다 보니, 차라리 시야 안에 두자는 생각으로 행사에 부른 거였다.

차후 한국으로 돌아갈 때 함께 넘어갈 생각이었다.

칼죽이라는 안전장치도 있는 만큼,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지만, 그래도 마냥 맘이 편한 건 아니었다.

미안한 마음으로 형수를 보던 것도 잠시, 마루의 눈가에 묘한 이채가 스쳐 갔다.

‘어? 이거….’

그가 형수에게 다가가 속삭이듯 물었다.

“…설마, 각성하셨어요?”

이에 화들짝 놀란 안미연이 마루를 바라봤다.

“그걸, 어떻게?”

정답인 모양이었다.

“둘이 뭘 그렇게 속닥거려?”

정가람이 의아한 듯 바라보자, 잠시 생각하던 안미연이 마루에게 말했다.

“나중에 따로 이야기해요.”

고개를 끄덕이며 관련 화제를 뒤로한 채, 마루가 정다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간 수련이 효과를 본 것인지, 제법 단단해진 눈빛에 슬쩍 미소가 나왔다. 현장 경험도 시켜 놨던 덕분일까?

‘잘 버텼네.’

감당키 어려운 전장 앞에서도 의지가 꺾이지 않은 게 기특해, 대견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손끝으로 내심 안도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잠시간 오라비의 칭찬 어린 손길을 만끽하던 정다솜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훈장 임명식은 어떻게 되는 거야?”

마루가 주변을 쭈욱 돌아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글쎄다.”

난장판이 된 거리를 보고 있노라니, 아무래도 이번 행사는 여기까지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

“이런 때일수록 더욱 성대하게 축제를 벌여야 합니다!”

트리니티 여왕은 전혀 예상치 못한 행보를 보였다.

“시민의 피해 역시 놀랍도록 적었습니다.”

헌터들과 근위대의 피해가 상당했지만, 시민들 중에서는 사망자가 한 명도 없었다.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승전보를 울려야 한다면서, 그녀는 오히려 더욱 화려한 임명식을 준비했다.

엉망이 된 거리를 정리하기 위한 시간?

하루면 충분했다.

원래는 한 해의 마지막을 마무리하기 위한 행사였건만, 어느새 새해를 축복하기 위한 축제로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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