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아발론.
#15. 아발론.
훈장 임명식은 아주 성대하게 이뤄졌다.
새해를 축하하는 자리와 어우러지며, 대규모 축제로서 영국 전체가 들썩일 만큼 판이 벌어졌는데, 각성자의 등장 이후 자제시 되던 화약성 폭죽도 잔뜩 터트렸다.
환경 문제니 뭐니 해서 사용을 위해선 이런저런 서류 절차가 상당히 까다롭고, 가격도 과거에 비해 뻥튀기가 되었건만, 트리니티 여왕은 이 모든 걸 감수해 가며 불꽃을 쏘아 올렸다.
각성자들이 만드는 불꽃이 비해, 깔끔한 맛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때로는 그 잔영에서 여운을 느끼는 경우도 많은 터라, 사람들은 간만에 보는 ‘진짜’ 불꽃놀이에 환호했다.
당연하게도 이번 사태의 희생자들을 위한 예배도 있었는데, 행사의 시작은 캔터베리 대주교의 미사로 시작됐다.
놀라운 건 그의 곁에 교황청의 상징인 성녀가 함께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종교 대화합!
―역사적인 순간이다.
―이건 교과서에 실릴 만한 장면이다.
―밑줄 긋고 체크해 놔라. 녹화 버튼도 필수다.
무거운 분위기로 시작된 행사였지만, 그건 딱 오전 중으로 끝을 맺었다. 오후로 넘어가면서 즐길 게 넘쳐 나기 시작하는데, 역시나 하이라이트는 훈장 임명식이었다.
이번 사태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사내.
정마루!
그의 가슴에 트리니티 여왕이 직접 훈장을 달아 주는 모습이 각국에서 나온 기자들에 의해, 전 세계로 널리 전파됐다.
―주모오오오오~!
―국뽕이 차오른다.
―오늘 하루는 만취하는 거다!
―개가 되자!
―왈왈! 으르르릉~!
―이 호로 잡것들아, 적당히 처묵고 빠져. 테이블이 썩어 나냐?
―히익! 욕쟁이 할망?
당연히 한국에서도 난리가 났다.
특히, 마루가 받는 훈장의 특별함이 더욱 부각되며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외국인에겐 작위 부여가 안 된다며?
―시민권 획득 전에는 그냥 명예 훈장임.
―그럼, 저건 뭔데?
―뭐긴 뭐야! 국뽕 마실 시간이지!
―주모오오오~!
놀랍게도 마루는 왕실의 특혜로 인해, 훈장에 시민권의 권한까지 자동 부여되며, 아예 작위까지 하사되어 버린 것이다.
최초이자 특수 사례로서, 놀랍게도 영국 내에서도 관련해서 별말이 없을 정도였는데, 이번 사태에 보여 준 마루의 활약이 그 정도로 놀라웠다는 것이다.
오히려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이젠 트랩퍼도 영국 시민인가.
―함께 가자!
―동방의 신사가 사는 나라!
―코리아~!
―신사들의 만남이다.
그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성녀는 남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번 사태는 그만큼 특별했던 것인데, 훈장 임명 뒤 시민권 부여 및 작위 수여까지, 일련의 과정에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뜻밖의 사태로 인해 한 방에 패스되어 버렸다.
아무리 빠르게 잡아도 이번 겨울은 지나야 할 거라 여겼건만, 하루아침에 해결되어 버렸으니, 이 같은 반응은 당연한 거였다.
시간 단축은 마루에게도 좋은 부분이지만, 그녀에게도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교황청에서 꾸준히 태클이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관계가 개선됐다고는 하나, 여전히 영국 왕실과의 거리감이 남아 있기에, 그들 입장에선 불편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캔터베리 대주교와 한 앵글에 잡히는 것도 그들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이번 사태가 워낙 심각했었던 터라, 할 수 없이 넘어가 주는 분위기였다.
만약 지금처럼 단축되지 않았더라면, 결국 아발론에는 마루 혼자 들어가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녀 나름대로 따로 시간을 내 봤겠지만, 내심 반반의 확률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진 만큼, 함께 돌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문일까?
그녀 역시 축제를 즐길 수 있었다.
* * *
영국 왕실 내에서는 사태가 끝난 뒤, 행사를 재개하기보단 바로 레메게톤의 본진을 습격해야 한다는 말이 더 많이 올라왔었다.
실제로도 그럴 생각으로 요원들을 움직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
“사라졌다고?”
놀랍게도 레메게톤이 자취를 감췄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용하던 시설 등은 남아 있었지만, 마치 유령 마을이라도 되는 듯, 사람의 흔적은 전혀 비치질 않았던 것이다.
이리 신속하게 발을 뺐다는 점에서, 애초에 그곳은 본진이라고 하기보단, 대외 창구용의 거점일 뿐이라는 의미였고, 내심 속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부분으로, 제법 굵직한 이면의 인사들이 들락거리기에 그럴싸하게 보인 것이다.
그러며 한편으로는 안도하는 마음도 가졌다.
레메게톤은 ‘유럽’ 이면의 연합체였다.
이는 즉, 이름난 대형 클랜들을 대거 상대해야 한다는 의미와도 같았던 터라, 은연중에 부담감이 컸던 것이다.
게다가 사흑련도 끼어 있던 판이니만큼, 칼을 어디까지 빼 들고 또 휘둘러야 할지, 견적을 내기도 쉽지 않았던 터라, 알아서 발을 빼 준 저들이 고마울 정도였다.
물론, 당한 게 있는 만큼 챙길 건 챙겨야 했고, 그 때문에 과감히 이번 사태를 공론화했다.
[레메게톤의 실체?]
[범죄자들의 소굴?]
[반인륜적인 행태?]
여러 다양한 의혹들을 연달아 제기하되, 그 모든 내용에 의미를 담아서 사건의 진실에 닿을 수 있는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데자르 등판했을 때 설마설마했는데.
―햐… 완전 테러 집단이었네.
―게이트도 레메게톤이 조작했다는 말이 있더만.
―아니, 그게 가능한 거냐?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게 가능하면 레메게톤의 기술력이 세계 최고라는 뜻 아닌가?
―또 모르지 키메라 연구까지 전문적으로 한다잖아.
당연히 그로 인해서 세계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냉정하게 판단하면, 이번 사태도 존슨 패밀리 아니었으면 제대로 막았겠냐?
―트랩퍼 역할도 컸지. 덕분에 시민 피해는 별로 없었잖아.
―피는 좀 봤지만, 사망자는 없더라.
―헌터들의 희생도 잊지 말자. 묵념!
―그분들이 진짜 영웅이다. 묵념!
―감사합니다. 묵념!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영국 왕실은 레메게톤 본진 공략에 관한 기사도 흘렸다.
이미 비어 버린 본진이지만, 이를 대승으로 적당히 포장한 것인데, 그렇잖아도 축제로 들썩이던 영국의 분위기가 한껏 폭발하기에 충분한 화제였다.
[트리니티 여왕의 공식 인터뷰]
[전통의 영국 특수 부대.]
[반파된 레메게톤?]
[성공적인 작전!]
이 같은 홍보를 통해 이면의 주민들은 적잖이 자존심이 상해 버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영국 왕실이 이를 갈고 있는 것도 문제였지만, 트리니티 여왕의 과감한 발표로 인해, 주변국에서도 호응을 해야 하는 분위기다 보니, 한동안은 숨죽여야 하는 흐름이 형성된 까닭이었다.
이는 저 멀리 사흑련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괜히 판돈을 던졌다가 깨져 버린 터라, 알게 모르게 무림맹의 눈치를 보는 실정이었다.
때아닌 폭우가 이면으로 쏟아지는 와중에, 멋대로 기우제를 지냈던 이들에 대한 관심도 역시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레메게톤은 어디로?]
태풍의 중심에 있는 집단, 그들은 놀랍게도 여전히 영국 내부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등하불명(燈下不明)! 이쪽 세상에 있는 격언인데, 참 괜찮은 것 같아.”
비모는 그리 말하며 일행들을 돌아봤다.
새 육신으로 갈아타며 이제는 테라가 되어 버린 자이로를 비롯해서, 제2 호위대인 테우르기아의 대원들이 보였다.
제1 호위대인 아르스 게티아는 새롭게 대원들을 구성 중이다 보니, 이들이 비모와 함께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바짝 긴장한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비모의 정체를 알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등허리가 오싹해질 수밖에 없었다.
데자르!
놀랍게도 비모는 현재 레메게톤 총장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뜻하는 바를 알기에 테우르기아 대원들이 긴장하는 거였다.
‘총장님은 죽었구나.’
‘꿀꺽… 동족 사냥꾼!’
일족의 간부를 향한 경외감도 있지만, 그 못지않은 두려움 역시 큰 것이다.
비모는 동족 포식을 통해서 상대의 모습까지 흉내 낼 수 있는 터라, 데자르의 모습으로 총장의 역할을 수행 중이었다.
‘이 굵직한 단체를 버려둘 수는 없지.’
식민지화 계획을 위한 전초 기지이자 돌격대로서, 이만큼 훌륭한 집단은 또 없을 터였다.
단지, 그 과정에서 변화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데자르와 비모!
그 둘의 포지션적인 차이점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는 다시 그늘로 들어간다.”
돌격대장인 데자르와 달리, 하르칸의 그림자였던 비모는 지금처럼 드러내 놓고 활동하는 게 그리 달갑지 않았다.
“데자르의 의도가 나쁘진 않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였어. 사흑련에서 며칠 활동해 봤는데. 기왕이면 그쪽처럼 점조직 형태로 넓게 퍼져서 행동하는 게 맞다고 본다.”
사실, 사흑련에서 활동했다기보단, 그쪽에서 활동하던 범죄자의 육신에 깃들었다고 봐야 옳았다.
무협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는 터라, 육체의 원래 주인은 하급 무사의 신분이었는데, 더 높은 힘과 지위에 대한 탐욕이 대단했고, 덕분에 이처럼 강림의 재료가 될 수 있던 것이다.
어쨌든 이 같은 총장의 변화로 인해, 레메게톤은 다시금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고, 영국 이면을 넓게 사용하며 발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문제가 없진 않았다.
각종 언론에서 왕실의 승리니 뭐니 하면서 떠들어 대니, 이로 인해 레메게톤의 다른 기둥들인, 거대 클랜들이 불만을 터트린 것이다.
“이렇게 숨을 거면 뭐 한다고 얼굴을 드러낸 겁니까?”
“총장 자리에 대한 재검토가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이라도 물러나시죠?”
비모는 이를 가볍게 정리했다. 언론은 무시했고, 클랜은 거래로써 잠재웠다.
“뮤턴트에 관한 지식을 공유하도록 하지.”
“…….”
“…….”
하나같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고, 이내 얌전한 걸음으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총장의 자리?
변함없이 그의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 대해 테라가 걱정스레 물었다.
“뮤턴트의 지식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비모는 웃으며 답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환란이다. 이 세계가 엉망이 될 정도로, 크게 화재를 일으키는 거지.”
이 세상을 두르고 있는 거대한 장막을 떠올렸다.
“밖에서 뚫을 수 없으면, 안에서 찢어 버리면 되는 거야.”
그리 말하며 서늘하게 웃는 모습에, 테라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쳐야만 했다.
* * *
트랩퍼!
그에 대한 값어치는 어마어마하게 상승 중이었다. 마루의 동네에서 발생했던 사건으로 충분히 증명되었다 여겼건만, 이번 영국 사태에서 보여 준 건 이마저도 아득히 뛰어넘어 버린 것이다.
설마하니 런던 시내 전체를 커버하는 재주라니.
이는 현 WHA의 협회장인 크라운의 결계술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때문일까?
왕실의 인사들은 마루에 대해 극도로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단번에 작위까지 허락한 것 역시 그런 이유였다.
하나 그런 이들도 주춤하게 만드는 제안이 있었다.
“아발론의 출입이라고요?”
“왕실의 기밀을 오픈한다는 건 좀….”
“허어… 트랩퍼가 대단한 활약을 하긴 했지만, 왕실의 보물까지 허락하는 건, 그리 달갑지가 않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리니티 여왕은 이를 밀어붙였는데, 클레어를 비롯하여, 그녀를 따르는 세력들을 최대한 앞세우며 기어이 출입증을 받아 낼 수 있었다.
관련한 문제로 한동안 손해를 봐야 할 것이나, 그녀는 마루와의 인연을 깊게 다져 놓는 게.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겼다.
‘드래곤 스케일 문제도 있고.’
그러면서 성녀 레아에게 이야기했다.
“너 때문에 내가 입은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마루 한 사람을 통과시키는 것도 골치였는데, 성녀는 자신도 함께하고 싶다 이야기하며, 그녀를 배로 피곤하게 만든 것이다.
성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 대신 저는 이번 활약에 대한 보상을 모두 포기했잖아요.”
그뿐만이 아니라 캔터베리 대주교와 한 앵글에 잡히는 서비스까지 해 줬다.
“차라리 받았어야지. 듣기로는 너도 그걸로 말이 많다며?”
실제로도 교황청에선 적잖은 소란이 일고 있었는데, 성녀는 별거 아니라는 태도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제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프랜차이즈 스타가 아닌, 진짜 성녀로 각성하고 난 뒤, 그녀는 본신의 능력을 보여 주면서, 교황청 내에서 꾸준히 입지를 다져 왔고, 나름의 성과도 있었다.
그런 만큼 이번 사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단 자신감이 있었다.
성녀는 그렇게 걱정을 뒤로한 채, 마루의 곁으로 향했다.
잠시 후,
아발론!
왕실의 보물이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