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심장에 해롭다!
#16. 심장에 해롭다!
PP의 몬스터들은 상당수가 현실에서 등장했던 몬스터들을 구현한 것으로, 그중에 특수 개체로 분류되는 아주 특별한 녀석들이 있었다.
정령과 요정!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표현하자면, 일종의 정신체에 가까운 게 정령이고 물질계와 닿아 있는 게 요정이라 할 수 있었다.
정령들은 자연의 기운이 모여서 탄생한다면, 요정은 좀 더 물질적인 방법으로 태어나는 존재들인 것이다.
대표적인 정령들을 언급하자면, 샐러맨더나 실프 그리고 운디네 등을 예로 들 수 있고, 요정들의 경우에는 페어리를 비롯하여 엘프 그리고 세이렌 등을 대표로 할 수 있을 터였다.
개중 페어리는 정령에 더 가까운 존재로, 한편에선 반정령으로 표현되는 상위 특수 개체였다.
여하튼 그런 존재들이 현실에 간혹 등장한 바 있었고, PP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를 구현해 내며, 수많은 유저들을 흥분시킨 바 있었다.
마루도 그 같은 기억이 선명했던 터라,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저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이는 걸 느꼈다.
“와….”
절로 터져 나오는 감탄사가 그의 심경을 대변해 줬다.
‘…왜 아발론인가 했더니.’
버킹엄의 비밀 던전은 놀랍게도 꿈과 환상이 넘쳐 나는 세계였다.
‘정령과 요정이 이렇게 많다고?’
그 특별한 개체들이 던전 가득 넘실대고 있던 것이다.
여왕에게 듣기로는 이곳 던전이 거대한 섬이라고 했으니, 눈앞의 풍경과 교차되며 참으로 어울리는 명칭이라 여겼다.
꺄르르르륵!
아하하하~!
하늘에는 자그마한 바람의 정령들이 신나게 구름을 쫓아 노닐고, 땅 아래는 대지의 정령들이 땅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저 한편의 물가에선 물의 정령들이 물장난을 치며 서로에게 물대포를 쏴 댔고, 불의 정령들은 서로 몸싸움을 하며 얽혔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크게 일어나는 불길에, 주변 정령들이 신이 나서 환호하는데, 그 환호성에 호응하듯 더 많은 불의 정령이 얽혀 대니, 돌연 산불이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그 순간, 마치 구급대원이라도 되는 듯, 물의 정령들이 황급히 움직이며 물대포를 쐈고, 어렵사리 진화된 불길 너머로 나무의 정령들이 등장하는가 싶더니, 잎사귀를 바르르 떨며 불의 정령에게 화내는 게 보였다.
삑! 삑! 삐익….
혹은,
삐약! 삐약! 삐야악!
묘하게 그런 식으로 들리는 느낌이랄까?
“허윽….”
마루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는데,
털썩!
곁으로 성녀 레아가 무릎을 꿇고 있는 게 보였다.
둘이 시선이 교차되고, 똑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심장에 해롭네요.”
성녀 레아의 이야기에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던전입니다.”
저 귀여운 생명체들을 보고 있노라면, 하루 종일 이곳에서 힐링을 받고 싶을 정도였다.
정령에게 머물던 시선을 돌려, 더 멀리 시야를 넓혀나가자 또 다른 생명체들이 속속들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정령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요정족!
곳곳에서 그들의 흔적들이 느껴진 것인데, 정신체인 정령과는 달리 인기척이 선명해서 모를 수가 없었다.
“뭐 하는 거야?”
뒤따라 들어온 트리니티 여왕이 레아에게 묻다가, 이내 둘의 표정을 보고는 실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심경을 이해한 까닭이었다.
‘하긴….’
아발론의 풍경은 정말로 환상적이다 보니, 그녀도 때때로 이곳에서 피서를 보내고는 할 정도가 아니던가.
자주 방문하기 때문일까?
사라라락….
바람의 정령들을 시작으로 여러 다양한 정령들이 그녀 주변으로 다가와 맴돌기 시작했다.
특히, 그녀의 옆구리에 맨 신검 주변으로 자주 달라붙는데, 그곳에서 풍기는 신성한 기운 때문이기도 하지만, 검의 고향이 이곳 아발론이기에, 더더욱 반기는 것일 터였다.
“아니. 지금까지 이런 걸 혼자서만 즐기고 있던 거야?”
성녀가 뿔난 얼굴로 트리니티 여왕에게 따지고 들었다.
“혼자라니. 클레어도 즐겼어.”
“이익….”
정점에 선 두 여인의 편안한 태도와 대화에도 불구하고 마루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돌입 전에도 경험한 바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 둘의 관계가 보통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때, 핸드폰 배경 화면에 성녀 레아의 사진을 올려놨을 만큼 그녀를 향한 팬심이 상당했던 터라, 관련한 정보는 제법 수집한 바 있었고, 그 때문에 그녀들의 특수한 관계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원래 여기가 이렇게 환상적인 동네는 아니었답니다.”
트리니티 여왕은 마루를 돌아보며 아발론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해 줬다.
“어마무시한 보스 몬스터가 있었거든요.”
감히 자부하건대 랭커보다 윗줄이라 할 만한, 가히 초월적인 존재가 터를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저 북극의 지배자인 얼음마녀, 그녀와도 견줄 수 있을 거라는 게 그녀의 주장이었다.
“만약에 던전이 터졌었다면, 영국도 북극처럼 거대한 마수지대가 되어 버렸을지도 모르죠.”
그런 초월적 존재를 어찌 해결할 수 있었을까?
이 타이밍에서 트리니티 여왕은 한 차례 호흡을 골랐는데, 정말 큰 비밀을 밝혀야 하기 때문이었다.
“마르코 회장님 덕분이에요.”
뜬금없이 세계적인 영웅이 언급됐다.
“뭐, 우리 측의 희생도 상당하긴 했지만, 마르코 회장님의 능력이 결정적이었죠.”
그러면서 여왕은 보스의 정체를 입에 담았다.
“본 드래곤!”
눈이 동그래지는 내용이었다. 그 순간 마루의 머릿속으로 마르코의 스킬이 스쳐 갔다.
‘네크로맨서!’
그도 그럴 게 본 드래곤의 또 다른 명칭은 바로 ‘언데드 드래곤’이지 않던가.
아니나 다를까.
“그분의 능력이 아발론의 보스를 통제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답니다.”
당시에도 이미 초인이라 불렸던 마르코였으나, 상대가 상대인 만큼 완벽한 통제는 어려웠다.
“잠깐씩 붙잡아 놓는 정도가 전부였는데, 그래도 덕분에 결정적인 기회를 얻을 수 있었죠.”
아주 힘겨운 사냥이었다.
“…사실, 그분의 도움으로도 승리를 장담하긴 어려웠어요.”
거기서 뜻밖의 지원군이 등장했다.
트리니티 여왕이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그녀 시야에 담겨 드는 무수히 많은 정령들이 보였다.
“저 아이들이 지금은 저렇게 쾌활하지만, 당시에는 본 드래곤의 저주 때문에, 검게 그을려서 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오염되어 있었답니다.”
과거에는 시꺼먼 그림자들만 가득했던 것이다.
그러한 저주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인 듯, 정령들도 힘을 보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숨죽여 살아가던 여러 요정족까지 한 팔 거들면서, 말 그대로 대규모 레이드급의 격전 끝에 퇴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정령들이 트리니티 여왕을 반기는 건, 사실 그녀도 당시 격전의 현장에 있던 ‘동료’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아발론을 해방시킨 이들은 하나같이 작위를 얻었는데, 그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이곳의 출입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다.
‘이제는 몇 안 남았지만.’
당시 격전의 생존자가 몇 되지 않기도 했지만, 이후로도 부상 및 후유증으로 일찌감치 은퇴하거나 사망한 이들이 적잖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마루가 물었다.
“던전의 일원이 심장을 공격할 수 있는 겁니까?”
일원이란 정령과 요정 등 소속 몬스터였고, 심장은 보스를 뜻했다.
이에 트리니티 여왕이 말했다.
“마르코 회장님 덕분이죠. 그분의 스킬이 본 드래곤을 통제하면서, 놈의 저주가 약해졌거든요.”
그로 인해 정령과 요정족들 일부가 정신을 차린 것이다. 던전에 속한 존재들이지만, 애초에 강제 집행이며 노예 계약이었고, 그 때문에 봉기한 것이다.
보스가 사라진 던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건, 이곳 던전의 코어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원래라면 던전 코어도 함께 제거해야 하겠지만, 마르코 회장이 이를 막았다.
[저들 역시 우리의 동료 아니겠습니까.]
마지막 순간 자신들을 도와줬던 정령과 요정족을 떠올리며, 어찌 보면 은인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라면서, 이곳을 저들의 터전으로 만들어 주는 게 어떠냐며 제안한 거였다.
과연, 그 의도가 틀리지 않았음일까?
시간이 흐르면서 정령과 요정족은 저주를 벗어나기 시작했고, 검게 그을렸던 육신도 점차적으로 제 색깔을 찾더니, 이내 지금처럼 귀엽고 깜찍한 심장 폭격기가 된 것이다.
꺄르르륵….
우헤헷….
트리니티 여왕과 함께 있기 때문일까?
작은 꼬마 정령들이 마루와 레아의 곁에도 맴돌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들의 신체 곳곳에 달라붙으며 애교를 떨어 댔다.
성녀 레아의 길고 풍성한 머릿결을 미끄럼틀처럼 타고 논다거나, 마루의 근육질 몸뚱이를 이리저리 짚어 가며 클라이밍을 하는 등, 그 작은 몸짓으로 아기자기하게 달라붙어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여러모로 심장에 해로운 생명체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허윽….”
저도 모르게 심장을 움켜쥐는 마루와 레아의 모습에 작게 실소하던 트리니티 여왕이, 이내 한 방향을 바라보며 작게 고갯짓을 하는 게 보였다.
여왕의 목례를 받는다?
호기심에 시선을 돌려 보니, 숲 사이로 긴 귀가 인상적인 그림자가 비쳤는데, 요정족의 일원인 엘프가 아닐까 싶었다.
그들도 여왕에게 가벼이 목례를 보냈다.
주변을 맴도는 정령들과 달리 친근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는데, PP를 통해서 저들의 폐쇄적인 습성을 어느 정도 알기에,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하다고 여겼다.
정령들도 그 방향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그 귀여움에 흠뻑 빠져 버린 탓에, 한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세월네월 하고 싶었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아발론을 방문한 이유를 떠올렸다.
‘오염된 여의주!’
트리니티 여왕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콧잔등을 타고 오르는 정령을 가벼운 재채기로 떨쳐 낸 뒤, 여왕을 향해 물었다.
“본 드래곤의 시체는 어디 있습니까?”
질문의 순간 눈가에 이채를 띄우는 여왕의 모습에서 느낌이 왔다.
아니나 다를까.
“요정족에 의해서 보호 중인데… 혹시…?”
말끝을 흐리는 그녀에게, 마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제 목적지는 그곳 같네요.”
그가 물었다.
“안내해 주실 수 있습니까?”
트리니티 여왕은 잠깐이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서서 길을 열었다.
그 뒤로 형형색색의 정령들이 군기를 맞춰 절도 있게 걸어가는 모습이란, 여러모로 심장에 해로웠다.
허윽….
* * *
본 드래곤!
아발론의 지배자였던 보스 몬스터가 죽은 자리에는 놀랍게도 거대한 호수가 형성되어 있었다.
마루는 이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사골국을 떠올렸다.
이유인즉,
놈의 뼈가 녹아내리며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 하얀 호수에서 흘러나온 게 바로 여왕이 차고 있는 신검이었다.
괜히 엑스칼리버와 비교하는 게 아니었다.
우우우웅….
문득, 마루는 자신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 묘한 울림이 일어나는데, 그와 동시에 강렬한 끌림을 느꼈다.
그것이 여의주의 신호라는 걸 알았다.
‘호수 속에 들어가라는 건가?’
여의주가 원하는 바가 전해졌다.
그 끌림을 좇아 저도 모르게 호수로 걸음을 하는 가운데, 트리니티 여왕은 의외로 이를 막지 않은 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이에 성녀가 의아한 듯 물었다.
“안 막아요?”
트리니티 여왕이 웃으며 말했다.
“성녀님께서 바라던 일 아니야?”
“…그렇긴 하지만.”
너무 태연히 반응하니 오히려 떨떠름했던 것이다. 이에 트리니티 여왕이 마루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왠지, 운명을 느꼈다고 해 두자.”
마루가 그녀에게 안내를 부탁할 때였을 것이다.
놀랍게도 그 시점에 마루는 이미 이곳 호수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정확히 이곳, 호수가 있는 방향을 보고 있었어.’
그 시선에서 거대한 흐름을 감지하며 전율했다.
애초에 본 드래곤의 시체가 어디 있냐고 묻기까지 했다. 마치 수거되지 않았다는 걸 안다는 듯, 그 잔재가 호수로 변한 걸 아는 건, 당시 현장을 겪었던 이들밖에 없건만, 따로 정보가 샌 것일까?
트리니티 여왕은 작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운명!
자신이 한 말이 정답인 것 같았다.
멀리 요정족들의 반응 역시 운명에 손을 들어 주는 느낌이었다.
호수를 지키며 외부의 침입을 막아서야 할 그들이 조용히 침묵하며 몸을 숨기고 있는 부분에서, 지금 이 순간이 정해진 흐름이라는 걸 확신한 것이다.
첨벙….
어느새 마루가 호수 속으로 발을 들였다.
그 순간이었다.
크르르르르르….
섬뜩한 울림과 함께 새하얀 호수 너머로 시꺼먼 어둠이 뭉쳐 드는 것이 보였다.
“허억….”
트리니티 여왕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켰다.
‘…이건, 설마?’
그녀 일생에 있어서 가장 공포스럽던 순간의 기억이 재생되며, 저 울림의 정체를 되새기게 만들었다.
‘본 드래곤?’
스멀스멀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착각이 아니었던 듯, 화들짝 놀란 요정족들이 숲에서 튀어나오는 가운데, 한데 뭉친 어둠이 크게 부풀어 오르더니 하나의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맙소사!’
트리니티 여왕의 안색이 새하얗게 탈색됐다.
‘정말로?’
어둠 속에서 본 드래곤이 부활하고 있었다.
그 순간,
화아아악….
마루의 등 뒤로도 어둠이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