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정화.
#17. 정화.
사일론은 여전히 작은 유아형의 외형을 하고 있었다.
하나 그 내면은 전혀 달랐다.
꽈아악….
조막만 한 손을 움켜쥐는 가운데, 그 안에 담긴 거력이 그를 뿌듯하게 만들었다.
‘얼추 반절 정도는 왔나?’
역시나 육성 시스템의 효과는 남다르다 여겼다. 이 짧은 기간에 이 정도까지 회복할 수 있을 줄 줄이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PP의 커뮤니티를 살폈다.
―드디어 마지막 십이지섬 개방!
―공지 올라오긴 했는데, 거기까지 간 유저 있음?
―이번에 여덟 번째 뚫었다고 하더라.
―한참 남았네.
사일론의 성장에 따라서 마계의 정보 역시 오픈되고 있던 터라, 능력의 회복에 맞춰 십이지섬이 전부 개방된 것이다.
그의 수준이 점차 본신에 맞춰지면서, 이제는 마계 본 대륙이 오픈 준비에 들어간 듯싶었다.
성장에 따라 PP에선 어느새 소년기를 넘어서 청년기로 다가가는 중이었지만, 현실에선 여전히 유아형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는 전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본신의 능력을 회복하고, 그 존재감이 커짐에 따라서 자연스레 알게 되는 부분이라고 해야 할까?
‘존재감을 최대한 죽여야지.’
비록 ‘반인반마’로서 인간의 핏줄을 지니고 있다지만, 마계의 혈통까지 품고 있기 때문일까?
이레귤러!
그는 이곳 세상에선 이질적 존재로서, 일종의 균열이 될 수 있는 불순물이었다.
반쪽은 인간이기에 금단의 술법을 통해 넘어오는 도플갱어에 비해선 영향력이 적다고는 하나, 일정 부분 피해를 끼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특히, 그에게 담긴 인간의 혈통은 이곳 세상과는 무관한 데다가, 결국 그가 나고 자랐던 뿌리는 마계에 있지 않던가.
유아형으로 존재감을 죽이는 건 일종의 편법으로서, 그가 세상에 끼치는 영향력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추가로 엔트라넷과의 계약이 일부분 그의 부담감을 덜어 주고 있기도 했는데, 굳이 비유하자면 그의 현 상황은 단수 여권과 같다고 봐야 할 것이다.
10년까지 연장되는 복수 여권과 달리, 1년 단기의 단수 여권처럼, 그의 체류 기간에는 여러모로 제약이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더더욱 존재감을 감추며 기간 연장을 꿈꾸고자 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 가며 숨죽이는 건?
여러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는 엔트라넷 계약서에 따라 최대한 얌전히 지내기 위함이었고, 둘째로는 균열이 커짐으로 인해 세상의 방벽이 무너지는 시간이 빨라질 터, 침공 시기를 최대한 늦추기 위함이었다.
‘이제 겨우 반절인데.’
본신의 능력을 회복하기도 전에 사달이 나면 안 되지 않겠는가.
결정적으로 한 가지 더,
‘제법 마음에 든단 말이야.’
체류한 기간이 그리 긴 건 아니었지만, 이곳 세상은 여러모로 홍미로운 것들투성이였다.
각종 오락거리를 비롯하여 먹거리도 그렇지만, 단순하게 일상 대기의 쾌적함까지, 여러모로 마계와는 다른 분위기가 매 순간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침공 시기를 늦추는 건 능력 회복을 위한 것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더 이 세상을 즐기기 위해, 그 나름의 방법으로 시간을 끄는 것이기도 했다.
커뮤니티를 확인하며, 각종 댓글에 낄낄거리다가 슬쩍 악플도 달고 키보드 배틀도 하길 한참, 배 속에서 울리는 신호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꼬르르륵….
이내 냉장고 한편에 붙은 전단지를 뜯어다가 번호를 눌렀다.
“짜장면 곱빼기에 탕수육하고, 맞다! 만두도 서비스로 주시는 거 맞죠? 그리고…….”
이래저래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었다.
* * *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이라고 해야 할까?
마루는 가족들과 함께 귀국하기로 이야기를 맞춰 놓은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아발론을 경험하는 동안, 가족들은 왕실의 귀빈 대우를 받으며 영국 각지를 관광하며 즐기는 중이었다.
훈장 임명식 축제를 대규모로 잡은 덕분인지, 영국 전역은 여전히 흥에 겨운 나날이 반복되는 터라,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물론, 레메게톤의 위협을 염두에 둔 만큼, 비밀 호위를 비롯하여 남다른 실력자들이 함께하며, 가족들의 안전을 지켜 줬는데, 놀랍게도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바로 인디안 존슨이었다.
그리고 이를 따르듯 패밀리들 역시 돌아가며 마루의 가족들을 호위해 줬는데, 새로운 패밀리를 위한 그들 나름의 호의였다.
“오늘은 또 어디를 관광시켜 드릴까요.”
존슨 패밀리는 가이드를 자처하기도 했는데, 각자 세계 각국을 돌아다닌 경험이 남달랐고, 거기에는 영국 역시도 포함되어있는 터라, 1일 가이드를 하기에는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게다가 각 패밀리마다 전문 분야가 또 달랐다.
“축구장 투어가 괜찮겠네요.”
“저는 박물관을 소개해 드리고 싶군요.”
“영국에 왔으면 역시 노팅힐 거리를 걸어 봐야죠.”
역사와 전통에 집중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즐길 거리를 전담하는 이도 있고, 영화 속 명소에 집중하는 이까지, 패밀리마다 개성이 뚜렷해서, 매일 새롭게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어느새 일주일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간 가운데, 슬슬 걱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직 안 나오는 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죠?”
정다솜이 가족들의 걱정을 대신 전달하며, 존슨을 향해 물어 왔다. 그녀는 마루가 왕실의 비밀 던전에 들어간 걸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만약을 대비해서 가벼운 언질을 해 놓은 것이다.
그간 패밀리들과 친해졌다고는 하나, 아무래도 정다솜과 존슨의 친분에 비할 바는 아니기에, 그녀가 나선 거였다.
이에 존슨이 이야기했다.
“걱정할 거 없어. 마루가 간 곳은 그렇게 위험한 곳은 아니니까. 오히려 휴양지에 가깝지.”
아발론 전투에는 참전하지 못했지만, 스승을 통해서 당시 이야기를 일부 전해 들었기에, 그곳이 이미 클리어된 던전임을 알았다.
뿐만 아니라 몬스터들도 중립 수준을 넘어, 평화 계열의 정령들이 한가득이다 보니, 크게 위험할 것도 없지 않던가.
게다가 트리니티 여왕의 전언도 있었다.
[큰 깨달음을 얻는 중이라, 조금 시간이 걸릴 듯하네요.]
존슨은 이를 상기하며 정다솜을 안심시켰다.
“듣기로는 휴양지에서 아주 제대로 때 빼고 광내는 중이라더라. 오히려 더 건강해져서 올걸.”
지난 사건의 날, 데자르와의 전투에서 마루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엿본 만큼, 거기서 또다시 성장한다는 게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콩나물도 아니고, 뭐 이렇게 쑥쑥 자라는지.’
하루하루가 새롭다고 해야 할까?
“요즘 시국에 해외여행 쉽지 않은 거 알지?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은 말고, 온 김에 최대한 즐겨. 아직 축제도 한창이잖아. 부모님께도 걱정하실 것 없다고 말씀드리고.”
그렇게까지 말하니 안심이 되는 듯, 정다솜이 한결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돌아갈 수 있었다.
이를 잠시 바라보던 존슨은 이내 발길을 돌려 트리니티 여왕에게로 향했다.
생각난 김에 재차 확인하고자 그녀를 찾은 것이다.
그의 표정에서 방문 목적을 이미 짐작한 걸까?
“아직입니다.”
트리니티 여왕이 그리 말하며 조금은 싸늘히 쳐다봤다.
정다솜 앞에서는 태연히 반응했었지만, 내심으론 걱정스러운 마음이 있었던 듯, 수시로 찾으며 마루에 관해 물었던 것이다.
여왕의 반응은 그로 인한 여파였다.
이에 민망하니 뒷머리를 긁던 존슨이 트리니티 여왕의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나가기는커녕 슬그머니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차 한 잔도 없습니까?”
“오늘만 벌써 세 번째인 것 같은데요. 질리지 않습니까?”
“크흠… 그러면 커피라도….”
연달아 터지는 민망함에 뒷머리가 남아나질 않았다.
그 모습에 결국 표정을 풀며 실소해 버린 트리니티 여왕이 따로 커피를 준비해서 내어 줬다.
그의 방문을 핑계 삼아서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진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
후루룩….
침묵 속에서 목울대만 꿀렁이는 가운데, 문득 존슨이 물었다.
“정말로 어떻게 된 건지, 말씀 안 해 주실 겁니까?”
그가 이처럼 애태우는 이유가 있었으니, 아발론 내에서 벌어진 일을 전해 듣지 못한 까닭이었다.
괜찮다는 소리만 들었지, 상세한 내용까진 모르고 있으니, 걱정스러운 마음이 뒤따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트리니티 여왕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건 당사자에게 직접 듣는 게 좋겠네요.”
여전한 이야기에 푸욱 한숨을 내쉰 존슨이 어느새 비어 버린 커피 잔을 내려다보다, 짧게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마셨습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집무실을 나서는 존슨의 뒷모습에, 트리니티 여왕은 존슨이 그토록 궁금해하던, 아발론에서의 ‘환상’을 떠올렸다.
본 드래곤과 마루 그리고 기적!
그건, 정말로 꿈 같은 순간이었다.
* * *
크르르르르르….
본 드래곤이 그 형상을 갖추며 피어를 터트렸을 때, 트리니티 여왕을 비롯해 숲 속의 엘프들까지, 모두가 얼어붙었다.
현기증이 일며 무릎이 휘청였다.
과거, 너무나도 지독했던 경험이 악몽처럼 차오르며 그들의 발목을 휘감은 것인데, 그 순간 피어난 새로운 어둠이 마치 광명처럼 모두를 일깨웠다.
어둠을 꿰뚫는 어둠이라고 해야 할까?
화아아악….
마루의 등 뒤로, 마치 날개처럼 펼쳐진 어둠의 장막이 놀랍도록 크게 확장되더니, 이내 본 드래곤의 형상을 뒤덮은 것이다.
그 형체가 시야에서 사라지며 찾아온 안도감에, 모두의 무릎이 크게 흔들리는 가운데, 한 여인이 걸음을 내디뎠다.
성녀 레아!
그녀가 조용히 목소리를 높였다.
아아아아~!
마치 흥얼거리듯 천천히 음을 높여 나가는데, 그에 맞춰서 은은한 성력이 뿜어져 나오더니, 주변 일대를 휘감는 게 보였다.
기이한 건, 그녀가 내뿜는 빛이 강해질수록 마루가 내비치는 검은 장막도 진한 칠흑빛이 되어 간다는 점이었다.
어둠에도 농도가 있다는 듯, 그렇게 깊은 어둠을 품은 장막 너머로 본 드래곤의 포효가 들려왔다.
크아아아아악….
앞서의 피어와는 달랐다.
그건 정말로 생사의 경계에서나 나올 법한 절망이며 절규였다. 처절한 비명은 지난 악몽 너머로 영광의 시간을 일깨워 줬다.
세계적인 영웅 마르코와 함께 놈을 무찌르던 그날, 그 순간을 되새겨 주더니, 이내 굳어 버린 몸과 다리를 움직이며 걸음을 내딛게 만들었다.
희망의 순간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포스를 일으키는 가운데, 하늘 너머로 형형색색의 광채가 날아드는 게 보였다.
꺄르르르~!
에헤헤헷!
그건 아발론의 정령들이었는데, 무수히 많은 정령이 날아들더니 호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성녀의 노랫소리에 맞춰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정령들의 기운이 뒤섞인 듯, 성녀의 성력이 무지갯빛으로 물들어 가는 가운데, 돌연 검은 장막 너머로 푸른빛 광채가 솟구쳤다.
파아아아아앗!
트리니티 여왕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건….’
광채라 여겼던 건, 거대한 무언가의 몸짓이었다.
푸른 바다를 닮은 물빛 비늘과 하늘빛 아우라, 그 너머로 피어나는 찬란한 별빛까지, 미지와의 조우였다.
* * *
마루는 갑자기 깨어난 본 드래곤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기이하게도 그는 이렇게 될 걸 알았던 듯, 당연하다는 얼굴로 눈앞의 기현상을 바라봤다.
사자유희!
그 특별한 신물이 일찌감치 경고를 한 것이다.
‘해결 방법도 알겠지?’
마루의 물음에 사자유희는 당연하다는 듯 그림자를 벗어나 덩치를 부풀렸고, 겁 없이 떠도는 망자를 향해 저승왕의 권한을 휘둘렀다.
[망자는 저승으로]
그 덩치가 조금 부족할 수도 있었지만, 시기적절하게 밀려든 성녀의 축복이 힘을 실어 주니, 사자유희는 신나게 일렁거리며 망자를 집어삼킬 수 있었다.
이후로는 치열한 힘겨루기의 시간이었는데, 그 와중에 마루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어? 어어… 포스가 빨려 나간다!’
배 속이 허해지는 기분에 깜짝 놀라야만 했는데, 오래지 않아 상황을 이해하며 진정할 수 있었다.
여의주에 담긴 부정하고 삿된 기운들이 응당 그러해야 한다는 듯, 너무도 자연스레 본 드래곤에게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우우웅… 우웅… 우우우웅….
그로 인해 사자유희가 힘겨운 울음을 터트릴 때였다.
꺄르르륵….
꺄하하하….
새로운 물결이 들이치며 등을 떠밀어 준 것이다.
우우우우우웅….
과연, 기운을 차린 사자유희가 다시금 신나게 일렁이기 시작했고, 본 드래곤의 망령도 재차 절규하며 울부짖었다.
그 지독한 힘겨루기의 끝에서,
[고생했다!]
마루는 익숙한 음성을 들었고,
파아아아아앗!
여의주가 완전히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