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꺼멓게.
#24. 꺼멓게.
B급 A형 헌터 정마루!
그는 건어택이란 이명만으로도 충분히 몸값이 상당했건만, 이젠 트랩퍼라는 이명까지 더해지면서, 실로 어마어마한 몸값을 지닌 특급 헌터가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그래서일까?
“마루 씨가 팀장이 되는 걸 반대하는 녀석은 아무도 없어.”
김연희의 이야기에 이선희가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등급만 B급이지 랭커나 다름없는 전력이니까.”
건어택의 이름값만으로도 어느 정도 인정하던 분위기였는데, 트랩퍼까지 등장하면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뻥튀기된 몸값이었지만, 영국행이 끝난 뒤에는 일말의 의문마저 지워지며, 말 그대로 완벽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이선희는 김연희의 이야기 속에서 일말의 불안감을 읽고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팀장 계약이 취소될 일은 없으니까 걱정 마.”
“…정말이지?”
“그래. 이번에 영국에서 확답도 받아놨어.”
“이이이익! 그런 건 일찍 좀 말해줘.”
“전에도 괜찮다고 했잖아.”
“그때하고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
“왜? 사람은 같은데.”
이렇게 나와버리면 할 말이 없었다. 입만 뻐끔대는 김연희에게 이선희가 이야기했다.
“뭐, 계약 조건을 크게 조정해야 하긴 하겠지만, 마루는 혜성 1팀 팀장 자리를 맡겠다는 생각은 변함없더라.”
그러면서 특수조건 하나를 언급했다.
“따로 외부에 개인 팀을 하나 운영하고 싶다더라.”
눈살이 찌푸려지는 내용이었다. 특히나 저처럼 대놓고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언뜻 무시당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던 터라, 불편한 기색이 차오르고 있었다.
이에 이선희가 바로 이야기를 이었다.
“오히려 숨기는 것보단 괜찮다고 생각해.”
또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는데, 물론 표정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니었다.
“랭커급 전력이잖아. 게다가 활용성은 일반 랭커들보다 윗줄이라고 평가받고 있어. 오히려 그 정도 양보는 당연한 거야.”
꾸준히 이어지는 설득에 결국 김연희도 납득하고야 말았다. 어느 하나 틀린 이야기가 없던 탓이다.
“…그래서 다른 팀은 어떻게 운영할 생각이래?”
김연희의 물음에 이선희는 눈치를 살짝 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모른다는 뜻이었고, 이에 김연희는 재차 인상을 구겨야만 했다.
“꼭 이렇게까지 양보해야 돼?”
이에 이선희가 단호하게 말했다.
“당연하지!”
영국 사건의 현장에 있었기에, TV로는 알 수 없는 마루의 대단함을 더욱 생생히 느꼈고, 그 때문에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일까?
“어떤 식으로 팀을 운영할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지원해 주도록 해.”
덕분에 김연희의 표정은 완전히 구겨져버렸는데, 이에 이선희는 그녀의 주름살을 빳빳이 펴줄 수 있는 화젯거리도 던져야만 했다.
“슬슬 준비하자.”
“…정말?”
별다른 내용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척하면 척이랄까?
과연, 예상대로 김연희의 표정이 확 펴졌고, 이에 이선희도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더 이상 혜성은 그룹에 묶어둘 순 없지.”
“드디어 독립하는구나!”
두 주먹을 불끈 쥐는 김연희의 모습에, 아주 살짝 찬물을 끼얹어줬다.
“그러니까 마루와의 계약이 중요해. 한동안 얼굴마담 역할도 해 줄 테니까.”
김연희의 표정이 다시금 살짝 구겨졌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풀어버렸다. 그만큼 이번 사안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그녀의 물음에 이선희가 핸드폰에 번호 하나를 띄웠고, 김연희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굳 초이스!”
이내 통화버튼을 찍었다.
* * *
혜성과 태호!
그 두 그룹이 라이벌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일까?
“기어이 나한테 방아쇠를 넘길 줄이야.”
적호 길드의 수장 강호구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핸드폰을 바라봤다. 좀 전 통화를 나눴던 이의 번호가 찍혀있었다.
[얼음여제]
무려 라이벌 관계에 있는 혜성 길드의 대표격 인사가 다이렉트로 통화를 건 것이다.
그 내용을 떠올리니 실소가 절로 나왔다.
“뜻밖이라서 효과는 확실하겠네.”
이선희는 그에게 혜성의 약점을 던져줬고, 그는 이걸 잘 활용해서 태호 그룹 내의 인지도를 올릴 생각이었다.
혜성 ‘길드’가 ‘그룹’에서 갈라서기 위한 도화선에 그가 불을 붙이는 것이니만큼, 임팩트는 확실할 터였다.
짧은 시간 적호 길드를 휘어잡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룹의 휘하에 있는 상황이니만큼, 이번 거래는 그에게는 훌륭한 발판이 되어줄 터, 어디까지 도약할 수 있는지는 그의 개인 역량에 달려있었다.
그리고 충분히 뛰어오르게 된다면?
‘나도….’
그 역시 독립을 꿈꿀 수 있을 터였다.
* * *
베르도아 치토르 드래픽!
해를 품은 검이라는 뜻으로써, 한때 용사의 검으로 불리다가 마족의 손아래 타락해버린 성검, 반칼죽에겐 오랜 세월 꿈꿔온 하나의 바람이 있었다.
[용사님의 핏줄에 몸을 맡기는 것!]
전사라 불리던 용사의 누이가 저 지옥과도 같은 마계의 한편에서 아이를 잉태했음을 알았다.
뿐만 아니라 그 존재가 마계에서 대단한 위치에 올랐다는 소문도 들었다.
과연 용사의 핏줄이라며 감탄하는 한편, 비록 타락해버린 비루한 몸뚱이나마, 다시금 그 핏줄에 맡기고 휘둘리고 싶은 갈망이 있었다.
그 때문에 지구로 넘어온 이후에도 꾸준히 힘을 키우며, 차원 너머 마계로 돌아갈 방도를 찾던 게 아니던가.
하지만 이게 웬일?
‘용사님의 핏줄이 눈앞에 나타나다니!’
비록 타락했다고는 하나, 한때나마 성검이었으며 용사의 무구였다. 검신 깊이 용사의 인자에 대한 각인이 되어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용사의 흔적에 누구보다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처음 보는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용사의 핏줄임을 알아볼 수 있던 것이다.
과연 핏줄이라고 해야 할지, 미묘하지만 용사의 모습도 일부 묻어있었다.
-주인님의 모습이…아아!
왜 하필 아이의 형태인 건지, 저도 모를 아쉬움이 새어 나왔다. 좀 더 장성한 모습이었더라면, 분명 용사를 쏙 빼닮았을 것 같단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주인님…주인님…주인님….
쉼 없이 반복되는 그 외침으로 인해, 마루는 대략적인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맙소사! 사일론이 반인반마인 건 알았지만, 설마 용사의 핏줄이었단 말이야?’
반칼죽의 소망에 대해선 들었지만, 그 용사의 핏줄이 누구인지는 듣지 못했었던 터라, 그는 눈앞의 현실에 몸서리치게 전율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모르는 사일론의 경우, 이 갑작스런 칼부림에 당혹스럽기만 할 따름이었다.
만약, 검신에서 한 점의 살기라도 느껴졌더라면, 당장 잡아다가 꺾고 비틀며 검날을 찢어버렸으리라.
하지만 기이할 만큼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데다가, 묘한 감동의 물결까지 흘러나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기이하게도 그 역시 알 수 없는 친밀감을 느끼고 있던 것이다.
‘뭐지?’
의문의 순간 뜻밖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헬레나 님!
사일론의 동공이 부릅떠지고, 그의 손이 허공을 부유하는 반칼죽을 단숨에 움켜쥐었다.
-아아…이 느낌! 이 감촉! 아아아아….
황홀해하는 칼죽이의 외침과 달리, 사일론의 눈가에는 묘한 분노가 차오르고 있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으득! 감히, 어머님의 이름을 부르다니. 네놈 정체가 뭐냐?”
그리고 이어지는 진실.
-용사님께서 사용하시던 성검, 베르도아 치토르 드래픽! 이렇게 전사님의 아드님께 인사드립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성검…이라고?’
어렴풋이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마계 대장간을 구르다가 고철이 됐단 소문이 있었는데….’
실제로도 수많은 성검이 마족들의 실험 아래 고철덩이가 되는 게 일상이었다. 그들이 침공한 세계는 한둘이 아니었고, 그만큼 많은 성검도 약탈해온 것이다.
모친의 세계에서 넘어온 성검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고 여겼다.
한데, 이 무슨 뜬금없는 등장이란 말인가.
거짓이라 부정하려다가도 묘한 끌림으로 인해 고개를 저을 수가 없었다. 특히 손에 착 감기는 이 느낌은 또 어떠한가.
꽈드득….
저도 모르게 두 손 가득 움켜쥐는 가운데, 반칼죽이 작게 움츠렸던 몸집을 키우며, 본연의 모습과 형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러나는 찬란한 검신이 햇빛을 한껏 받아들였다.
타락하면서 잃어버린 본연의 정체성이 용사의 핏줄인 사일론과 만나면서 다시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해를 품은 검!
쏟아지던 햇빛이 스며들고 넘쳐흐르는가 싶더니 이내 검신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 * *
그건 마치 종의 본능과도 같은 거였다.
부르르르….
비모는 팔뚝을 타고 오르는 닭살과 등허리를 찌르는 전율에, 저도 모르게 창밖을 내다봤다.
런던 시내의 환상적인 풍경이 발아래로 펼쳐져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하늘 높이 솟구쳐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이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구로 넘어온 수많은 도플갱어 일족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그들이 바라보는 건 푸르른 창공도 떠다니는 구름도 아니었다.
이 거대한 세계에 속해있는, 어떤 미지의 흐름이었다.
눈으로 본다기보단 영혼으로 느낀다고 할까?
인간 육신의 습관적 양식에 의해 시선만 올린 것이지, 그들 시야는 멍하니 초점 없이 부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동시에 한 단어를 떠올렸다.
‘용사…?’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린다.
‘…마왕님?’
뜻밖의 단어가 연상된 까닭이었다.
* * *
현무암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창밖을 바라봤다. 오랜만에 돌아보는 대한민국의 풍경은 과거와 크게 달라져 있었다.
자유를 얻은 이후로는 해외로만 돌아다녔고, 간혹 한국에 오더라도 잠깐 마루를 지원하고는 바로 떠나버린 게 전부였다.
하나 이번에는 제법 시간을 들여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이는 바로 그의 옆에서 열심히 고급 사료를 챱챱대는 검은 고양이 때문이었다.
백호신물의 지킴이 메로였다.
이제는 세상이 단둘밖에 남지 않은 동류가 아니던가.
물론, 오랜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쭈욱 생을 이어온 그와 달리, 메로의 경우에는 계승을 통해 매번 새로운 지킴이가 탄생했으니, 일말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본질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신물의 수호자!
워낙 자유분방한 백호 신물의 지킴이들 특징을 떠올리며, 이렇게 만남 김에 잠시간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한 것이다.
고양이 카페!
오붓한 시간을 위해 찾은 곳이었다.
작은 공원을 끼고 있어서 창밖의 풍경도 제법 괜찮아, 여러모로 운치가 있다 여겼다.
그렇게 그는 커피와 각종 디저트를 메로는 최고급 사료를, 맘껏 즐기면서 느긋한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음?’
현무암과 메로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창밖의 어느 한 지점을 주시했다.
‘이건…?’
…냐앙?
* * *
대개 용사는 탄생의 이전부터 나름의 전조 현상이 나타나기 마련인데, 그 간단한 예를 들자면 용사의 형제자매는 일부나마 용사의 기운을 닮게 된다는 점이었다.
신의 가호가 일찍이 내려앉으며, 그 가족과 주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사일론의 모친이자, 용사의 누이였던 헬레나가 뛰어난 전사로써 성장할 수 있던 것 역시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용사의 핏줄인 것일 뿐, 정말 용사는 아니었다.
그 때문에 많은 기대를 할 수는 없었다.
반칼죽은 이미 타락해버린 자신의 검신에서 마기를 완전히 걷어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묵은 때를 벗기는 건 어렵겠지만, 그래도 먼지 정도는 털어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이게 웬일?
오히려 먼지층이 더욱 두터워지고 있었다.
그 증거로 태양 빛을 삼키며 붉게 타오르던 검신이 어느새 검붉은 빛으로 오염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마계대공 사일론!
그 절대적 직위에 따른 강대한 마기가 흘러든 결과일까?
아니다. 반칼죽은 그런 것보다 좀 더 근본적인 무언가가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답을 도출해냈다.
한때나마 용사의 검이었기에, 신성한 가호를 받은 검이었기에, 결코 모를 수 없는 대적자의 기운, 그게 사일론의 품 안에서 느껴졌던 것이다.
‘…마왕?’
그 순간 검신이 꺼멓게 죽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