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대적자?
#25. 대적자?
성녀 레아!
지난 영국행에서 적잖은 말썽을 일으켰던 탓일까?
그녀는 한동안 교황청에서 요구하는 임무를 착실히 수행해야만 했다.
거기에는 던전 탐사 및 헌팅도 있었지만, 여러 국가 및 길드의 인사들과 만나는 것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역대급 성력을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미모 역시도 역대급이다 보니, 그녀의 인기는 그야말로 최고였고, 교황청을 대표하는 최고의 카드이기도 했다.
여전히 대외적으로는 프랜차이즈 스타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박혀 있었지만, 전문가들은 순수한 실력만으로 그녀를 인정한 지 오래였다.
오늘 역시 그렇게 마련된 자리였는데, 그나마 다행이라면 하하 호호 웃어 대면서, 가식스러운 표정을 짓는 자리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크워어어어어!
사납게 포효하며 거대한 날갯짓을 하는 몬스터가 보였다.
지상 최강의 몬스터라 불리는 존재.
드레이크!
어지간하면 놈의 영역에는 발을 들이지 않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사냥에 나서야만 했다.
저쪽에서 먼저 내려온 까닭이었는데, 일종의 영역 확장에 의한 대대적인 레이드가 펼쳐진 상황이었다.
스위스에서 발생한 사태로서, 랭커가 없는 탓에 교황청에 의뢰가 들어갔고, 이처럼 성녀가 출동해서 한 팔 거들게 된 거였다.
[스킬 : 빛의 가호]
그녀의 전신에서 찬란한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일행들을 덮쳐드는 피어를 걷어 냈다.
최후의 발악이련가.
외침 가득 저주의 향기가 물씬 풍겨 나왔지만, 그녀의 충만한 성력 앞에 깨끗이 정화되며, 헌터들의 정신을 말끔히 씻어 줬다.
“지금이다!”
“화력을 집중시켜!”
뿐만 아니라 부상자들마저 다시금 일으켜 세우니, 드레이크의 두 눈에는 깊은 절망감이 깃들었고, 오래지 않아 그녀의 가호를 받은 헌터들에 의해, 생의 마지막을 맞아야만 했다.
쿠우우웅….
그 거대한 동체가 땅에 박히는 순간,
“우와아아아아!”
“드레이크를 잡았다!”
“우리가 해냈다!”
헌터들이 환호하며 승리의 외침을 한껏 터트렸다.
지상 최강의 몬스터라 불리기 때문일까?
당연하게도 레이드 장면은 실시간으로 중계가 되고 있었는데, 성녀의 지원을 통해 패배가 아닌 승리를 확신했기에 이뤄진 라이브기도 했다.
덕분에 여러 커뮤니티도 제법 뜨겁게 달궈지는 상황이었다.
―역시, 레아 공주님!
―최강의 성녀님.
―아니, 랭커도 없는데 사상자가 제로라고?
―성녀님도 랭커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이번에는 뒤에서 버프만 걸어 줬잖아.
사람들이 환호하는 건, 이번 레이드의 중심에는 랭커가 한 명도 끼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성녀 레아가 랭커로 분류된다고는 하나, 그녀도 전면에 나서기보단 후방 지원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스위스에서 요구한 바가 딱 거기까지였기 때문이다.
물론, 원래 그게 그녀의 역할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이전 성녀의 레이드를 아는 이들은 수긍하지 않을 터였다.
―성녀님은 버프보단 역시 주먹질이지.
―현실판 몽크!
―간만에 화끈한 한판 보는 줄 알았는데.
―작년부턴 버프에 좀 더 치중하는 것 같긴 하더라.
―공주님의 맴매가 보고 싶다!
―하악… 하악….
그 와중에 자연스레 언급되는 이가 있었다.
―확실히 아이언슈트가 압도적이긴 하네.
―실전력에 랭커가 없었다고는 해도, 하나같이 알아주는 네임드급 헌터들로 구성된 전력인데, 저렇게 모아 놓고도 피똥을 싸네.
―아이언슈트는 그냥 혼자서 뚜까 팼잖아.
―그래서 요즘 말이 많잖아.
―아이언슈트 vs 인디안 존슨!
―누가 더 강할까?
새롭게 떠오르는 화두로서, 마족 셋을 혼자서 끌고 갔던 존슨과 드레이크를 혼자 때려잡은 아이언슈트, 언제나 그렇듯 최강 대전은 최고의 이야깃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언슈트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꽤 높은 건, 마족과 존슨의 대결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아이언슈트가 드레이크를 잡은 건, 정식으로 촬영까지 돼서 오픈되어 있단 점 때문이었다.
성녀 레아는 휴식 시간을 통해 커뮤니티를 구경 중이었고, 덕분에 그녀도 이런 흐름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녀의 머릿속에도 마루의 얼굴이 고스란히 그려지고 있었다.
아이언슈트의 정체를 알기에 자연스러운 흐름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녀가 마루를 떠올린 건, 커뮤니티와는 조금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균열이 또… 커졌어?’
성녀로서 각성한 이후, 그녀는 하루하루 많은 걸 깨우쳐 갔는데, 거기에는 세계 방벽을 향한 시야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조금 전, 막 드레이크 사냥을 마쳤을 때, 새롭게 균열이 커진 걸 느낀 것인데, 그 때문에 순간적으로 드레이크 사냥의 여파라고 착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내 그게 아님을 알았고, 자연스레 그 흐름을 쫓아 시선을 던져 보냈다.
‘…마루님?’
기이하게도 그 끝에서 마루의 흔적을 느낀 것이다.
* * *
시꺼멓게 물든 검신에서 불길한 기운이 물씬 풍겨져 나왔다.
‘이게, 뭔…?’
사일론은 두 눈을 부릅뜨며 이를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태양 빛을 삼켜서 붉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 모친 헬레나의 잔영과 향수를 느끼고 있었다.
그 포근함에 저도 모르게 두 눈이 스르륵 감기려던 찰나였다.
‘마왕?’
재수 없는 최악의 구린내가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어째서?’
그 같은 의문을 길게 느낄 시간은 없었다.
―끄아아아아악….
반칼죽의 비명이 손끝을 타고 올라온 탓이었다. 당혹감 속에 다급히 손을 놨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내부에서 ‘뭔가’를 내려받으며, 저 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것 정도는 알았고, 일단 손을 놔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우우우우우우웅….
시꺼멓게 죽어 버린 검신 위로, 사이한 기운이 물씬 풍기는 가운데, 문득 마루가 움직였다.
화아아악!
그와 동시에 검붉은 불길이 치솟으며 마루를 뒤덮었다.
* * *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검을 쥔 건 아니었다.
여의신주!
빛과 어둠, 그 모든 걸 아우르는 특별한 기운이 그에게는 함께하지 않던가.
[스킬 ― 사신무]
그 나름의 확신이 있었다.
사자유희!
든든한 지원군 역시 등을 떠밀었다.
―끄아아아아아악….
반칼죽의 비명도 그를 이끌었다.
그 결과,
화아아악!
거대한 어둠이 그를 덮쳤다.
그리고,
거기서 볼 수 있었다.
콰아아앙… 콰아앙….
우워어어어어~!
끄아아악!
거대한 전쟁, 세계와 세계가 맞부딪치는 광경, 그것은 거대한 혼란이었다.
빛과 어둠이 맞부딪친다.
‘아….’
마루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기억이구나!’
반칼죽의 과거를 엿보고 있던 것이다.
사신무를 통해 여의신주의 기운을 한껏 끌어내고, 사자유희를 통해 어둠의 기운을 통제하려 든 결과, 반칼죽의 내면 깊숙이 빠져든 것이다.
거기서 볼 수 있었다.
‘…저게, 마왕!’
어지러이 소용돌이치는 어둠의 군세의 중심, 태풍의 눈처럼 홀로 고요한 존재가 보였다.
오싹!
침묵 속에서도 전해지는 전율적 존재감이란, 저도 모르게 등허리가 저릿해지며 무릎이 풀릴 것 같았다.
그 순간 마루는 거대한 빛의 기운이 전신을 휘감는 걸 느꼈다.
‘이건…?’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지금 반칼죽의 기억 속에 있었고, 이 모든 건 반칼죽의 시야에서 벌어지던 일이었다.
말인즉, 그는 현재 반칼죽이었다.
드론이라도 띄운 듯, 이 넓은 시야는 평소 반칼죽이 보는 세상의 풍경이리라.
눈으로 보는 게 아닌,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다.
“드디어 최종전인가.”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온다. 얼굴을 확인했을 때 정체도 알게 됐다.
‘용사!’
반칼죽의 기억이 주는 영향인지, 사일론과 닮은 외형 때문인지, 그가 용사라는 걸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가자 베른!”
아마도 반칼죽의 본명인 베르도아 치토르 드래픽을 줄인, 일종의 애칭이리라.
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화르르르르륵!
태양의 빛을 한껏 받아들이며 반칼죽의 검신이 붉게 타올랐다.
마치 지상에 강림한 태양이 이러할까?
용사는 그 뜨거운 불길을 휘두르며 매섭게 돌진하는데, 그 기세만으로도 어지간한 몬스터는 비명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뜨겁게 녹아내리며 즉사해 버리고는 했다.
저돌적으로 어둠의 군세를 가르며 돌진해 들어갈 때, 용사의 앞을 막아서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그 강대한 기세는 상대가 보통이 아님을 알게 만들어 줬는데, 반칼죽의 기억으로 인해 이들의 정체도 알게 됐다.
‘마계 대공들!’
사일론 시대 이전의 대공들이리라.
과연, 저들 중 몇이나 현시대까지 남아 있을까?
마루는 그들 생김새를 일일이 머릿속에 저장시켰다. 차후 사일론에게 물어보며 비교할 생각이었다.
할 수 있다면 저들의 전투 스킬이나 스타일 등도 살피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전장의 흐름상 제대로 관찰할 여유는 없을 듯싶었다.
“거기까지다!”
대공들의 외침, 하지만 그들은 용사의 진격을 막지 못했다. 막을 수 없었다고 보는 게 옳았다.
용사의 뒤를 따르는 그림자가 있던 탓인데, 영광의 역사를 써 내려온 용사 파티가 그 정체였다.
전사를 비롯하여 궁수 그리고 성녀와 암살자 등, 다양한 직업과 종족들이 뒤섞인, 중간계의 최정예들이 용사의 뒤를 받쳐 주고 있었다.
그 덕분일까?
“멈추지 마!”
“여긴 우리에게 맡기고 가!”
“달려!”
용사는 그들을 믿으며 재차 도약했고, 이내 저 깊은 어둠 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마계 대공들이 이를 막으려 뛰어들지만, 용사 파티의 일원들이 적절히 개입하며 그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렇게 마왕의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풋내 나던 애송이가 이젠 제법 그럴싸해졌군.”
마왕의 이야기에 용사와 반칼죽이 동시에 기세를 일으켰다.
이들 격돌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과거에 마왕의 분신과 한차례 부딪친 바 있었는데, 분신임에도 불구하고 패퇴하며 물러나야 했던 것이다.
옛 기억 때문에 이번 최종전에 망설임이 들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를 일으킬 수 있던 건, 마왕의 말처럼 용사는 더 이상 풋내 나던 애송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충분한 경험과 경력을 쌓았다.
반칼죽의 도움 없이, 그 본연의 실력만으로도 이미 중간계 최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실력에 반칼죽의 신력이 얹어졌다.
‘할 수 있다!’
확신이 그의 등을 떠밀어 줬다.
“우오오오오오오!”
포효와 함께 오러가 솟구치고, 반칼죽이 그에 호응하며 검신 가득 태양의 기운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그 기세가 사방으로 퍼지며, 고요해야 할 태풍의 눈 속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켰다.
“좋군!”
마왕의 한껏 흥이 오른 얼굴로 기운을 끌어올렸다.
태양 너머 시꺼먼 어둠이 솟구치고, 이내 두 세계를 대표하는 절대자들이 격돌을 시작했다.
반칼죽의 기억을 타고 흐르는 대격전!
‘맙소사!’
새삼 반성하게 만들었다.
‘저런 괴물과 싸워야 한다고?’
마루는 아찔한 감각이 전신을 휘감는 걸 느꼈다.
그 정체를 모르지 않았다.
공포!
비각성 헌터로서, 매 순간 생사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해 왔기에, 너무도 자주 부딪쳐야만 했던 감각이며 감정이 아니던가.
벽을 넘고 잠시나마 자만했던 게 우습게 여겨졌다. 게을렀던 건 아니지만, 잠시 마음이 풀어졌던 건 사실, 그 때문에 반칼죽의 기억을 통해, 더더욱 허리띠를 졸라매며 각오를 다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몸서리를 치는 와중에도 정신을 바로 잡은 채, 절대자들의 전투 현장을 똑똑히 눈에 담은 것이다.
가슴에 새겼고, 영혼에 각인했다.
‘마왕!’
그 존재를 외면하지 않은 채,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잠시 잠깐 반칼죽을 향한 시선이라 여겼지만, 이내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를 보는 거였다.
‘어떻게?’
과거의 기억이, 그 파편이 어떻게 현실로 이어진단 말인가.
짧은 의문 사이로 세상이 찢어지는 게 보였다.
마왕을 중심으로 세상의 풍경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며, 거대한 혼돈이 사방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오직 한 곳만이 고요했다.
마왕!
태풍의 중심에서 그가 입을 열었다.
“반갑구나 대적자여!”
전율이 등허리를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