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등장!
#13. 등장!
비모는 레메게톤의 새로운 기둥이 된, 각 클랜의 신규 클랜장들을 움직이며, 세계에 퍼진 그들의 정보를 통제하고 꼬아 놓는 등, 위장 작업에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정보 출처에 대한 조사도 진행하는데, 아주 흥미로운 이름이 튀어나왔다.
“하… 또 존슨인가!”
사사건건 그들 일족에 방해가 되는 존재였다.
‘역시나 하르칸님 말씀처럼, 일족 최대의 골칫거리군.’
그들 일족은 일찌감치 사일론의 흔적을 쫓아 세계 곳곳으로 요원을 파견 보낸 상황이었는데, 그간 왜 허탕만 쳤던 건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머리를 잘 썼군.’
그는 사일론의 잔머리에 고개를 저어야만 했다.
설마하니 적으로 만나서 한바탕 어우러졌던 존슨에게 몸을 의탁할 줄이야.
상상도 못 한 부분이었다.
‘하긴, 그런 머리가 있으니 우리 일족을 그토록 힘들게 한 거겠지.’
사일론은 무력만으로 북마계를 평정한 게 아니었다.
무능의 마인이라 불렸던 만큼, 초기의 사일론은 여러모로 취약한 부분이 많았고, 그 때문에 머리도 잘 굴려야만 했다.
‘그간 잘 숨기고 있더니만….’
갑자기 밝힌 이유도 짐작이 갔다.
‘…힘을 회복한 건가?’
이 역시 놀라운 부분이었다.
‘그리 쉽게 회복될 만한 게 아닐 텐데.’
사일론이 마계에 남겨 두고 간 기운을 생각해 봤을 때, 한두 해 정도로는 결코 회복할 수 없다고 여겼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
‘1년도 안 돼서?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워낙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보니, 한편으로는 존슨과 사일론이 짜고서, 그들 일족을 함정에 빠트리려는 유인책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여러모로 골머리가 아파지는 내용이었다.
그 때문일까?
“후우….”
한숨과 함께 관련 내용은 잠시 뒤로 미뤘다. 다른 부분을 둘러보며 정신적 환기가 필요하다 여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내용은 아주 만족스러운 거였다.
“시원하게 때려 부수는 것만큼 재밌는 게 없지.”
비모는 거처 한편의 벽면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거대한 세계 지도 펼쳐져 있었다. 어느새 꺼내 든 것인지 다트를 튕기던 그가 지도를 향해 던졌다.
이내 지도의 너른 부분에 깊숙이 박히는데, 거기에 쓰인 국가 이름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중국!
“건방진 놈들!”
감히 그의 손길을 거부한 사흑련에게 엄벌을 내려 줄 차례였다.
* * *
“결국, 우리 대륙에도 격변이 발생하는군.”
사흑련의 련주 철마는 눈살을 찌푸리며 날아든 보고서를 구겼다.
“레메게톤 이놈들….”
사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니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배신감 역시 상당했다.
물론, 먼저 등 돌린 건 그들이긴 하나, 저들 레메게톤의 성장에 적잖은 지원을 했던 게 바로 사흑련이지 않던가.
“이걸로 저들이 대격변을 조절할 수 있다는 건 확실해졌군요.”
“허어… 실로 위험한 종자들입니다.”
“우리도 저들 수색에 동참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들에게 중화 민족과 무림의 힘을 보여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와중에 떠오르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레메게톤의 총장이 도플갱어라는 말이 있던데.”
“이거 상황으로 봐선, 아무래도 진실일지도 모르겠군요.”
“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다니.”
“가만두면 안 됩니다!”
사흑련 소속 문파의 문주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가운데, 철마는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흥분하지 마라. 레메게톤 놈들을 정리하는 건 당연한 거지만, 지금은 당장 눈앞의 문젯거리에 집중해야 할 때다.”
도플갱어에 관한 부분은 굳이 언급하진 않았다. 아직 진위 여부가 명확지 않은 탓에,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관련 발언을 자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계의 마족이라니….’
쉬이 입을 놀리기에는 그 안에 담긴 무게감이 너무 컸다.
일단은 당장 중요한 사안을 입에 담았다.
“자금성이 무너져선 안 된다.”
이번 대격변 균열의 발생 장소는 그들 자존심 중 하나인 자금성이었다.
“무림맹과 연계해서 대륙 내 모든 주술사들을 동원해, 최대한 많은 결계를 사방에 깔아 둬야 한다.”
누군가 물었다.
“트랩퍼에게 요청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에 대한 답변은 굳이 철마가 할 필요도 없었다.
“허… 대륙의 인재가 몇인데, 굳이 저 조그만 반도의 빵쯔 놈들에게 도움을 청할 필요가 어딨습니까?”
“그딴 놈 아니더라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크라운이라고 해도 눈에 안 차는데, 어디 가오리 놈 따위를 쓴단 말인가.”
WHA의 4대 협회장까지 언급되며, 장내의 분위기를 한껏 들끓게 만들었다. 이에 괜히 의견을 내비쳤던 문주는 거북 목이 돼야만 했다.
분위기가 너무 과열되는 걸 막고자, 철마가 재차 손을 들어서 공기를 환기시켰다.
“그대들이 말한 것처럼, 굳이 외국에 손을 벌릴 필요는 없다. 정부와 무림맹에서도 인재들을 잔뜩 끌어모으기로 했으니, 우리 힘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가 생각하는 문젯거리는 그 이후였다.
“대격변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경우를 생각해야 된다.”
당장 미국만 해도 연달아 두 번이 터지지 않았던가. 언급했듯 레메게톤을 쫓는 건 당연하지만, 그 전에 일찌감치 안전장치를 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무림의 힘을 세계에 보여 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 상황을 깔끔히 잘 처리한다면?
“WHA의 헌터 업계를 깔아뭉갤 수 있을 겁니다.”
“무림맹 놈들은 싫지만, 실력은 확실하죠.”
“한번 제대로 어울려 보죠.”
“무림을 세계로!”
“무림을 세계로!”
사흑련만이 아니라, 무림맹 역시 비슷한 분위기를 내비치며, 중국 전역이 뜨겁게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 * *
이제 마루에 대한 대우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최고등급의 국가 귀빈 수준이 되어 있었다.
사실, 랭커급의 재주만으로도 그만한 대우는 당연했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 도심 대격변 방비에 큰 영향력까지 끼치니, 국가 수장에 버금갈 정도의 대우가 당연해진 것이다.
그 같은 이유로 민간의 인지도 역시 하늘을 찌르고 있었는데, 감히 비교하건대 저 세계적인 영웅 인디안 존슨과도 비교되는 게 최근의 분위기였다.
물론, 이런 흐름이 장기적으로 갈 수 있냐 없냐에서 차이가 날 수도 있지만, 일단 당장은 존슨에 버금가는 건 확실했다.
자연히 한국 내 여러 커뮤니티는 수시로 주모를 찾으며 거나하게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가 주모 과로사하겠네.’
마루도 이런 분위기를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때때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다.
혜성 길드를 통해서 수시로 날아드는 방송국의 러브콜이나 각 언론사의 취재 요청 등, 외국까지 쫓아와서라도 기사를 내고 싶어 하는 저들 분위기만 봐도, 한국 내 그의 영향력이 실감 날 정도였다.
어찌나 뜨거운지, 최근 들어서는 아이언슈트보다 그의 존재감이 더 크게 부각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직까진 한국 한정인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세계적으로는 여전히 아이언슈트가 더 우위에 있었다.
각성 체조!
그 혜택을 받는 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 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트랩퍼의 명성도 대단하지만, 당장 대격변을 겪은 도시가 그리 많은 건 아니다 보니, 피부에 와닿는 부분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어쨌든 남다른 인지도와 인기로 인해 적잖이 당혹스러운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특히, 앞서 영국 사건 이후로 한차례 경험을 해 봤기에, 더더욱 부담스러운 면이 클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서 영웅이네 뭐네 하면서 띄워 주는 게 특히 더 그랬다. 그의 실상은 그런 영웅과 거리가 멀지 않던가.
‘하아… 내가 진짜 영웅이었으면, 도쿄가 밀리도록 내버려 뒀을 리가 없잖아.’
관련한 생각을 길게 이어 가면 괜히 머리만 아픈 터라, 다른 방면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는데, 이게 또 뜻밖의 내용이었다.
“중국에서 요청이 없었다고?”
자금성 대격변 소식이 들려왔던 터라, 내심 그쪽으로의 여정을 준비하고 있었건만, 이건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마루의 물음에 레베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무래도 중국 자체적으로 해결할 생각인가 봐요. 이걸 기회로 무림의 영향력을 넓히려는 것 같아요.”
따로 대격변을 대비하고자 찾아드는 인원은 막지 않지만, 그들이 원해서 요청하는 경우는 없었다.
자국에 대한 자부심이 어마어마했다.
한차례 고민하던 마루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빼기로 했다.
“부르지도 않는데, 굳이 갈 필요는 없겠지.”
다시금 유럽으로 넘어온 상황으로, 이곳에서도 여러 요청으로 인해서 할 일이 넘쳐 났다.
물론, 자금성 대격변에 맞춘 지원은 해야겠지만, 그 부분은 혜성 길드 자체적으로 따로 요원을 파견하기로 했기에, 굳이 그가 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짐작하건대 무리해서 중국으로 넘어간다고 할지라도, 이런저런 제약이 상당할 터였다.
알게 모르게 견제까지 들어올 테니, 심력은 심력대로 소비하고, 시간은 시간대로 낭비하는 등, 그야말로 최악일 확률이 높았다.
‘그냥 이곳에서 할 일이나 하는 게 낫지.’
돈 주고 각종 희귀 재료까지 챙겨 주는데, 뭐 하러 욕먹으며 넘어간단 말인가.
게다가 유럽에서 할 일도 많았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
마냥 돈독이 올라서 주머니나 채우러 다니는 일정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의미가 있는 여정으로서, 그 나름의 확실한 계획이 있는 것이다.
팀과 제자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목적이 있었다.
저도 모르게 하늘로 향하는 시선, 그리고 거기에 잡히는 세계의 균열까지, 자연스레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대환란!’
거대한 파멸의 위기를 앞에 두고, 그 나름대로 발버둥을 치고자,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물밑 작업을 하고 있는 거였다.
천기에 눈이 뜨이면서 세워진, 조금은 즉흥적인 계획이었지만, 남다른 스탯 덕분에 활짝 깨어난 머리로 인해, 짧은 시간에도 설계도는 훌륭히 완성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관련한 이미지가 머릿속에 그려지며, 수시로 발전해 가는 중이었다.
각국 단체에서 받아 내는 특수 재료?
연인의 성장을 위한 것도 있지만, 그 많은 게 전부 대장간으로 흘러가는 건 아니었다.
그의 계획을 위해 쓰이는 게 더욱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다면, 사실 중국에도 들려야 하는 게 맞지만, 지금 당장은 찾아갈 생각이 없었다.
‘시간도 없는데, 효율적으로 써야지.’
괜한 심력 낭비는 피하고 싶었다.
게다가 연달아 대격변을 겪어 보면서 느끼는바, 결국 그를 찾게 될 거란 자신감도 있었다.
‘매번 균열이 커지는 것 같단 말이지.’
자금성도 호되게 당할 확률이 높았다.
‘…아니면 말고.’
넘쳐 나는 사람만큼 헌터 숫자도 세계 제일이니만큼, 확신은 금물이었다.
어깨를 으쓱이며 레베카의 안내를 따라 이탈리아의 거리를 걸었다. 그러다 저 멀리 보이는 웅장한 건축물에 잠시 멈췄다.
바티칸!
이번 여정의 목적지였다.
익숙한 기운이 그를 반겨 와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성녀 레아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루 역시 손을 흔들어 주려는 찰나였다.
오싹!
등허리를 타고 오르는 아찔한 감각에 무릎이 휘청거렸다.
‘이건, 대체….’
저도 모르게 하늘 위로 시선을 올려 보내야만 했다. 성녀도 비슷한 감각을 맛본 듯, 똑같이 하늘을 바라봤다.
마루는 온몸으로 전율해야만 했다.
분명 푸르른 창공이었다.
하지만 세계 흐름을 엿보는 그의 시야에는 기이할 만큼 어둑한 기운이 가득했다.
있어선 안 될 일이 발생한 것이다.
‘…마기라고?’
마수지대의 대기가 일상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설마?’
그의 시선이 한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곳은?
북극이었다.
* * *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고 해야 할까?
“존귀하신 마계의 하늘을 뵙습니다!”
얼음 마녀 데이지는 황홀경에 빠진 얼굴로 바닥 깊이 머리를 숙였다.
‘설마… 강제로 문을 열고 나오실 줄이야.’
그녀에게 극상의 예를 받는 존재, 이는 전 마계를 통틀어 오직 하나뿐이었다.
대마왕!
그가 인간계로 넘어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