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대환란!
#21. 대환란!
예상치를 한참 웃도는 효과라고 해야 할까?
‘구현동화가 이 정도라고?’
실버 박사는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며 적잖이 놀란 얼굴이 돼 버렸다.
‘C급 수준까지 올려 주다니.’
그의 예상치는 D급까지가 한계였건만, 놀랍게도 한 등급 이상의 상승효과가 추가된 것이다.
‘만상결계….’
현무암의 존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실존하는 정령체라는 게 놀랍고 지닌바 재주 역시 놀랍지만, 그 이상으로 특별한 건 따로 있었다.
결계에 쓰인 기운이었다.
‘이름 없는 신….’
그 역시 마주한 적 있는 신비로운 존재로서, 전해 듣기론 원래 이곳 지구 출신의 신격이라고 들었다.
짐작하건대 그 때문에 이곳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리라.
방벽으로 인해 수많은 신들이 세계 바깥에서 한 다리만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PP라는 세상을 통해 간접적인 접촉만 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가 마주했던 이름 없는 신은 달랐다.
오랜 과거, 애초에 이 세상의 일원이던 시기에 뿌려 뒀던 안배였던 만큼, 방벽의 유무와 무관하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그 결과 구현동화까지 상승했다.
여러모로 놀라운 일이 가득한 가운데, 특히 그를 경악하게 만든 거라면?
‘초롱이….’
그 존재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나, 마루의 성장을 지켜보며 그 존재가 일종의 보조 역할 정도라 여겼다.
[용아병]
그 특수한 칭호가 그런 판단을 하는데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
‘성체 드래곤이라니.’
100미터에 달하는 거체가 어둠을 가르며 날아가는 광경이란, 실로 장관이란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구현동화 스킬 덕분에, 엔트라넷을 징검다리 삼지 않고서도, 다이렉트로 현세를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세계의 수많은 사건 사고의 직관이 가능했다.
돌아가는 전황을 알기 때문일까?
‘역시… 마왕은….’
크루이트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지난 만남까지 연상시키니, 너무도 그럴듯한 그림이 그려졌다.
그렇기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어째서?
‘패배하려는 거지?’
미스터리 속에서도 그의 시야는 바삐 현세를 살피고 있었다.
* * *
혜성 특수 1팀은 갑작스러운 팀장의 부재로 인해 당혹감을 드러내야만 했는데, 이미 이야기가 됐던 것일까?
“이번 한 번은 제가 복귀하죠.”
이선희 곁으로 갔던 김연희가 임시로 팀장직을 맡으며 지휘권을 가져갔다.
오랜만에 손발을 맞추는 거지만, 지난 세월 쌓아 올린 호흡이 어딜 가는 건 아닌지, 능숙하게 지휘를 할 수 있었다.
신참이 여럿 들어왔다고는 하나, 그 정도는 문제 되지 않았다.
덕분에 혜성 특수 1팀은 한국을 대표하는 돌격대다운 면모를 보여 줄 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이런 그들이 크게 화제가 되진 못했다.
웨이브, 대격변, 드래곤 등등, 여러 사건이 겹친 것도 있지만, 꾸준히 시선을 앗아 가는 화젯거리는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불과 얼음!
―피닉스와 얼음여제가 한 전장에 있다니.
―와… 그러고 보니 둘이 사귄다는 소문도 들리던데.
―그거 헛소문이야.
―헛소문일 거야.
―헛소문이어야 해!
이선과 이선희가 한 전장에서 어우러지며 손발을 맞추고 있던 것이다.
영국에서도 전장을 공유했었지만, 지금처럼 한 앵글에 잡히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둘이 함께 어우러지며 전장을 휘어잡고 있는 것이다.
불과 얼음이란 상극의 기운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이할 만큼 둘의 기운은 잘 어우러지고는 했다.
그 때문에 과거에 이선이 이선희를 제자로 삼으며, 그 자신의 흔들리는 기운을 다스렸던 것이 아니겠는가.
상극임에도 불구하고 기이한 상생 효과를 내니, 그야말로 최고의 상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환란에 따른 대격변의 연속이었다.
그 최악의 전장에 맞춰, 아낌없이 모든 걸 드러내기 위해, 함께 어우러지고 있는 거였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삼발이 아저씨도 잘하고 있는데.
―수호 아재의 외로운 사투!
―그래도 길드 활약도는 삼족오가 탑이다!
삼족오 길드의 수장이자 한국의 두 번째 랭커로 유명한 김수호, 그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가 상당 부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일까?
―미국의 히어로가 한국에서 활약해도 되나?
―영웅이면 어디서건 활약하면 OK지.
―대환란이니까 문제지.
분명 차후에 말이 나올 수밖에 없을 거라는 게, 많은 이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김연희 역시 이를 알았지만, 저 둘을 말릴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대환란!’
상황이 그만큼 최악이었다.
실제 그들이 마주하는 건 대격변 게이트일 뿐이지만, 타국의 지원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일찌감치 한계를 맛보게 만들 정도였다.
크워어어어….
우어어억!
여전히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몬스터들로 인해, 절로 욕지거리가 쏟아져 나오려 했다.
구현동화를 통한 비각성 헌터들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일찌감치 도시를 포기했으리라.
“버텨!”
김연희는 버럭 목소리를 높이며 전장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어지러운 전황으로 인해 지휘에만 집중할 수 없어, 이처럼 수시로 발을 담그며 내부 정리에 힘을 써야만 했다.
구현동화 덕분에 포스 충전이 이뤄지지 않았더라면, 일찌감치 드러누웠을지도 몰랐다.
‘제대로 하고 있는 거겠지?’
그 때문인지 그녀에게 팀을 맡기고 멋대로 떠나 버린 사내가 자꾸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환란을 막고 오겠습니다.]
무슨 재주로?
헛소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존슨이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디 한시라도 빨리 해결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 * *
뜻밖이라고 해야 할까?
‘혼자?’
저 멀리 얼음성이 보이기 시작할 즈음, 사일론은 전해지는 기운의 파장을 통해, 이미 그 주변의 풍경을 머릿속으로 그려 내고 있었다.
그로 인해 적잖이 놀랐다.
대마왕 크루이트와 얼음마녀 데이지의 기운 외에는 느껴지는 게 없던 것이다.
“뭐야? 왜 이리 조용해? 이렇게 한적한 동네가 아닌데.”
옆에서 들려오는 존슨의 중얼거림에서 알 수 있듯, 북극 마수지대의 들끓던 마물들마저 존재하지 않았다.
눈살을 찌푸린 사일론이 지난 침공전들을 되새겼다.
‘사천왕은 항상 끼고 다녔었는데.’
그 역시 언제나 침공전에선 마왕의 곁을 지켰었다. 그러다가 찾아오는 용사 일행의 정예들과 한판 어우러지고는 했다.
특히, 세계가 밀어내는 거부감으로 인해, 이곳 세상의 축이 되는 장소를 최대한 벗어나지 않는 게 좋았다.
적어도 축이 되는 장소에서만큼은 세계의 압력이 반감되기 때문이었다.
북극도 그런 축의 한 지점이 아니던가.
그 때문에 침공이라 표현하면서도, 마왕을 비롯한 핵심 전력은 따로 성을 지어 놓고 용사 일행을 기다리는 것이다.
공주나 성녀를 납치하는 건, 손쉽게 그들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 중 하나였다.
‘무슨 생각이지?’
의문이 이어지는 가운데, 어느새 얼음성에 다다랐고, 그곳을 지키고 있는 일남 일녀를 볼 수 있었다.
마왕과 마녀!
일행들이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초롱이의 머리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모두가 땅에 도착할 즈음, 사일론과 라미가 아이의 외형을 탈피하며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뿐만 아니라 검은 고양이 메로 역시 덩치를 부풀리며 흰색 줄무늬를 형성하더니, 이내 거대한 흑호가 돼선 일행들의 전방에 내려앉았다.
크루이트는 먼저 마루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또 보네.”
“…그러게.”
짧게 기세를 부딪치는 것으로 인사를 마무리 지은 뒤, 크루이트는 흑호 바로 뒤편의 사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며 내뱉는 한마디.
“잘 지냈느냐. 아들아!”
순간, 데이지가 깜짝 놀란 얼굴로 사내, 사일론을 바라봤다.
‘주인님의 아드님?’
당혹감 어린 그녀의 표정과 달리, 사일론을 비롯한 마루 일행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할 뿐이었다.
“호….”
크루이트가 눈을 빛냈다.
‘한번 흔들어 볼까 했더니.’
저들의 반응에서 실패임을 알았다. 자연히 알게 되는 사실이 있었다.
“알고 있었느냐?”
크루이트의 물음에 사일론이 안광을 번뜩이며 말했다.
“내게 아버지는 없다. 오직 한 분의 어머님만이 있을 뿐. 감히 내 앞에서 핏줄을 주장하는 이가 있다면, 빌어먹을 사기꾼이니 갈가리 씹어 먹어 버리겠다!”
그러면서 마기를 한껏 드러내는데,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강렬했다.
‘그새 발전했군.’
입꼬리를 말아 올린 크루이트가 PP를 떠올렸다. 이곳 세상에 존재하는 거대한 육성 시스템으로서, 짐작건대 인간의 핏줄을 이용해서 그곳에 접속했으리라 여겼다.
소마의 형태로 쫓겨났던 걸 생각한다면, 이처럼 단기간에 회복한다는 건 그것 외에는 답이 없었다.
마치 태풍처럼 강대한 마기에 데이지가 깜짝 놀라 반응하려 했지만, 크루이트가 손짓으로 그녀를 막았다.
이에 얌전히 호흡을 가라앉히는데, 그러며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크루이트와 사일론을 돌아봐야 했다.
데이지를 막은 손짓이 이내 전방으로 향하니, 폭풍처럼 밀려들던 마기가 마치 봄바람처럼 흩날리며 주변으로 흩어졌다.
‘쯧!’
이를 본 사일론 눈살을 찌푸렸다.
‘여전하군.’
PP 덕분에 힘을 회복하고, 더 나아가서 성장까지 했건만, 여전한 격의 차이가 느껴졌다.
하지만 기죽을 필요는 없었다.
그는 현재 혼자가 아닌, 동급의 실력자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이 같은 심경을 읽기라도 한 듯, 크루이트의 시선이 사일론의 너머로 향했다.
“방랑하는 무녀! 지구로 넘어온 건 알았는데, 설마 이 자리에 끼어들 줄이야. 이건 자네 부친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야.”
라미가 한숨을 내쉬며 이를 받았다.
“하아… 어쩌겠어. 미래의 낭군님을 위해선 움직여야지.”
그 말에 크루이트의 시선이 하늘 위로 향했다.
거대한 동체를 지닌 드래곤 한 마리가 보였다. 하지만 그 외형에 속지 않았다.
진실을 꿰뚫어 보는 그의 두 눈엔, 자그마한 꼬마 해츨링이 파닥이는 게 보일 뿐이었다.
해츨링과 라미에게 연결된 인연의 끈이 보였다.
“훗! 운명인가.”
재밌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운명을 깨부수기 위해서 이 자리를 마련했는데, 눈앞의 여인은 운명에 순응하며 이곳에 선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뒤, 이 자리에서 가장 의외로 보이는 사내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인디안 존슨!’
이곳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라서 모를 수가 없었다.
“운명이라….”
같은 소리가 튀어나오는데, 이번에는 의미는 좀 달랐다.
미묘하게 부러워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기본적으로 벽을 깨부수며 초월의 영역에 이른 인간은 전부 ‘운명의 너머’에 발을 들인 이들이었다.
마루 역시 벽을 넘었지만, 그와 존슨은 달랐다.
가호의 유무!
조금 다른 종류이기는 하나, 마루는 벽을 넘을 수 있는 운명을 지녔다.
그 품에 거대한 ‘용’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용사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존슨은 달랐다.
‘정말 평범한 인간이군.’
그래서 놀랍고 또 부러운 것이다.
그의 기억 속에서 용사와 그 일행 외에, 감히 그의 앞까지 다다를 수 있는 이들은 몇 없었다.
‘진정한 초월자!’
벽을 넘으며 운명을 넘었다. 사일론이나 라미가 금수저나 다이아 수저를 넘어, 오리하르콘 아다만팀움 수저라면, 존슨은 그저 흙수저일 뿐이다.
그렇기에 더욱 특별한 존재라 할 것이다.
‘초능이 풀린 지 한 세기도 안 되었을 텐데.’
여러모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내였다. 얼음성에서 쉬는 동안 가장 재미있게 봤던 게 존슨의 일대기이지 않던가.
그는 자격이 있는 존재였고, 그 때문에 그에겐 특히 정중했다.
“영웅이여. 만나서 반갑구나.”
“어… 음.”
존슨이 그 친근한 말투에 당혹감을 드러냈다. 진심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반갑지는 않지만, 음… 영광이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헷갈리는 어투였지만, 그래도 일단 존슨은 저 진실된 감정에 침을 뱉을 순 없어서 적당히 응수해 줬다.
그렇게 한 차례씩 눈빛을 보내고 있을 때, 사일론이 물었다.
“다른 놈들은 어디 갔지?”
이에 크루이트가 웃으며 말했다.
“아들아. 어리석은 소릴 하는구나. 여기에 없으면 어디 있겠느냐?”
“뿌득… 다시 말하지만… 으득! 내게 혈육은 어머님 한 분뿐이다.”
사일론이 시뻘건 귀화가 일렁이는 눈으로 노려보지만, 크루이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무시할 뿐이었다.
그를 보며 존슨이 물었다.
“다른 왕들은 바깥으로 나간 것이오?”
크루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로 바다로 그리고 땅과 꿈으로 떠나보냈지.”
사일론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늘은 동마계의 타이푸겠고, 바다면 서마계의 크라크트겠군.’
각자 비익족과 해룡족이었다.
짐작건대 뭍으로 움직이는 건 그의 영역을 가로챈 북마계의 하르칸이리라.
‘꿈이라면… 레미안인가.’
가장 까다로운 일족이었다. 몽마의 일족답게 꿈결을 타고 환란을 일으키는데, 지금 이 시각 현실을 피해 눈을 감고 귀를 막아 버린 이들은 남마계의 왕을 마주하고 있을 터였다.
이리저리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문득 크루이트의 시선이 다시금 마루에게로 돌아왔다.
“슬슬 준비는 된 것 같은데. 시작할 텐가?”
마루가 쓰게 웃으며 물었다.
“눈치채고 있었어?”
“나 마왕일세. 대마왕!”
확실히 숨길 수 있을 거라 여기진 않았지만, 그래도 일말의 기대를 하고 있기는 했었다.
‘별문제 없어서 살짝 기대했는데.’
입맛을 다신 그가 하늘 위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저 드넓은 창공을 빙글빙글 돌며 선회하는 초롱이가 보였다. 그리고 초롱이와 연결된 영성을 느꼈다.
이를 앞세우며 외쳤다.
[드래곤 레어]
특수 스킬이 발동하더니, 초롱이가 선회하던 영역 전체에 거대한 결계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기다리느라 지루했지?”
마루가 그리 말하며 두 주먹을 쾅쾅 두드렸다.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