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아끼다?
#22. 아끼다?
레미안은 남쪽 마계의 왕이자, 모든 환마족을 대표하는 몽마 일족의 수장이었다.
꿈을 타고 넘으며 환상으로 목표물을 공격한 뒤, 상대의 정신을 갉아먹고 점령하는 게 그의 재주였다.
그 때문일까?
마계의 여러 군주들 중 가장 까다로운 상대로도 유명했다.
존재하는 현상이 아닌 꿈결을 타고 환상을 찌르는데, 어지간한 경지가 아니고서야 단숨에 그의 노예가 되어 버리기 일쑤였다.
마계에서도 그러할진대 이곳 인간계에서야 어떻겠는가.
‘사일론의 분신을 잡은 놈도 있지만.’
그런 인간은 극히 드물었다.
어쩌다 보니 일족의 최정예만 넘어온 상황이었고, 이곳 세상에 최상급 몽마의 환상을 이겨 낼 수 있는 인간도 극히 소수일 터였다.
‘아주 싹 쓸어 주마!’
갑자기 넘어오는 터라 게이트도 불안하고, 병력도 완전치 못해 군세가 부족했다.
하나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인간들을 현혹시켜 인간의 군대로 인간을 치는 건, 그들 몽마 일족이 즐겨 하는 놀이이지 않던가.
멀리 인간의 도시가 보였다.
“즐겨라!”
그리 명령하며 먼저 인간들 사이로 들어갔다.
조용히 파고든 뒤, 그들의 꿈결 속으로 은밀히 스며들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헛! 이게 무슨….’
꿈속으로 들어갔다 여겼건만,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여전히 현실이라고?’
―주… 주군 뭔가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꿈속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주군….
수하들의 당혹감 어린 텔레파시가 날아드는 가운데, 레미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훑고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맙소사!’
이미 그들은 꿈속에 들어온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머무르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결계….’
어마어마한 세계의 결계에 의해 현상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져 있는 상태였고, 그 때문에 몽마 일족이 꿈속에 스며들었음에도 현실에 머물고 있는 거였다.
[구현동화]
이미 현실은 가상의 일부가 되어 버린 상황, 그 때문에 몽마 일족은 현실을 벗어났음에도 현실에 머무는, 그런 기이한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으음….’
레미안의 표정이 잔뜩 굳어졌다.
환상을 즐길 수 없다?
몽마 일족의 재주가 힘을 잃어버렸다는 뜻이었고, 전력이 반감하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어… 어쩌죠?
―주군, 설마 육탄전을 벌여야 하는 겁니까?
―인근의 마물이라도 불러올까요?
레미안은 인상을 구겼다. 크게 실수했다 여긴 것이다.
‘마물을 이끌고 왔어야 했나.’
하늘과 바다 그리고 땅!
동, 서, 북의 왕들에게 마물을 양보한 게 실수라고 여긴 것이다.
환상으로 넘어가면 일이백이 아닌, 수십만 대군을 꾸며 내며 부릴 수 있기에, 현실의 병력은 의미 없다 여긴 것인데, 그게 큰 실착이 되어 버렸다.
“일단… 주변의 마물을 끌어모은다.”
다행이라 한다면 조용히 파고들었던 만큼, 인간들의 시야 밖으로 빠져나가는 와중에 별다른 소란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며 생각했다.
‘현상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졌다면… 북쪽 왕도 고생깨나 하겠군.’
도플갱어 역시 환마족의 일원.
환상을 끼고 살아가는 건 환마족의 숙명이었다.
* * *
레미안의 예상이 정확히 들어맞았다고 해야 할까?
‘골치 아프게 됐군.’
하르칸은 당혹감 어린 얼굴로 주변을 돌아봤다.
사방 가득 도플갱어 일족의 먹잇감이라 할 수 있는 인간들이 넘쳐 났다.
하지만 이게 웬일?
―주군 재능 습득이 안 됩니다.
―재주를 훔치려 할 때마다 기력이 쭉 빠집니다.
―으음… 몸이 너무 무겁습니다.
분명히 뛰어난 재주꾼들이 넘쳐 났다.
각종 스킬들을 부려 대는 모습을 보라, 저 많은 인간들이 전부 재주꾼이라는 점에서 잠깐 놀랐지만, 그만큼 먹잇감이 많다며 좋아했었다.
오랜만의 만찬에 기뻐하던 게 거짓말처럼, 재능을 훔칠 수가 없었다.
인간의 형상을 흉내 내는 것부터 재능 탈취까지, 어느 하나 제대로 되지 않으니, 당혹감에 수하들의 텔레파시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대체 이게….’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 한동안 멍하니 주변을 살피기만 하는데, 아직 레미안에 비해 경지가 부족했던 탓인지, 구현동화의 희미한 흔적을 엿보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가짜?’
그들이 군침을 흘린 재주꾼들의 재능이 전부 거짓이라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저 많은 인간들이 마치 그들, 도플갱어 일족처럼 거짓의 탈을 쓰고 있었다.
진짜 재능은 그 너머에 있을 터, 아무리 군침을 흘리며 침을 발라 봐도, 그들이 맛볼 수 있는 건 신기루와 같은 잔상뿐이었다.
‘골치 아프게 됐군.’
도플갱어가 환마족 중에선 현계에 가깝다고는 하나, 그들도 결국 환상을 통해 재주를 탈취하는 일족이었다.
전력이 반감되는 건 당연했다.
‘…그래도 아주 최악은 아닌가.’
레미안보단 낫다 여겼다.
물론, 아쉬움이 큰 건 여전했다.
전력이 반감된다는 건 활약이 줄어든다는 의미였고, 자연히 차후 공적을 인정받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을 터였다.
동쪽과 서쪽 마계의 무투파들에 비한다면, 환상계의 환마족들에겐 최악이라 할 수 있는 전장이었다.
하르칸은 입술을 짓씹었다.
‘식민지 계획이… 으득!’
이래저래 엉망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도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진 최선을 다해야 하기에, 끌고 왔던 마물들을 전면에 세우기로 결정하며, 본격적인 침공전에 들어갔다.
* * *
알파 세계에서의 격돌 중, 크루이트는 많은 조언을 해 줬다.
[사신무 ― 화룡출수]
손끝을 타고 오르는 불길을 보며 타박하길,
“홀로 외로운 용이라니. 기왕이면 바람과 함께 노닐면 보기 좋을 것 같군.”
스킬의 조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말처럼 바람을 타고 오르는 불길의 위력이 더 강렬한 건 사실이었다.
단지, 용이 노닐 만한 바람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았다.
이전까진 개별 스킬로도 충분한 위력이 있다 여겼지만, 크루이트와의 만남을 통해 부족함을 실감한 탓일까?
[협곡의 칼바람]
꼬마 요정 루미가 전심전력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그동안 놀고 있기만 한 것 같겠지만, 틈틈이 PP에서도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바깥세상에 현현(顯現)하고 있던 것만으로도 루미는 성장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상에서 현상으로 옮겨 가며 진체를 얻은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마루의 요정이다 보니, 마루의 성장에 따라 성장하는 것 역시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같은 효과들로 인해, 루미의 스킬도 비범한 영역에 이르렀다.
시리도록 차가운 북극의 대기가 호응하며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그 위로 마루가 스킬을 던졌다.
[화룡출수]
그 순간 손끝을 타고 뻗어 나온 불길이 어지러이 흩날리는 바람길을 쫓아, 수십 갈래로 쪼개지며 수많은 화룡의 형상을 이루더니, 이내 크루이트를 향해 매서운 이빨을 드러냈다.
쿠르르르르르….
이를 보는 크루이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쳐 갔다. 그건 상대를 비웃거나 깔보는 종류가 아닌, 마치 기특하다 여기는 느낌이었다.
태연한 표정과 달리 여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알파 세계에서 마주쳤던 것 이상의 위력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용사 각성을 하지 않고서도 이런 위력이라니.’
이는 즉 아직도 여력이 남았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기대감이 한층 커지는 가운데, 어깨 위로 떨어지는 압력을 느꼈다.
[용언]
저 하늘 위에서 꼬마 용이 그의 전신을 옥죄고 있었다.
[멈춰][정지][스톱]….
다양한 언어로 그를 붙잡으려 드는데, 용언을 통해 발현되는 외침이다 보니, 하나하나가 최상위급 스킬이 되어 그를 압박해 들어왔다.
특히, 마루가 펼친 [드래곤 레어]의 효과로 인해, 별도로 쏟아지는 압력도 상당했다.
급격히 더해지는 무게감에 따라, 날아드는 화룡을 피하기가 쉽지 않았고, 결국 받아 내야 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빠지지직….
그의 이마 위, 매섭게 솟아오른 두 개의 뿔 사이로 뇌전이 번뜩인다 싶더니, 칠흑빛 번개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마치 뇌룡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는데, 날아드는 화룡을 일일이 받아 내며 소멸시키고 있었다.
그 순간 화룡 너머로 또 다른 용의 형상이 그려지니, 용군주 라미가 그 주인공이었다.
드라고니안의 기세가 용의 형태로 나타난 건데, 화룡들 사이로 묻어 가며 존재감을 숨기고 있던 것이다.
이미 뇌룡은 지나친 상태, 단숨에 파고드는 라미의 모습에 크루이트의 등 뒤에서 한 줄기 그림자가 일어나며 그녀를 쳐 냈다.
짜악!
그것은 크루이트의 꼬리로서, 끄트머리에 시뻘건 불길을 뿜는 악마의 형상을 달고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등허리가 오싹해지는 마력이 있었다.
용군주 라미는 채찍처럼 휘어져 들어온 그것을 받아 내려 했지만, 어마어마한 거력이 뿜어지며 그녀를 튕겨 내 버렸다.
주르륵 밀려나는 라미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쳇! 마왕이라는 건가.’
새삼 눈앞의 존재에 대해 실감한 까닭이었다. 더욱 짜증 나는 건 마왕의 시선이 그녀에게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화룡을 쳐 낸 뇌룡들의 뒤를 쫓고 있었는데, 모든 화룡을 씹어 삼킨 뇌전은 더욱더 넓게 영역을 확장하며, 마루 일행을 향해 덮쳐들고 있었다.
그 순간 사일론이 움직였다.
번쩍!
한순간 증폭된 마기가 대마왕의 뇌룡을 베어 냈다.
이를 본 크루이트가 눈을 빛냈다.
‘호… 저건?’
사일론의 손에 들린 기이한 물건을 본 까닭이었다.
‘마검?’
반칼죽이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이다. 자꾸만 그의 신경을 건드리는 게 무언가 했더니, 기억 속에 있는 용사의 검이었다.
‘재미있군. 저게 아직까지 남아 있었나?’
제 삼촌의 물건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마루 왈!
[난 원래 무투파야!]
칼죽이 자체적으로도 전력이 될 수 있긴 했다.
데스나이트와 죽음의 군세는 분명 큰 전력일 것이나, 대마왕을 상대로는 큰 의미가 없었다.
마루가 존슨에게 언급했듯, 벽을 넘지 않았다면 전력이 될 수 없었다.
반칼죽의 데스나이트는 아쉽게도 그 영역에는 이르지 못했다.
마검으로 변화하며 나름 진화를 했지만, 데스나이트의 성장까진 무리였다.
그 때문에 검의 형태로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게 된 것이다.
과거에는 성검이었으나, 이제는 완전히 마검으로 화해 버린 용사의 검으로서, 그 능력은 용사의 괴력을 증폭시켜 주는 거였다.
화르르륵….
이런 재주를 사일론의 손 위에서 한껏 발휘하는 중이었다.
과거와 달리 이제는 성력이 아닌 마기를 증폭시키는 재주꾼으로 바뀌었다는 게 차이가 있었다.
‘완벽한 마검이 됐나.’
크루이트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좋은 무기를 얻었군.’
마루는 칼죽이가 마검이기에 일행 중 사일론에게 가장 어울린다 여기며 그에게 건넸다.
그뿐만이 아니라 용사의 핏줄이다 보니, 칼죽이를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영적인 연결 고리도 마련되어 있었다.
콰아아아아아….
뇌룡을 벤 검기가 폭풍처럼 몰아치며 날아드는 게 보였다.
그 무시무시한 광경에 먼발치서 지켜보던 데이지가 두 손을 꽈악 쥐었다.
‘주인님!’
같은 마계의 존재이다 보니, 다른 누구보다 사일론의 실력을 잘 알았고, 그 때문에 긴장감이 큰 것이다.
맘 같아선 당장 끼어들고 싶었다.
하지만 마왕은 홀로 굳건해야 하는 법, 그녀에게는 관전 이상의 자격이 허락되지 않았다.
한껏 증폭된 마기에 잠시 긴장했지만, 역시나라고 해야 할까?
촤아아악!
크루이트의 등 뒤로 칠흑빛 날개가 솟구치며 한 차례 펄럭이니, 날아들던 태풍이 사방으로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커허어어엉!
그 순간, 마기의 그림자에 숨어 있던 시꺼먼 호랑이 한 마리가 포효하며 솟구쳤다. 그러며 거대한 앞발을 휘둘러 온다.
강대한 신력이 담겨 있어, 가벼이 볼 수 없었다.
쿠우우웅….
한 팔을 들어서 막는데, 놀랍게도 크루이트의 신형이 주르륵 밀려 나갔다.
그만큼 메로의 공격은 강렬했다.
단순 괴력으로만 놓고 본다면, 이곳에 모인 여러 초월자들 중 최고라 할 것이다.
‘어설퍼도 신수는 신수인가.’
크루이트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하….”
그건 이내 강한 울림이 되어 뻗어 나가더니, 메로의 전신을 거세게 두드려 튕겨 냈다.
요란하게 바닥을 뒹구는 것도 잠시, 신력을 지닌 신수답게 어렵지 않게 자세를 바로잡은 뒤, 긴 포효로 내부에 스민 마기를 걷어 내는 게 보였다.
어허어엉!
기회를 엿보던 존슨이 전력으로 몸을 던지며 크루이트의 뒤를 노렸다.
이에 크루이트가 빙글 몸을 돌리는데, 그 회전력과 함께 형성된 소용돌이로 인해, 존슨은 공세 대부분이 방어로 전환되며 결국 뒷걸음질을 쳐야만 했다.
‘크윽… 괴물이군.’
존슨은 눈앞의 존재를 보며 마루의 평가를 떠올렸다.
‘정말 답이 없네.’
저 같은 괴물을 상대로 홀로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니, 오만이며 자기 과신이 너무 심각했던 듯싶었다.
입술을 짓씹던 것도 잠시였다.
‘카드를 꺼내야 하나….’
이는 마루가 줬던 것으로서, 그가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아서 아껴 뒀던 것인데, 지금 상황으로는 무조건 써야 할 듯싶었다.
‘…아끼다 똥 되지.’
그러면서 꺼내든 건?
[용사 이용권]
존슨은 이를 조심스레 찢었다.
화르르륵….
이내 이용권이 불타오르고,
쿠우우웅!
신력이 그의 전신에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