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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마 최고 대부호 크라수스 (2/326)

  # 2 1. 로마 최고 대부호 크라수스 ──────────────── 재훈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상할 정도로 머리가 멍했다.

  분명히 도서관에서 눈을 감았을 텐데 어째서 누워있는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마 진짜로 기절해서 보건실이나 병원에 실려 온 건가?'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보건실이나 병원이라고 하기에는 풍경이 묘했다.

  '드라마 세트장인가? 아니면 아직 꿈?'

  누워있는 침대도 뭔가 화려하게 보이기는 했는데 정작 푹신함은 집에 있는 싸구려 매트리스만도 못했다.

  천장에는 형광등조차 없어 어둑어둑했고 방의 벽에는 온통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엔 별로 조예가 없었지만 옛날 느낌이 풀풀 풍기는 벽화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요새 드라마나 영화의 세트장이 아닌 이상 이런 집은 찾아볼 수 없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데에 실려 왔지?'

  자신이 지금 전혀 짐작도 가지 않는 장소에 있다는 자각이 들고나니 머리가 확 맑아졌다.

  황급히 자리에서 튕겨 일어나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뭐야, 내가 왜 이 따위 옷을 걸치고 있는 거야?"

  짧은 소매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요상한 일체형 옷을 입었고, 해괴한 장식이 달린 허리띠를 차고 있었다.

  일체형이라 당연히 바지도 입고 있지 않아 기분이 실로 요상했다.

  옷만 이상한 게 아니라 체형도 뭔가 느낌이 달라졌다.

  키가 작아지기라도 한 것처럼 시야가 낮아졌다.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하려고 했으나 자신의 소지품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현 상황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은 재훈은 거울이라도 찾아보려고 방 안을 돌아다녔다.

  "도련님, 일어나셨나요?"

  "도련님?"

  휘장을 젖히고 들어온 여성이 건넨 말은 한국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너무나 자연스레 말의 뜻이 이해가 됐다.

  게다가 생전에 들어본 적도 없는 그 언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도 있었다.

  "저, 저기요···제가 아무래도 집을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요. 그렇다고 제가 몰래 들어온 건 아니고 누군가 절 여기로 데려온 것 같은데······."

  기다란 가운처럼 생긴 옷을 입은 여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어제 너무 과음하신 듯하네요. 그러니까 어르신께서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말라고 하셨잖아요. 계속 어르신의 말씀을 듣지 않으신다면 더는 술집에 가지 못하실 수도 있어요."

  "어르신? 술집이요? 아니 그 이전에 여긴 대체 어디에요? 설마 경기도를 벗어난 건 아니겠죠?"

  "기억 안 나세요? 어제 퀸티오가 의식이 끊어질 때까지 마신 도련님을 업고 들어왔답니다. 어르신께서 술에 취할 때까지 마시는 건 귀족의 위엄을 실추시키는 일이라고 화를 내셨어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여인의 말에 골이 띵해오기 시작했다.

  대관절 그녀는 무슨 이유로 자신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것인가.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냐고 하고 싶었으나 표정을 보아하니 그것도 아닌 듯 했다.

  "저기···전 당장 내일까지 제출할 과제가 있어서 가봐야 하는데요. 그리고 가서 일도 해야 하고······."

  "마르쿠스 도련님이 일을 하신다고요?"

  여성이 이번에야말로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제 너무 과음을 하셨나···아직 술이 다 깨지 않으신 것 같네요. 주인 어르신께는 제가 잘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인이 몸을 돌려 침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재훈은 황급히 그녀를 다시 불러 세우며 질문을 쏟아냈다.

  "저, 저기요! 여긴 어디고 제가 왜 이런 옷을 입고 있는 거죠? 제가 가지고 있던 물건들은 다 어디로 간 거고요."

  "네? 여긴 당연히 팔라티노 언덕의 크라수스 가문의 저택이고 도련님은 도련님이죠."

  여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와 재훈의 안색을 살폈다.

  "혹시 몸이 좋지 않으신가요? 아니면 악몽이라도 꾸셨나요?"

  "아니요···그게 그러니까······."

  "저기, 도련님? 어째서 저를 그렇게 조심스럽게 대하시는 건가요?"

  재훈은 속된 말로 머리가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눈에 보이는 작고 깨끗한 두 손은 분명 기억 속 자신의 손과는 달랐다. 순간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저기요, 거울 좀······."

  "예, 가져오겠습니다."

  방을 나선 여인은 몇 초 되지 않아 작은 청동거울을 가지고 돌아왔다.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청동거울의 형태에 재훈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떨리는 손으로 거울에 얼굴을 비쳐본 재훈은 너무 놀라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머리는 검긴 해도 동양인과는 완전히 다른 외견을 지닌 라틴계열 소년이 거울에 비치고 있었다.

  '이게 나라고?'

  눈을 부릅뜨고 거울 속의 자신을 노려보는 재훈에게 여인이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어제의 피로가 풀리지 않으신 모양이네요. 오늘 수업은 받기 어려울 것 같다고 어르신께 말씀드릴까요?"

  "잠깐. 그쪽 이름이 그러니까······."

  "코레입니다. 제 이름까지 헷갈리시다니 정말로 몸이 좋지 않으신가 보네요.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아니, 의사는 부르지 말고···윽!"

  거울속의 얼굴을 쭉 보고 있으니 갑자기 엄청난 두통이 엄습해왔다.

  재훈이 머리를 감싸 쥐고 쓰러지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코레가 허겁지겁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불렀다.

  몇몇 사람들이 방에 들어와 뭐라고 말을 걸었으나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풍경, 사람들의 이름, 사물에 대한 지식이 홍수처럼 밀어닥쳤다.

  재훈은 이곳에서 자신이 누구였는지 기억할 수 있었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로마 최고 대부호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같은 이름을 지닌 그의 장남이다. 그러니까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2세인 셈이다.

  현 크라수스 가문은 과거 집정관을 배출한 최고 명문 귀족가문이면서 로마 최고의 부를 소유한 옵티마테스의 중진이었다.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으나 재훈은 이 대부호가의 장자가 된 것이다.

  갑작스레 너무 많은 정보를 떠올린 재훈은 잠깐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주변이 어둑어둑해진 뒤였다.

  "도련님! 정신이 드시나요?"

  재훈이 눈을 뜨자 걱정스레 그를 주시하고 있던 코레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인 어르신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뛰다시피 방을 나선 코레는 몇 분 뒤 엄격하게 생긴 중년 남성과 함께 돌아왔다.

  재훈은 처음보는 남성임에도 그가 누구인지 곧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그가 바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1세.

  크라수스 가문의 가장이자 마르쿠스가 된 재훈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이다.

  "쯧쯧, 잘하는 짓이다. 크라수스 가문의 장남이 어린 나이부터 포도주에 쩔어 인사불성이라니."

  "그, 그게······."

  제훈은 억울했으나 술을 퍼마신 마르쿠스의 기억은 분명히 가지고 있었으므로 변명도 할 수 없었다.

  크라수스는 혼란스러워하는 그를 노려보며 혀를 차더니 그대로 몸을 돌렸다.

  "나처럼 되라는 바람에서 내 이름을 그대로 물려주었거늘 어찌 저런 놈이 나왔다는 말인가. 가문의 성세를 이어가는 건 푸블리우스에게 맡길 수밖에 없겠구나."

  푸블리우스는 마르쿠스의 동생으로 크라수스 가문의 차남이다.

  차남에게 가문을 맡기겠다는 이야기를 대놓고 할 정도로 마르쿠스는 아버지의 눈 밖에 난 것이다.

  크라수스는 별다른 말을 더 남기지 않고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 가버렸다.

  코레도 재훈의 눈치를 한번 본 뒤 그대로 크라수스를 따라 방을 나갔다.

  어두운 방에 혼자 남겨진 재훈은 침상에 누운 채로 현 상황을 냉정하게 되짚어 보았다.

  자신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2세.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자 현실이었다.

  황당하긴 했어도 일단 납득은 가능했다.

  문제는 올해 열두 살이 되는 자신이 아버지의 속을 썩이는 이름난 탕아라는 점이다.

  크라수스 2세는 가문의 재력과 위세를 등에 업고 갖가지 소동을 일으켜 이미 로마 시내에 그 악명이 자자했다.

  고작 열둘밖에 되지 않은 꼬마가 뭘 할 수 있겠냐 싶겠지만, 마르쿠스는 상당히 질이 안 좋은 인간이었다.

  법에 걸릴 일은 피하면서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괴롭혔다.

  그가 괴롭힌 대상은 주로 다른 집의 노예나 몰락한 평민들이었기에 크라수스도 처음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쨌거나 지금 시대에서 노예는 그저 물건이다. 거기에 몰락한 하층민들 좀 손봐주었다고 크게 문제를 삼을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점점 정도가 심해지자 크라수스도 더는 두고 볼 수 없게 됐다.

  크라수스는 마르쿠스가 노예들을 동원해 이유 없이 폭력을 저지르는 걸 금지했다.

  그러자 마르쿠스는 보란 듯이 방탕하게 먹고 마시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원래 로마인들은 포도주를 많이 마시기는 해도 물을 많이 타서 연하게 마시는 게 보통이다.

  그러지 않고 도수가 높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버리는 이들은 질이 나쁜 술꾼으로 취급했다.

  마르쿠스는 질 나쁜 귀족 자제들과 어울리며 어린 나이부터 술에 취하는 게 거의 일상이었다.

  이러니 아버지의 신뢰가 땅에 처박힐 수밖에.

  '진짜 전형적인 무개념 귀족 자제의 표본이구만. 내가 이런 놈으로 살아가야 한다니.'

  하루아침에 인생이 바뀌어버렸지만 재훈은 의외로 담담히 현 상황에 적응했다.

  어차피 한국에 있을 때는 평생 대출금이나 갚으며 빈곤하게 먹고 살아야 하는 흙수저였다.

  그러느니 차라리 돈 걱정은 평생 하면서 살지 않아도 되는 고대 귀족 가문의 자제로 사는 게 수백 배는 더 낫지 않겠는가.

  가문은 동생이 잇게 되겠지만 어차피 재훈은 가문을 이어나가고 싶은 욕망도 없었다.

  그냥 적당히 망나니 생활만 청산하고 짱짱한 아버지와 동생의 그늘에 묻혀 쾌적한 귀족의 삶을 살아가면 그만이다.

  '크라수스라고 하면 그 유명한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결성해 로마를 좌지우지 하게 되는 거물 중의 거물이었지? 좋아, 좋아. 이제 흙수저의 삶은 영원히 안녕이다.'

  고대인의 생활은 조금 불편하겠지만 그토록 바라던 금수저의 삶을 위해서라면 감내할 수 있다.

  사람이 너무 갑자기 변하면 의심만 받을 테니 아주 조금씩 크라수스의 말을 따르는 쪽으로 선회하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희망찬 미래의 청사진에 한껏 가슴이 부풀어 오르려던 찰나, 재훈이 알고 있는 역사적인 지식 하나가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잠깐.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명성을 따라잡기 위해 무리한 원정을 추진했다가 죽지 않았던가?'

  기억은 틀리지 않았다.

  동방의 대국인 파르티아 원정을 감행한 크라수스는 로마 역사에 손꼽을 정도의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사망한다.

  문제는 그 전투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차남 푸블리우스도 함께 죽는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동생의 등에 올라타 편하게 꿀만 빨려던 계획이 시작도 하기 전부터 위기에 봉착했다.

  치사량 직전까지 김칫국을 들이마시던 재훈의 표정이 휴지조각처럼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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