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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로마 최고 대부호 크라수스 (4/326)

  # 4 3. 로마 최고 대부호 크라수스 ──────────────── 예상치 못한 재훈의 반응에 사내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아, 아니···그러니까 이 노예는 제 거라고 확실히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알아.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이잖아?"

  "그렇죠. 그렇습니다. 그렇고말고요."

  "그럼 노예가 행한 잘못도 당연히 그 주인의 잘못이라고 봐야겠지?"

  비릿하게 웃는 재훈에게 남성은 처음으로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태도에 재훈은 상대에게서 여유가 사라졌다는 걸 느꼈다.

  "내 발목을 좀 봐. 네 노예가 잡아채서 피로 범벅이 됐잖아. 감히 노예가 원로원 의원의 장남의 신체를 함부로 잡아서 더럽혀?"

  "아니, 그건······."

  "네가 좋아하는 법에서 이런 걸 과연 용인하던가?"

  "···그, 그게······."

  남성은 뭐라 반박하지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럴 줄 알았다.

  현대만 해도 변호사가 아닌 이상 법률을 줄줄 외우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식으로 알량한 법지식을 들먹이는 자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 알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의 물건이잖아? 이건 결국 그쪽이 나에게 심각한 무례를 저지른 거라고 해석해도 무리는 없을 것 같은데. 내 말이 맞지, 셉티무스?"

  "말씀대로입니다. 주인님께서 저 노예를 지금 당장 끌고 가서 쳐 죽여도 할 말이 없죠. 동의하지 않는다면 주인에게 돈으로 배상하라는 요구를 할 수 있겠고요."

  셉티무스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자 남성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미색이 뛰어나고 쳐녀인 여자 노예는 그리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구한다고 하더라도 당연히 엄청난 액수의 돈이 깨진다.

  남성은 필요하다면 재판까지 가는 것도 감수할 셈이었다.

  "그러니까···귀족나리께서는 저 노예가 무례를 범했으니 넘기라 이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가 데려가서 직접 무례에 대한 값을 치르게 할 것이다. 노예를 구하는데 든 돈 정도야 내가 지불해주마. 그러면 불만 없겠지?"

  내놓으라고 한다고 순순히 내놓는 바보가 있을 리가 없다.

  남성은 소녀를 1, 2년만 더 교육시키면 들인 돈의 배 이상을 뽑아낼 자신이 있었다.

  이런 걸어 다니는 황금을 원가에 넘겨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두 배라면 몰라도 원금만 받고 넘길 수는 없습니다."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쪽에게 상품을 사는 게 아니야. 나에게 무례를 범한 노예를 처분할 테니 제값만 받고 넘기라는 거지."

  "그럴 수 없다고 한다면···저를 고발이라도 하실 겁니까?"

  "고발? 그렇게 시간이 걸리고 불편한 짓을 왜 감수해야 하지?"

  재훈은 마르쿠스의 기억 덕분에 이런 부류의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았다.

  "관대한 나는 자네의 무례함도 기분 좋게 넘어갈 수 있지만 나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자네가 앞으로 이 로마에서 사업을 계속하는데 이상한 불운이 계속해서 덮칠 수도 있겠지. 아무도 자네에게 노예를 팔려고 하지 않는다든가, 원인 모를 화재가 났는데 소방관들이 불을 꺼주지 않는다든가 하는 사소한 문제들이 터질 수도 있겠지."

  남성의 얼굴이 완전히 하얗게 질렸다. 이건 명백한 협박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그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어린 소녀에 비하면 남성은 절대적인 강자였으나, 마찬가지로 평범한 노예상인 남성에 비한다면 로마 최고 부호의 장남인 재훈은 훨씬 더 거대한 힘을 지닌 강자였다.

  남성은 자신이 이 해괴한 귀족 도련님에게 완전히 찍혔다는 걸 직감했다.

  설령 여기서 노예를 넘긴다고 해도 나중에 어떤 트집을 또 잡을지 모른다.

  자신도 그리 만만한 존재는 아니라는 걸 어필해야만 했다.

  "자, 잠깐만요! 귀족나리께서 얼마나 대단한 가문의 도련님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역시 거래하고 있는 귀족 분들이 계십니다. 원로원에 의석을 지닌 분들도 몇몇 있어요. 저에게서 노예를 공급받지 못하신다면 그분들도 꽤나 불편해할 수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군요."

  "크크큭, 귀족들과 나름 연줄이 있으시다?"

  재훈은 남성의 말 따윈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싸늘한 조소를 흘렸다.

  "그 말을 들으니까 진심으로 궁금해지는데? 과연 그쪽이랑 거래하는 원로원 의원들이 크라수스 가문이 아닌 그쪽 편을 들어줄까? 한 번 실험해볼까?"

  "크, 크라수스?"

  남성의 입이 이 이상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떡 벌어졌다.

  크라수스 가문은 평범한 로마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로마 사상 최고의 대부호였다.

  특히 노예상처럼 그리 밝은 일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크라수스가 부를 축적할 때 보인 어두운 면모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크라수스는 본디 원로원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철혈의 독재를 한 술라 휘하의 무장이었다.

  술라의 반대파를 철저히 숙청하면서 얻은 막대한 부가 크라수스의 재산 형성의 배경이 됐다.

  이때 얼마나 피도 눈물도 없이 반대파를 찍어냈는지 술라마저 난색을 표할 정도였다고 한다.

  어쨌거나 지금은 고인이 된 술라의 문하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첫째로 폼페이우스, 둘째로는 크라수스를 꼽는다.

  올해 집정관에 선출된 루쿨루스도 있으나 크라수스가 지닌 로마 최고의 부자라는 임팩트가 아무래도 조금 더 컸다.

  일개 노예상 따위가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이다.

  남성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 납작 엎드려 비는 게 다였다.

  "아이고, 도련님. 제가 귀인을 몰라보고 그만 실언을 했습니다. 도련님의 발목을 더럽힌 노예 따위 얼마든지 데려가십시오! 당연히 드려야지요. 원금만 주셔도 저는 정말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감지덕지 받아야지요."

  "그래? 이해가 일치하니 기쁘군. 이렇게 서로 만족하는 형태로 갈등이 마무리 되니 얼마나 좋아? 돈은 내일 지불하도록 하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헤헤헤, 그럼 저는 이만."

  남성은 비굴하게 손을 싹싹 비비더니 도망치듯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재훈은 도망간 남성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쓰러져 있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안심하고 눈을 붙여라. 앞으로 너는 내 그늘 하에서 비호를 받을 테니."

  꿈결처럼 날아든 자상한 목소리에 소녀는 공포와 허무에 찌든 눈을 천천히 감았다.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어도 놀라고 있는 쪽은 셉티무스였다.

  그는 마르쿠스의 이런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마르쿠스는 노예를 때려죽이는 쪽이었지 절대로 구해주는 쪽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당연한 물음을 입에 담았다.

  "데려가서 취하실 생각이신가요?"

  "미쳤냐? 내가 페도야?"

  "예? 페도?"

  "난 소아성애자가 아니란 뜻이다."

  셉티무스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로마에서 어린 소녀를 품는 건 딱히 비난받는 일이 아니다.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대상은 자유민 출생의 어린아이, 그리고 베스타 여사제들 정도다.

  성적으로 개방적인 로마에서 어린 여자 노예와 동침하는 정도는 추문거리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면 어째서 이 아이를 구해주신 겁니까? 평상시라면 절대로 이런 행동은 하지 않으셨을 텐데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병신 같은 내가 쪽팔려서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그건 또 무슨······."

  "그런 게 있어."

  재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셉티무스를 뒤로한 채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이런 자기만족에 가까운 행위를 했다고 무언가 달라지는 게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건 자신의 마음속에 일종의 선을 그은 것이다.

  영문도 모르는 채 과거의 세계에 떨어져 버렸지만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저버리지 않겠다.

  그 최소한의 도리를 어느 정도로 판단할 것인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재훈이 마틴 루터처럼 타고난 정의감의 소유자가 아니라 로마 전체와 맞서면서까지 노예제의 부당함을 주장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그럴만한 그릇도 따라주지 않는다.

  그래도 일단 자신만이라도 그들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로 했다.

  비겁한 겁쟁이의 위선에 불과할 지라도 이게 스스로에게 그은 최소한의 지켜야 할 선이었다.

  셉티무스는 터덜터덜 걸어가는 작은 주인의 뒷모습에서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참, 그러고 보니 그 노예상은 어떻게 할까요?"

  "불법적인 일을 저질렀는지 조사해봐. 그리고 처벌받은 일을 했다면 우리와는 관계없는 변호사에게 슬쩍 흘려줘. 저런 쓰레기라면 분명 법에 걸리는 일을 엄청나게 해댔겠지. 털다보면 고발할 거리야 아주 무궁무진하게 많이 나올 거야."

  "말씀하신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셉티무스는 누구도 볼 수 없게 살짝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자유민이라고 해도 그 역시 노예출신이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노예를 때리고 파는 자를 고깝게 볼 리가 없다.

  그는 크라수스에게 마르쿠스가 사고를 치면 무조건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최대한 마르쿠스에게 호의적인 보고를 올리기로 했다.

  ※※※※

  저택에 돌아온 재훈은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졌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떤 인간이 되려 하는가.'

  진지하게 답을 내야 하는 화두였다.

  현대의 재벌 2세처럼 과거에 누리지 못했던 호사를 마음껏 누리며 산다.

  그런 것만을 목표로 삼을 수는 없다.

  오늘 본 소녀에게 일어난 일은 로마 전역에서 흔하게 행해지고 있을 터.

  그런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했는데 모르는 척 잊어버리고 사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가진 자들은 그만큼 사회를 위해 배풀 줄 알아야 한다.'

  현대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이를 당연한 미덕이라 여겼다.

  하지만 막상 그 입장이 되어보니 이게 아무래도 쉬운 게 아니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내 능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눈에 띄는 노예 몇몇을 구한 것만으로 실질적인 변화는 찾아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노예제를 폐지하자는 정신 나간 주장을 할 마음은 없다.

  노예제는 현 로마 경제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다. 이를 커버할 수 있는 대안도 없이 저런 소리를 했다가는 돌 맞아 죽기 딱 좋았다.

  정의감이 아니라 실리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문제다.

  '그라쿠스 형제도 토지개혁을 주장하다가 기득권층에게 살해당했으니까. 급진적인 개혁안을 내면 바로 권력자들과 척을 진다고 봐야겠지.'

  그라쿠스 형제가 평민들의 대표인 호민관으로서 부의 분배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은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유명한 이야기다.

  이보다 조금 더 완화된 농지법은 훗날 카이사르가 집정관이 되어 통과시킨다.

  재훈이 보았던 책에서는 그라쿠스 형제는 실패했고 카이사르는 성공한 이유를 이렇게 풀이했다.

  카이사르의 개혁안이 그라쿠스의 개혁안보다 덜 급진적이기도 했으나 다른 중대한 차이점이 하나 더 있다. 그라쿠스 형제는 평민들의 지지만 등에 업고 원로원 기득권층은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즉, 아래에서 위를 향하는 혁명에 가까운 개혁이었다.

  반대로 카이사르는 로마 최고 관직인 집정관이라는 직책을 얻은 뒤 개혁을 진행했다.

  그리고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던 폼페이우스와 재력가인 크라수스를 끌어들여 자신의 제안에 무게감을 더했다.

  개혁이란 체제 밖에서가 아닌 체제 안에서 진행해야 맞닥뜨리는 저항이 훨씬 약해지는 법이다.

  주인이 가진 노예의 생살여탈권을 폐지한 이는 훗날 로마의 황제에 오르는 하드리아누스였다.

  '역시 변화를 이루려면 그걸 추진할 수 있는 자리에 오르는 게 먼저야.'

  그 정도 위치에 오른다면 사람들의 의식변화를 촉구하기도 용이해진다.

  단순하게 노예제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사회가 품고 있는 수많은 모순들과 그로 인해 희생당한 피해자들의 수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

  '이천 년도 더 전의 세계로 왔는데 최소한 이 정도라도 하지 않으면 뭔가 죄를 짓는 기분이잖아.'

  어떤 길을 가야하는지 정하는 데에는 별다른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이뤄야 하는 것이냐다.

  '단순히 집정관에 오르는 정도로 가능할까? 아니, 그것만으로는 불가능해.'

  집정관이 로마 최고의 관직이라 해봐야 임기는 1년에 불과하다. 국가의 존폐가 걸린 사안이 아니면 연임도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이래서야 장기적인 안목으로 바라봐야 하는 개혁을 추진하기란 무리다.

  '그렇다고 카이사르처럼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독재관으로 혼자 다 해먹는 것도 좀 그런데······.'

  로마인들은 독재자에 대해서는 거의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인다.

  상당히 좋은 취지의 개혁을 많이 통과시킨 카이사르의 말로도 결국엔 암살이었다.

  술라처럼 기득권층을 위해 독재를 하고 바로 그 권력을 내려놓은 사람도 독재자라는 비판이 왕왕 나오는 곳이 로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재훈이 카이사르나 폼페이우스 같은 쟁쟁한 인물들과 경쟁할 자신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대강 알고 있으니 어떻게 이겨볼 수는 있을까? 아니, 그렇다고 해도 만약 뭔가가 잘못 돼서 내전이라도 벌어지면? 내가 카이사르를 어떻게 이겨?'

  공화정 말기의 로마는 군사적 재능과 공적이 없는 사람은 최고위에 오르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문제가 생기면 마지막에는 거의 실력행사로 나와 버리니 당연한 일이다.

  크라수스도 자신에게 부족한 군사적 공적을 무리하게 얻으려다가 결국 원정에서 죽지 않았던가.

  '아오! 이럴 줄 알았으면 수박 겉핥기식이 아니라 철저하게 고대 로마사를 탐독하고 왔어야 하는데.'

  갑자기 이천 년 전으로 떨어질 줄 몰랐으니 이제 와서 과거의 자신을 탓해봐야 무의미한 짓이다.

  방안을 서성이며 고민에 잠겨있던 재훈은 불현 듯 떠오른 아이디어에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맞아! 굳이 카이사르 같은 인간이랑 경쟁할 필요는 없잖아? 바보같이 왜 이런 생각을 못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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