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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알고보니 천재? (6/326)

  # 6 5. 알고보니 천재?

  ──────────────── 결심을 내렸다면 이제 바로 행동으로 옮길 뿐이다.

  다나에를 남겨둔 채 나온 마르쿠스는 곧바로 아버지인 크라수스를 찾았다.

  크라수스는 아들이 찾아올 것을 예상 못했는지 조금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마르쿠스를 맞이했다.

  "네가 먼저 나를 보자고 하다니 의외로구나. 최근 며칠은 좀 잠잠하다 싶더니 어디서 또 사고라도 친 게냐?"

  "설마요. 그랬으면 셉티무스가 보고를 올렸겠죠."

  "그래. 그걸 아니까 더 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무슨 일로 찾아온 거냐?"

  전혀 신뢰감이 느껴지지 않는 크라수스의 시선에 마르쿠스는 절로 쓴웃음을 지었다.

  "아버지에게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그전에 나도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그 트라키아인 여자애는 왜 데리고 온 게냐. 애첩으로라도 삼으려고?"

  "전혀 아닙니다. 생각해둔 바가 있어 일단 전문교육을 받게 하려고 합니다."

  "여자노예에게 초등교육이 아니라 전문교육을 시키겠다고?"

  크라수스는 긴 의자에 비스듬하게 누운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마는 그리스와는 달리 여성들도 문자교육으로 대표되는 초등교육까지는 받는다.

  하지만 보통은 거기서 끝일 뿐이며 학식 있는 가문의 여성들 정도나 중등 이상의 문법 교육을 받는다.

  남자 노예 같은 경우는 특수한 직군에 한해서 고등교육까지 받는 일도 있었으나. 여자노예는 그런 경우를 찾아볼 수 없었다.

  크라수스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했다.

  "반드시 도움이 될 때가 올 겁니다."

  "여자노예 하나가 별로 도움이 되리라 보지는 않지만···그럼 그냥 네 하고 싶은 대로 해보아라."

  "감사합니다."

  "노예 문제는 그쯤 넘어가길 하고, 부탁할 게 뭐냐. 최근에 얌전하게 지낸 상으로 가벼운 부탁이라면 들어주마."

  술에 떡이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얌전히 지냈다고 칭찬을 받는 상황이다. 마르쿠스는 크라수스가 자신에게 지닌 기대감이 얼마나 낮은지 단적으로 엿볼 수 있었다.

  '자업자득이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효과도 상당히 클 거야.'

  원래 잘하던 놈이라면 더 잘해봐야 가벼운 칭찬만 듣고 넘어가는 법이다.

  반대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던 자라면 중간만 가더라도 그 성취가 한층 더 커보이게 된다.

  마르쿠스는 심호흡을 한 차례 한 뒤,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내 놓았다.

  "가문의 사업을 보고 배우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뭐라고? 사업을 배우고 싶어?"

  전혀 예상치 못한 부탁에 크라수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로마에서 열두 살이라면 이제 중등교육을 시작할 나이다.

  당연히 마르쿠스도 건성이긴 해도 저명한 그리스 문법교사 밑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다.

  로마 시민은 17세에 성인식을 치루고 로마의 정장이라고 할 수 있는 토가를 입을 수 있게 된다.

  성인식도 치루지 않은 소년은 군역을 지지도 않았고, 아직 배움에 열중해야 하는 나이대로 여겨졌다.

  상류계급의 자식들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원로원 의원의 자식들 정도 되면 문법, 산술, 기하등의 교육을 끝마친 뒤에도 수사학과 웅변 기법, 철학까지 배워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이렇게나 할 일이 많은데 다른 일을 시켜달라고 하는 것은 의무를 미루는 걸로 보이기 마련이다.

  크라수스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렇게 공부하는 게 싫더냐?"

  "그런 게 아닙니다. 당연히 지금 받는 교육에도 충실하게 임할 생각입니다. 다만 그 외에도 가문의 사업을 바로 옆에서 보고 배우고 싶은 겁니다."

  "어째서? 어차피 실무는 가문의 해방노예들이 할 텐데. 그리고 너도 일단 우리 가문의 일원이니 원로원에는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네가 인망이 부족해도 재무관 정도야 금력을 동원하면 얼마든지 될 수 있다."

  "예. 당연히 그럴 생각입니다."

  원로원 의석은 본래 300명 정원이었으나 술라의 개혁으로 현재 600명으로 늘어난 상태였다.

  재무관-안찰관-법무관-집정관 순으로 관직을 밟아 나가는 자들 중에 감찰관의 심사를 통과한 이들이 원로원 의원이 된다.

  이 관직들은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해 로마에서는 흔히 명예로운 경력이라 불렀다.

  명망 있는 가문의 젊은이들은 대게 재무관만 거치면 바로 원로원 의원으로 들어간다.

  로마는 선관위 같은 조직이 없었기 때문에 유권자들을 매수하는 건 일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정원이 2명인 집정관이나 8명인 법무관이라면 몰라도 20명이나 되는 재무관은 돈만 뿌리면 어떻게든 당선될 수 있었다.

  망나니인 마르쿠스도 가문의 지원만 있다면야 재무관 정도는 충분히 당선될 수 있을 터.

  상식적으로 장차 원로원 의원이 될 그가 어린 시절부터 상업에 종사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가문의 부를 지키고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상업에 해박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선후관계를 착각해서는 곤란해."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세부적인 일이야 해방노예들이 한다고 해도 사업을 총괄하는 건 책임자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푸블리우스는 정치인으로서 대성은 할 수 있겠지만 상재는 부족합니다. 사람이 너무 건실하고 착하니까요."

  "흐음······."

  마르쿠스의 말은 크라수스도 한번쯤 생각해 보았던 사안이었다. 차남인 푸블리우스는 솔개가 매를 낳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크라수스가와는 동떨어진 아이였다.

  만인에게 사랑을 받고 존경을 받을만한 그릇을 가진 아이였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나 깨끗하고 맑아 상업에 발을 걸치기엔 무리가 있다.

  가문의 재산을 유지하기만 해도 다행이고 십중팔구는 깎아먹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너는 다를 것 같으냐?"

  "저도 아버지만큼의 능력이 없는 건 압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사업에 익숙해지려는 겁니다."

  비스듬히 누워있던 크라수스가 몸을 똑바로 일으켰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마르쿠스를 꿰뚫었다.

  스산한 바람이 등골을 휘감았다. 그렇게 착각할 정도의 위압감에도 마르쿠스는 기가 죽지 않았다.

  크라수스는 딱히 아들을 겁박하기 위해 노려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에서 냉혹한 경영자의 모습으로 자세를 바꾸었을 뿐이다.

  이게 로마 부의 정점에 앉은 크라수스 가문의 가장이 지닌 존재감이다.

  고요한 소름에 떠는 마르쿠스의 귀로 크라수스의 건조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너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문제만 일으켰지. 단 한 번도 내 기대에 부응해주지 못한 너에게 내가 또 한 번 속아줘야 할 이유가 있느냐?"

  여기에서 납득할만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교섭은 바로 결렬이다.

  마르쿠스는 희석한 포도주로 한 번 입을 축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해 정치인으로 대성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당장 동생과 비교해서 제 능력이 모자란 게 계속해서 티가 났으니까요."

  "그랬으면 더욱 노력을 하는 모습이라도 보였어야지."

  "아버지의 기대가 동생에게 옮겨가는 걸 보는 게 괴로웠고 그만큼 할 수 없는 자신이 미웠습니다."

  잘 지어낸 거짓말이었긴 해도 효과는 확실했다.

  냉철하던 크라수스의 눈동자가 일순간 흔들린 것이다.

  그 역시 사람의 자식이며 두 아들의 아버지다.

  솔직하게 어긋난 이유를 고하는 아들의 진심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아버지는 없다.

  "그래서 어린 나이부터 술에 취하고 갖은 사고를 치고 다녔다는 거냐."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인정할 건 인정하기로요. 저는 동생처럼 될 수 없습니다. 대신 동생과는 다른 분야에서 가문에 힘이 되고 싶습니다."

  "갑자기 그런 마음을 먹게 된 계기라도 있느냐?"

  크라수스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누가 들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어조는 부드러워져 있었다.

  거의 다 넘어왔다고 판단한 마르쿠스는 표정 연기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며칠 전에 술에 완전히 취해 정신을 잃고 깨어났을 때 엄청난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 것인가···숨을 거두는 날까지 이따위 삶을 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이제 네 나이면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때지. 여러 가지로 마음이 어지러웠을 게야.

  "형으로서 책임감이 없다고 느끼실 지도 모르겠지만 가문의 뒤를 이어야 하는 부담감은 동생에게 전가하기로 했습니다. 부끄럽지만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한결 가벼워지더군요. 대신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자고 결심했습니다."

  "그게 상업이냐?"

  마르쿠스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크라수스는 아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잠시 눈을 감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주변을 감돌았다.

  시간으로 따지면 몇 초밖에 되지 않을 정적이 마르쿠스의 가슴을 옥죄었다. 여기에서 실패하면 한참을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한결 풀어진 크라수스의 눈이 마르쿠스의 얼굴을 들여 보다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보고 배우기만 하는 거라면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 네가 정말로 상업에 소질이 있다고 판단이 된다면 그에 맞는 자리를 준비해주마."

  "감사합니다! 절대 실망하시는 일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설득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안도의 미소를 짓는 마르쿠스에게 크라수스는 잊지 않고 냉정하게 조건을 덧붙였다.

  "또다시 말뿐이었다는 게 증명이 된다면 앞으로 다시는 너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거다. 그래도 괜찮겠지?"

  "물론이죠."

  마르쿠스에게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비책이 몇 가지 있었다.

  가문의 재산을 늘리면 늘렸지 까먹을 일은 절대로 없다고 확신했다.

  "마지막 기회라는 걸 명심하고 죽을 각오로 배우겠습니다."

  "부디 말뿐이 아니기를 바란다."

  마르쿠스는 확신에 찬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티는 내지 않았으나 크라수스도 며칠 사이 놀랍도록 달라진 아들의 모습에 내심 크게 흡족했다.

  그 덕분인지 부자간의 대화는 실로 오랜만에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

  "···해서 대강 알아두셔야 할 사항은 이 정도입니다."

  "더럽게 복잡하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마르쿠스는 곧바로 가문이 경영하는 사업에 대해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원래 실무 일을 해왔던 셉티무스가 그대로 마르쿠스의 교육담당을 맡았다.

  솔직히 고대 시대의 사업이라 해봐야 얼마나 대단하겠냐고 얕보는 마음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마르쿠스는 이런 현대인의 오만을 바로 뼈저리게 반성하게 됐다.

  크라수스 가문이 가진 부는 정말 상상이상으로 거대했고. 이 재산을 바탕으로 경영하고 있는 사업도 엄청나게 방대했다.

  책에서 말하기론 크라수스 가문의 재산은 현대의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200조가 넘는다고 한다.

  이는 포브스지가 선정한 역사적 인물들 중 역대 8위에 해당하는 자산이다.

  200조는커녕 200만원이라도 통장에 있을 때가 드물었던 마르쿠스로서는 이게 어느 정도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광산업에 전문훈련을 받은 노예 파견, 소방업에 대농장 경영, 운송업과 거기에 쓰일 수레들의 제작, 부동산업, 해운업, 거기에 검투사 육성까지···진짜로 손을 안 댄 분야가 없네?"

  "네. 로마에서 돈이 되는 사업에는 전부 손을 뻗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건 진짜 현대의 재벌 그 자체구만."

  수십 가지가 넘는 계열사들이 해방노예의 명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이 해방노예 밑에는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백 단위의 노예가 딸려 있었다.

  예상을 훌쩍 넘어서는 규모와 정교함에 감탄마저 나왔다.

  "크라수스 가문은 로마의 부를 상징하는 가문이니까요."

  어깨를 쭉 피는 셉티무스의 표정에서는 일종의 자부심이 흘러나왔다.

  자신들이 이 거대한 부의 축적에 일조했다는 그런 자부심이었다.

  "이 정도로 사업규모가 방대하면 아버지라고 해도 세세하게 다 돌아보는 건 무리였겠는데?"

  "그렇습니다. 하지만 크라수스 님은 사업의 본질을 통찰하는 혜안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커다란 결정을 내리시면 그것들을 구체화하는 게 저희들이 할 일이죠."

  들을수록 헌대 한국의 재벌과 운영되는 방식이 비슷했다.

  강력한 지배력을 가진 기업의 총수가 회사의 방향을 정하고 능력 있는 사장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고대 국가에서 이런 구조의 사업이 가능했다니 세상에······.'

  자칫하면 압도당할 뻔 했으나 다행히 마르쿠스는 기가 꺾이진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자신이 하려고 했던 일은 사업의 큰 틀을 정해서 수익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복잡하고 세세한 일은 그가 신경 쓸 사안이 아니었다.

  투자의 핵심은 결국 싼 값에 사서 비싸게 파는 것.

  이것만 확실히 해낼 수 있다면 누구라도 무지막지한 수입을 버는 게 가능하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가격의 변동을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마르쿠스에게도 그런 능력은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에게는 예측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지식이 있었다.

  '밀 가격의 급등과 폭락은 곧 일어나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액수의 차익을 남길 수 있어.'

  로마인들의 주식은 밀이다. 이 밀의 가격이 요동을 칠 때마다 로마의 정세는 항상 급변했다.

  덕분에 로마의 역사를 자세하게 다룬 책에서는 항상 짧게나마 밀 가격에 대한 언급이 나왔다.

  현대 사회에서 정보는 곧 돈이었다.

  그것은 고대사회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마르쿠스는 자신이 지닌 지식을 가문의 사업에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슬슬 감이 잡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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