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6. 알고보니 천재?
──────────────── 밀의 대량 매수와 매도를 통해 차익을 남기겠다는 마르쿠스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물론 그 정도의 발언권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실적이라는 형태의 신뢰를 쌓을 필요가 있었다.
지금의 마르쿠스가 밀 가격이 오를 테니 미리 사두라는 말을 해봐야 누가 귀를 기울이겠는가.
그렇다고 초장부터 너무 튀는 행동을 하면 의심을 받기 마련이다.
일단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해 싹수가 있는 놈이라는 걸 보여주는 정도로도 충분했다.
세상만사 뭐든지 빌드업이 중요한 법이다.
마르쿠스는 사업장을 돌아보던 중 마침 딱 좋은 소재를 발견했다.
바로 고장난 수차였다.
"셉티무스, 저기 수차는 어째서 수리중인 거지?"
"톱니가 뒤틀렸다고 하더군요. 종종 있는 일입니다."
"종종 있는 일이라고? 톱니의 재질이 좋지 않은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극단적으로 닳는 톱니들이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형태가 망가지는 경우가 자주 있는 모양입니다."
마르쿠스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거야말로 교양수준에 불과한 자신의 지식으로도 해결이 가능한 문제다. 그것도 고대 수준의 수학적 지식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했다.
마르쿠스는 짐짓 모르는 척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이유는 몰라?"
"부끄럽게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이유가 없는 현상은 없지. 같은 나무를 썼는데 어떤 건 멀쩡하고 어떤 건 마모가 심하면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마르쿠스는 한동안 수차를 여기저기 관찰하며 열심히 궁리하는 연기에 몰두했다.
"혹시 마모된 톱니들은 항상 이것들끼리만 맞물리니까 빨리 닳아진 게 아닐까? 반대로 멀쩡한 톱니는 그만큼 맞물린 횟수가 적은 거고."
"아마···그렇겠죠? 그렇게 보는 게 합당하겠네요."
"그럼 톱니를 설계할 때 모든 톱니들이 골고루 맞물리게 하면 내구성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이론상은 그렇겠죠. 하지만 중요한 건 어떻게 그렇게 설계를 하느냐 아닐까요."
"그렇지? 그런데 내가 이거랑 관련된 걸 최근에 본 것 같거든? 기하학 관련 책이었던 것 같은데······."
셉티무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공부가 싫다고 도망 다니던 마르쿠스가 기하학 관련 책을 보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였다.
그 시선을 눈치 챈 마르쿠스가 변명조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사업을 하려면 적어도 수에는 능통해야 하잖아. 그래서 그쪽 관련 책만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있는 거야."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드디어 철이 드셨군요."
"음···뭐, 어쨌든 얼마 전에 본 유클리드 호제법을 응용하면 뭔가 될 것도 같아. 한 번 말이 되는지 들어볼래?"
대다수의 현대인들은 고대인들의 수준을 너무 낮잡아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고대인들의 지적수준은 결코 무시할 정도로 낮지 않았다.
당장 서양 기하학의 아버지격인 유클리드의 원론은 19세기까지 교과서로 쓰일 정도였다.
유클리드의 호제법만 보더라도 최대공약수를 구하는 방법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고, 서로소의 개념도 이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톱니바퀴의 마모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톱니의 수가 이 서로소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톱니들이 서로소라는 뜻은 톱니 수간의 공약수가 1밖에 없는 상태를 말한다.
맞물리는 톱니들의 수가 서로소라면 모든 톱니가 같은 확률로 맞물리게 된다. 자연스레 톱니들이 고르게 닳아가고 맞물림이 최적화되는 것이다.
마르쿠스는 금전적인 문제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취미였던지라 이런 잡지식에 능했다.
사실 이 원리는 고도로 수학이 발달한 로도스 같은 곳에서는 이미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이 시대는 같은 지역 내에서조차 지식과 기술이 차이가 나던 시기다.
하물며 로도스와 로마 정도의 거리라면 지식과 기술이 전파되는 데만 한 세월이 걸릴 수밖에 없다.
현 로마에 이 원리를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이해하고 수차를 설계하는 자는 거의 없을 게 확실했다.
어쨌거나 셉티무스에게도 마르쿠스의 설명은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는 수차를 만드는 기술자에게 한 번 실험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만약 정말로 수차의 내구성이 좋아진다면 대단한 일을 하신 겁니다. 정기적으로 톱니를 수리하는 비용이 크게 줄어들 테니까요."
"그렇지? 하지만 실제로 성과가 있어도 당분간은 우리가 경영하는 곳에서만 쓰는 게 좋을 것 같아."
"음?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가 쓰는 거야 내구성이 높으면 좋지만, 남이 쓰는 건 자주 부서져야 돈을 벌 수 있잖아."
밀이 주식인 로마는 전국 각지에 대형 제분소를 두고 있었다.
위대한 발명가인 비트루비우스가 톱니로 연결한 수차를 만든 이후 이 수차를 쓰지 않는 제분소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이 수차의 내구성이 좋아지면 사용자들이야 좋겠지만, 수차를 관리하고 수리하는 장인들은 수익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
총명한 셉티무스는 바로 마르쿠스의 의도를 간파했다.
"그렇군요. 확실히 저희가 경영하는 곳만 개선품을 쓰는 게 가장 이득을 극대화할 수 있겠군요."
"어차피 톱니의 원리는 머지않아 다들 알게 될 거야. 그때가 되면 전반적인 계약방식을 손보는 형태로 장인들의 손해를 메꿔주면 되겠지."
"도련님께 이런 상재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과연 주인 어르신의 핏줄이십니다."
"그것도 있고, 내가 원래 다른 사람들 등쳐먹는 짓을 잘했잖아. 이런 쪽으로라도 재능을 살려야지."
가벼운 농담이었으나 셉티무스는 차마 웃지 못했다.
마르쿠스의 활약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셉티무스에게 간단한 분업의 개념을 설명하고 의견을 물었다.
고대 로마에서도 분업이 없지는 않았다.
다만 이 당시의 분업은 노동 과정을 쪼개는 게 아니라 산업의 분배에 가까웠다.
비옥한 토지의 대농장에서 수출용 작물을 재배하고, 도시에서는 사치품을 위한 수공업이 이루어지는 정도에 불과했다.
분업이 이론적인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저술했을 때부터다.
마르쿠스는 이 분업의 개념을 조금 더 일찍 로마에 적용시키기로 했다.
"노동 과정을 여러 가지로 나누어서 개인이나 개별 집단이 각각 수행하며 협업을 하는 형태라···이런 생각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공부하기가 귀찮아서."
"예?"
"좀 궤가 다르긴 하지만 공부도 여러 과목을 동시에 배우면 효율이 떨어지잖아? 사람은 원래 다양한 작업을 동시에 하면 능률이 떨어져. 노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공정을 나눌 수 있는 건 나눠서 최대한 단순한 작업을 여러 번 반복하게 하면 훨씬 더 쉽게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
마르쿠스의 대답에 셉티무스는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감탄했다.
공부도 못하고, 문제만 일으켰던 망나니가 실은 천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제가 판단할 때 도련님의 발상은 충분히 실험해볼 가치가 있어 보입니다. 일단 전차와 수레를 만드는 장인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보도록 하죠."
"그냥 실없는 생각일 수도 있으니까 너무 기대하지는 마."
"아니요. 예감이 좋습니다. 생산량이 상당히 올라갈 것 같아요."
며칠 뒤, 셉티무스는 크라수스의 앞에서 마르쿠스의 칭찬을 줄줄 늘어놓았다.
"도련님은 상업에 엄청난 재능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지금부터 제대로 배우고 성장하신다면 가문의 부를 배로 늘릴 인재가 되실 겁니다."
"···요즘 유행하는 신종 농담인가?"
"아닙니다. 고작 며칠 간 지켜보았을 뿐이지만 도련님의 재능은 진짜입니다. 장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통찰력을 지니고 계십니다."
크라수스는 얘가 뭐 잘못 먹었나 하는 표정으로 셉티무스를 쳐다보았다.
자식의 칭찬이 기분이 나쁠 리는 없지만 이건 너무 현실성이 없지 않은가.
"그 아이가 지금까지 하도 모자란 모습만 보여줘서 자네가 필요 이상의 과대평가를 하는 게 아닌가?"
"절대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고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셉티무스는 수첩으로 애용하는 밀랍 목판을 펼쳐 크라수스에게 보여주었다.
"도련님께서 떠올린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톱니를 만들어보았습니다. 실제 가동결과 모든 바퀴가 일정하게 맞물리는 걸 확인했습니다. 제작한 장인의 견해로는 톱니의 수명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길어질 거라고 하더군요."
"호오~그 아이가 이런 성과를?"
"거기에 노동 과정을 쪼개 분업한다는 새로운 개념도 엄청난 효율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걸 공부하기 싫어서 떠올렸다고 하시는 게 참으로 도련님답지만요."
"그래? 그건 기존방식과는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나 차이가 나던가?"
셉티무스는 극적인 효과를 주기위해 일부러 잠깐 뜸을 들였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충격적인 수치를 들려주었다.
"단순 작업속도만 봐도 몇 배나 차이가 납니다. 게다가 이건 아직 이 방식에 익숙해지지 않은 장인들로 실험한 결과입니다. 게다가 놀랍게도 불량률 역시 분업을 한 쪽이 더 낮았습니다."
이번에는 크라수스도 진심으로 경악했다.
단순히 일을 쪼개서 협업시켰다고 그 정도로 생산성이 증가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놀랍군···그 아이에게 이런 재능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게다가 단순히 번뜩이는 아이디어만 있는 게 아닙니다. 톱니를 개량하고 나서도 수리로 얻는 이익이 감소할 것까지 전부 내다보고 계셨으니까요."
"상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이득을 끌어낼 수 있는 부분을 파악하는 직관력이지. 하긴, 내 자식이니 그런 능력이 있어도 이상하진 않아."
"그렇습니다. 누구나 적성에 맞고 맞지 않는 게 있으니까요. 도련님께는 공부가 별로 맞지 않았던 것이겠지요."
셉티무스의 보고를 쭉 들은 크라수스는 입이 귀밑까지 걸렸다.
공부에는 재능이 없었던 아이가 다른 쪽에서 재능을 보이는 건 의외로 흔한 이야기다.
하지만 크라수스는 그런 형편 좋은 일이 자기 자식에게 적용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굉장히 기쁜 오산이었다.
"재능의 싹이 확실히 있다면 그걸 꽃 피울 수도 있도록 해줘야지. 앞으로도 자네가 그 아이 옆에 잘 붙어 있도록 하게. 원하는 건 되도록 다 들어주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셉티무스가 물러가고 혼자 남은 크라수스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두 아이들이 지금처럼만 잘 성장해준다면 내가 폼페이우스에게 밀릴 이유가 없지."
차남인 푸블리우스가 시민들의 지지를 얻고, 장남인 마르쿠스가 가문의 부를 책임지는 이상적인 구조가 그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남은 건 폼페이우스에 비견될 만한 군공인데···이 부분을 해결해야 해. 하지만 마땅한 무대가 없으니······."
※※※※
셉티무스의 극찬이 있은 뒤 마르쿠스의 운신의 폭은 굉장히 넓어졌다.
크라수스가 직접 마르쿠스의 재능을 최우선적으로 키워주라는 명령을 내린 덕분이었다.
상당히 많은 자금을 쓰는 실험도 합당한 이유만 댄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한 숨 돌릴 여유가 생긴 마르쿠스는 다나에를 찾았다.
며칠 만에 본 그녀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혈색은 이제 완전히 돌아왔고, 푸석하던 머리도 단정하게 말아서 땋아 올렸다.
영양실조에 가까워 보였던 빼빼마른 몸에도 약간이나마 살이 붙었다.
아직도 많이 야윈 축이긴 했으나 그건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반듯한 이목구비를 봐서는 적당히 살이 붙으면 사랑스러운 소녀가 될 것 같았다.
"여기에서 생활은 어때? 적응할 만하니?"
"네. 전에 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게 좋아요. 다른 분들도 친절하게 대해주시고 배우는 것도 정말 재미있어요. 마음 같아서는 더 많은 것들을 배워보고 싶어요."
"그래? 그건 정말 다행이네. 사실 너도 이제 슬슬 장사에 대해서 배워두는 게 좋을 것 같았거든. 셉티무스에게 말해둘 테니 당분간 내 옆에 붙어 다니는 게 좋겠어. 괜찮겠지?"
로마의 여성권리는 현대에 비하면 낮긴 해도 고대 국가치고는 꽤나 높은 편에 속했다.
아무리 가장의 권위가 막강하다고 해도 집안에서 아내의 권위 역시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여성들의 사치를 금지했던 오피우스 법이 철폐됐다는 사실이 좋은 예시다.
당시 진심으로 분노한 여인들의 맹공을 집안의 가장들은 어떤 방법으로도 억누르지 못했다.
현재 로마에서 상류층의 여성들은 사치품 시장에서 꽤나 중요한 고객들이었다.
단순히 물건을 구매하는 것 외에도 여성들 특유의 인적 네트워크는 이 시대에도 건재했다.
이는 정치적인 여론을 만들 때도 꽤나 중요하게 작용했다.
마르쿠스는 바로 이런 부분을 파고들어 공략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남성에게 맡기는 건 아무래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마르쿠스는 다나에가 충분히 성장하면 그녀에게 이 역할을 맡길 계획이었다.
다나에는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의욕을 불태웠다.
"도련님께서 맡기시는 일은 뭐든지 전력으로 임하겠습니다."
"하하, 직접적인 일을 맡기는 건 먼 미래의 일일 테니 벌써부터 너무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
"그래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도련님을 옆에서 모시려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똑똑해져야 할 테니까요."
너무 의욕이 과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열심히 배운다고 나쁠 건 없으니 일단 그대로 두기로 했다.
"앞으로의 일은 그만하면 됐고···아, 맞다. 내일 카푸아로 갈 예정이니 너도 준비할 게 있으면 미리 해놓는 게 좋을 거야."
"카푸아요? 혹시 사업 때문에 가시는 건가요?"
"아니. 친구들이 하도 가자고 성화를 부리고 있어서 말이야. 인맥관리도 너무 소홀히 하면 안 되거든. 돈 될 일이 있다면 겸사겸사 처리를 하겠지만."
마르쿠스가 평소 어울려 놀던 집안의 자제들은 대다수가 같은 원로원 가문의 일원이었다.
이제 방탕한 삶과는 거리를 두었다고 해도 훗날의 VIP 고객들을 소홀히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이번에 갈 곳은 마르쿠스로서도 굉장히 관심이 가는 지역이기도 했다.
"다른 귀족 자제분들과 함께 가시는 거군요, 혹시 카푸아에서 축제 같은 게 열리고 있나요?
"검투시합을 보러 가는 거야. 요새 카푸아의 검투사들이 장안의 화제거든. 엄청나게 수준이 높다고 소문이 자자해."
"아~검투사 시합이군요. 일종의 축제가 맞긴 하네요."
"그래. 특히 카푸아 검투사들의 챔피언이 괴물처럼 강하다고 유명세를 떨치고 있어. 본명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이렇게 부른다고 해."
마르쿠스는 자신도 익히 알고 있는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스파르타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