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9. 스파르타쿠스 ──────────────── 스파르타쿠스가 먼저 노린 건 방패를 든 검투사였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거리를 좁힌 스파르타쿠스의 검격에 검투사들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콰앙!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 올린 검투사 한 명이 무지막지한 굉음과 함께 뒤로 날아갔다 방패로 막아냈음에도 충격을 다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커윽!"
등부터 땅에 떨어진 검투사는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모래밭을 나뒹굴었다.
순식간에 한 명이 무력화되자 쌍검을 든 검투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정면에서 검을 받지 마! 무조건 피해!"
"말이야 쉽지! 저 속도 안보여?"
스파르타쿠스는 상대방이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시 쇄도했다.
갑주를 입은 검투사가 갑옷의 방어력을 믿고 마주 검을 찔러갔다.
피하기만 해서는 이길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스파르타쿠스는 휘두르는 검을 회수하고 가볍게 몸을 틀어 갑주 검투사의 검을 피했다. 동시에 몸을 회전하는 기세 그대로 오른발을 차올렸다.
갑주 검투사의 복부에서 맹렬한 타격음이 터져 나왔다.
빠악!
"끄어억······."
갑주 검투사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갑옷을 입지 않았다면 장이 파열돼서 즉사했을지도 모르는 파괴력이었다.
어찌나 충격이 컸던지 쥐고 있던 무기마저 떨어뜨리고 땅에 무릎을 꿇었다.
스파르타쿠스는 무릎을 꿇은 갑주 검투사의 관자놀이를 그대로 주먹으로 후려쳤다.
급소를 얻어맞은 갑주 검투사는 그대로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갔다.
수비적으로 버티려고 했던 쌍검의 검투사가 성급한 동료에게 욕을 한 사발 퍼부었다.
"이런 경솔한 새끼! 그러니까 혼자 나서지 말랬잖아."
제대로 검 한 번 휘두르지도 못하고 혼자 남아버렸다.
이제 회피고 뭐고 불가능하다.
쌍검의 검투사는 이를 갈며 앞으로 나섰다.
횡으로 치고 들어가는 그의 검격을 스파르타쿠스의 검이 수직으로 내리찍었다.
쌍검은 채 3합도 견뎌내지 못했다.
삽시간에 두 쪽이 난 검 한 자루가 허공을 날고 손목에서 감각이 사라졌다.
스파르타쿠스의 검에 실린 힘은 가히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한계에 달해 있었다.
챙! 파캉!
한 자루밖에 남지 않은 검을 휘두르는 검투사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이 정도로 강할 거라고는 짐작도 못했다는 표정이다.
세 명이 덤비면 어떻게든 될 줄 알았는데 터무니없는 착각이었다.
"이런 괴물 같은 놈이······!"
그래도 그는 클로디우스 검투사 양성소의 일인자였다.
혼이 빠져나갈 듯한 공세에도 어떻게든 반격의 실마리를 찾아보려 했다.
발악적으로 찔러오는 검 끝에 스파르타쿠스의 눈이 한 줄기 섬광을 번쩍였다.
스각!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대결은 끝났다.
직선으로 뻗어오는 검을 쳐낸 스파르타쿠스의 검이 그대로 사선으로 흘러내렸다.
승부에 종지부를 찍는 결정타였다.
"커억!"
외마디 신음성을 토해낸 검투사의 입에서 붉은 핏물이 흘러나왔다.
즉사는 아니었으나 도저히 전투를 이어나갈 수 없는 치명상이다.
한쪽 무릎을 꿇고 비틀거리던 그는 이내 그대로 모랫바닥에 얼굴을 묻고 쓰러졌다.
스파르타쿠스는 태연하게 걸었다. 그의 발끝이 향한 곳에는 처음에 날려버렸던 방패를 든 검투사가 있었다.
거리가 좁혀지자 검투사는 방패로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스파르타쿠스는 상대방이 일어날 타이밍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듯했다.
방패의 검투사는 바로 앞에 스파르타쿠스가 있는 걸 보고 황급히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가 그걸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방패의 검투사가 뒷걸음질을 치기도 전에, 스파르타쿠스의 주먹이 한 발 더 빠르게 쏘아졌다.
뻐억!
검투사의 입에서 부서진 이빨이 튀어나왔다. 그의 몸이 정신없이 뒤쪽으로 튕겨 나갔다.
과장 없이 주먹 한 방에 정신을 잃은 것이다.
그의 몸이 바닥에 쓰러진 채,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클로디우스 양성소의 검투사 3인방.
이들은 그 어느 검투사 시합을 나가더라도 이렇게 볼품없이 깨질 전사들이 아니었다.
현재 카푸아 제일의 검투사 양성소는 크릭수스와 스파르타쿠스를 배출한 바티아투스 양성소다.
하지만 저 두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클로디우스 양성소도 바티아투스 양성소에 버금가는 곳이었다.
카푸아 전역을 다 뒤져도 클로디우스의 베테랑 검투사만 한 이들은 스무 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게 그들이 지닌 이름값이었다.
스파르타쿠스는 그렇게나 출중한 검투사 셋을 아무렇지도 않게 박살내고 당당하게 자리에 섰다.
"와아아아아아!"
"네가 최고다!"
카푸아가 뒤흔들릴 정도의 함성이 원형경기장을 휩쓸었다.
쓰러진 검투사 셋이 들것에 실려 나가고 진행자가 깃발을 휘날리며 승자를 칭송했다.
아직 대회의 열기가 다 가라앉지 않은 객석에선 끊이지 않고 방금 전 경기에 관한 말들이 이어졌다.
마르쿠스 주변의 귀족들도 잔뜩 흥분한 채 침을 튀기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나에가 완전히 압도당한 표정으로 마르쿠스의 옷자락을 살짝 잡았다.
"후아···진짜 야수 같은 전사네요.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그래. 직접 눈으로 보니까 소문이 파다했던 이유를 확실히 알겠어. 오히려 이건 소문이 실재를 따라가지 못한 느낌이야."
"저는 사람이 저런 식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확실히 기대 이상이었어."
스파르타쿠스가 대체 어떻게 검투사들을 규합해 로마 정규군을 때려잡았는지 알 것 같았다.
확실히 저 정도로 격이 다르니 수만이 넘는 노예들을 규합하고 이끌 수 있던 것이리라.
마르쿠스는 확신했다.
스파르타쿠스의 기량이 저 정도로 출중하다면 충분히 계획을 진행해볼 만하다.
그리고 계획과는 상관없이 순수하게 저 전사를 손에 넣고 싶어졌다.
"좋아, 결정했어. 오늘 당장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
"누구랑요?"
"당연히 스파르타쿠스지. 셉티무스, 가서 진행자에게 내가 스파르타쿠스를 만나보고 싶다고 전해줘. 필요하다면 돈도 조금 쥐어 주고."
"알겠습니다."
셉티무스는 마르쿠스에게 은화가 든 자루를 건네받고는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셉티무스는 함께 온 귀족들이 자리를 슬슬 뜨기 시작할 때쯤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니 저녁 무렵에 가능하다고 합니다. 괜찮겠습니까?"
"상관없어. 그쪽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긴 할 테니. 일단 안심하라고 전해줘. 그쪽에 해가 될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고."
"예. 그대로 전하고 구체적인 시간을 잡아보겠습니다."
자리를 정리하겠다는 핑계는 믿지 않았다.
진짜 이유는 크라수스 가문의 장남이 어째서 자신들을 보려고 하는지 조사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 정도의 시간쯤이야 얼마든지 줘도 무방하다.
마르쿠스는 스파르타쿠스가 시합장을 떠나 어두운 대기실로 들어갈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줄곧 바라보았다.
시합이 다 끝나고 열기가 가라앉자 그토록 화려해 보였던 그의 모습이 왠지 처량하게 느껴졌다.
※※※※
마르쿠스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바티아투스 검투사 양성소의 수장 렌툴루스 바티아투스는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대체 크라수스가에서 스파르타쿠스를 어째서 보자고 하는 거지?"
셉티무스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진행자가 태연스레 답했다.
"너무 멋진 모습에 반해 팬이 되었다는데요? 그래서 한 번 꼭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그건 표면상의 이유고. 크라수스 가문이라면 로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부호잖아. 스파르타쿠스를 빼가려는 게 아닐까?"
"에이···설마 그렇게까지 하려고요."
"아니야. 크라수스 가문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한다는 소문이 있어. 그자들의 눈에는 스파르타쿠스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보일 수도 있지."
"흠···그런데 그건 우리 쪽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정곡을 찔린 바티아투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진행자의 말대로였다.
바티아투스는 휘하 검투사들을 자신에게 돈을 가져오는 가축으로 취급했다.
이 당시 검투사들의 대우가 좋은 양성소는 찾아보기 쉽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바티아투스 양성소는 특히나 더 검투사들에게 가혹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쟁 포로들의 공급이 차고 넘치니 검투사들을 잘 대해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대충 쓰다가 죽어버리면 새로운 노예를 구해오면 그만이다.
베테랑으로 성장한 검투사가 아니라면 최소한의 대우조차 기대할 수 없었다.
"만약 크라수스 가문에서 스파르타쿠스를 내놓으라고 하면 그냥 보내줘야 하나?"
"어째서요? 노예는 주인의 소유 아닙니까. 그냥 팔지 않겠다고 하면 그만일 텐데요."
"어이, 그런 건 상대가 나보다 적당히 강할 때나 통하는 거야. 만약 크라수스 가문이 자금으로 우리를 압박한다면 견뎌낼 재간이 없다고. 게다가 크라수스는 올해 법무관 선거에서 당선이 유력한 자야. 내년부터 당장 법무관 임기가 시작될 텐데 권력과 재력을 모두 갖춘 상대에게 밉보여서 좋을 게 어디 있겠어?"
"하긴···로마 최고의 부를 지닌 자가 법무관까지 된다면 저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네요."
법무관은 치안과 사법을 담당하는 로마의 핵심 직책 중 하나다. 그 위상은 최고 관직인 집정관 다음으로 사실상 로마에서 두 번째 가는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그런 자가 작정하고 털기 시작하면 일개 검투사 양성소의 주인은 반항조차 하지 못한다.
바티아투스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일단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확실히 알 때까지는 저쪽에 맞춰줘야겠지."
"맞습니다. 저쪽의 기분이 틀어지는 일은 무조건 피해야 해요."
"먼저 스파르타쿠스에게 단단히 주의를 줘야겠군. 그놈이 혹시라도 무례한 짓을 하면 안 되니까."
바티아투스는 스파르타쿠스를 불러 절대로 화를 내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스파르타쿠스는 그런 바티아투스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냉소를 흘렸다.
"신기하군. 우리에게는 그렇게나 고압적으로 굴던 그쪽도 로마 귀족 앞에서는 한 마리 순한 양이 되어야 하나 보지?"
"비꼬지 말고 내 말을 명심해. 저쪽에서 어떤 무례를 저질러도 절대로 화내지 마라. 그리고 그 꼬마가 너를 왜 보자고 했는지 나에게 한 마디도 빼놓지 말고 그대로 보고해."
"그렇게 어려운 명령도 아니군."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시엔 너···아니, 너를 따르는 신참 검투사들이 꽤나 험한 꼴을 보게 될 거다."
스파르타쿠스의 미간이 순간 확 좁혀졌다. 분노에 찬 눈빛으로 바티아투스를 노려보던 그는 이내 감정을 가라앉히고 입술을 깨물었다.
"끝까지 치졸하게 구는군. 내가 잘못을 저지르면 나를 처벌하면 될 게 아닌가."
"그럴 수는 없지. 자네와 크릭수스는 내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상품이니까. 소중한 상품에 흠이 가는 짓을 할 수 없잖아?"
이죽거리는 바티아투스의 말에도 스파르타쿠스는 더 쏘아붙이지 못했다.
여기서 그가 반항한다면 바티아투스는 자신이 말한 대로 신참 검투사들을 처벌할 것이다.
이전에도 비슷한 이유로 스파르타쿠스를 따르는 어린 검투사를 호랑이에게 던져버린 적이 있었다.
바티아투스는 그런 인간이다.
그의 협박은 절대 빈말로 끝나는 법이 없었다.
스파르타쿠스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네 말대로 다 따르마. 그러니 오늘만은 다른 검투사들을 배불리 먹여다오."
"네가 가져오는 내용에 따라서 생각해보마. 이제 네 처지를 알았다면 당장 가서 내 명령을 수행해라. 중요한 손님을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니까."
스파르타쿠스는 대답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비참하지만 이 정도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마르쿠스가 기다리는 방으로 향하는 스파르타쿠스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미칠 듯한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서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는 스파르타쿠스의 눈이 증오로 번뜩였다.
그의 입에서 깊고도 진한 살기 어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빌어 처먹을 로마 놈들···네놈들은 어디까지 사람을 짓밟아야 직성이 풀린다는 말이냐."
스파르타쿠스는 로마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다.
고향은 멸망했고, 평생을 지켜주겠다고 맹세한 여인도 노예로 팔려 갔다.
그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로마는 그가 지키려 한 모든 걸 부숴버렸다.
스파르타쿠스는 로마와 관련된 모든 것이 미웠다.
투기장의 관객도, 검투사 양성소의 주인 바티아투스도, 번드르르한 말로 자신을 칭송하는 척하는 진행자도.
자신이 지금 만나러 가는 이름 모를 로마의 어린 귀족도 마찬가지였다.
"그놈도 크면 제 아비들과 똑같은 수탈자가 되겠지. 그래, 내 눈으로 직접 봐주마. 미래의 수탈자의 상판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볼 것이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는 몰랐다. 자신이 지금부터 만나러 가는 상대가 어떤 제안을 건넬지.
그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미래가 어떤 방식으로 변하게 되는지.
오늘의 이 만남이 얼마나 큰 운명으로 이어지게 되었던가.
지금의 스파르타쿠스는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