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상승가도 (15/326)

  # 15 14. 상승가도 ──────────────── 로마의 원형경기장 앞은 엄청난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경기가 있는 날은 보통 이렇다지만 최근에는 그 열기가 더욱 뜨거워졌다.

  로마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콜로세움은 아직 이 시기에는 지어지지 않았다.

  대신 좀 더 작은 규모의 원형경기장에서 검투 경기들이 진행됐다.

  그래서인지 나날이 인기가 늘어가는 검투사 시합을 관전하지 못해 분통을 터트리는 사람들도 여럿 보였다.

  마르쿠스는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이 그린 구상이 훌륭하게 먹혀들어 가고 있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와아아아아아아!

  경기장 내부에서 들리는 함성 소리가 천둥처럼 사위를 울렸다.

  "좋아, 좋아. 한껏 달아오르고 있군."

  "도련님께서 구상하신 일이니 당연히 성공할 수밖에 없죠."

  "아직 시범단계인데도 이 정도라는 게 놀랍군요."

  이제 마르쿠스의 전속비서처럼 찰싹 달라붙어 다니는 다나에와 셉티무스도 한 마디씩 감상을 늘어놓았다.

  두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걸어가는데 뒤쪽에서 미약한 충격이 느껴졌다.

  폴짝폴짝 뛰며 달려오던 어린 소녀가 마르쿠스를 들이받고 그대로 넘어져 버린 것이다.

  "아야!"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진 소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아, 미안. 괜찮니?"

  엄밀히 말해서 잘못한 사람은 자기 혼자 달려와 박고 넘어진 소녀였지만, 마르쿠스는 그녀를 달래며 일으켜주었다.

  울먹이는 소녀는 다나에보다도 1, 2살 이상 더 어려 보였다.

  소녀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더러워진 튜니카를 탁탁 털고는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나이답지 않게 예의 바른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너무 신나서 그만 무례를 범했습니다."

  "아니, 그 정도로 무례까지야. 그래도 앞으로는 기분이 좋아도 정면은 보고 달리렴."

  "네.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녀는 다시 한 번 넙죽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저 멀리서 황망하게 뛰어오고 있는 자신의 노예에게 차분한 걸음으로 발길을 옮겼다.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보는 마르쿠스는 왠지 묘한 예감을 받았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어딘가에서 저 아이와 다시 한번 마주칠 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

  소녀가 저 멀리 사라지자 다나에가 마르쿠스의 등을 툭툭 털어주며 볼을 부풀렸다.

  "이래서 아이들은 문제라니까요. 조금 신난다고 마구 뛰어다니기나 하고."

  "내가 볼 땐 너도 그냥 아이야. 그래도 아까 그 아이 정도면 나이에 비해 굉장히 의젓한 편이지 않아? 옷도 화려하진 않았어도 깔끔한 게 아마 귀족인 것 같던데."

  "으으···그렇긴 하죠. 그래도 저도 고향에 있을 때 저 정도 교양은 충분히 있었어요."

  "이름도 모르는 애랑 경쟁의식 불태워서 뭐 하게?"

  마르쿠스가 피식 웃으며 다나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다고 해도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애가 맞다.

  가벼운 소란이 가라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형경기장 안에서 살집이 있는 중년 남성이 허겁지겁 밖으로 나왔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마르쿠스를 발견하고 전속력으로 달려와 숨을 몰아쉬며 인사를 건넸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정말로 송구합니다. 제가 이번에 아오크토르(프로모터)로 고용된 코르넬리오입니다."

  "만나서 반갑네. 그리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으니 신경 쓰지 말게. 일단 보고를 먼저 들어볼까?"

  "예. 일단 검투사들 개개인의 개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적당히 살을 덧붙여 이야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기 전에 검투사들의 설전을 경기장 밖에 붙여놓은 것도 아주 호응이 좋습니다. 3개에서 4개로 체급을 분류해 순위를 나누는 작업도 현재 진행 중입니다."

  "좋아, 좋아. 스파르타쿠스는?"

  "안 그래도 이제 막 경기가 시작할 겁니다. 직접 들어가서 보시겠습니까?"

  마르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코르넬리오가 미리 마련해둔 귀빈석으로 마르쿠스를 안내했다.

  마침 타이밍 좋게 스파르타쿠스가 시합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카푸아에서 봤을 때와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복장의 화려함부터가 예전과 달랐다.

  팔목에 찬 은색보호대가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관중들의 성원에 힘입어 다시 무대에 오른 전사! 스파르타쿠스! 사전에 밝힌 대로 이 남자의 포부는 검투사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100승의 기록을 달성하는 것! 과연 이 남자의 도전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스파르타쿠스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우렁찬 포효를 터트렸다. 와아아! 하는 함성이 사위를 뒤덮는다.

  이어서 진행자가 상대방을 소개했다.

  강인한 게르만 검투사 아타리크가 화려하게 장식된 검집을 휘두르며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마르쿠스는 편안한 마음으로 시합을 관전했다.

  이것은 철저하게 계산된 무대다.

  승부의 향방, 검투사들이 맡은 배역, 긴장감을 연출하는 상황.

  시합의 상대방인 아타리크나 관객들은 짐작도 못 하고 있겠지만. 모든 상황이 계산을 벗어날 수 없다.

  "자! 과연 이 대결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진행자의 목소리가 개전의 신호가 되었다. 아타리크와 스파르타쿠스가 동시에 서로를 향해 쇄도했다.

  양쪽 다 수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새였다.

  아타리크의 검이 날카로운 빛을 품고 뻗어 나왔다.

  스파르타쿠스가 가볍게 몸을 틀어 살벌한 검날을 비껴냈다. 그가 한 손으로 검을 내질렀다.

  휘이잉, 공기를 가르는 소리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위협이었다.

  카앙!

  두 사람의 검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아타리크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한 손으로 휘두른 검을 받았는데도 힘의 차이가 뚜렷했다.

  덥수룩한 수염으로 덮인 얼굴에 한순간 당혹감이 스쳐 갔다.

  그래도 아타리크는 가장 수준이 높다는 로마에서 열 번에 가까운 승리를 거머쥔 베테랑이었다.

  자신의 실력이 밀린다는 걸 인정한 그는 냉정함을 잃지 않고 지닌 모든 능력을 밑바닥까지 끌어냈다.

  스파르타쿠스의 맹공을 적절히 흘려내는 그 움직임만으로도 관객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스각!

  마침내 스파르타쿠스의 검이 아타리크의 허리춤을 물어뜯었다. 한 줄기 핏물이 바닥을 수놓자 관객들의 환호가 절정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도 절묘한 반격이 몇 번인가 이어졌다. 마냥 압도할 것 같던 스파르타쿠스도 위기를 맞이했지만, 절묘하게 빠져나왔다.

  전부 사전에 계획한 대로다.

  관객들의 열기가 거의 광기에 이른 바로 그 순간, 스파르타쿠스가 결정타를 날렸다.

  쇄골에서 복부에 이르는 일검.

  쭉 내려친 검격에 피가 뿜어져 나오며 아타리크의 몸이 허물어졌다.

  목숨을 빼앗을 정도의 깊이는 아니지만, 승부를 마무리하는데 충분한 상처였다.

  스파르타쿠스가 검을 치켜들자 관객들의 주먹도 동시에 하늘로 솟구쳤다.

  "스파르타쿠스! 스파르타쿠스!"

  "최강의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경기장이 울릴 정도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설욕하고 싶은 자, 실력을 연마해 얼마든지 재도전하라!"

  당당하게 선포하는 그 모습이 수많은 남성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패배자를 처형하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모두가 한결같이 승자인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을 소리 높여 칭송할 뿐이었다.

  ※※※※

  "많이 능숙해졌던데?"

  시합이 끝난 뒤 스파르타쿠스는 평소처럼 마르쿠스의 호위로 돌아갔다.

  그는 양성소의 노예가 아니었기 때문에 시합과 훈련이 없을 때는 주로 마르쿠스의 옆을 지켰다.

  "너무 쉽게 대결을 결정짓지 말라고 해서 노력은 했습니다. 잘 해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 정도면 아주 훌륭해. 카푸아에서의 네 대결은 굉장하긴 했어도 긴장감이 없었거든. 그런 건 반복되다 보면 질리기 마련이니까 지금 정도가 딱 좋아."

  첫 시합은 압승으로 강인한 인상을 남기고, 두 번째 시합은 긴장감 넘치는 승리.

  최고로 좋은 흐름으로 가고 있다.

  "하지만 힘을 다 보이지 않는 건 목숨을 걸고 경기에 임하는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게 아닐까요?"

  "그런 논리면 애초에 목숨을 끊지 않고 제압하는 것도 하면 안 되지. 네가 진심으로 전력을 다하면 아타리크는 10초 만에 죽었을 텐데?"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 제압하는 것도 봐주기의 일종이긴 하겠군요."

  "애초에 압도적인 실력 차가 있는 상대방에게 도륙당하는 건 패자 입장에서도 좋지 않아. 실력을 보여줄 시간도 없으니 관객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수도 없을 테니까."

  아타리크는 이번에 지긴 했어도 불리한 상황에서도 멋진 반격을 보여주고, 쓰러지기 전까지 굴하지 않는 투혼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관객들도 패자인 그에게 야유를 보내지 않았다.

  "도련님께서는 정말 대단한 혜안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지금 와서 느끼는 의문이지만 도련님은 제가 무섭지 않으셨나요? 검투사 양성소에서 풀려난 제가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몰랐을 텐데요."

  "보험이 없던 것도 아니고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자신 있거든."

  스파르타쿠스는 역사적으로도 증오하는 로마인들조차 무분별하게 죽이지 않은 인격자였다.

  마르쿠스는 그런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스파르타쿠스에겐 그저 주인의 안목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도련님께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카푸아에 계속 있었다면 저는 분노에 좀 먹혀 자신을 잃어버렸을 겁니다."

  "바티아투스 같은 놈 밑에서 계속 있다 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그러고 보니 아내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혹시 어디로 팔려 갔는지는 알고 있어?"

  순간 스파르타쿠스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어졌다. 이내 고개를 푹 떨군 그는 회한에 가득 찬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모릅니다. 로마에 노예로 팔려 간 것까지는 알지만······."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은 없지만, 일단 네가 원한다면 조사는 해볼 수 있어. 어때, 진행할까?"

  스파르타쿠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찾을 수···있는 겁니까? 그녀를?"

  "너무 희망적으로만 보지 마. 각오해야 할 것들도 많을 테니까. 조사해도 찾지 못할 수도 있고, 이미 사망했다는 소식만 전해 듣게 될지도 몰라. 그리고 설령 찾았다고 해도 네가 기억하는 그녀가 아닐 가능성이 높아. 그래도 찾고 싶어?"

  "예. 찾고 싶습니다."

  스파르타쿠스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즉답했다. 그리고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설령 이미 죽었다고 해도, 아니면 어느 귀족의 노리개로 전락했다고 해도, 어째서 지켜주지 못했느냐는 매도를 듣는다고 해도···저는 그녀의 행방을 알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제발 제 아내를 찾을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마르쿠스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파르타쿠스의 각오가 확고하다면야 들어주지 못할 부탁도 아니다.

  "셉티무스, 돈은 얼마를 써도 상관하지 않을 테니 오늘 당장 조사를 시작해. 스파르타쿠스는 셉티무스에게 아내에 대한 정보를 말해주도록."

  "알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갚겠습니다."

  스파르타쿠스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내 그의 눈가를 타고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평소의 스파르타쿠스를 아는 사람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다.

  마르쿠스는 이 강한 사내의 눈물을 일부러 보지 못한 척 시선을 돌렸다.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아내가 로마로 잡혀 온 것은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외모와 나이, 이름 정도만으로 트라키아에서 한참 전에 잡혀온 노예를 찾아낼 확률은 낮다.

  사람들을 많이 부려야 할 테니 은화도 꽤 뿌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의 절대적인 충성심을 얻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쯤이야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스파르타쿠스의 성품상 이제부터 그는 마르쿠스를 위해서라면 목숨조차 아끼지 않고 바칠 것이다.

  누군가에게 습격당해 비명횡사할 가능성은 이제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저택으로 돌아온 마르쿠스는 개인 목욕탕에서 몸을 담그며 하루의 피로를 씻어냈다.

  로마는 커다란 대중목욕탕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르쿠스는 개인 욕탕을 훨씬 선호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로마의 대중목욕탕은 상상 이상으로 위생이 안 좋았던 까닭이다.

  로마인들은 항상 목욕을 즐겨 위생이 좋았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이 시대는 위생에 대한 과학적인 관념이 박혀있지 않았다.

  욕탕의 물을 자주 갈지도 않았고, 탕에 들어가기 전에 몸을 씻는 게 아니라 몸에 기름을 바른 뒤 탕에 들어가서 몸을 씻어냈다.

  사실 로마인들에게 목욕탕은 그저 몸을 씻기 위해 가는 곳이 아니라 일종의 유흥시설이었다.

  그곳이 더러운 줄 모르고 가는 게 아니라 온갖 문화가 갖춰져 있는 사교의 장을 즐기기 위해 가는 것이다.

  마르쿠스는 나중에 자신이 공직에 오르면 이 대중욕탕의 위생을 점검할 계획이었다. 위생만 확실히 챙겨도 질병의 발생률은 눈에 보일 정도로 줄어들 테고, 이를 치적으로 내세워 홍보를 할 수 있다.

  그래서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지금은 딱히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개선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목욕은 필요하니 궁여지책으로 개인 욕탕을 청결하게 관리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후우···어쨌거나 뜨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까 좋구만."

  마르쿠스는 노예들의 시중을 받으며 느긋하게 휴식을 즐겼다. 처음에는 여자 노예들의 시중을 받는 게 어색하지만, 이제 완전히 익숙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기분이 좋았다.

  욕탕으로 들어온 다나에가 차게 희석한 포도주를 가지고 와 마르쿠스에게 건네주었다.

  "드세요, 도련님.

  "고마워. 너도 오늘 내 뒤를 따라다니느라 힘들었지? 저녁에는 일이 없으니까 푹 쉬어도 돼."

  "네. 그러면 감사히 쉬겠습니다."

  그녀는 물러가려다가 말고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스파르타쿠스 님이 엄청나게 고마워하고 계시더라고요."

  "그렇겠지. 남녀관계란 참 오묘하단 말이야. 시간이 꽤 오래 지났을 텐데도 오히려 더 애틋한 마음으로 남게 되는 것을 보면."

  "도련님도 언젠가는 도련님께 어울리는 멋진 여성과 결혼을 올리시겠죠? 아, 그건 조금 힘들지도."

  "뭐? 왜?"

  다나에가 웃음기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도련님과 완벽히 어울릴만한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요. 너무 완벽한 분은 이런 데에서 곤란을 겪기도 하는 법이네요. 항상 하향식 결혼이 되어버릴 테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너무 진지하게 해서 마르쿠스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동경에 비친 그의 얼굴은 객관적으로 상당히 잘생긴 편이긴 했다.

  키도 나이대에서는 훤칠한 편이니 이대로 성장하면 선이 굵은 장신의 미남으로 성장하리라.

  외모만 놓고 봐도 이전의 삶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웠다.

  "그나저나 결혼이라···성인이 되면 하긴 해야지. 철저하게 조건을 따지긴 하겠지만."

  이 시대의 결혼은 거의 다 정략결혼이었다. 하지만 정략결혼이라고 해서 불행하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정략으로 맺어졌어도 행복한 결혼생활을 한 부부는 얼마든지 있었다.

  마르쿠스도 정략결혼에 가까운 형태로 결혼을 하게 되겠지만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싶다는 욕구 정도는 있었다.

  "벌써 혼담이 오가는 집안이 있나요?"

  "글쎄? 동생이라면 몰라도 나는 없을걸. 서서히 소문이 돌고 있긴 해도 아직 내 평판이 극적으로 개선되지는 않은 것 같거든."

  "아···그렇군요. 그래도 도련님의 진가가 널리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까요. 곧 있으면 로마 최고의 유력가문들도 앞다투며 탐을 낼 거예요."

  "그거랑 별개로 내 쪽에서 신부가 탐이 나야겠지만."

  사실 결혼을 할 정도의 가치가 있는 집안들은 이미 대강 정리를 해두긴 했다.

  물론 리스트에 있는 자들은 현재가 아니라 먼 훗날 마르쿠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이었다.

  '뭐, 결혼이란 것은 서로의 이해가 일치해야 하니까. 내가 하자고 해도 그쪽에서 거절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겠지.'

  그러니 너무 한 쪽만 생각하고 있기보다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여러 후보를 물색해 놓는 게 중요하다.

  어쨌든 로마는 일부일처제였다. 이혼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아내를 들일 수는 없으니 결혼은 신중해야 했다.

  가장 좋은 조건을 가졌으면서도 인간적으로 잘 맞는 사람을 만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천천히 피어오르는 욕탕의 증기에 마르쿠스가 그리는 미래의 구상이 포도주의 향처럼 진하게 섞여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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