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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노예반란 (17/326)

  # 17 16. 노예반란 ──────────────── 카푸아의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문은 곧 로마 전체에 파다하게 퍼졌다.

  사실 로마는 이미 시칠리아에서 발생한 두 차례의 노예전쟁을 경험한 바 있었다.

  시칠리아에서 두 번이나 노예반란이 일어난 이유는 간단하다.

  전통적으로 로마의 곡창지대인 시칠리아는 노예를 이용한 대규모 농장을 운영했고, 이 과정에서 노예들을 상당히 학대했기 때문이다.

  이 두 차례의 반란은 모두 로마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즉, 엄밀히 말하면 이번에 일어난 소동은 제3차 노예반란, 혹은 제3차 노예전쟁이라 할 수 있겠다.

  당연히 대부분의 가족 식사에서도 한 번쯤은 화제거리로 다뤄졌다.

  그건 로마 최고의 유력가인 크라수스 가문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 원로원은 이번에 카푸아에서 탈출한 노예들에게 어떤 방식의 대응을 고려하고 있나요?"

  "글쎄. 고작 70명 정도가 탈출한 것뿐이니 카푸아에서 적당히 진압군을 편성하지 않을까? 원로원에서 논의될 사안은 아니라는 게 중론이더구나."

  마르쿠스의 물음에 크라수스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이게 현 로마인들의 거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고작 70여 명의 노예 검투사들이 뭔가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전무했다.

  원로원 의원 중 신중파로 여겨지는 자들조차 이번 사건은 한 달 내에 가라앉을 거라 여겼다.

  크라수스는 잘 조리된 새끼돼지 구이 한 조각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마르쿠스의 뒤를 지키고 있는 스파르타쿠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도 카푸아 출신인 걸로 아는데 탈주한 자 중 혹시 지인이라도 있나?"

  스파르타쿠스는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긴 했지만, 아직도 얼굴색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스승이자 친우였던 자가···이번 탈주의 주범인 듯합니다."

  "그래? 마음이 꽤 복잡하겠군. 쯧, 조금만 더 참고 있으면 빛 볼 날이 있었을 텐데 네 친우라는 자도 그리 생각이 깊지는 않았나 보군. 얼굴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가서 좀 쉬고 있도록."

  "어르신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스파르타쿠스는 평소의 그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축 처진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크라수스가 미심쩍은 어조로 물었다.

  "저 녀석은 믿을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이미 저에게 절대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가까웠던 자들이 토벌당한다면 충성심이 흔들릴 수도 있는 법이다."

  "그 친우들보다 더욱 소중한 사람을 찾아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 번 정한 신념은 절대 굽히지 않을 사람입니다. 죽은 친우를 위해 눈물을 흘릴지라도, 그걸로 다른 마음을 먹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제가 보장하지요."

  "그래? 그럼 일단 네 말을 믿기로 하마. 하지만 혹시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면 내 나름의 대처를 하겠다. 이의 없겠지?"

  마르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라수스는 결코 과민 반응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카푸아 출신의 검투사라면 처신을 조심해야한다.

  식사가 끝난 후 이야기를 전해들은 스파르타쿠스도 당연하게 납득해주었다.

  "의심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카푸아에서 가장 유명한 검투사였던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그래. 그래도 지금의 자넨 우리 가문의 사람이야. 얌전히 조심하고 있으면 의심의 눈초리는 자연히 사라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물론 그냥 가만히만 있으면 의심이 완전히 다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다. 반란이 한순간에 진압된다면 몰라도, 역사처럼 길어진다면 나름의 대응책을 생각해둘 필요가 있었다.

  "예. 그런데 도련님, 크릭수스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지금이라도 제가 가서 설득한다면 혹시······."

  "설득을 해서 어쩌게? 자수라도 시키려고? 그런다면 아마 십자가형이 참수로 바뀌는 정도일걸. 그냥 도망치기만 한 거라면 구제의 여지가 있지만, 그는 로마시민을 죽이고 탈주했어. 아무리 용서를 구해도 극형을 면할 수 없을 거야."

  로마법상 로마의 시민은 절대로 재판 없이 사형에 처할 수 없다. 만약 사형판결을 받지 않은 로마인을 죽인다면 그 누구라도 로마의 적이 된다.

  하물며 갈리아 출신의 노예가 로마 시민인 주인을 죽였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스파르타쿠스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크릭수스···어째서 조금만 더 참지 못한 것인가. 대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뒷감당이라는 걸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쌓였겠지. 바티아투스 같은 인간은 사실 죽어도 싸. 하지만 그래도 법은 법이니까 이 상황에서 크릭수스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없을 거야."

  "살아날 방법은 전무한 겁니까?"

  "적어도 로마의 영역 내에서는 무리겠지. 이대로 쭉 북상해서 갈리아나 게르만까지 도망간다면 살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쉽지는 않을 거야."

  "그렇군요. 역시······."

  베수비오산에서 알프스까지는 하루에 8시간을 걸어도 한 달 가까이 걸린다.

  그 긴 시간동안 로마의 손을 피해 계속 도망 다니며 의식주를 해결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걸 해내려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추적하는 군대를 격파하는 수밖에 없다.

  마르쿠스는 이 점에서 몇 가지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게 있었다.

  역사상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일으킨 주범은 세 명이다. 그중에 한 명인 오이노마우스는 초기에 사망했다.

  이후 노예들은 스파르타쿠스와 크릭수스가 이끌게 됐다.

  스파르타쿠스가 무리의 지도자이긴 했어도 크릭수스의 영향력 또한 상당했다.

  지금은 노예들을 크릭수스 혼자서 이끌 테니 실제 역사와 똑같이 흘러가리란 보장이 없다.

  아니, 십중팔구는 다르게 흘러간다고 봐야한다.

  초기 진압군에게 간단히 토벌당할지, 아니면 그들을 격퇴하고 어마어마한 수의 노예군을 이끌게 될지.

  이 모든 것은 온전히 크릭수스가 지휘관으로서 어느 정도의 역량을 가졌느냐에 달렸다.

  만약 스파르타쿠스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비견될만한 자질이 있다면 이 노예 반란은 역사와 비슷하게 길어질 가능성이 있다.

  "크릭수스가 너에 비견 될 전사라는 건 아는데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재능은 어때? 저번에 이야기를 나눠보니 넌 기초적인 군사학을 이미 알고 있던데. 크릭수스도 그런가?"

  "예. 크릭수스에게는 제가 군사학을 알려주었습니다.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전 처음에 크릭수스보다 월등히 약했습니다.

  크릭수스는 그런 저에게 고맙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죠. 전 그게 고마워 제가 가진 지식으로라도 그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군사학이 개인전에서는 큰 도움은 되지 않지만, 집단으로 벌이는 난투에서는 의외로 써먹을 곳이 많으니까요. 특히 크릭수스는 기습전술에 관해서는 저와 이해도가 거의 비슷했습니다.

  "

  "호오, 그러니까 자네는 크릭수스에게서 검을 배웠고 크릭수스는 자네에게 군사학을 배웠다 이건가? 서로가 서로의 스승인 셈이로군."

  이건 굉장히 유용한 정보였다. 이 말대로라면 크릭수스는 스파르타쿠스의 하위호환이나 마찬가지인 자라는 뜻이다.

  역사상으로는 성격이 더 거칠고 로마에 대한 분노가 깊었다고 하지만, 최소한의 능력은 갖추었다고 봐야 한다.

  마르쿠스는 앞으로 상황이 어떤 식으로 전개가 될지 슬슬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일단 카푸아 진압군 따위로 토벌하는 건 절대로 무리라고 봐야겠군.'

  진압군을 역으로 소탕하고 한층 더 강화된 무장으로 세력을 강화하는 것까지는 확정일 것이다.

  정규군단이 아닌 3천의 신병을 이끌고 토벌에 나설 법무관 글라베르도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만약 이것까지 이겨낸다면 크릭수스의 반란은 역사처럼 전국적인 노예반란으로 번져나가리라.

  '법무관 글라베르와 이후의 지휘를 맡은 바리니우스는 모두 스파르타쿠스의 기습에 패했지. 크릭수스도 이런 기습적인 전략에 능하다면 나도 나름의 준비를 해놓는 게 좋겠는 걸?'

  ※※※※

  마르쿠스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크릭수스는 카푸아에서 파견된 진압군을 간단히 격파하고 그들의 무장을 뺏어 거대한 산적집단으로 성장했다.

  카푸아 정부는 도저히 손쓸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결국 로마에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 당시에도 로마는 노예군을 너무나 얕잡아 보고 있었다.

  정규 군단병이 아닌 3천의 신병을 이끄는 글라베르는 임기응변에 능하지 못한 자였다.

  그는 베수비오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봉쇄하고 차근차근 노예군을 몰아넣어 전멸시킬 계획을 세웠다.

  정석에 충실한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승리를 과시한 글라베르는 후방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크릭수스는 야생의 포도넝쿨로 밧줄을 만들어 절벽을 내려와 로마군의 후방으로 돌아들어갔다.

  적은 정면에만 있을 거라 판단하고 있던 로마군은 완전히 방심한 상태였다.

  어찌나 마음을 놓고 있었는지 후방에 제대로 된 보초조차 배치하지 않았다.

  그 대가로 로마군은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한 채 노예군의 기습에 그대로 노출됐다.

  크릭수스와 그의 동료들은 양 떼를 휩쓰는 늑대마냥 로마군을 사정없이 유린했다.

  "로마 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자!"

  "뭐야! 적은 앞에 있다고 하지 않았어? 들은 것과 다르잖아!"

  야밤에 생각지도 못한 습격을 당한 로마군은 제대로 검을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백 명이 넘는 기습부대가 각자 두세 명을 베어 넘기니 순식간에 삼백에 가까운 로마군의 피가 바닥을 수놓았다.

  "당황하지 마! 전열을 갖춰! 적은 고작 노예와 산적에 불과하다! 훈련받은 대로 진형을 짜!"

  어떻게든 지휘를 해보려는 백인대장의 외침도 듣는 이가 없으니 한낱 비명에 불과했다.

  엄청난 속도로 적진을 헤집는 크릭수스는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들만을 우선적으로 베었다.

  선봉에 선 그의 머리 위로 적들의 피가 솟구칠 때면 그 뒤에서 달려온 검투사들이 사기가 꺾인 로마병을 덮쳐 시체의 산을 만들었다.

  "도망쳐!"

  "단순한 노예가 아니야! 이런 말은 듣지 못했다고!"

  훈련이 덜 된 병사들 사이에 공포의 감정이 번져나갔다.

  특히 혼자서 거의 수십의 병사를 도륙하는 크릭수스는 로마병들에게는 거의 악마처럼 보였다.

  얼마나 많은 피를 뒤집어썼는지 한밤중임에도 선명한 붉은 색이 돋보인다.

  군단의 사기는 이미 무참하게 꺾였다.

  패배를 떠올린 병사들의 저항에 힘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으악!"

  "크아악!"

  뒤늦게 막사에서 나온 병사들은 대열을 갖출 생각도 하지 못하고 도망쳤다.

  얼마나 사기가 나락으로 떨어졌는지 군단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군기마저 내팽개쳤다.

  얼이 빠져 있던 글라베르는 전사자가 천에 가까워지고 나서야 퇴각 명령을 보냈다.

  "후, 후퇴하라! 전군 후퇴!"

  하지만 뒤에서 기습을 받았고 앞은 험준한 산길이라 그 후퇴조차 쉽지 않았다.

  검투사들 역시 도망치는 로마군을 두고 보지 않았다.

  특히나 총지휘관인 크릭수스가 누구보다 악착같이 앞으로 나서 검을 휘둘렀다.

  한 병사가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지만 크릭수스는 코웃음을 치며 병사의 목을 날려버렸다.

  그가 살의와 증오로 번득이는 목소리로 외쳤다.

  "투항 따위는 필요 없다! 죽이고 죽이고 죽여라! 로마 놈들의 피로 이 산을 가득 물들이자!"

  "우오오오오!"

  광기로 범벅이 된 호응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로마 시민병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님을.

  검투사들은 로마군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죽이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살이 베이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온 산에 메아리쳤다.

  땅을 적시는 피는 계속 늘어나 이윽고 커다란 웅덩이를 이루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도망친 자들이 있는 건 그저 로마군의 숫자가 노예군의 숫자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전투가 아닌 처절한 살육은 두 다리로 걷는 로마인이 시야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이어졌다.

  대승을 거둔 크릭수스는 부하들에게 시켜 로마군이 남기고 간 물자를 모조리 챙기게 했다.

  "안 그래도 무기와 갑옷, 식량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는데 이번 전투로 한숨 돌릴 수 있겠군."

  카푸아에서 함께 탈출했던 동료 검투사 아슈레가 옆으로 다가와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 제대로 로마 놈들을 박살내줬으니 드디어 오이노마우스 님도 편하게 잠드실 수 있겠군요."

  "그래. 그랬으면 좋겠군."

  크릭수스와 함께 노예들을 탈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오이노마우스는 베수비오로 도망치는 과정에서 화살을 맞아 숨졌다.

  화살을 쏜 자는 크릭수스가 직접 베었지만 제대로 된 복수를 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천에 달하는 로마군을 죽인 지금도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아슈레가 못내 아쉬운 듯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스파르타쿠스 님도 함께 계셨다면······."

  "그 녀석의 이야기는 절대 꺼내지 마라!"

  크릭수스가 단호하게 아슈레의 말을 잘라냈다.

  그는 엄중한 어조로 재차 경고했다.

  "로마에 가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녀석이다. 그 배신자는 우리와는 상관없으니 그 녀석의 이름은 절대 입에 담지 마라!"

  "알겠습니다."

  "명심해라! 스파르타쿠스는 카푸아의 검투사가 아니다. 녀석이 로마에서 도망쳐 나와 우리에게 합류한다면 모를까, 그 이전에는 배신자에 불과할 뿐이다. 다른 동료들에게도 다시 한번 전해라. 배신자를 그리워하는 이는 우리의 분열을 꾀하려는 적의 첩자로 간주하겠다고."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슈레는 순순히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생각해보면 크릭수스의 말이 백번 옳았던 것이다.

  제아무리 과거에 검투사들을 이끄는 정신적 지주였다고 해도 지금은 황금에 몸을 판 배반자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그런 자를 아직도 마음속에서는 같은 편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게 화가 날 정도였다.

  그는 곧장 다른 동료들에게도 크릭수스의 말을 전하러 갔다.

  홀로 남은 크릭수스는 조금 전 화를 냈던 게 거짓말처럼 피식 웃었다.

  적당히 평평한 바위에 앉은 그는 하늘에 뜬 달을 올려다보았다.

  "자네가 있는 로마에서도 저 달은 밝게 빛나고 있겠지."

  크릭수스는 글라베르의 짐에서 찾은 희석한 포도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격렬한 전투 뒤에 목을 타고 넘어가는 서늘한 포도주의 감촉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상쾌했다.

  "자네는 아마 만나면 화를 내겠지. 어째서 기다리지 못 했느냐고. 어쩔 수 없었네. 나는 자네처럼 될 수 없거든. 그러니 자네는 거기에서 계속 자신의 삶을 살았으면 하네. 그래, 자네는 저 달보다도 한층 더 빛나는 태양이 되게나."

  스파르타쿠스는 앞으로 나아질 미래를 믿고 선택을 했지만, 크릭수스는 달랐다.

  그는 불확실한 미래 따위가 아닌 지금을 선택했다.

  로마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허황된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

  아무리 선전하더라도 자신들은 진다. 이건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하지만 지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크릭수스는 그저 로마인들을 한 명이라도 더 죽여 증명하려는 것이다.

  자신들은 무참하게 짓밟혀도 될 쓰레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신들도 그들을 물어뜯을 이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 목숨을 불태워 로마에게 손톱만큼의 경각심이라도 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자네한테 폐가 되면 안 되겠지."

  아무리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더라도 친우가 걷는 길을 막아서는 안 되는 법이다.

  스파르타쿠스를 수하들에게 배신자라 공표한 건 관계를 완벽히 끊어내는 게 그를 위한 일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설령 길이 갈라졌다고 해도 서로가 믿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면 그뿐.

  크릭수스는 평소와 다르게 혼잣말을 하는 자신이 우스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취기가 오르지도 않았는데 묘하게 감상적으로 되는군. 자네에게 배운 지식으로 승리를 거뒀기 때문일까."

  크릭수스는 자신을 잘 알았다. 투사로서의 재능은 있어도,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부족한 편이다.

  그래서 그는 스파르타쿠스에게 배운 것들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궁리했다.

  이 자리에 그가 있었다면 과연 어떤 전술을 썼을까.

  어떤 수단을 구사해 적에게 대항했을까.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넝쿨을 엮어 절벽을 내려간다는 발상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언제나 곁에 있었던 친우 둘은 이제 옆에 없지만, 그들에게 받은 것들이 남아있다.

  크릭수스는 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멈추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닿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저 하늘에 뜬 달을 향해 손을 뻗어 주먹을 쥐어본다, 어떤 결말이 오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굳은 결의가 그 손에 가득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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