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19. 출전 ──────────────── 동절기가 지나가고 마침내 출전의 아침이 밝아왔다.
로마에서 가장과 장남이 한꺼번에 전쟁터에 나가는 건 엄청나게 드문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장남이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아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마르쿠스의 어머니 테우토리아는 출병하는 그 순간까지도 걱정을 거두지 못했다.
"정말로 갈 생각이니? 지금이라도 집에 남겠다고 해도 괜찮단다. 네가 그런 곳에 따라갈 이유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이니."
"걱정 마세요, 어머니. 저도 올해 열네 살이 됩니다. 삼 년만 있으면 정식으로 군대에 갈 나이가 돼요. 이 기회에 경험을 쌓고 온다고 생각해주세요."
"그러니까 삼 년이나 일찍 그런 경험을 쌓을 이유가 없다는 말이잖니. 하아···정말 어쩌다가 이런 고집쟁이가 되어 버렸을까."
테우토리아는 조용히 기마를 점검 중인 크라수스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렸다.
"아들이 무리한 행동을 하려고 하면 당신이 말렸어야죠. 얘가 잘못되면 대체 어떻게 책임을 지시려고요."
"나와 항상 붙어있을 테니 잘못될 일 없을 거야. 약속하지."
"만약 마르쿠스가 잘못되면 제 얼굴을 다시 볼 생각은 하지 마세요."
"아, 그럴 일 없다니까······."
평소라면 강하게 나갔을 크라수스도 이번 일에서만큼은 아내에게 숙여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이 얘기를 꺼냈을 때는 이혼 이야기까지 나왔을 정도다.
결국 마르쿠스가 테우토리아의 옆에 며칠간 바짝 붙어 설득한 뒤에야 조건부 허락을 받았다.
이번 전쟁이 끝난다면 성인이 될 때까지는 다시는 전쟁터에 나가지 말 것.
혹시라도 잘못되면 크라수스가 이 모든 일에 책임을 지겠다고 맹세할 것.
이 모든 사항에 동의를 한 뒤에도 테우토리아는 틈만 나면 마르쿠스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마르쿠스도 최대한 그녀의 불안을 달래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도 결국 떠나야 할 때는 떠나야 하는 법.
마르쿠스는 등자를 밟고 말 위에 올라탔다.
"저기, 도련님······."
쪼르르 달려온 다나에가 머뭇거리며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마르쿠스가 시선을 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니?"
"도련님, 저기···혹시 저를 데리고 가주실 수는 없을까요?"
"뭐? 너를?"
"네."
다나에의 눈에는 간절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혼자 남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싫은 게 아니라 무서웠다.
그녀는 마르쿠스의 개인노예다. 마르쿠스가 있는 곳이 자신이 있을 자리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마르쿠스가 없는 크라수스의 저택에서 어떻게 지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주인 어르신께서도 시중을 들 노예를 데리고 가시잖아요. 도련님도······."
"안 돼. 일단 너는 너무 어려. 게다가 나는 아버지랑 다르게 억지로 얹혀가는 형태로 종군하는 거야. 그런데 시중을 들 노예까지 데리고 다닌다면 당연히 주변에 좋지 않은 모습으로 비치겠지."
"하지만 도련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전 뭘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는걸요."
"그럴까 봐 이미 셉티무스에게 말해놨어. 가정교사도 붙여줄 테니까 내가 없는 동안 학문에 힘쓰고 있으렴. 특히 기하학은 지금부터 신경을 많이 써야 할 거야."
다나에가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로 뒷일을 배려해주었는데도 납득하지 못한다면 그건 그냥 은혜를 모르는 자일뿐이다. 총명한 그녀는 자신의 입장을 확실히 자각하고 있었다.
"도련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다치지 말고 돌아와 주세요."
그녀는 마르쿠스의 옆에 단단히 버티고 있는 스파르타쿠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도련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라. 털끝 하나도 상하시는 일이 없도록 내 목숨을 걸고 지킬 테니."
"스파르타쿠스 님만 믿고 있을게요."
다나에와 스파르타쿠스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셉티무스가 마르쿠스에게 슬쩍 다가왔다.
"도련님, 저번에 제가 올린 보고를 스파르타쿠스에게 말씀하셨습니까?"
"아니, 아직."
"어째서요? 제가 말할까요?"
마르쿠스가 티 나지 않을 정도로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스파르타쿠스에 안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틈을 봐서 적절한 시기에 말할 테니 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조사하느라 수고했다."
"예. 그럼 저는 조금 더 확실하게 알아보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시길."
셉티무스는 별다른 당부의 말 같은 것도 보태지 않고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간단하게 작별 인사를 끝낸 마르쿠스는 크라수스와 나란히 말을 몰아 저택을 나섰다.
다시 보지 못할 이별도 아닌데 구구절절한 말을 늘어놓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저택이 위치한 팔라티노 언덕을 내려가는 길목은 평소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다.
잠깐 말을 멈춘 크라수스가 진지한 얼굴로 마르쿠스를 돌아보았다.
"군에 합류하면 나는 네 아버지이기 전에 군단을 이끄는 총사령관이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이야기하자꾸나."
"예. 말씀하십시오."
"나는 지금까지 부의 축적과 정치적인 성공만을 위해서 살아왔다. 타고난 천성이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건 변하지 않았고. 하지만 최근에는 한 가지 더 욕심이 생기는구나. 바로 네가 성장해 내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올라가는 걸 지켜보고 싶다는 욕심이다."
크라수스는 지금껏 한 번도 짓지 않았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옆에 붙어 있어라. 안전하게 경험을 쌓아 훗날 나도, 저 폼페이우스도 넘볼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어라."
자신이 말하고도 머쓱했는지 크라수스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다시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
그 뒷모습을 따라 말을 모는 마르쿠스의 가슴 한쪽이 뭉클해졌다.
2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아버지라 부르며 함께 생활했으니 어떠한 형태의 정이든 쌓일 수밖에 없다.
애초에 자신에게 이토록 진한 부성을 보여주는 사람이 싫을 리가 없다.
마르쿠스는 크라수스의 두 번째 바람을 반드시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적어도 원래의 역사에서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일은 없게 만들 것이다.
이것 하나만큼은 장담할 수 있었다.
※※※※
5만이 넘는 로마군이 도열해 있는 광경은 실로 웅장했다.
8개 군단의 대군이라면 백인대장만을 집결시켜도 500명에 달한다.
자신들의 군세를 둘러본 군단병들은 자연스레 확신했다.
이렇게나 압도적인 군세가 패할 리가 없다.
사람이란 본디 무리를 짓게 되면 자신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패배를 겪은 집정관의 군단에 속해있던 자들도 활기를 되찾았다.
총사령관에게만 허락된 주홍색 망토를 찬 크라수스가 위풍당당하게 자리에 섰다.
"전군은 들어라! 우리는 저 극악무도한 반란의 무리를 진압하기 위해 이곳에 나왔다. 지금 남쪽에서 날뛰고 있는 반란의 무리는 로마시민을 해하고, 약탈하고, 우리가 쌓아온 모든 질서를 유린하고 있다.
유피테르 신의 이름에 맹세코 나는 이 역도들의 행위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저들이 이토록 기세등등하게 날뛸 수 있었는가.
그 이유는 이전에 싸운 우리의 동포들이 패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저들보다 약해서? 그렇지 않다! 저 에페이로스의 피로스도, 카르타고의 한니발도, 동방의 강대한 왕조들도 전부 우리 로마에 패했다. 우리가 저 반란의 무리에게 패배한 것은 저들을 적으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품은 방심이라는 독에 스스로 자멸한 것이다!
"
병사들의 얼굴에 수치심이 어렸다. 특히 검투사들에게 패배한 경험이 있는 병사들은 고개를 숙인 채 전면을 응시하지 못했다.
"지금의 상황은 절대 가볍지 않다. 적의 숫자는 우리보다 훨씬 많으며 연이은 승리의 경험으로 자신감이 충만하다. 저들은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너희들에게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시키기 위해 극단적인 처방을 내리기로 했다. 바로 이전에 패배한 군단에 10분의 1형을 언도하는 것이다."
집정관의 군단에 소속되어 있던 병사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10분의 1형은 로마군 내에서도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다.
모든 십인대가 열 명당 한 명을 제비로 뽑아 다른 아홉 명이 동료를 직접 때려죽이게 하는 것이다.
너무나 잔혹한 처벌이라 선고된 경우라도 실제로 집행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걸 군단 단위로 실시한다는 건 상황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때 참모들이 나섰다. 과거 그들이 패배했던 이유는 이전의 지휘관들이 군공을 탐했기 때문이니, 책임을 묻기 전에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빌었다.
사실 이것은 이미 짜놓은 상황이었다.
크라수스는 실제로 10분의 1형을 집행할 생각이 있었으나 마르쿠스가 반대했다.
그는 갈리아 전기에서 읽은 카이사르처럼 형을 언도하는 척만 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 판단했다.
크라수스도 아들의 앞에서 너무 잔혹한 모습을 보이는 건 꺼려졌는지 결국 의견을 굽혔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연출된 상황이라는 걸 모르는 병사들의 얼굴은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참모들에 이어서 군단장들까지 용서를 빌자 크라수스는 그제야 굳게 다문 입술을 열었다.
"모두가 입을 모아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탄원하니 형의 집행은 연기하겠다. 하지만 이는 결코 취소된 게 아니다. 만약 너희들이 적을 얕보고 허술한 싸움을 보인다면 다시 형을 집행하겠다."
참모들이 입을 모아 감사하다고 외쳤다.
이어서 형을 선고받을 예정이었던 군단의 병사들도 목숨을 다해 싸우겠노라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그들을 지켜보는 다른 군단병들의 눈에도 결연한 빛이 감돌았다.
완전히 군기가 잡힌 군단병들을 둘러본 크라수스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까딱였다.
"지금의 절실함과 투지를 절대 잊지 말도록. 적을 두려워하지 마라, 자신을 과신하지도 마라. 그저 훈련받은 자신을 믿고, 너희들을 지휘하는 장교들의 명령을 따라라. 군신 마르스의 이름 앞에 맹세하노니, 나와 함께 걸어가는 한 우리 앞에 패배란 없다!"
크라수스가 손에든 무기를 치켜들자 병사들의 가슴속에서 용솟음친 투지가 하늘을 찌르는 함성으로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아!"
병사들의 사기가 끝을 모르고 올라갔다.
그 장대한 외침에 휩싸인 마르쿠스의 온몸에 전율이 돋았다.
병사들의 심장을 타고 흐르는 격동의 울림이 마침내 진정한 전쟁의 시작을 알린다.
대열을 갖추어 진군하는 로마군의 머릿속에 이미 패배의 기억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두 눈에 이글거리는 불길을 담은 병사들이 약속된 승리와 복수를 위하여 힘차게 땅을 박찼다.
※※※※
로마군의 진격은 곧장 크릭수스의 귀에도 들어왔다.
8개 군단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압박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반대로 그를 따르는 부하들은 전혀 심각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로마 놈들이 오고 있다고 합니다."
"전투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번에도 이기면 로마 놈들은 이제 끝입니다. 확실하게 밟아버리죠."
모두가 이런 식의 말을 나눌 뿐이다.
불안함에 속이 타는 사람은 크릭수스 혼자뿐인 듯했다.
그들도 처음에는 이렇지 않았다. 작년에 집정관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는 도망가자는 소리를 하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약간의 행운과 적들의 방심이 따라준 결과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수만이 넘는 반란군은 한 가지 생각을 공유하게 됐다.
'생각보다 할 만한데?'
'로마, 로마하며 호들갑을 떨더니 별것도 없잖아?'
한 번도 패하지 않고 계속해서 승리를 맛본 반란군은 점점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됐다.
원래 역사와는 달리 결정적일 때마다 제어를 해줄 스파르타쿠스가 없다는 게 그 원인이었다.
이내 그들은 로마의 8개 군단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코웃음을 쳤다.
위기감이 마비되어 버린 것이다.
크릭수스의 오른팔로 활약하고 있는 아슈레가 조악한 지도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로마군은 아마 이 경로를 통해 오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기습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조금 돌아오더라도 넓은 평야 지역을 횡단하고 있습니다."
그 설명을 듣는 반란군 지휘자들의 가슴속에 한 줄기 유혹이 피어올랐다. 돌격대의 지휘를 맡은 양치기 노예 출신 지휘관이 불쑥 입을 열었다.
"로마군의 수는 대략 5만. 우리는 저들의 2배에 달합니다. 여기에서 승부를 걸어보는 게 어떨까요?"
반란군 지휘관들도 허황된 생각만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가장 알기 쉬운 지표는 바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숫자다.
반란군의 무리는 끝도 없이 늘어나 거의 10만에 육박했다. 이는 로마군의 2배에 달하는 엄청난 인원이었다. 비전투인원까지 포함한다면 12만이 훌쩍 넘어갔다.
이는 역사상 기록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보다 훨씬 더 늘어난 규모였다.
북방으로 피신하는 대신 철저하게 남쪽의 도시들을 약탈하며 노예와 하층민들을 끌어 모았기 때문이다.
이 압도적인 숫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폭력이다. 자신감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두 번째는 그들이 숫자가 더 적을 때에도 로마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합쳐져 지휘관들은 자신감 과잉 상태에 빠져 있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음이 발생했다. 그들 대부분이 할 만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적인 관측이었다.
군량 보급을 담담한 지휘관도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일단 무작정 버티고 있는 건 불가능합니다. 숫자가 불어난 만큼 식량의 소비 속도가 너무나도 빠릅니다."
"그러니까 저 로마군을 모조리 죽여 버리면 군량 문제도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로마 놈들의 보급 물자를 모조리 빼앗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옳습니다. 게다가 이번에도 승리를 거둔다면 남부에 있는 대도시들도 더는 버티지 못할 겁니다. 진짜 승리로 향하는 길이 열리는 겁니다."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지휘관들의 시선이 일제히 크릭수스에게 집중됐다.
크릭수스는 지휘관들의 얼굴을 한 번씩 모두 둘러보았다. 너나 할 것 없이 전투를 바라는 열기로 가득했다.
그 역시 연이은 승리로 자신감이 오른 상태이긴 했지만, 그래도 일말의 불안감은 남아 있었다.
"로마 놈들도 우리에게 대패한 뒤 이를 갈고 나왔을 것이다. 지금 출병한 5만의 군대는 엄청난 정예라고 봐야 할 것이야."
"물론입니다. 저희도 방심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계속 도망 다닐 수만은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미 저희는 규모가 너무나 커져 버렸습니다. 치고 빠지는 기습만 하는 건 무리입니다."
다부진 체격의 중년남성이 꺼낸 말은 사실이었다.
10만에 가까운 병력을 데리고 계속해서 도망만 다니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어딘가에서 한 번쯤은 반드시 싸울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크릭수스는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정말로 로마군과 회전을 벌여도 되는지 확신을 내릴 수 없었던 까닭이다.
저번에 싸운 집정관의 군대와 비슷한 수준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무장의 질은 딸리지만, 반란군은 숫자의 우위가 있다.
개개인의 훈련 상태는 로마군이 좋을 테지만, 반란군에게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투지와 로마를 향한 분노가 있다.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여기에서 패하면 정말 모든 게 끝일 수도 있는데······.'
계속해서 군단을 보충할 수 있는 로마와 달리 반란군은 한 번의 패배로 모든 걸 잃어버릴 수 있다.
결정은 신중해야만 한다.
하지만 부하들의 목소리를 끝까지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의견이 서로 갈렸다면 모를까 지금 부하 중 그 누구도 결전에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이 정도로 통일된 목소리를 독단으로 찍어 누른다면 어떤 뒷말이 나올지 모른다.
그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평원에서 결전을 치르자."
"와아아아!"
"이번에도 로마 놈들의 피로 시원하게 목욕을 해봅시다!"
크릭수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방에서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크릭수스는 그런 들뜬 분위기 속에서도 최소한의 보험을 들어두기로 했다.
그가 지도상의 한 곳을 가리키며 신중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다만 결전은 이곳에서 한다. 혹시라도 잘못되었을 경우 후방에 있는 숲으로 도망갈 수 있으니 최악의 경우라도 전멸하는 일은 없을 거야."
"하하,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이것보다 훨씬 안 좋은 상황에서도 이겨내지 않았습니까. 충분히 승리할 수 있을 겁니다."
희망적인 미래를 낙관하는 지휘관들과 달리 크릭수스의 가슴 속에는 한줄기 불안감이 떠나지 않았다.
'회전에 대비하는 것 외에도 패배했을 때의 대책을 마련해둬야겠군.'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해도 아직 여기에서 끝날 마음은 없다.
착 가라앉은 그의 시선이 엉성하고도 조잡한 지도 위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