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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죽어야 할 이유, 살아야 할 이유 (23/326)

  # 23 22. 죽어야 할 이유, 살아야 할 이유 ──────────────── 크릭수스와 스파르타쿠스가 약속이라도 한 듯 천천히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마르쿠스는 뒤에서 활을 겨누는 병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크릭수스의 두 눈에서 묘하게 일렁이는 감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죽음까지 초연하게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는데도 아직 다 떨쳐내지 못한 감정의 편린.

  다름 아닌 가장 절친한 벗을 향한 호승심이었다.

  "검투사에게 있어서 같은 상대에게 두 번 패한다는 건 다시없을 수치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자네에게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네. 마지막으로 가는 길. 자네에게 맡긴 카푸아 제일의 자리는 다시 돌려받아야겠어."

  "안타깝지만 그 바람은 들어줄 수 없을 것 같군."

  최강의 검투사 두 사람의 안광이 번뜩이는 불을 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이 애용하는 스파타가 섬광처럼 검집에서 뽑혀 나왔다.

  째앵!

  두 사람의 검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스파르타쿠스는 손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각에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힘에서 우위를 보이는 건 스파르타쿠스일 텐도 크릭수스는 밀려나지 않았다.

  충돌과 동시에 유연하게 손목을 움직여 충격을 흘려냈기 때문이다.

  그동안 어떤 수련을 했는지는 몰라도 스파르타쿠스가 알던 크릭수스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촤아앙!

  유연함뿐만이 아니다. 크릭수스의 검이 믿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찔러 왔다.

  검 끝이 어깨 보호를 위해 걸친 사슬갑옷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하압!"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다. 스파르타쿠스의 입에서도 절도 있는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무기 째로 베어버리는 방어 불가의 검격이 날아오는 스파타를 제대로 찍어 눌렀다.

  카아앙, 쩌엉!

  이전보다도 더욱더 빠르고 한층 더 강하다.

  미처 다 흘려내지 못한 크릭수스의 검이 뒤로 튕겨 나갔다.

  "······!"

  두 사람은 동시에 다른 이유로 경악했다.

  '검을 부수지 못했다고?'

  '충분히 흘려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는데?'

  따라잡힌 스파르타쿠스도 나름의 충격을 받았지만, 크릭수스의 놀라움이 조금 더 컸다.

  지난 2년을 피와 살이 튀는 전장에서 구르며 검을 가다듬었는데도 따라잡는 데에 그쳤을 뿐, 뛰어넘지는 못한 것이다.

  쩌정!

  또 한 번의 충돌이 벌어지며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검을 나누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합이 오가며 섬뜩한 바람이 일고, 살기 어린 검광이 난무했다.

  그렇게 검을 교환하기를 거의 3분.

  약속이라도 한 듯 물러난 두 사람의 눈에 은은한 감탄이 서렸다.

  크릭수스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혀를 찼다.

  "로마에서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닌가 보군.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둘 중 누군가가 죽지 않는다면 결말이 나지 않겠어."

  "그래. 자네 말대로 끝까지 싸운다면 누가 이길지 알 수 없겠어."

  "그래도 끝까지 가야겠지? 자네도 그럴 각오를 굳혔기 때문에 이곳에 나온 게 아닌가. 사실 나도 죽는다면 로마 놈들보다는 자네의 손에 가는 게 덜 억울할 것 같고."

  "진심인가?"

  스파르타쿠스가 슬픈 눈빛으로 물었다.

  만약 크릭수스가 대결을 원치 않는다면 그 역시 검을 겨누지 않을 것이다. 겨눌 수 있을 리가 없다.

  스파르타쿠스의 각오는 어디까지나 크릭수스가 대결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크릭수스는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승부를 내기엔 역시 관중들이 너무 부족해. 결전의 그 날 최고로 화려한 무대를 만들어 보세. 자네와 겨룬다면 전설로 회자될 만한 검투를 벌일 수 있겠지."

  살아서 시대를 바꾸는 게 아니라 죽음으로서 의지를 남기기로 했다.

  최후의 무대는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좋다.

  물론 그렇다고 패배할 생각은 없었다. 두 번이나 같은 상대에게 진다면 억울해서 눈도 감지 못할 것이다.

  크릭수스는 스파르타쿠스를 꺾은 최강의 검투사로서 당당한 최후를 맞이할 작정이었다.

  친우의 각오가 그렇다면 더 망설일 필요가 없다. 스파르타쿠스가 뒤편에 서있는 마르쿠스에게 허락을 구하듯 시선을 돌렸다.

  허락하고 말 것도 없는 사안이다.

  마르쿠스는 즉각 답을 내렸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감사합니다."

  스파르타쿠스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본 크릭수스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당신이 스파르타쿠스가 말한 그 귀족 도련님인가? 아직 어린데도 전장에 오다니 담대한 것인지 무모한 것인지 모르겠군."

  "전부 계산이 선 상황이니까. 한데 그쪽도 내가 듣던 것과는 인상이 다른데? 조금 더 야수 같은 사내일 줄 알았는데 의외야."

  "위치란 사람을 변하게 하는 법이니까. 일군을 이끄는 자가 언제까지나 야수로 있을 수는 없는 법이지. 그나저나 스파르타쿠스가 그쪽을 상당히 충직하게 따르는 것 같은데 당신에게 정말로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것인가?"

  "크릭수스, 실례되는 말은 하지······."

  스파르타쿠스가 대화에 끼어들려고 하자 마르쿠스가 괜찮다는 손짓을 보냈다. 그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건 네 친구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나를 따르는 것이고. 그래도 굳이 이번 전쟁에 관련된 거로 한 가지 말해주자면 그쪽에게 악몽과도 같았을 중무장한 기병들. 그게 내가 만든 거라고 한다면 좀 이해가 되겠지?"

  "그 괴물 기병들 말인가······."

  회전에서 반란군을 무참하게 짓밟던 중장기병들의 위용을 떠올린 크릭수스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그런가···로마가 일부러 숨긴 게 아니라 존재하지 않았던 병종을 당신이 새로 만든 거였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만약 당신이 로마의 권력자가 된다면 스파르타쿠스의 바람대로 이 로마가 변할 수 있는 것인가? 정말로 그런 날이 오긴 하는 건가?"

  "변하겠지. 노예들을 모두 해방해주겠다는 약속은 할 수 없고, 하지도 않을 거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좋아질 거다. 딱히 너희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건 아니야. 이 로마에 사는 모든 사람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해줄 거다."

  "그럼 꿈같은 일이 가능할 리가······"

  "가능해. 너희가 볼 수 없다는 게 진심으로 아쉽지만."

  크릭수스의 얼굴이 충격으로 얼룩졌다. 마르쿠스는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었다. 그저 담담하게 앞으로 일어날 현실을 말해주는 것뿐이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태연한 목소리에 무서울 정도의 설득력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이해가 됐다. 스파르타쿠스가 어째서 이 소년을 믿고 로마로 향했는지.

  난생처음 보는 괴물 같은 기병을 만든 것도 이 소년의 능력의 단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크릭수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이 소년은 어떤 방식으로든 로마를 크게 바꿀 사람이다.

  그 거짓말 같은 사실을 인정하자 말투도 자연스레 변했다.

  동시에 가장 알고 싶으면서도, 아는 게 두려운 물음이 그의 입을 뚫고 나왔다.

  "당신에게 한 가지만 묻고 싶소. 내가, 아니 나와 내 동료들이 일으킨 이 일이···당신이 일으킬 변화에 방해가 된 것이오? 우리가 지금 하는 행동이···그저 무가치한 일이었다고···그런 평가를 받게 될 거라 보시오?"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온다면 결전에 지장이 갈지도 모른다.

  괜한 물음을 던졌다고 후회하려던 찰나, 마르쿠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을 거다. 너희들은 이미 로마의 사회구조를 한 번쯤 다시 돌아보게 하는 경종을 울린 거야. 너희들의 싸움이 무의미했다고 폄하 받는 일은 없을 거다. 아니, 절대 그렇게 되도록 놔주지 않아. 그러니 안심해라."

  크릭수스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거면 됐다.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이 어찌 두려운 마음이 없겠는가. 세상에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 이상의 가치를 약속받은 사람은 죽음이라는 공포마저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

  "내 동료들이 원하는 것들은 모두 제각각일지도 모르오. 하지만 모두가 공통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한 가지 있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싸움을 누구 하나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오. 잊히지 않도록 해주시오. 우리의 의지가,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맞이할 최후의 싸움이."

  크릭수스가 시선을 내려 마크루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르쿠스는 저 멀리 구릉 위에 진을 치고 있는 반란군을 둘러보았다.

  자유롭게 세상을 살고 싶었던 수많은 소망이 그 안에 있었다.

  "약속하마. 저 하늘에서 지켜보아라. 너희들의 이름이 앞으로 어떻게 기억되는지."

  진심을 담은 마르쿠스의 대답이었다.

  ※※※※

  "쉽지는 않을 것 같군요."

  멀어져가는 크릭수스를 바라보던 스파르타쿠스가 대뜸 그렇게 말했다.

  "크릭수스 말이야?"

  "그렇습니다. 강해졌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더군요."

  "너보다 더 강해진 건가?"

  "글쎄요. 끝까지 겨뤄보지 않으면 쉽게 판단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더 강하든, 약하든 결국 미세한 차이로 승패가 갈리겠지요."

  스파르타쿠스 역시 로마에서 훈련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지금의 그는 카푸아에 있을 때보다 확실히 한층 더 강해진 상태였다.

  그 사실을 아는 마르쿠스였기에 지금의 상황은 솔직히 예상외였다.

  "그래도 패배는 조금 곤란한데···내 계획은 어디까지나 네가 승리를 거둔다는 가정하에 성립하거든. 질 거라면 아예 싸우지 않는 게 더 나아."

  스파르타쿠스가 결연히 각오를 다지며 숨을 가다듬었다.

  "걱정하시 마십시오. 설령 팔 하나를 준다고 하더라도, 아니 목숨을 걸어서라도 이길 겁니다."

  친우의 각오를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서는 그 역시 나름의 결심은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오히려 눈살을 찌푸렸다. 은은한 분노가 담긴 그의 목소리가 스파르타쿠스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지금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예······?"

  스파르타쿠스가 몸을 움찔하며 되물었다. 어조에는 약간의 당혹감도 섞여 있었다. 지금까지 마르쿠스가 이런 반응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패배는 하지 않아? 네 목숨은 고작 이런 곳에 걸기 위해 있는 거냐?"

  "그, 그것은······."

  "친구의 마지막 각오에 어울려주기 위해 마음을 다지는 것까지는 괜찮아. 하지만 목숨을 버려서라도 뭔가를 하겠다는 각오는 크릭수스처럼 정말 최후를 앞둔 사람에게나 허용되는 거라는 점을 명심해."

  스파르타쿠스는 대답할 수 없었다. 물론 확실하게 이기고 싶은 마음이야 강했다. 하지만 싸움에서는 실력만큼이나 정신적인 요소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크릭수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확고한 결의를 다지고 전투에 임할 것이다.

  스파르타쿠스는 크릭수스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 역시 목숨을 거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 이상으로 투지를 불사를 수 있는 동기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굳이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음에도, 마르쿠스는 표정만으로 스파르타쿠스의 마음을 읽어냈다.

  "그래, 마침 잘 됐어. 네가 절대로 다치지 않도록 싸워야만 하는 이유를 알려줄게."

  "하지만 실전이란 언제라도 변수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 변수마저 허용하지 않겠다는 철저한 각오를 다져. 아내를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다면."

  "그, 그게 무슨······?"

  스파르타쿠스는 마르쿠스의 마지막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한순간 멍하니 서 있었다.

  의문과 혼란의 감정은 이내 격정으로 변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났다.

  마르쿠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출병하기 전에 셉티무스에게 보고를 받았어. 네가 말한 조건에 맞는 사람을 찾았다더군."

  "그녀를 찾은 겁니까? 정말로?"

  "아직 완전히 확실한 건 아니야. 그래서 너에게 미리 말하지 않은 거고. 혹시 알아봤는데 아니라면 실망감이 엄청날 테니까. 하지만 너에게 각오가 필요하다면 지금 이보다 좋은 시기는 없는 것 같다."

  스파르타쿠스는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심호흡했다.

  마음만 같아서는 한달음에 달려가 진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더라도 한눈에 알아볼 자신이 있다.

  "그녀는···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네아폴리스. 이번 전쟁이 끝나면 로마로 돌아가는 길에 들러서 확인하면 돼. 그런데 너는 설마 들것에 실린 상태로 그녀를 만나러 갈 생각은 아니겠지?"

  "저는······."

  "몸 성하게 돌아와라. 이 전쟁의 영웅이 돼서 멋지게 아내를 데리러 가야지."

  격렬한 떨림을 보이던 스파르타쿠스의 눈동자가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왔다.

  커다란 파도가 되어 가슴을 휩쓸던 감정의 격류도 차츰차츰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가 고개를 들어 북서쪽 네아폴리스가 있는 방향을 향했다.

  오래전, 까마득한 오래전, 고향에서 나누었던 부부의 소중한 맹세가 그곳에 있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제 확실하게 각오를 굳혔습니다."

  "이제야 평상시처럼 믿음직한 모습으로 돌아왔네. 드디어 믿고 맡길 수 있겠어."

  마르쿠스의 목소리에 흡족한 기색이 실려 나왔다.

  스파르타쿠스의 전신에서 풍기는 기세는 문외한인 마르쿠스가 보기에도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싸움이란 본디 삶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하는 것. 살고자 하는 의지는 그 무엇보다도 더 강한 법인데 말입니다."

  "그래. 애초에 너는 고작 검투사로서 끝날 인재가 아니야. 처음에 만났을 때도 말했지? 넌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있어."

  "예. 게다가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서 그녀를 만나야 합니다. 그러니 확실히 약속드리지요. 머지않아 치르게 될 크릭수스와의 결전. 완벽한 승리의 영광을 도련님께 바치겠습니다."

  스파르타쿠스의 가슴 속에 절대로 질 수 없는 이유가 새겨졌다.

  미동조차 하지 않는 두 눈동자에 강렬한 투지가 피어올랐다.

  마지막.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 두 명의 검투사의 결말이 바로 지척까지 다가왔다.

  고요한 밤공기에 결전의 시작을 예고하는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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