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23. 결전 ──────────────── 사흘 뒤, 크라수스는 구릉에 진을 치고 있는 반란군을 섬멸하라는 군령을 내렸다.
로마군은 즉시 전투준비에 들어갔다.
8개 군단이 일제히 움직이는 장면은 가히 인간의 파도가 친다고 생각될 만큼 장엄했다.
사실 이미 포위를 끝낸 상황이라 반란군은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였다.
이 상황에서 굳이 공격해줄 필요는 없다.
그냥 포위만 하고 있으면 식량이 고갈된 적들이 알아서 자멸할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걸 모르지 않는 크라수스가 총공격을 감행한 이유는 간단했다.
"폼페이우스···그놈은 끝까지 나를 도와주지 않는군."
크라수스는 공격 준비를 전부 마친 군단을 둘러보며 이를 갈았다.
"이미 충분한 군공을 세운 놈이 이리도 탐욕적으로 나오다니."
크라수스는 본래 최소 일주일 이상은 더 포위를 지속한 뒤 전투를 개시하려고 했다.
아예 아사시켜 버리는 수도 있겠지만, 이미 반쯤 궤멸 상태인 반란군을 상대로 그렇게까지 하면 너무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어차피 대충 힘을 다 빼놓은 뒤라면 어떻게 싸우더라도 손쉽게 섬멸이 가능했다.
그다음 보고를 올릴 때 정면에서 용맹하게 싸웠노라 적당히 포장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로마로 돌아온 폼페이우스의 군단 때문에 계획이 꼬였다.
이미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 도착한 그는 무서운 속도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폼페이우스의 군단이 카푸아 서쪽을 통과했다는 보고가 바로 어제 크라수스의 막사에 날아들었다.
결국 크라수스는 포위를 지속한다는 계획을 백지로 돌리고 총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만약 폼페이우스 군단이 합류하게 된다면 반란군 토벌의 공은 두 사람이 나눠 가지게 된다.
크라수스의 입장에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였다.
갑자기 전투태세에 들어간 로마군의 움직임은 당연히 구릉 위에 있는 반란군의 눈에도 보였다.
"설마 쳐들어올 생각인가?"
크릭수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견고하게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자들이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러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쨌든 우리한테는 호재로군. 내일 중에라도 총공격을 해야 하나 싶었는데."
반란군이 지니고 있는 식량도 슬슬 바닥을 보이던 참이다. 솔직히 아무리 길어도 일주일 이상 버틸 여력은 없었다. 물론 로마군의 진지에 돌격하는 건 자살행위에 가깝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없던 상황이었다.
"마지막 가는 길 시원하게 한바탕 싸워볼 수는 있겠군."
로마군이 공격으로 전환했다고 반란군에게 승산이 생긴 건 아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패배할 상황에서 싸워보기라도 할 수 있는 희망은 생겼다.
"아슈레, 다시 한번 부하들에게 방비를 철저히 하라고 일러라. 아무리 저쪽에서 먼저 들어온다고 해도 우리가 압도적인 열세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예. 그런데 대장님, 정말로 최전선에서 싸우실 겁니까? 그래도 상황을 좀 보다가 참전을 하시는 게······"
"어차피 이게 최후의 전투다. 사전에 말한 대로 이후의 지휘는 너에게 맡기마. 어제 했던 말을 꼭 명심해라."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저번에도 로마군의 진영까지 혼자 가시지 않았습니까. 그때 로마 놈들이 수작을 부렸다면 저흰 정말 어이없이 총사령관을 잃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오히려 더 좋았겠지. 우린 놈들에게 대등한 상대가 아니라 고작 노예 반란군에 불과하다. 그런데 홀로 회담을 청한 대장을 사로잡아서 처형한다? 어마어마한 비웃음거리가 됐을 거다. 애초에 로마 놈들이 가진 자존심이 그걸 허용하지 못해."
로마군이 완전히 전투태세를 갖춘 걸 본 크릭수스가 하늘을 향해 검을 쭉 뽑아 들었다.
촤촤촹
크릭수스의 뒤를 따라 3만에 달하는 결사대가 일제히 검을 뽑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칼날 위로 반사된 햇빛이 구릉 위로 퍼져나가는 광경이 실로 장관이었다.
"들어라, 자랑스러운 동지들!"
크릭수스가 목청을 높였다.
"긴말을 하지 않겠다. 지금까지 그대들과 함께 싸울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저 로마 놈들에게 우리의 마지막 의지를 보여주자! 두려워 마라. 내가 누구보다 앞장서겠다.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등에 검을 맞고 쓰러지는 치욕을 당하지 마라!"
동시에 크라수스도 무기를 꺼내 구릉 위를 겨누었다.
"전군, 대열을 갖추고 전진하라! 오늘은 위대한 승리의 날이다. 이 반란을 잠재운 영웅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와 너희들이 될 것이다!"
"와아아아!"
도합 8만에 이르는 장병들의 발소리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구릉 위에서 달려오는 3만의 반란군.
반대로 구릉으로 치고 올라가는 5만의 로마 군단병.
로마군 최전방에 선 병사들의 투창이 공중을 수놓으며 전투가 개시됐다.
동시에 가장 젊은 병사들로 이루어진 최전열이 앞으로 돌격했다.
"반란군을 죽여라!"
"지지 마라! 로마 놈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방 먹여주자!"
양측이 얽혀들며 난전이 벌어졌다. 기병을 쓰기 적합하지 않은 지형이라 이런 식의 우직한 힘겨루기로 승부를 낼 수밖에 없었다.
욕설과 비명,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수십 겹으로 겹쳐졌다.
하지만 기병을 쓰지 못한다고 해서 로마군에게 불리할 것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보병끼리 대치하는 백병전이야말로 로마군의 진가가 드러난다.
체력이 왕성한 하스타티가 적의 체력을 소모시키고, 바로 뒷줄에 배치된 노련한 프린키페스들이 본격적으로 적들을 제압한다.
가장 나이가 많은 고참병으로 구성된 트리아리는 최후방에서 대기한다. 그러다가 전술적으로 움직일 상황이 오면 유기적으로 전선에 투입되어 아군을 보조했다.
이것이 과거 로마 보병의 전통적인 대열, 마니풀라르 시스템이다.
이 대열 덕분에 로마군은 다른 세력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유기적인 움직임을 선보일 수 있었다.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이후 이 3전열 체제의 구분을 허물고 무장을 통일하긴 했지만, 이 체계적인 대열의 흐름을 활용하는 전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개개인의 전투력은 검투사가 로마병을 압도할지 몰라도 집단전에는 그 차이가 역으로 뒤집힌다.
게다가 반란군의 병사 중 그 개인전투력이라도 좋은 검투사는 소수에 불과했다.
자연히 싸움은 로마군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스파타와 글라디우스를 휘둘러 반란군의 목을 찌르고, 창으로 두개골을 쪼개버리며, 방패로 넘어진 자들의 목을 찍었다.
제아무리 반란군이 목숨을 불태워 항전한다고 해도 도무지 메꿀 수 없는 힘의 차이가 있었다.
정신력만으로 최강의 군대를 만들 수 있다면, 군력증강을 위해 고뇌하는 나라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중앙 대열에 보강이 필요하다. 손이 비는 백인대를 보내!"
"측면이 무너졌다! 집중적으로 돌파하라!"
백인대장들의 지휘하에 로마군은 마치 한 몸처럼 정교하게 움직였다.
최전선에서 적재적소로 병력을 운용하는 이 백인대장들이야말로 로마군의 척추라 할 수 있다.
특히 이렇게 보병끼리의 힘겨루기가 되었을 때 그들의 능력은 더욱더 빛을 발한다.
반란군은 점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로마군의 수는 거의 줄지 않는 반면 반란군의 수는 시간이 갈수록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마지막 의기를 보여주려는 불굴의 투지가 아니었다면 이미 무너졌으리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 하나만으로 악착같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이미 공포로 무너졌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전투가 유지되고 있다.
크릭수스의 말처럼 그 누구도 등을 보이지 않았다.
죽어가는 반란군들의 몸에 난 상처는 전부 몸통과 얼굴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반란군이 아직 무너지지 않고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바로 최전선에서 혈투를 벌이고 있는 크릭수스와 그가 이끄는 검투사들의 분투 덕이다.
"자, 와라! 내 시체를 넘지 않고는 이 전쟁을 끝낼 수 없을 것이다!"
크릭수스가 벼락같은 포효를 내지르며 로마 군단병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었다.
그가 이끄는 최정예 검투사들은 정신력만 뛰어난 자들이 아니었다. 타오르는 투지를 받쳐줄 만한 실력까지 겸비한 이들이다.
크릭수스는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검투사들을 도와 로마군을 한 명 한 명 베어나갔다.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며 사람을 베는 그 모습은 마치 성난 사자와도 같았다.
상당히 먼 거리를 떨어져 있는 크라수스에게조차 크릭수스의 활약상이 똑똑히 보였다.
"보면 볼수록 아까운 놈이로군. 로마인으로 태어났다면 정말 훌륭한 군인이 되었을 텐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는 옆에 있는 스파르타쿠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이길 수 있겠나?"
"이길 수 있습니다."
스파르타쿠스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강인한 두 눈동자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크라수스는 이 결투를 허락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차피 크릭수스가 저렇게 날뛸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인간인 이상 체력이 무한할 수 없고, 한 손이 두 손을 감당키 어려운 법이다.
이대로 차분하게 병력으로 조이면 금방 한계를 드러낼 터. 굳이 일대일 결투를 걸어줄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만약 진다면 쉽게 끝낼 수 있는 싸움이 괜히 더 질질 끌릴 우려가 있다. 하지만 마르쿠스의 설득에 마음이 흔들렸다.
크라수스의 등을 떠민 건 군사적인 실리가 아닌 일종의 명예욕이었다.
"스파르타쿠스가 크라수스 가문의 검투사라는 사실은 이미 로마의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노예가 세운 공은 곧 주인의 공이지요. 스파르타쿠스가 적장을 쓰러뜨린다면 가문의 위상을 크게 드높여줄 겁니다."
"하지만 만약 진다면?"
"아버지께서도 로마에서 스파르타쿠스의 싸움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절대 지지 않습니다. 물론 진다고 해도 다 방법이 있고요."
마지막 말은 마르쿠스의 허세였지만 크라수스를 안심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군사전략이 발달하며 국가 간 전투에서 일대일 결투가 벌어지는 비중이 줄었다지만, 사례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로마의 칼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로 불리는 마르켈루스가 대표적인 예다.
그는 갈리아의 인수브레스 족장 비르도마루스와 단기접전을 벌여 승리해 엄청난 명예를 얻었다.
안 그래도 폼페이우스를 의식 중인 크라수스에게 이는 엄청난 유혹이었다.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을 훌륭하게 진압한 폼페이우스와 비견되려면 어느 정도의 화제성은 필수다.
졌을 때의 대책도 다 있다고 하니 문제 될 게 없지 않은가. 크라수스는 또 한 번 아들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좋아. 가서 적장을 베고 영광을 거머쥐어라. 그렇게 되면 이제 누구도 너를 노예라 부르지 못할 것이다."
싸움에서 이기고 가문에게 영광을 돌린다면 해방해주겠다는 의미다.
노예들이라면 누구나 눈이 돌아갈 조건이었으나 스파르타쿠스는 개의치 않았다.
신분에 관계없이 그의 주인은 마르쿠스 한 명. 평생을 그렇게 살리라 이미 다짐한 까닭이다.
그가 수많은 인파를 가르며 크릭수스에게 다가갔다.
혼란스러운 전투 속에서도 친우의 접근을 알아차린 크릭수스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로마 병사 하나의 목을 베며 땅이 쩌렁쩌렁 울릴 외침을 발했다.
"나의 목을 가져가는 자가 이 전쟁을 끝낸 영웅이 될 것이다!"
로마 병사들의 눈에 일순간 유혹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섣불리 달려드는 이는 없었다.
극히 미미한 시간이기는 해도 중앙군이 검을 멈추었다.
찰나의 정적을 비집고 로마 병사들의 뒤편에서 한 줄기 목소리가 천둥처럼 뻗어 나왔다.
"네 상대는 나다. 크릭수스."
모두의 이목이 일제히 집중됐다.
로마군의 총사령관인 크라수스가 허락했고, 반란군의 대장인 크릭수스가 받아들였다.
한창 전투 중이던 중앙대열은 일시적인 휴전을 맞이했다.
중앙이 싸움을 멈추자 자연히 다른 곳도 한순간 휘두르려던 무기를 멈췄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긴 크릭수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으나 반란군은 이미 한계에 가까웠다.
3만에 가까웠던 결사대는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삼분의 일이 사망했다.
반면 로마는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강력한 군대였다.
쓰러진 동료들의 시신에서 눈을 뒤로한 채 크릭수스는 스파르타쿠스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길다면 길었고 짧다면 짧았던 인연과 삶에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였다.
"결판을 지어볼까."
스파르타쿠스는 곧바로 검을 뽑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먼저 숨을 돌리게. 지친 자네를 베고 싶지 않으니."
크릭수스의 눈썹이 살짝 요동치더니 이내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지금까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스파르타쿠스와 달리 크릭수스는 줄곧 로마군과 싸웠다.
이런 상태에서 싸웠다면 의외로 허무하게 결판이 났을 수도 있다.
사실 마르쿠스는 이걸 노리고 전투가 벌어진 뒤에 스파르타쿠스를 보낸 것이었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는 오히려 몸에 걸치고 있는 사슬갑옷, 로리카 하마타까지 벗어던졌다.
"조금 쉰다고 해도 체력이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겠지. 시시한 승부가 되지 않도록 갑옷까지는 벗도록 하겠네."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마르쿠스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다 이길 상황을 만들어주었는데 굳이 어려운 길을 가려 한다.
그러면서도 절로 그다운 모습이라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저래놓고 패배한다면 천하의 머저리가 따로 없겠지만, 스파르타쿠스는 다르다.
저런 방식으로 승리를 거두니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하는 것이다.
자만심이 아닌 자신의 실력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크릭수스는 호흡을 고르며 체력을 회복했다.
"전에 봤을 때와는 뭔가가 다르군. 정말 질리지도 않는 친구야."
"자네에게는 미안하지만 적당히 할 생각은 없네."
"하! 누가 할 소리를!"
전의로 번득이는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은 동시에 스파타를 뽑아 들고 자세를 취했다.
스파르타쿠스의 검신에 반사된 햇빛이 반짝이는 궤적을 그렸다. 그와 동시에 시대를 대표하는 두 검투사는 서로에게 쇄도해 가진 모든 능력을 완전히 풀어냈다.
촤촤촹!
'역시나 강하다!'
이전에 격돌했을 때에도 느꼈지만 크릭수스는 스파르타쿠스가 상대한 그 어떤 자보다도 강했다.
스파르타쿠스가 아직 갖추지 못한 유연함과 속도가 크릭수스의 검에는 살아 숨 쉬고 있다.
크릭수스의 감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크릭수스가 평생을 가도 얻지 못할 파괴적인 힘이 스파르타쿠스의 검에는 가득했다.
채앵!
강렬한 금속성이 고막을 찢을 듯 연이어 터져 나왔다.
서로 간의 검이 몇 번이나 부딪쳤는지.
단 일격만 들어가도 생사가 갈릴 테지만 두 사람은 전혀 거리끼는 게 없었다.
그저 자신이 지닌 모든 힘을 밑바닥까지 전부 끌어 쓸 뿐.
카앙!
두 자루의 검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양측의 몸을 밀어냈다.
스파르타쿠스는 곧바로 움직이며 재차 검을 쳐냈다. 완전히 충격을 다 흘리지 못한 크릭수스의 눈에 위기감이 깃들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위기를 기회로 이용할 정도의 경험과 능력이 있었다.
유연하게 검을 움직여 스파르타쿠스의 검을 흘려냈다. 부딪치는 힘을 이용해 거리를 벌린 크릭수스가 투지를 불태우며 역으로 검을 찔러왔다.
쉬잉!
엄청난 속도의 빠르기가 스파르타쿠스의 어깨를 미세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검이 복잡한 움직임을 보였다.
검이 날아드는 방향을 쉽사리 예측할 수가 없다.
피를 깎는 훈련으로 얻은 기본기에 수많은 실전으로 다져진 신랄함이 더해졌다.
빈틈을 찾아내기가 불가능한 완성도였다.
"하압!"
크릭수스의 입에서 터져 나온 기합성과 함께 스파르타쿠스의 팔뚝에서 핏줄기가 솟았다.
제대로 베인 것은 아니지만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빈틈이 없다면 강제로 비집어서 만든다! 아무리 빠르고 복잡한 검이라도 내가 더 강하다.'
검투의 승리는 자신에 대한 확신에서부터 나온다.
크릭수스가 아무리 강해졌다고 해도, 스파르타쿠스 역시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 한 번 이긴 상대를 다시 누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잠깐 어지러워졌던 스파르타쿠스의 검이 제 자리를 찾았다.
그들의 검이 부딪친 회수가 순식간에 수백 합을 넘어섰다.
"저게 정말 사람의 싸움인가······."
누군가가 중얼거린 감탄사가 곧 이 검투를 지켜보는 모두의 심정이다. 다시없을 최고의 대결을 지켜보는 모든 이의 가슴이 흥분으로 떨려왔다.
쉬잉!
크릭수스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옆을 스쳐 허공을 베었다.
스파르타쿠스의 검이 섬광처럼 움직이며, 어마어마한 힘을 뿜어냈다.
받아낼 수 없을 거라 판단한 크릭수스가 뒤로 물러섰다.
그것이 그릇된 판단이었다.
검을 휘두르는 기세 그대로 앞으로 돌진한 스파르타쿠스의 검날이 눈부시게 번쩍였다.
더 피할 데가 없다고 판단한 크릭수스도 이를 악물고 억지로 다시 앞으로 쇄도했다.
교차하는 양측의 검.
스파르타쿠스의 눈에 오래전 헤어진 아내의 밝은 미소가 새겨진다.
그의 몸이 아슬아슬하게 다가오는 검을 비껴내는 동시에 혼신의 일격을 쳐냈다.
촤아아악!
손에 전해지는 감촉이 가슴이 아플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크릭수스의 가슴에서 선명한 피보라가 뿜어져 나왔다.
흐려지는 그 눈을 보는 스파르타쿠스의 얼굴에 일말의 슬픔이 깃들었다.
크릭수스는 땅에 검을 꽂고 앞으로 넘어가려는 자신의 몸을 억지로 지탱했다.
그는 어쩐지 후련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가쁜 숨을 내뱉었다.
"같은 상대에게 두 번의 패배···너에게 또다시 진다면 좀 더···수치스러울 줄 알았는데······."
"크릭수스······."
두 사람의 실력은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죽어서 유지를 남기려고 했던 자와, 살아남아 끝까지 생을 구가하려고 한 자.
미래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관점의 차이가 승패를 갈랐다.
털썩.
결국, 크리수스의 몸이 허물어졌다. 그가 쓰러지는 소리는 곧 반란의 종결을 알리는 신호와도 같다.
"마지막으로···하나만 말하겠네."
크릭수스의 목소리에는 투쟁심도, 죽음을 향한 두려움도 없었다. 스승이자, 제자이자, 친우인 남자의 염려 어린 감정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우리의 길은 끝났지만, 자네는 이제 시작이네···알겠지? 자네가 살아 있다면···우리는 결코 죽는 게 아니야. 자네의 심장에···우리의 의지가······."
"알고 있네. 자네들의 목숨이···절대 헛되지 않도록 내 남은 일생을 전부 사용할 것이네. 그러니 안심하게나."
"하하···믿고···맡기겠네······."
크릭수스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대지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본 그가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하고 싶은 모든 것을···해냈으니···나쁘지 않은 인생이었어.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고집스러운 입매와 어울리지 않게 만족한 미소로 감긴 눈.
삶의 최후의 불꽃을 장렬하게 사그라뜨린 한 남자의 마지막이 거기에 있었다.
치열한 투쟁의 인생을 살아온 한 영웅이 푸른 하늘 저편으로 자유의 바람을 띄워 보낸다.
한 방울의 눈물로 친우를 배웅한 스파르타쿠스가 일어나 검을 치켜들었다.
"크라수스 가문의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적장을 베었다!"
"우와아아아아!"
메아리치는 환호가 스파르타쿠스의 전심을 감싸며 휘몰아쳤다.
일대 영웅의 탄생.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마르쿠스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