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24. 종결 ──────────────── 크릭수스가 죽은 뒤 로마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갔다.
평생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최강 검투사들의 대혈투. 거기에 승자는 아군 총사령관의 직속 검투사다.
스파르타쿠스는 크라수스를 향해 무릎을 꿇고 크릭수스의 검을 바쳤다. 전설 속 이야기에서나 나올 것 같은 한 장면이었고, 이를 지켜보는 로마군을 열광케했다.
반란군도 끝까지 의기를 보여준 크릭수스를 따라 용감히 싸웠다. 하지만 절망적인 전력 차이가 그들을 무참하게 짓눌렀다.
싸움은 몇 시간밖에 더 지속되지 않았다.
구릉을 가득 수놓던 병장기 소리가 완전히 잦아들고 있었다.
"와아아아아아!"
점점 가라앉는 병장기 소리대신 승리를 알리는 나팔과 병사들의 함성이 구릉을 뒤덮었다.
1년을 훌쩍 넘게 지속된 반란은 이제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도망친 반란군의 수는?"
아군의 사망자는 미미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극소수다.
문자 그대로 압승이었다.
그래도 크라수스는 일말의 찝찝함을 떨쳐내지 못했다.
전투 마지막에 아군의 포위망을 뚫고 도주한 적 부대가 눈에 띄었던 까닭이다.
군단장 한 명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적의 우익이 3군단의 포위를 뚫고 도망갔습니다. 그래도 수는 5천도 되지 않을 겁니다."
"어째서 포위가 뚫린 거지?"
"3군단이 공격해 들어가는 지형은 촘촘히 둘러싸기가 불가능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 진지를 활용한 방어전을 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이번에는 운이 좋지 않았습니다."
"후···한 줌밖에 안 되는 잔당이지만 신경이 쓰이는군."
도망간 패배자들이 딱히 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번 전투로 적을 완벽히 궤멸시켰다는 결과를 얻지 못한 점이 걸렸다. 폼페이우스의 군대가 지금쯤 어디까지 근접해 있을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지. 아무리 폼페이우스 그놈이라고 해도 도망간 자들을 찾아내려면 시간이 걸릴 터. 이쪽도 아직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폼페이우스가 군공을 가로채게 두지는 않는다.
물론 폼페이우스가 도망간 잔당을 소탕한다고 해도 공을 통째로 뺏길 걱정은 없었다.
이번에 크라수스가 거둔 대승리는 고작 그 정도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자신이 다 이뤄놓은 승리에 얌체처럼 끼어드는 행위는 용납이 안 된다.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가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이런 행동을 하는 거라고 확신했다.
지금 원로원에서 폼페이우스의 경쟁상대가 될 수 있을 만한 인물은 크라수스와 루쿨루스 정도다.
루쿨루스는 현재 동방에서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를 훌륭하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거기에 크라수스까지 이탈리아반도 남부를 초토화시킨 반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이런 상황에서는 폼페이우스가 아무리 빛나는 전공을 세워도 혼자 돋보이기 힘들다.
견제심리가 작용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크라수스에게 마르쿠스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버지,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오오, 왔느냐. 너의 공이 아주 컸다. 스파르타쿠스에게도 네가 잘 전해다오. 로마로 돌아가면 곧장 우리 씨족의 이름을 내린 뒤 해방해주겠다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소수의 잔당이 도망갔다고 들었습니다."
"아아···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속을 썩이던 참이다."
마르쿠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건으로 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폼페이우스에 관련된 일입니다."
※※※※
아슈레가 이끄는 반란군의 잔존병력은 원래 목표였던 브룬디시움을 향해 나아갔다.
그들은 결코 운으로 포위망을 돌파한 게 아니었다.
사전에 철저하게 계획되어 있던 도주였다.
아슈레도 마음 같아서는 죽을 때까지 크릭수스의 옆에서 싸우고 싶었다.
하지만 크릭수스는 소수의 인원이라도 죽지 않고 살아남기를 바랐다.
목숨만이라도 건져 비굴하게 계속 살아가라는 뜻이 아니었다.
이 싸움을 계속 기억하고 널리 퍼트려주길 원해서였다.
아슈레는 결전 전날 크릭수스에게서 모든 진실을 들었다.
스파르타쿠스는 배신자가 아니며 검투사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계속 싸워왔다는 사실을.
그리고 크릭수스는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크릭수스와 스파르타쿠스의 결투가 끝난다면 누가 이기더라도 한순간의 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틈을 최대한 노려 포위망을 뚫고 브룬디시움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브룬디시움까지만 가면 어떻게든 그리스 지역으로 도망가는 게 가능하다.
거기까지만 가도 로마군의 영향력은 눈에 띄게 줄어든다.
마침 로마군이 무리한 공격을 한 덕에 포위가 허술한 지역이 생겨났다.
아슈레는 크릭수스가 죽은 틈을 놓치지 않고 자신이 이끄는 부대를 지휘해 서쪽을 돌파했다.
살아서 도망친 사람들은 5천도 되지 않았으나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도주하는 경로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 결정했다.
혹시 모를 추격대를 대비해 가도를 가로지르는 위험한 짓은 하지 않았다.
아슈레와 생존자들은 숲길을 타고 목적지인 브룬디시움을 향해 서둘렀다.
"여기만 빠져나가면 브룬디시움은 코앞이다. 모두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전투가 끝난 뒤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쉬지 않고 달려왔다. 모두가 체력적으로 거의 한계에 달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생존자들의 얼굴은 밝았다.
브룬디시움까지 가서 배를 타면 지긋지긋한 로마와도 안녕이다.
그리스로 건너가면 영웅 크릭수스의 이야기를 널리 퍼트리며 평범하게 살아갈 것이다.
모두가 그런 희망을 지니고 숲의 밖으로 나왔다.
"이제 바로 브룬디시움으로······."
하지만 그들이 햇빛이 비치는 곳으로 나왔을 때, 휘황한 독수리 군기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런······."
충격으로 멈춰 선 아슈레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럴 수는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로마군이 자신들을 앞지르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벗어난 뒤 그들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이동했다.
설령 로마군이 정비조차 하지 않고 움직였다고 해도 뒤를 따라오는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들을 미리 앞질러 대기하는 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이, 이건 악몽이야.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는 거야······."
생존자 중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아슈레도 별반 다르지 않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뭔가가 달랐다. 눈앞에 있는 로마군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싸운 자들과는 조금 이질적으로 보였다.
병사들이 풍기는 분위기가 숨이 막힐 정도로 살벌했다.
이전의 로마군보다 훨씬 더 전쟁에 익숙한, 피 냄새가 짙게 배어 있는 자들이었다.
그 군단의 중심에 말을 타고 있는 사령관이 생존자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나이는 서른 초중반쯤 되었을까.
조각 같은 외모를 지닌 굉장한 미청년이었다.
확실하다.
이전에 구릉에서 로마군을 지휘하던 자와는 다른 인물이었다.
아슈레가 파르르 떨리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로마의 지휘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말머리를 휙 돌렸다.
무심한 눈빛.
반란군은 안중에도 없다는 기색이 절로 풍겼다.
지휘관의 옆에 있던 군단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떻게 저들이 이곳으로 올 거라는 예측을 하신 겁니까?"
"간단하지. 크라수스가 반란군을 추격한 경로를 보면 반란군의 목적지는 브룬디시움이다. 배를 미리 수배해놨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쪽에서 배를 탈 생각이었을 터."
"예. 전에도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크라수스 군은 저놈들을 중간에 따라잡아 포위하고 있었지. 그러나 우리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총공격을 할 수밖에 없어. 지도를 보니 그렇게 갑작스럽게 총공격을 하면 분명히 틈이 생기겠더군. 그렇다면 도주한 자들은 어디로 갈까? 뿔뿔이 흩어지는 게 아니라면 사전에 계획한 도주 경로를 그대로 이용할 가능성이 제일 높을 거다."
설명을 듣는 군단장의 눈에 점점 감탄의 빛이 서렸다. 지휘관은 이 정도는 자랑거리도 되지 않는다는 듯 무심히 말을 이었다.
"도주에 성공했다고 해도 평지를 움직이다가 따라잡힌 놈들이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을 거다. 아무리 노예들이라 해도 생각하는 머리라는 게 있으니까. 그렇다면 놈들이 도주할 경로쯤은 아주 손쉽게 예측할 수 있지."
"손쉽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저희에게는."
"그런가? 어쨌든 이 정도로 충분한 설명은 되었을 테니···슬슬 시작하도록 할까."
로마군은 반란군이 이곳으로 올 줄 예견하고 미리 대형까지 완벽히 갖춰둔 상태였다.
거기에 인원수만 해도 10배가 가깝게 차이 난다.
이건 전쟁이나 전투라는 표현조차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처형이었다.
신호를 받은 군단장이 무기를 꺼내 들고 허탈한 표정으로 서 있는 반란군을 겨누었다.
"전군,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적을 전멸시킨다. 적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포위망을 굳혀 섬멸하라! 임페라토르를 위하여!"
"임페라토르를 위하여!"
임페라토르란 개선식을 거행할 정도의 영예로운 군공을 세운 장수에게 붙는 칭호다, 수만의 병사들이 일제히 임페라토르를 연호하며 반란군의 생존자들에게 돌진했다.
후방을 제외한 모든 방향이 봉쇄당한 반란군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아슈레는 그저 허탈한 웃음을 한번 짓고 검을 뽑았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마지막 명령은 지키지 못할 것 같습니다."
묘하게도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새어 나온다.
'대장님, 이제 알겠습니다. 진짜 죽음이 다가온다면 보여줄 수 있는 건 배짱밖에는 없는 거로군요.'
크릭수스는 반란을 일으킨 뒤 언제나 이런 심경을 느끼면서 싸웠을 지도 모른다.
노예로 전락했음에도 스스로의 의지로 섬길 사람을 선택했고, 섬기는 자의 바람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 소망을 후대로 넘기지 못함이 아쉬울 따름이지만, 절망은 하지 않았다.
'뒤를 부탁합니다. 스파르타쿠스 님.'
아슈레는 누구 보다 앞장서서 달려오는 로마군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의 뒤를 따라서 다른 생존자들도 너나 할 것 없이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돌격했다.
이후의 광경은 분명히 장엄한 싸움이라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반란군은 몇 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전멸당했다.
생존자들은 없었다. 최후를 직감한 그들은 누구 하나 등을 보이지 않고 전부 얼굴과 몸에 칼을 맞은 채 쓰러졌다.
로마를 공포로 몰아갔던 반란은 이로써 마지막 한 명의 생존자까지 사망하며 끝을 맞이했다.
반란군의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지휘관에게 다가온 군단장이 예를 표했다.
"위대한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아무리 나라도 이런 걸 승리라고 자화자찬하지는 않는다. 지휘할 보람조차 없는 이런 학살 따위 찝찝할 뿐이야."
"그래도 임페라토르께서 이 전쟁을 종결시켰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자, 그럼 이곳에서 볼일도 끝났으니 슬슬 움직여볼까?"
군단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마로 회군하시겠습니까?"
"아니. 그전에 크라수스를 먼저 봐야겠다. 그래도 5년 만에 만나는 사이인데 인사라도 나눠봐야지."
그와 크라수스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전 로마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둘이 만난다면 평범한 안부 인사 따위가 오갈 리 없다. 그럼에도 군단장은 전혀 토를 달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이 군대에 있어서 임페라토르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군단장이 충성심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뜻대로 하시길.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
사흘 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군대는 메타폰툼 북서쪽에 위치한 실비움에서 회동을 했다.
폼페이우스의 훤칠한 얼굴을 마주한 크라수스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이를 갈았다.
"폼페이우스······."
"5년 만에 보는군. 크라수스, 달라진 게 없어 보여 기쁜걸."
원로원 의원이라고 해도 크라수스의 면전에서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대상을 30대 이하로 한정한다면 오직 폼페이우스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크라수스는 아홉 살이나 어린 이 젊은이가 싫었다.
고작 18세의 나이에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술라의 밑에서 활약한 군사의 천재이자 대전략가.
로마 최고의 부호인 크라수스조차 명성에서는 폼페이우스에게 미치지 못한다.
두 사람은 원래부터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크라수스는 자신에게 없는 군사적 재능을 가진 폼페이우스를 시기했다. 폼페이우스 역시 너무 탐욕적으로 부를 쌓는 크라수스의 방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거기에 이번 노예 반란의 마무리를 폼페이우스가 가로채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크라수스의 성격을 아는 이들은 곧 벼락같은 격노가 쏟아지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 달리 크라수스는 못마땅하다는 눈초리로 한번 흘겨볼 뿐,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로마로 귀환했으면 재깍 군대를 해산하고 시민으로 돌아가야지 어째서 여기까지 내려온 것인가?"
"로마의 적이 뿌리 뽑히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마음 편히 군대를 해산할 수 있겠나."
"그 적은 사실상 내가 뿌리 뽑았네만."
"하지만 잔당을 놓쳤지. 자그마한 불씨만 살아있어도 언제든 다시 거대한 산불이 날 수 있는 법. 반란이라는 화재를 완전히 마무리 지은 사람은 나 폼페이우스라 해도 과언이 아닐 걸세. 원로원에도 그렇게 보고서를 올렸고."
크라수스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원로원에 보고서를 올렸다고?"
"물론. 반란군의 잔당들을 전부 토벌한 뒤 그 자리에서 서신을 보냈네."
폼페이우스는 여기에서 크라수스가 감정적인 동요를 보일 거라고 확신했다.
이번 전쟁을 궤멸시킨 핵심은 분명히 크라수스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남부에 엄청난 피해를 끼친 반란군은 단순한 노예 반란군이라 치부할 수준을 넘어섰다.
불만을 품은 노예의 반항 정도로 덮어버리기엔 사건이 너무 커진 것이다.
제아무리 원로원이라 해도 이 정도 사안을 유야무야 모른 척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폼페이우스는 자신이 사건을 완전히 종결시켰다는 식의 보고는 올리지 않았다.
반란을 제압한 주역은 어디까지나 크라수스다.
폼페이우스 자신은 거기에 도움을 준 조력자 정도로만 포장했다.
그래도 크라수스가 누려야 할 군공의 일부를 가로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물론 그는 크라수스가 길길이 날뛰든 말든 전혀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어디까지나 한 가지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였다.
그러나 크라수스의 반응은 폼페이우스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크라수스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한번 숨을 들이켜고는 희석한 포도주로 입술을 축였다.
이내 그의 입을 뚫고 상상도 하지 못한 발언이 튀어나왔다.
"그거 참 우연이로군. 나도 마침 원로원에 보고서를 보낸 참이거든. 개선식을 한다면 그걸 누려야 할 사람은 당연히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라고 말이야."
내심 크라수스의 격정어린 반응을 기대하던 폼페이우스의 표정이 일변했다.
폼페이우스의 두 눈이 황당함과 충격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