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26. 비상의 시작 ──────────────── 마르쿠스와 스파르타쿠스가 탄 마차는 중천에 뜬 햇빛을 받으며 네아폴리스를 향해 나아갔다.
마르쿠스는 이제는 익숙해진 최악의 승차감을 즐기며 흔들흔들 말없이 시간을 보냈다.
스파르타쿠스는 긴장으로 온몸을 굳히고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크릭수스와 싸우기 전에도 이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기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긴장돼?"
"네."
스파르타쿠스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그의 떨리는 심장소리가 마르쿠스의 귀에까지 들리는 듯했다.
저 멀고 먼 트라키아에서 헤어졌던 아내를 다시 만나러 가는 길이다.
긴장되지 않는 게 이상한 상황이리라.
"괜찮다니까. 외견도 일치하고, 이름도 똑같고, 트라키아에서 로마로 끌려온 날도 네가 말한 그대로잖아. 아, 그러고 보니 요리를 굉장히 잘한다는 말도 있었어."
"제 아내가 요리 실력이 뛰어난 건 맞습니다. 지인들이 오면 아내가 직접 요리를 했었는데 하나같이 감탄을 하며 먹었었죠. 제 자랑이었습니다."
"그래. 그 정도로 특징이 일치하니까 기대를 가져 봐도 좋을 거야. 다행히 요리 실력이 뛰어나서 험한 꼴 보지 않고 괜찮게 살고 있나 보더라."
딱딱하게 굳은 스파르타쿠스의 얼굴에 한 가닥 희망이 피어났다. 실망하지 않기 위해 마음을 비워보려고 해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네아폴리스라면 카푸아에서 그리 멀지 않은데 코앞에 두고도 그녀를 찾지 못했다니······."
"어쩔 수 없지. 너는 쭉 양성소에 갇혀 있었고, 네 아내는 스파르타쿠스라는 이름을 모르잖아. 그리고 알았어도 만날 방법은 딱히 없었을걸. 뭐, 너도 이제 로마로 돌아가면 자유민이 될 테니 스파르타쿠스라는 이름을 버리고 싶다면 그래도 돼."
"아니요. 자유민이 되더라도 저는 지금도 앞으로도 쭉 스파르타쿠스라는 이름으로 살고 싶습니다. 동료들이 유지를 맡긴 사람은 어디까지나 카푸아의 검투사 스파르타쿠스니까요. 트라키아에서 그 누구도 지키지 못한 무력한 남자가 아닙니다."
반란군과의 전쟁이 끝난 뒤 스파르타쿠스의 마음은 한층 더 단단해졌다.
실력적인 면이야 예전부터 두말할 나위가 없었고, 이제 정신적으로도 거의 완성에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이제 아내만 다시 찾는다면 어떤 미혹도 그의 마음을 흔들지 못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스파르타쿠스의 아내가 요리를 그렇게 잘한다면 내 전속 요리사로 일해 달라고 해볼까?'
아무래도 전생의 기억 때문인지 가끔 미치도록 그리워지는 음식들이 있긴 했다.
김치처럼 만들기 힘든 음식은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국밥 정도라면 비슷한 맛을 내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처음엔 무리라도 요리에 능숙한 이가 어느 정도 시행착오를 거치다 보면 만들 수 있긴 할 것이다.
'비 오는 날에 국밥 한 그릇 뚝딱하면 세상 부럽지 않은 시절도 있었는데···그 기분을 다시 느끼지 못하는 건 좀 아쉽네.'
가문의 저택에서 돼지고기 냄새가 풀풀 풍기는 국을 주변에 권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너무 이질적이라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이내 고개를 흔들어 실없는 생각을 떨쳐버린 마르쿠스는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점검해나갔다.
국밥이 아니더라도 그가 신경 써야 할 일들은 너무나 많았다.
일단 원로원의 호감을 얻는다는 계획은 순조롭게 궤도에 올라섰다. 폼페이우스에게 원로원의 견제를 집중시킨다는 책략도 멋지게 맞아떨어졌다.
폼페이우스가 역사에 묘사된 그대로의 인물이라 다행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얕볼 수 있는 인물은 절대로 아니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실패해본 적이 없어 자신감이 과하고, 정치력이 조금 떨어질 뿐 능력만큼은 흠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
'등자를 보자마자 그 가치를 한눈에 간파했었다고 했지.'
진지로 돌아가는 그를 배웅할 때 아주 짧게 인사를 나눴을 뿐이지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뿌리 깊게 내린 확고한 자신감과 흔들리지 않는 의지.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타고난 능력과 군을 이끄는 선천적인 카리스마까지.
세상을 호령할 일대 영웅의 상이라는 건 부정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저 전략의 천재가 등자를 활용해 어떤 기병 전술을 펼칠지 보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역시 중무장 기병을 보여주지 않은 건 정확한 판단이었어.'
지금 시대에 랜스 차징을 하는 등자 기병은 전장의 균형을 완전히 붕괴시킬 수도 있는 존재다.
폼페이우스 같은 전략의 귀재에게 너무 일찍 이런 카드를 준다면 어떤 나비효과를 부를지 예측할 수가 없다.
어차피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 다 알게 되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숨겨놔야 한다.
'저쪽에 유출됐을 때쯤이면 이쪽은 개량을 충분히 마쳤을 테니까 차이는 변하지 않겠지.'
반란군과 벌인 회전에서 중장기병은 기대 이상의 파괴력을 선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개선해야 할 점도 꽤 많이 드러났다.
가장 최우선으로 개량해야 할 점은 갑옷의 질이다.
현 로마군이 사용하는 로리카 하마타는 중장기병의 갑옷으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로리카 하마타는 사슬갑옷이라 베는 종류의 충격에는 강해도 찌르기에는 굉장히 취약했다.
그런데 랜스를 든 중장기병이 받는 공격의 대부분은 창이나 활 같은 찌르기 형태의 무기다.
무장이 빈약한 반란군 상대로야 괜찮았지만, 잘 훈련된 군대와 맞상대할 때는 붙기도 전에 무너질 가능성이 있었다.
파르티아에서 사용하는 갑옷이나 제정 때 사용된 로리카 세그멘타타를 도입할까 고민도 했었다.
하지만 이 역시 미봉책에 불과하다.
로리카 세그멘타타가 판갑의 일종이라고는 해도 중세에 사용하던 판금갑옷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판금갑옷이야말로 기병의 진형파괴능력을 극대화시켜줄 수 있는 최강의 장비다.
아무리 공격력이 강하다고 해도 적에게 붙기도 전에 화살에 전멸하면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판금갑옷으로 적의 화살세례를 튕겨내고 랜스로 방어를 분쇄한다.
이 공방일체가 완성되지 않으면 중장기병의 힘은 결국 반쪽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군마는 지금부터 꾸준히 품종개량을 한다고 치고···역시 강철의 생산이 가장 큰 문제로군.'
지금의 제철 기술로는 15세기 이후에 사용한 전신 판금 갑주 같은 건 도저히 제작이 불가능하다.
전신을 강철로 만들려면 그만큼의 생산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고대의 제철 기술로는 강철을 그렇게 대량으로 찍어낼 수 없었다.
판금 갑옷을 만들고 말고를 논하기 전에 제철 기술부터 끌어올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을 한 가지 꼽는다면 지금 기술로 실현 불가능한 영역은 아니라는 점이다.
'중세 유럽에서 강철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건 동양에서 사용되는 선진적인 풀무가 들어온 이후라고 했지. 이후 수력을 이용한 풀무기술까지 나오면서도 또 한 번의 발전이 있었고. 일단 초기 수준의 고로는 지금도 이미 사용하고 있어. 시간과 인력, 금력을 쏟아부으면 충분히 강철의 대량생산에 도달할 수 있을 거야.'
풀무란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화로에 바람을 불어넣는 도구다. 불에 산소를 공급해 화력을 늘려 철을 더 효과적으로 녹이는 것이다.
고로는 엄밀히 말하면 조금 다르지만, 초기 형태의 용광로라 볼 수 있다.
지금 로마의 대다수 제련소는 화로와 고로를 모두 사용해 주괴를 만들었다. 물론 현 기술로는 부산물이 없는 주괴는 만들지 못했다.
마르쿠스는 로마에 돌아가는 즉시 제철 기술부터 혁신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건 단기간에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고정적인 인력과 자금을 상시 투입해 꾸준히 개발해 나가야 한다.
개발 할 수 있는 건 개발하고, 동방의 우수한 기술도 가능한 대로 수입해 와야 할 것이다.
특히 한나라부터 사용하고 있었다는 중국의 초강법을 어떻게든 배워올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걸 해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은 돈이다.
충분한 자금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현재 구상하고 있는 계획의 대부분은 진행이 불가능하리라.
'등자와 편자만으로는 부족하니 새로운 사업 아이템도 좀 더 구상을 해봐야겠다. 뭐, 일단 돈을 벌 방법이야 넘쳐나니까.'
물론 해야 할 건 이게 다가 아니었다.
제철 기술의 개선과 사업의 확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재의 영입.
이 세 가지는 단발성이 아니라 항시 계속해나가야 하는 일이다.
특히 마르쿠스는 슬슬 각 방면에서 뛰어난 인재들을 영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수족처럼 움직여 줄 수 있는 인물로는 셉티무스가 있지만, 그는 엄밀히 말하면 전속비서에 가깝다.
스파르타쿠스는 호위 외에도 따로 해야 하는 일이 있었고, 다나에는 아직 어렸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활약할 시기는 마르쿠스가 원로원에 들어가는 시점이 될 것이다.
지금은 저 셋처럼 완전히 믿을 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해도 수족처럼 움직여줄 유능한 사람이 필요했다.
앞으로의 로마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술라가 억지로 찍어 눌렀던 체제의 모순은 이제 거의 한계에 달했다.
터져 나오는 욕망, 한계에 달한 야심, 온갖 감정이 뒤엉켜 녹아내린 용광로가 될 것이다.
철저하게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사태에 휩쓸려갈 뿐 주도권을 쥐고 움직이지 못한다.
어렸을 때야 상황에 맞춰갈 수밖에 없었다.
가문의 부라고 해봐야 결국 아버지인 크라수스의 소유였고, 마르쿠스가 가진 힘은 미약했다.
반란 사건이 터졌을 때도 마르쿠스가 할 수 있던 건 크라수스의 옆에서 거드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만 했다.
역사의 큰 흐름은 바꾸지 않더라도 사건의 주도권을 놓칠 마음은 없었다.
마르쿠스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스파르타쿠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해도 자신의 수하에게 평생 안고 가야 할 무거운 짐을 지게 했다.
이제 다시는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이번 반란 사건을 겪으며 마르쿠스는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그는 많은 사람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사람을 이끈다는 건 곧 그에 맞는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마르쿠스가 고개를 들었다.
고요하면서도 강렬한 결의가 마음속 깊이 새겨지는 순간이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창밖으로 흘러가는 구름이 고요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
노예로 팔려 가 헤어졌던 부부가 머나먼 타국의 땅에서 재회했다.
남편은 겁이 나 차마 아내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다.
"당신···인가요?"
꿈에서도 그렸던 익숙한 목소리.
줄곧 시선을 떨구고 있던 스파르타쿠스는 몸서리쳐질 정도의 반가움에 격동했다.
"당신, 맞군요?"
"셀리니···정말로 당신인가······?"
불안감으로 가라앉아 있던 스파르타쿠스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그가 천천히 걸어가 아내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혹시라도 환상이 아닐까 싶어 몇 번이나 중간에 손이 멈추었다.
이윽고 손가락을 타고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를 느낀 스파르타쿠스는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 그의 아내가 있다.
자신의 목숨을 전부 주어도 하나도 아깝지 않을 사람.
스파르타쿠스의 눈에 기어코 눈물이 고였다. 아내인 셀리니도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지 못하고 쏟아냈다.
"무사했었군. 정말로···다행이야. 나는······."
다시 만난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았다. 지켜주지 못했던 과거에 대한 사과, 이렇게 만날 수 있는 지금에 대한 감사,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까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은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목이 메어 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저 울었다.
그 모습을 본 그녀는 더욱 많은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의 얼굴에서 흐르는 눈물은 복받쳐 새어 나온 마음이었다.
속에 간직하고 있던 수많은 말도 눈빛을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다 알 수 있었다.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마르쿠스도 어쩐지 가슴이 찡해졌다.
절친한 친우를 베고 상처 입었을 수하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좋은 결과가 있어서 다행이구나."
스파르타쿠스의 아내는 굉장히 운이 좋았다.
그녀는 기초적인 교육을 받아 교양도 지니고 있었고, 요리 솜씨도 아주 좋았다.
그 능력을 눈여겨본 네아폴리스의 부유한 노부부의 저택에 노예로 들어갔다.
주인들은 그녀의 요리를 워낙 마음에 들어 했기에 상당히 좋은 대우를 해주었다.
희롱이나 학대를 당하는 일도 전혀 없었다.
다만 남편의 소식을 알아보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아에서의 이름을 버리고 스파르타쿠스라는 검투사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마르쿠스의 명을 받은 셉티무스가 접촉해 온 것이다.
그는 노부부와 협상해 처음 셀리니를 데려왔을 때보다 세배의 값을 더 쳐주고 노예의 소유권을 샀다.
셀리니의 사정을 들은 노부부는 제값만 쳐줘도 된다고 했지만, 마르쿠스는 기어이 추가금을 얹어주었다.
수하의 아내를 그동안 잘 대해줘서 고맙다는 의미에서였다.
이 사실을 안 스파르타쿠스는 마르쿠스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도 지금의 감사함을 표현할 수 없었으나 최소한 이 정도라도 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셀리니도 그의 옆에서 함께 무릎을 꿇었다.
"도련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목숨을 바쳐서···아니, 죽어서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이 몸이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온몸과 영혼을 바쳐서 충성을 바칠 것을 다시 맹세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것 없어. 로마로 돌아가면 너도 이제 자유민이니까.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아니라 파트로누스(후원자)와 클리엔테스(피후원자)의 관계가 되는 거야. 당연히 셀리니도 해방을 해줄 테니 정식으로 로마에 가서 식을 올리도록 해."
"형식 따위는 관계없습니다. 제 앞으로의 인생은 이제 도련님의 뜻과 그 의지를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도련님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제가 베어 넘기겠습니다."
셀리니도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지아비가 섬기는 주인은 곧 저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해방이 된다고 하더라도 도련님을 충실히 모시겠습니다."
"뭘 새삼스럽게···어쨌든 고맙다. 부부 사이에 밀린 이야기도 많을 테니 가서 이야기 좀 나누고 있어. 나는 셀리니의 전 주인과 마저 계약 이야기를 하고 갈 테니까."
멀고 먼 길을 돌아 다시 만난 두 사람이다. 마르쿠스는 눈치 좋게 자리를 피해주기로 했다.
감동의 재회를 맞이한 부부를 바라보던 그는 이내 시선을 돌려 저 앞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의 끝에는 로마가 있었다.
이제 귀환하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은 전부 끝냈다.
지금부터 로마의 정점에 설 때까지 한순간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가 진정한 시작이다.
새로운 출발의 순간이 마르쿠스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