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 키케로 (34/326)

  # 34 33. 키케로 ──────────────── 마르쿠스는 시칠리아 주민들을 저택으로 초대해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그들은 현 집정관의 아들이 사건에 관심을 보이는 것에 굉장히 고무된 반응을 보였다.

  시칠리아 주민들은 시라쿠사이와 메시나를 제외한 모든 도시에서 파견된 대표단이었다.

  그 정도로 사안이 심각하다고 강조한 대표단은 하소연에 가까운 말을 쭉 늘어놓았다.

  "가이우스 베레스는 법무관을 지낸 후 시칠리아의 총독으로 파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임자들과는 달리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총독직을 수행했지요."

  "그때는 노예 반란 때문에 총독을 교체할 여력이 없었으니까."

  "예. 그래서 저희가 받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예를 들자면?"

  "수치만 들어도 쉽게 이해가 되실 겁니다. 베레스가 임기 첫해에 착복한 곡물만 해도 30만 모디우스에 달합니다."

  로마 시민이 매달 1인당 제공받는 곡물의 양이 약 5 모디우스다.

  즉, 베레스는 총독 임기 첫해에 5천 명이 1년 동안 배급받을 밀을 횡령한 셈이다.

  "거하게도 해먹었군."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300명이 넘는 농부가 있던 지역이 베레스의 임기 3년 만에 80명으로 줄어버렸습니다. 그자가 악랄하게 토지 절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도를 넘어선 고리대금업과 문화재까지 횡령했고요."

  "그래, 천하에 다시없을 부패한 정치인이라는 건 잘 알겠어. 그런데 증거는 있나?"

  "···증인은 있습니다. 증거도 찾아보면 분명 상당히 많이 나올 겁니다."

  마르쿠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증거가 없다면 기소해봐야 유죄를 끌어내긴 힘들 거야. 배심원들도 총독직을 수행하면서 어느 정도의 뇌물은 당연히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정도를 넘어선 착복이라는 명백한 증거를 제시해야 해."

  "만약 베레스를 기소하겠다는 분이 나온다면 저희가 전폭적으로 지지하겠습니다. 분명히 증거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나도 베레스 같은 인간은 로마에 발을 붙이고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변호사로서 실력이 그리 좋은 게 아니라 직접 나설 수는 없어. 대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소개해주지."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물론. 그쪽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보다 관심을 가질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어.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내년에 시칠리아 총독이 될 분이거든."

  마르쿠스의 말을 들은 시칠리아 대표단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들도 당연히 내년에 총독으로 부임할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대표단 가운데 한 명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로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를 만날 수 있는 겁니까?"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관계는 세간에 앙숙으로 알려져 있다. 시칠리아 대표단도 당연히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

  위장 공작이 그만큼 잘 먹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이가 좋지 않긴 해도 공적인 일에서까지 대립하지는 않아. 두 분 다 로마를 대표하는 위치에 계시니까."

  마르쿠스는 대표단을 안심시키고는 그들과 함께 폼페이우스의 저택으로 향했다.

  폼페이우스는 당연히 이 사안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특히 현 시칠리아의 기반산업인 농업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에 극심한 분노를 보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임자가 뿌려놓은 오물을 자칫하면 자신이 뒤집어쓰게 생겼기 때문이다.

  시칠리아는 로마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적인 곡창지대 중 하나였다.

  이곳의 총독은 밀을 안정적으로 로마에 공급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만약 이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로마 시민들에게 엄청난 지탄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데 대표단의 말을 들어보니 베레스가 3년에 걸쳐 부린 패악이 너무나 심각했다.

  게다가 현 총독인 루키우스 메텔루스가 베레스의 처남이라는 점도 문제였다.

  그는 베레스의 사고를 수습하는 척하면서 그가 지른 비리의 증거를 은닉하는 중이었다.

  시칠리아의 민심은 끝을 모르고 내려가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니 내년에 부임하는 폼페이우스가 총독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과 인기가 이런 어이없는 일로 타격을 받아서는 안 된다.

  폼페이우스는 반드시 사건을 해결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대표단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베레스를 기소할 변호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마르쿠스는 역사의 흐름대로 키케로를 추천했다.

  폼페이우스 역시 키케로에게는 나름대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마르쿠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집정관에 출마할 때도, 호르텐시우스 법을 부활시킬 때도, 키케로는 폼페이우스의 편을 들어주었다.

  물론 키케로는 본인의 신념대로 행동한 것이었지만, 폼페이우스 입장에서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현직 집정관의 부름을 받은 키케로는 즉시 폼페이우스의 저택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정관께서 저와 의논할 게 있으시다고요?"

  나이는 동갑이지만 키케로는 폼페이우스 앞에서 깍듯한 예의를 차렸다.

  평민 출신 신참자에 불과한 키케로와 집정관을 역임중인 명문 귀족 폼페이우스 사이에는 그만큼 큰 격차가 있었다.

  "그래. 자네가 로마의 젊은 변호사들 가운데에서 최고라는 평을 들어서 말일세. 여기 마르쿠스가 적극적으로 자네를 추천하더군."

  "마르쿠스?"

  키케로는 폼페이우스의 옆에 앉아있는 젊은 청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르쿠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자신을 바라보는 키케로를 향해 정중히 예를 표했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입니다. 과분하게도 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아버지라면 현 집정관인 그 크라수스인가?"

  키케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르쿠스와 폼페이우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조합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선의 의미를 이해한 폼페이우스가 피식 웃으며 앉으라는 손짓을 보냈다.

  "크라수스가 짜증이 나는 것과 그 아들이 호감이 가는 건 별개의 일이니까. 자네 둘도 이참에 안면을 트게나. 서로 알아둬서 손해 볼 일은 없을 테니."

  "크라수스 가문의 장남이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키케로는 흥미롭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마르쿠스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인색하고 까다롭기만 하던 크라수스가 아들 바보가 되었다는 소문은 이미 원로원에 파다했다.

  가문의 사업을 이미 절반쯤 아들에게 물려주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마르쿠스를 주목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런데 거기에 크라수스의 정적인 폼페이우스와도 친밀한 듯 보인다.

  키케로는 이 젊은 사내가 먼 미래에 로마의 정계에 돌풍을 몰고 올 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받았다.

  마르쿠스 역시 키케로를 주시했다.

  공화정 말기를 대표하는 변호사이자 당대 최고의 문필가로 꼽히는 지성인. 특별한 군사적 재능도 없는 지방의 평민이 집정관의 자리까지 올라간 입지전적인 인물.

  키케로가 남긴 수많은 저작물과 공화주의에 대한 사상은 후대의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마르쿠스가 주목한 점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계획을 위해서는 차후 공화정파의 핵심적인 인물이 될 그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각자 상념에 잠긴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좀처럼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폼페이우스가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을 익혔다면 앞으로의 일을 좀 의논해 보세. 우선 키케로, 내가 왜 자네를 불렀는지 이유를 말해주겠네."

  키케로는 자리에 앉아 폼페이우스가 들려준 말을 가만히 경청했다.

  베레스가 저지른 갖가지 악행이 열거될 때마다 그의 눈가가 살짝 찌푸려졌다.

  키케로는 이야기가 완전히 끝난 뒤에도 잠시 말없이 생각을 정리했다.

  이내 그가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제가 가이우스 베레스를 기소해줬으면 하는 거로군요."

  "자네는 이미 시칠리아에서 재무관을 역임한 걸로 알고 있네. 그때 일처리가 아주 훌륭했는지 아직도 자네를 기억하는 지지자들이 많다는군. 이번 일을 멋지게 해내면 시칠리아 전체가 자네의 클리엔테스가 되지 않겠나."

  키케로가 잠시 말을 멈추고 머리를 긁적였다. 폼페이우스의 말대로 시칠리아는 키케로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 지역이었다.

  재무관 시절 아르키메데스의 무덤을 발견해 시라쿠사의 열광적인 환호를 이끌어 낸 건 지금도 자랑스레 내세울 수 있는 업적이었다.

  여기에서 베레스의 기소까지 성공적으로 마친다면 이후 그의 앞날에는 탄탄대로가 깔릴 것이다.

  법무관은 따 놓은 당상이고 어쩌면 집정관까지 노려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증거 수집이 쉽지 않을 텐데요. 베레스는 전직 총독입니다. 거기에 현 총독은 그의 처남인 루키우스 메텔루스죠. 심지어 그 루키우스 메텔루스의 동생은 내년 법무관의 유력한 후보고, 형인 퀸투스 메텔루스는 집정관이 될 거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내년에 재판이 열리게 되면 손을 쓸 방도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올해 재판을 열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고요."

  법정의 재판관은 보통 해당연도의 법무관 중 한 명이 맡는다.

  집정관과 법무관이 짜고 친다면 원하는 재판에 특정 법무관을 꽂아 넣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키케로는 미간을 좁히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메텔루스 가문은 베레스를 보호하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사용할 겁니다. 게다가 분명 제가 베레스를 기소하면 호르텐시우스가 변호를 맡을 텐데 글쎄요···썩 자신감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호르텐시우는 로마 최고의 변호사라는 명성이 자자한 인물로 메텔루스 가문과 막역한 사이였다.

  게다가 그는 이번 집정관 선거에서 당선될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이었다. 아직 신참인 키케로와는 명성이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폼페이우스도 가볍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내년까지 재판이 끌리면 필패겠군. 현직 집정관 두 명에 재판장까지 한통속이라면 이길 수가 없겠어."

  "예. 거기에 메텔루스 가문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도 저 같은 평민 출신에게는 엄청난 부담입니다."

  "하지만 내년 시칠리아 총독은 나일세. 내가 최대한 증거 확보를 도와준다면 어떨까?"

  "그전에 현 총독인 루키우스 메텔루스가 증거를 모조리 은닉하지 않는다면 다행이겠지요."

  폼페이우스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축 늘어지자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르쿠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러니 올해 재판을 치러야 합니다. 8월이 오기 전에 증거를 취합해 소를 제기하면 법무관 글라브리오가 담당하는 재판에 베레스를 세울 수 있어요. 글라브리오는 청렴한 사람이니 베레스의 손을 들어주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면 충분히 승산이 있지 않겠습니까?"

  "7월 말까지 증거를 전부 수집하란 말인가?"

  키케로가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마르쿠스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저들도 당연히 지연전술을 펼칠 테니 최소한 공직자 선거가 끝나는 7월 말까지는 기소준비를 전부 끝내야 합니다."

  "지금은 4월일세. 시칠리아가 어디 동네 앞마당도 아닌데 어떻게 그 짧은 시간 동안 증거를 모두 찾을 수 있겠나. 왕복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빼면 남은 시간이 두 달도 채 되지 않을 텐데."

  "분명 어렵겠지요. 하지만 할 수 있습니다."

  마르쿠스의 목소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확신으로 가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원래 역사에서도 키케로는 이 빠듯한 시간을 극복하고 훌륭히 재판을 치러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나비효과가 작용해 원역사와 흐름이 달라질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마르쿠스는 일을 더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그가 여전히 불신의 눈빛을 보내고 있는 키케로에게 당당히 선언했다.

  "키케로 님이 증거와 증인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도록 제가 돕겠습니다. 시칠리아로 가는 가장 빠른 배편을 준비하죠."

  "자네가 나를 돕겠다고?"

  "예. 배를 타고 가면 4월 말에 출발해도 5월 초에 시칠리아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40일 정도 증거를 모으고 로마로 돌아오면 여유롭게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겁니다."

  "크라수스 가문이 도와준다면···분명히 큰 도움이 되긴 하겠지. 그런데 어째서 자네가 베레스를 찍어내려고 하는 건가?"

  "그런 부패한 자는 공화정을 위해 사라져주는 게 좋습니다. 건전한 체제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건전한 정치인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뼛속까지 공화주의자인 키케로는 마르쿠스의 말에 크게 기뻐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네. 베레스 같은 자가 원로원 의원이랍시고 떵떵거리게 놔두는 건 이 공화정의 미래에 악영향만 미칠 뿐이지. 아무리 총독이라고 해도 도를 넘은 착취와 횡령은 파멸을 가져온다는 선례를 확실히 남겨야만 해."

  "그렇습니다. 베레스의 몰락은 이후 총독으로 파견되는 고위 공직자들에게 아주 좋은 본보기가 될 겁니다."

  마르쿠스는 이 세기의 재판의 규모를 본래 역사보다 훨씬 더 크게 키울 작정이었다.

  부패한 관리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의미도 있었고, 키케로의 명성을 한층 더 끌어올려 주기 위해서였다.

  결국 키케로는 이 재판을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으로 여기기로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결연한 의지를 담아 말했다.

  "집정관, 제가 베레스를 기소하겠습니다."

  "그래, 자네라면 충분히 승소할 수 있을 거야. 마르쿠스, 자네도 키케로를 잘 지원해주게나."

  "맡겨주십시오."

  회심의 미소를 지은 마르쿠스가 표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

  사흘 뒤, 키케로는 정식으로 시칠리아 대표단의 의견을 받아 가이우스 베레스를 기소하겠다고 밝혔다.

  기소 내용은 간결했다.

  베레스가 지금까지 취한 부당이득을 전부 반환하고, 4300만 세스테르티우스에 달하는 보상금을 지불하라는 것이었다.

  로마의 1년 예산이 2억 세스테르티우스였으니 실로 어마어마한 액수의 보상금을 요구한 셈이다.

  최고의 변호사로 명성이 자자한 호르텐시우스가 즉각 베레스의 변호인을 맡겠다고 선언했다.

  로마에서 모르는 이가 하나도 없는 최고 명문가 메텔루스 가문도 베레스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키케로는 소를 취하하지 않고 베레스의 죄를 낱낱이 밝히겠노라 장담했다.

  이 엄청난 규모의 재판 소식은 즉시 로마 전역에 퍼져나갔다.

  마르쿠스가 일부러 바람잡이들을 고용한 것도 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시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평민 출신의 젊은 원로원 의원이 유서 깊은 명문 귀족들을 상대로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시민들은 베레스가 이길 것이라 예상하면서도 내심 키케로를 응원했다.

  한편, 업무가 과중하게 쌓여있던 마르쿠스는 이번 일까지 겹치니 거의 한숨도 자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중요하지 않은 일은 그냥 셉티무스와 다나에에게 처리하라고 넘겨줬는데도 좀처럼 여유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는 마르쿠스의 귓가에 다나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도련님···많이 바쁘세요?"

  "응? 뭔데?"

  서류더미에서 시선을 뗀 마르쿠스가 눈가를 문지르며 다나에의 얼굴을 보았다.

  다나에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왔다.

  "아무래도 이건 도련님께 허가를 받아야 할 사항인 것 같아서 여쭤보는데요. 7월에 열릴 선거에 쓸 자금을 대출해 달라는 귀족분이 계셔서요."

  "그런 건 그냥 네가 알아서 해도 된다고 했잖아. 회수 가능성이 없는 게 아니라면 적당히 빌려줘."

  마르쿠스는 자신의 일이 너무 많아진 뒤로 간단한 대출 업무는 다나에에게 일임한 상태였다.

  그녀의 계산능력은 굉장히 출중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다나에는 어쩐지 자신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볼 때는 회수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데 계속해서 돈을 빌려 가셔서요. 이미 엄청난 액수의 돈을 빌리셨는데 여기서 또 빌려달라고 하시니···그래도 상당한 명문 귀족이라 제가 아닌 도련님이 직접 판단을 하셔야 할 것 같아요."

  "하···역시 어딜 가든 갚을 생각도 없으면서 빌려 가기만 하는 놈들이 꼭 있다니까. 대체 누구야? 명문 귀족이든 아니든 내가 직접 만나서 거절을 해야 정신을······."

  양피지에 적혀 있는 대출신청자의 이름을 본 마르쿠스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도련님?"

  다나에가 고개를 갸웃하며 마르쿠스를 불렀지만 그의 귓가에는 어떤 목소리도 들어오지 않았다.

  마르쿠스는 머릿속에 산재해 있는 온갖 일들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그 이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서 다시 한 번 확인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양피지에 적혀 있는 이름이 마치 각인처럼 마르쿠스의 눈에 박혀 들었다.

  대출신청인의 자리에 적힌 이름은 다음과 같았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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