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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베레스 재판 (37/326)

  # 37 36. 베레스 재판 ──────────────── 마르쿠스가 카이사르와 협력 관계를 확실히 하는 동안, 베레스는 재판을 위한 준비에 한창이었다.

  그는 자신의 배경을 과신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조치들을 확실히 취했다.

  변호를 맡은 호르텐시우스가 키케로를 절대 얕보지 말라고 경고했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본래 변호는 해도 기소는 하지 않기로 유명한 이였다.

  그런 그가 기소를 했다는 건 분명히 뭔가 노림수가 있다는 뜻이다.

  베레스는 특히 키케로의 배후에 폼페이우스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폼페이우스는 원래 역사보다도 한층 원로원의 심기를 거스르는 중이었다.

  당연히 원로원의 눈길은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베레스의 경계도 한층 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마르쿠스가 우려했던 나비효과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일어난 것이다.

  베레스는 자신의 변호를 맡은 호르텐시우스, 그리고 처남인 퀸투스와 함께 저택에서 모임을 했다.

  최근에 연이은 스트레스로 눈 밑이 퀭해진 베레스가 호르텐시우스를 독촉했다.

  "이보게, 키케로를 아예 기소인에서 제명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어째서 재판관들이 키케로를 기소인으로 인정한 것인가."

  "재판관들이 키케로의 언변에 넘어가 버렸네. 거기에 폼페이우스의 영향력까지 있으니 생각대로 되지 않더군."

  중후한 인상의 중년인 호르텐시우스가 가볍게 혀를 찼다.

  재판에 들어가도 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는 재판관을 구워삶아 키케로가 아닌 다른 사람을 기소자로 변경하게 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베레스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퀸투스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소기의 목적은 있었지 않소. 분명 이 재판의 배후에는 폼페이우스가 있는 거요. 그자가 우리 가문의 힘을 약화시키려고 키케로를 사주한 것이지."

  베레스가 분개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밖에 볼 수 없소. 빌어먹을 폼페이우스 놈···벼락출세한 애송이 주제에. 나를 찍어내고 시칠리아 총독으로 가서 인기몰이하려는 생각인가 본데 어림도 없지. 호르텐시우스, 자네만 믿고 있으니 부탁하오. 내 보수는 섭섭지 않게 드리리다."

  "재판에 대해서는 걱정 마시오. 당신이 내게 했던 말에 거짓이 없다면 질 리가 없으니. 혹시 몰라서 다시 묻겠는데 키케로가 기소한 내용 중 태반이 사실이 아닌 게 확실하오?"

  "그렇다니까. 내가 뇌물을 받은 건 사실이긴 해도 그 정도로 심하게 횡령을 하진 않았소. 이건 모두 나를 탄핵하기 위한 놈들의 중상모략이오. 당장 시칠리아의 도시 중 시라쿠사이와 메사나는 기소에 동참하지 않았잖소. 내가 정말로 그렇게 횡령을 했다면 당연히 이 도시들도 함께 나를 규탄했겠지."

  사실 그 두 곳은 베레스의 범죄에 동참해 수익을 공유했기 때문에 기소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호르텐시우스는 베레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좋소. 그러면 우리 전략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겠소. 우선 키케로를 기소인에서 제명하는 방침은 이제 쓸 수 없소. 그렇다면 우선으로 취해야 할 방침은 재판을 내년으로 미루는 거요. 여기 있는 퀸투스와 내가 이번 선거에서 집정관으로 당선될 건 거의 기정사실이니까."

  "거기에 처남은 법무관이 될 테니 내년까지 시간을 끈다면 우리가 질 일은 없을 테지. 하지만 이런 당연한 사실을 저쪽이 모를 리가 없지 않겠소. 분명히 해가 바뀌기 전에 재판을 시작할 생각일 거요."

  "나도 그렇게 판단하고 있소. 하지만 이번 사건처럼 로마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지역을 조사하는 거라면 최소 반년은 걸리기 마련이오. 거기에 키케로는 이번 선거에서 안찰관에 출마한다는 확실한 정보가 있소. 즉, 7월에는 로마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오. 억지로 올해 재판을 열려고 하면 제대로 된 증거는 찾지도 못할 거요."

  "안 그래도 현 총독인 루키우스에게 서신을 보내놓았소. 키케로가 시칠리아로 가서 증거를 수집하면 철저하게 방해를 해달라고 말이오. 그래도 억지로 소를 제기한다면 그때는 로마 최고의 변호사인 당신의 실력에 기댈 수밖에."

  호르텐시우스가 맡겨달라는 듯 절로 신뢰가 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맡겨 주시게. 아직 안찰관조차 지내지 않은 애송이 변호사에게 변론으로 밀릴 생각은 없으니."

  "하하하, 역시 로마 최고의 변호사이자 차기 집정관. 난 당신만 믿고 있겠소."

  "그럼 나는 돌아가서 변론 전략을 좀 더 검토해 보겠소."

  호르텐시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 앞에 놓인 포도주잔에는 손조차 대지 않았다.

  "당신의 노고는 절대 잊지 않겠소. 내년 국정 운영에도 최대한 협조할 것을 약속하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재판 전까지 책잡힐 만한 일은 피하도록 하시오."

  호르텐시우스가 커다란 정원을 가로질러 멀어져갔다.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베레스와 퀸투스는 한동안 말없이 가만히 앉아있었다. 이내 베레스가 술잔을 들어 올렸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노예가 재빠르게 술을 가지고 와서는 잔을 가득 채웠다.

  "변호는 호르텐시우스에게 맡기면 걱정할 것 없겠군."

  "하지만 폼페이우스가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하오?"

  "그럴 리가. 놈이 키케로를 내세워 나를 견제하려고 한 거라면 분명 무슨 수를 쓰지 않겠소?"

  "차기 총독인 그자가 영향력을 행사하면 현 시칠리아의 토호들이 루키우스의 말을 듣지 않을 우려가 있소. 폼페이우스의 이름값은 그만한 무게가 있으니까."

  베레스가 얼마나 심한 횡령을 했는지 알고 있는 퀸투스는 초조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메텔루스 가문은 베레스의 뒤를 봐주는 대가로 그의 수익 일부를 나눠 가졌다.

  재판에서 진다면 베레스만이 아니라 메텔루스 가문 역시 상당한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걱정 마시오, 퀸투스. 변호야 호르텐시우스에게 맡길 테지만, 나머지 공작은 내가 직접 나설 테니까."

  "나머지 공작이라면···증거 은닉이나 증거 수집 방해를 말하는 거요?"

  "평소라면 그걸로 그쳤겠지만 뒤에 폼페이우스가 있다면 더한 행위도 해야 하지 않겠소? 이건 놈이 먼저 건 싸움. 내가 받아친다고 해도 정당방위란 말이오."

  베레스의 눈동자가 위험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그가 잡혀 들어가면 곤란한 시칠리아 토호들은 여럿 존재한다. 거기에 그는 총독 시절 해적과 짜고 약탈을 방조한 적도 있었다.

  걸리면 정치 인생은 바로 끝장나겠지만 동원할 수단은 얼마든지 있었다.

  원역사에서는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아 키케로에게 깔끔히 당했으나 지금은 달랐다.

  상대를 키케로가 아닌 폼페이우스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사적으로 쌓아온 부와 권력을 이런 식으로 놓칠 수는 없다.

  베레스가 잔에 가득 찬 술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몸에 술기운이 돌자 내면에서 부글거리는 분노가 한층 더 강해졌다. 탐욕스러운 권력자의 눈이 서늘할 정도로 시린 빛을 발하고 있었다.

  ※※※※

  마르쿠스는 키케로와의 약속을 지켰다. 시칠리아로 향하는 가장 빠른 배를 구한 그는 키케로와 함께 갤리선에 올랐다.

  돛을 펼친 갤리선이 선장의 신호에 천천히 항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마르쿠스는 배 위에서 멀어져 가는 육지를 감회 어린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이 시대에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항해다.

  사실 전생에서도 딱히 배를 타본 기억은 없었다.

  돈은 물론이고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다소 흔들리는 느낌도 참아줄 만했다.

  시야 너머로 탁 트인 바다를 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듯 후련한 기분이었다.

  마르쿠스의 호위를 위해 동행한 스파르타쿠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후련해 보이시는군요."

  "그래. 배 위에서 보는 경치가 이렇게 멋질 줄은 몰랐어. 일종의 해방감마저 느껴질 정도야."

  "그건 도련님이 최근의 격무에서 문자 그대로 해방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

  스파르타쿠스의 말대로 지금 마르쿠스는 반쯤은 휴가를 가는 기분에 가까웠다.

  스스로 불러온 일이기는 해도 워낙 벌여놓은 사업이 많아 최근에는 잠잘 시간도 부족했다.

  그런 지옥 같은 일상에서 벗어났으니 해방감을 느끼지 않는 게 이상할 것이다.

  물론 마르쿠스가 빠진 만큼 남아있는 인원들은 한층 더 죽을 맛이리라.

  스파르타쿠스만 데리고 시칠리아로 간다고 하자 처음으로 다나에에게 원망 어린 시선을 받았다.

  셉티무스 역시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 두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었다.

  '로마로 돌아가면 당분간 푹 쉬라고 휴가를 줘야겠네.'

  어차피 그때쯤이면 밀린 일도 거의 다 처리가 됐을 테니 마르쿠스 혼자서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르쿠스는 단순히 휴가를 즐기기 위해 시칠리아로 가는 건 아니다.

  키케로를 도와주면서 그와 확실한 우호 관계를 맺는다는 확실한 목적이 있었다.

  게다가 얼마 전 베레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첩보도 귀에 들어왔다.

  만약 역사와 달리 키케로가 재판에서 진다면 이후 어떤 나비효과가 일어나게 될지 알 수 없게 된다.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마르쿠스가 키케로의 옆에 붙어 있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 기회에 로마의 배를 직접 타보고 앞으로의 구상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다.

  '어느 정도 조사를 하긴 했었지만 역시 선박 건조 기술이 그리 훌륭한 수준은 아니네.

  "

  고대 서구권은 갤리선이라는 종류의 배를 보편적으로 사용했다.

  갤리선은 노를 보조 동력으로 사용하고, 선체가 길고 얇은 게 특징이다.

  노를 사용하는 이유는 당시 사람들의 활동반경인 지중해의 날씨가 굉장히 변덕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렇기때문에 이 당시의 사람들은 먼 바다로 나가기보다는 연안을 따라 항해했다.

  배의 구조도 이런 항해에 최적화되어 발전했기 때문에 대양을 항해하는 건 무리였다.

  마르쿠스는 여기에서 커다란 한계에 봉착했다.

  '역시 감자를 가지고 오는 건 무리겠군.'

  인구 부양의 문제를 겪던 근세 유럽의 빈곤층을 먹여 살리다시피 한 음식이 바로 감자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구황작물로 그 효용성은 이미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마르쿠스는 로마의 고질적인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장 먼저 감자를 떠올렸다.

  주식이 되긴 무리겠지만, 빈곤층의 배를 채워줄 수 있는 정도만 해도 충분한 농업 혁명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감자의 원산지가 신대륙의 안데스 산맥이라는 것이다.

  위치는 알고 있으니 배를 개량하면 가지러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직접 로마의 배를 타보니 그런 헛된 기대는 단숨에 사라져버렸다.

  당장 파도가 그리 심하지 않은 지중해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데도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갤리선의 구조가 길쭉한 직선형이라 생기는 문제였다.

  거기에 노를 탑재해야 하니 필요한 인원수도 많아지고 자연히 적재량도 떨어진다.

  이런 배로는 아무리 개량을 해도 대서양을 횡단해 신대륙까지 가는 건 무리다. 정말 기가 막히게 운이 잘 따라줘서 도착한다고 해도 다시 돌아오는 게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고 러시아 쪽으로 가서 알래스카로 넘어간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구황작물에 의존할 수 없다면 본질적으로 농업기술을 개선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제강 기술이야 차근차근 발전하고 있었지만, 농업 쪽은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지금부터 새로 알아본다고 해도 토양이나 키우는 작물에 따라 지식대로의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농업이란 로마의 핵심인 만큼 이를 건드리는 건 어렵고도 어려운 문제였다.

  '일단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데이터를 확보하는 수밖에······.'

  그런 마르쿠스의 상념을 깨뜨린 것은 뒤편에서 들려온 키케로의 목소리였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나?"

  "별일 아닙니다. 그냥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 중이었습니다."

  "하긴 시칠리아로 가더라도 일이 그리 쉽지는 않을 걸세. 지금 총독은 베레스의 처남이니 아주 대놓고 우리를 방해할 가능성이 커."

  마르쿠스가 말한 앞으로의 계획은 시칠리아와 관련된 일이 아니었지만, 키케로의 착각을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쉽지는 않아도 사서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이미 마차는 물론 현지에서 증거 수집을 도와줄 사람들도 수배해 놓았으니까요. 만에 하나의 사태가 터졌을 때를 대비한 보험도 들어놨습니다."

  마르쿠스가 옆에 있는 스파르타쿠스를 가리켰다.

  로마 최강의 검투사로 명성이 자자한 그를 돌아본 키케로는 믿음직스럽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자네들이 함께 와줘서 정말 든든하네. 하지만 그래도 방심은 금물일세. 베레스와 메텔루스 가문의 부는 상상을 초월 정도니까. 그들이 금력으로 증인을 매수하고 증거를 은닉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궁지에 몰릴 수도 있을 거야."

  "그렇게 나와 준다면 오히려 이쪽이 더 편할 겁니다."

  마르쿠스가 피식 웃으며 자신감의 이유를 입에 담았다.

  "베레스와 메텔루스 가문의 재산을 전부 다 합쳐도 이쪽이 몇 배는 더 많으니까요."

  "오······."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잠깐 잊고 있었던 키케로는 감탄사를 흘리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내 평생 이보다 더 든든한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군."

  진심이 느껴지는 한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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