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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법정 개막 (40/326)

  # 40 39. 법정 개막 ──────────────── 루키우스는 해적들에게 받은 보고를 그대로 베레스에게 전했다. 어째서 우두머리가 직접 오지 않았는지 물었지만, 괜히 꼬리를 밟힐지도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신 증거로 키케로가 가지고 있던 토가의 옷단을 잘라왔다.

  토가에 주홍색 옷단을 장식할 수 있는 건 원로원 의원들의 특권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루키우스는 순순히 그들의 보고를 믿었다.

  그래도 키케로가 아예 선거에 나가지 못하면 일이 커질 수 있으니, 7월까지 로마에 돌아갈 수 있게 놓아달라고 전했다.

  "후우, 이제야 한숨 돌릴 수 있겠군."

  키케로가 시라쿠사이와 메사나에서 얼마나 조사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 정도만으로는 재판을 이길 수 없다.

  설령 진다고 해도 키케로가 주장한 4천만 세스테르티우스라는 보상금은 인용되지 않을 것이다.

  로마의 귀족들은 총독으로 가면 뇌물 정도야 충분히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까놓고 말해서 아예 안 받는 사람이 별종 취급을 받았다.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고 해봐야 한두 개로는 귀족 배심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을 터.

  루키우스는 오랜만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두 발 뻗고 편히 쉴 수 있었다.

  그렇게 마르쿠스는 감시망에서 벗어나 시칠리아 전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됐다.

  일이 잘 풀리고 있다고 방심하는 일은 없었다.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증인들에게 접근해 증거를 확보했다.

  그 결과 6월 초순이 지나기 전에 만족스러울 만큼 준비를 끝마칠 수 있었다.

  상선 하나를 통째로 빌린 마르쿠스는 모든 증인과 증거를 비밀리에 싣고 시칠리아를 떠났다.

  그들이 오스티아 항구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도 선거까지 여유가 꽤 남아 있었다.

  "이번 일로 자네에게 너무나 큰 빚을 졌어."

  키케로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젊은 청년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건넸다.

  "자네가 어째서 현 집정관 두 명에게 그토록 총애를 받는지 이해가 되네.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해주게. 내 힘닿는 데로 애써볼 테니."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래도 저는 재판에서 키케로 님이 이겨주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될 것 같습니다. 공화정의 정의가 바로 서는 모습을 꼭 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암, 암. 물론이지. 자네도 꼭 재판을 보러오게나. 호르텐시우스가 로마 최고의 변호사라는 명성이 있지만 그것도 이제 끝일 걸세.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내 웅변 실력이 그보다 훨씬 뛰어나거든. 자랑하려는 건 아니지만, 어렸을 때부터 내 논변을 들으러 학부모들이 학교까지 찾아올 정도였으니까."

  "아···그런가요? 역시 로마 최고 변호사가 될 분의 싹은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던 모양이군요."

  "하하, 자네는 요즘 청년들 같지 않게 이해가 정말 빠르군. 꼭 내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아. 그러고 보니 나 때는 어땠냐면······."

  키케로는 원래부터 자화자찬하는 기질이 조금 강했다. 거기에 마르쿠스가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자 완전히 흥이 올라 버렸다.

  그는 자신이 로마로 막 상경했을 때와 원로원에서 멋들어진 연설을 했던 경험을 끊임없이 늘어놓았다.

  결국 마르쿠스가 키케로의 자랑세례에서 벗어난 것은 정확히 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

  7월의 선거는 별다른 이변 없이 모두가 예상하는 결과대로 진행됐다.

  로마의 고위 공직자 선거는 켄투리아 민회라고 불렸는데 현대와는 방식이 조금 다르다.

  현대의 투표는 재벌이든,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모두가 평등한 1표를 가진다.

  반면 로마는 재산의 정도에 따라 행사할 수 있는 1표의 가치가 달랐다.

  로마는 감찰관이 조사한 재산에 따라 모든 시민을 193개의 그룹으로 나누었다.

  193개의 그룹 중 보다 많은 그룹에게 지지를 받은 후보가 당선되는 방식이다.

  언뜻 보면 미국의 선거인단 제도와 비슷하다.

  하지만 문제는 재산에 따라 그룹을 나누었다는 것이다. 최상위 부유층의 그룹은 10명이 조금 넘는 정도였다. 반면 가난한 계층의 그룹은 최소 수백 이상이었으며, 무산자의 경우 수천이 기본으로 넘어갔다.

  각 그룹은 공평하게 1표씩 행사할 수 있으므로 10명의 부유층이 수천 명의 무산자와 동등한 권리를 지닌다는 뜻이다.

  193개중 98개가 귀족과 기사계급으로 이루어졌으니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그래서 선거에 나선 후보들은 부유층에 유리한 공약을 적극적으로 내세웠다.

  원로원이 밀어주는 후보가 당선에 유리한 이유도 바로 이런 선거제도 때문이었다.

  그래도 안찰관과 재무관을 선출하는 트리부스 민회는 조금 더 공정했다.

  여기서는 시민을 재산의 정도로 나누는 게 아니라 부족별로 구분하고, 그 부족끼리의 다수결 투표로 후보를 선출했다.

  베레스는 두 선거 중 오직 켄투리아 민회의 선거 결과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로서는 다행히 호르텐시우스와 퀸투스가 무사히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퀸투스의 동생까지 법무관으로 선출되자 베레스는 남아있던 일말의 불안감까지 전부 떨쳐버렸다.

  "하하하, 모두들 수고했네. 이거 이대로 되나 싶을 정도로 일이 잘 풀리는군."

  "퀸투스와 내가 차기 집정관에 당선되는 건 원래부터 거의 확실한 일이었소. 거기에 법무관까지 한자리를 꿰찼으니 재판이 내년까지 끌리면 질 가능성은 이제 없다고 봐야겠지."

  "올해 열려도 마찬가지요. 키케로 그놈은 증거를 거의 수집하지 못했을 테니까."

  뒤늦게 트리부스 민회의 선거 결과를 확인한 베레스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평민 안찰관에는 무사히 당선되었나 보군. 그래도 지금쯤이면 잔뜩 화가 나서 따지러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냉정한걸. 따져도 소용이 없는 걸 알 테니 체념한 것인가?"

  로마로 돌아오자마자 해적들을 찾아내야 한다고 노발대발할 줄 알았는데 조금 예상외의 반응이긴 했다.

  호르텐시우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따져? 무엇을? 증거 수집을 방해한다고 한 것 말인가? 그 정도야 키케로도 예상했을 테니 굳이 이쪽에 핏대를 세우며 감정낭비를 할 필요가 없지 않겠나."

  "뭐, 원론적으로는 그 말이 맞소. 하지만 그래도 단단히 화가 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조금 의외라서. 합리적인 애송이니 설쳐봐야 별 실익이 없다고 판단했다면 이해가 가지만."

  "대체 어떤 방식으로 증거 수집을 방해했기에···책잡힐 일이면 곤란하오."

  "걱정할 필요 없소. 내가 했다는 증거 따위는 찾지 못했을 테니까."

  베레스의 호언장담에 호르텐시우스는 미심쩍은 눈빛을 거두었다.

  올해 선거에 당선된 사람들의 명단을 쭉 훑어 내려가던 중 익숙한 이름이 눈에 띄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재무관 중 최다 득표로 선출됐구먼. 이 청년도 언변이 꽤나 인상적이었는데."

  카이사르의 이름을 들은 베레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는 자요?"

  "아는 자라기보다는 예전에 그가 변호사로 나선 재판을 본 적이 있소. 패소하긴 했어도 논리정연한 변론이 꽤나 인상적이었지."

  "하, 빌어 처먹을 난봉꾼이 논리는 무슨 논리."

  "카이사르에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소?"

  영문을 모르겠다는 호르텐시우스의 물음에 베레스는 분노가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말 모르는 거요? 원로원 의원 중 상당수의 아내가 저 난봉꾼 놈과 놀아났는데. 당장 내년에 당신의 동료 집정관이 될 퀸투스의 아내도 저번 주에 카이사르와 찰싹 붙어있었을 거요. 루키우스의 아내도 남편이 시칠리아에 가 있는 동안 카이사르와 관계를 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고."

  "허허···그런 일이 있었다니."

  "당신 아내도 단속 잘하는 게 좋을 거외다. 저놈은 교양 있는 유부녀에게만 환장한다니까."

  자존심 때문에 직접 말은 안 했지만, 베레스의 아내도 카이사르와 바람을 피웠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아내와 이혼하고 싶었다. 하지만 메텔루스 가문과의 연결고리를 생각하면 그럴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할 수 있는 건 여기저기 추파를 던지고 다니는 애송이 정치인을 잘근잘근 씹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카이사르는 아직 원로원 의원들에게 빚쟁이 난봉꾼 정도로만 인식되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위험한 발톱을 숨기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현재로서는 오직 마르쿠스뿐이었다.

  ※※※※

  7월이 다 가도록 키케로가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베레스는 그가 재판을 포기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키케로가 법무관 글라브리오에게 면담을 청했을 때조차 기소를 취소하겠다는 말을 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키케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가이우스 베레스를 기소할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에 재판을 잡아주셨으면 합니다."

  원로원 의원들은 숨을 죽인 채로 베레스와 키케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베레스는 일순간 당황했지만, 키케로가 허세를 부리는 거라 확신했다.

  '소액의 벌금형이라도 받아내 보겠다고 저러는 건가. 발악하는 게 안쓰러울 정도로군.'

  베레스는 여유를 잃지 않고 자신은 떳떳하니 성실히 재판에 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호르텐시우스도 변호인단은 완벽히 준비를 마쳤다고 선언했다.

  기소인단과 변호인단의 의견이 합치되자 글라브리오는 한 달 안에 재판을 열기로 했다.

  재판이 열린다는 소문은 며칠 지나지 않아 로마 시내 전역으로 퍼졌다.

  로마 역사상 가장 큰 배상금이 걸린 재판이 될 거라는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여기에 마르쿠스가 고용한 바람잡이들이 키케로에게 유리한 말들을 흘리고 다녔다.

  "베레스가 패소하면 내년에 안찰관인 키케로가 밀을 싸게 들여올 수 있을 거라는데?"

  "맞아. 시칠리아 사람들과 이미 그러기로 약속이 되었다고 하더라."

  "뭐야, 진짜로? 그런데 재판을 이길 수 있긴 해? 베레스 변호사가 그 호르텐시우스라며."

  "그러니까 우리라도 키케로를 응원해야지. 시민들이 똘똘 뭉쳐 지지하면 배심원들도 조금이나마 영향을 받지 않겠어?"

  군중이란 자신들의 이익과 직접 결부되는 사안에는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법이다.

  이 재판이 내년의 밀 가격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말에 안 그래도 높던 관심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평민 출신 변호사가 명문 귀족들을 상대로 고군분투한다는 구도도 많은 시민들의 호응을 받았다.

  마르쿠스는 작정하고 재판의 규모를 역대 최고 수준까지 끌어올릴 생각이었다.

  키케로는 선천적으로 대중의 관심에 목마른 사람이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주목을 받으면 받을수록 능력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

  실제로 키케로는 일부러 시민들이 밀집해 있는 곳을 돌아다니며 열광 어린 응원을 즐겼다.

  마침내 다가온 1차 공판일.

  법정 주변은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엄청난 인파로 붐볐다.

  미리 좋은 장소를 선점한 마르쿠스는 편안한 의자에 앉아 법정을 둘러보았다.

  키케로의 승리를 비는 평민들만이 아니라 부유한 기사계급, 귀족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사건의 본질은 속주민들이 전 총독의 전횡을 고발한 것이다.

  이 재판 결과에 따라 앞으로 속주 통치 방식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오히려 평민보다도 귀족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재판의 결과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심 베레스가 승소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마르쿠스의 뒤에 서 있는 다나에도 그런 분위기를 느꼈는지 혀를 내둘렀다.

  "엄청 달아올라 있네요. 이러다가 키케로 님이 패소하면 폭동이라도 일어나는 거 아닐까요?"

  "괜찮아.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지더라도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가요? 아니면 패소할 일이 없다는 말씀이신지······."

  "지켜보면 알 거야. 마침, 함께 구경할 일행이 한 명 더 늘었네."

  인파를 해치며 다가오는 남자가 한 명 있었다.

  딱 봐도 많은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는 멋들어진 토가를 입었다.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뜬 다나에가 이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카이사르 님 오셨습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재무관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그래, 고맙네. 자네도 잘 있었나? 어째 볼수록 미모가 점점 더 물이 오르는 것 같군."

  "네? 가, 감사합니다."

  "자네도 해방 노예였지? 조금만 있으면 구애하는 남성들로 백인대 하나를 만들 수도 있겠어."

  "아···그, 저기···과찬이십니다."

  다나에가 당혹스러워하자 지켜보던 마르쿠스가 피식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시자마자 채권자의 사용인을 유혹하시는 겁니까?"

  "유혹이라니 무슨 소리. 순수한 칭찬일세. 그리고 15년쯤 지나면 몰라도 지금은 내 취향이 아니니 안심하게나."

  "아, 그랬죠. 제가 카이사르 님의 취향을 잠깐 깜빡했네요. 다나에는 아직 남편이 없으니까요."

  카이사르는 뼈가 있는 한 마디를 가볍게 웃어넘기며 마르쿠스의 옆에 앉았다.

  "자네는 이번 재판의 결과를 어떻게 보고 있나?"

  "아주 재미있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단 저도 1차 공판의 마지막 날에는 증인으로 설 예정이거든요."

  "증인? 시칠리아에 있는 자네의 클리엔테스가 베레스에게 약탈이라도 당했나?"

  "아니요. 그것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일입니다."

  카이사르가 뭔가를 더 묻기도 전에 키케로가 당당한 걸음으로 단상 위에 올라왔다.

  1차 공판의 절차는 먼저 기소인의 연설과 그에 반박하는 변호인단의 연설로 시작된다.

  그 뒤를 이어서 차석 기소인과 차석 변호인들의 기나긴 연설이 한 차례 더 이어진다.

  그 모든 연설이 끝난 뒤에야 기소인단이 선정한 증인 신문이 개시된다.

  그리고 증인이 바뀔 때마다 기소인단과 변호인단은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런 복잡한 절차 때문에 많은 증인이 등장하는 1차 공판은 심하면 열흘을 넘기기도 했다.

  물론 1차 공판이 끝난다고 재판이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다.

  며칠간의 휴정을 거친 뒤 이어지는 2차 공판은 1차 공판과 거의 구조가 비슷했다.

  즉, 재판 첫날은 사실상 큰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차석 변호인단이 많으면 연설만 듣다가 해가 저무는 경우도 허다했다.

  기소인단은 키케로 한 명이었지만, 베레스 측에는 돈으로 모집한 변호사들이 잔뜩 포진해 있었다.

  키케로는 여기에서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법무관 앞에 선 그의 입에서 호소력 있는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나왔다.

  "존경하는 재판관 글라브리오. 저는 이번 재판을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명백한 근거와 합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키케로의 말을 듣고 있던 호르텐시우스가 황급히 단상 앞으로 나섰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이번 재판은 반드시 기존 절차에 따라야 하오. 본 변호인은 베레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일은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겠소!"

  "딱히 베레스에게 불리한 방식을 제안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더 깔끔하고 밀도 있게 재판을 진행하자는 것이죠. 재판관, 제가 고안한 방식을 들어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지요. 다만 변호인의 말대로 한쪽에 유리한 방식의 재판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걸 미리 밝혀두겠습니다."

  글라브리오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베레스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공정한 남자였다.

  합리적으로 재판을 진행할 뿐, 누구의 편도 들 마음은 없다는 의사를 확실히 밝혔다.

  키케로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우선 저는 기소인단과 변호인단의 불필요한 연설은 모두 2차 공판으로 미뤘으면 합니다. 증인이 바뀔 때마다 하는 토론과 연설은 재판의 흐름을 끊을 뿐이니까요. 이래야 하는 이유는 이번에 제가 소환할 증인과 증거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절차대로 했다가는 한 달이 넘어가도 1차 공판이 끝나지 않을 우려가 있습니다."

  "그건 확실히 곤란하겠군요."

  "예. 그리고 변호인단과 달리 기소인단은 저 한 명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양측의 기나긴 연설을 계속 들을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건 변호인단에게도 좋은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2차 공판에서 우리의 연설을 처음 듣는다면 배심원들은 훨씬 더 신선하고 즐겁게 귀를 기울여 줄 테니까요."

  "확실히 베레스에게 걸린 혐의는 너무나 많습니다. 연설을 뒤로 미루는 게 각각의 혐의에 확실히 집중할 수 있겠군요. 변호인단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호르텐시우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키케로의 제안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치에 맞았다.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이건 자신에게도 나쁠 게 없는 제안이었다.

  기소인단은 키케로 한 명뿐이고 변호인단은 호르텐시우스를 제외하고도 상당수가 더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변호인단만이 거의 일방적으로 연설을 하게 된다. 자칫 잘못하면 배심원들에게 지루하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었다.

  어차피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건 2차 공판의 마지막 변론이다.

  여기에서 배심원들의 이목을 휘어잡을 수 있으면 이 방식은 호르텐시우스에게 더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거기에 배심원들이나 재판관은 불필요하게 재판이 길어지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딱히 변호인의 발언권을 제한하지도 않았는데 거절한다면 그의 이미지에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었다.

  "변호인에게 불리한 방식은 아닌 것 같군요. 그렇다면 이의 없습니다."

  "변호인단과 기소인단이 모두 동의했으니 이번 재판은 기소 측에서 제안한 방식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기소인, 가이우스의 베레스의 혐의를 설명해주시오."

  키케로는 크게 숨을 들이켜며 일부러 약간의 뜸을 들였다.

  마침내 배심원들의 이목이 충분히 집중되었다고 느낀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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