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 너는 선을 넘었다 (41/326)

  # 41 40. 너는 선을 넘었다 ──────────────── 키케로가 설명을 시작하려는 모습을 베레스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베레스가 해적에게 사주한 일을 모르는 퀸투스가 불안한 어조로 속삭였다.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거요? 호르텐시우스는 왜 키케로의 제안에 찬성한 거지?"

  "이쪽이 불리할 게 없다고 판단했을 거요. 키케로는 지금 그냥 발악하고 있을 뿐이지."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오? 만약 당신이 패소한다면 우리 가문도 상당한 손해를 입을 수 있소. 당신 역시 파멸할 거고. 이렇게 여유롭게 있어도 정말 괜찮은 거요?"

  "물론이오. 키케로 저놈은 제대로 된 증거를 수집했을 리가 없소. 끽해야 내가 시라쿠사이나 메사나에 뇌물을 받은 정도나 들고나오겠지."

  그런 증거 한 두개쯤이야 기나긴 1차 공판이 끝나면 배심원들의 머릿속에서 흐릿해질 것이다.

  거기에 호르텐시우스의 수려한 변론으로 2차 공판까지 끝나는 시점이면 더 볼 것도 없다.

  그때쯤 가면 누구도 증거나 증인 따위를 기억하지 못하리라.

  "한데 키케로는 자신이 내세울 증거와 증인이 엄청나게 많다고 하지 않았소?"

  "당연히 허세지. 물론 증인쯤이야 어디서 긁어모았을 수도 있겠지만, 증인만으로는 혐의가 인정되지 않으니 걱정할 것 없소."

  "흠, 당사자인 자네가 그렇게까지 확신을 한다면······."

  "재판에서 진다면 키케로는 앞으로 최소 5년은 로마에 발을 붙이지 못할 거요. 그러니 한바탕 소동이라도 일으켜서 자신의 인지도를 한껏 끌어올리려는 거겠지."

  평민 출신이 최고 귀족들을 상대로 소송을 건 이상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과거 카이사르도 재판에서 패소하고 냉각기간을 가지기 위해 그리스로 도피성 유학을 간 전적이 있었다.

  카이사르야 손꼽히는 명문 귀족 출신이니 3년 정도로 끝났지만, 키케로는 이야기가 다르다.

  평민 출신에 불과한 그는 5년은 고사하고 평생을 로마에 돌아오지 못하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이미 승리를 확신한 베레스는 자신의 클리엔테스를 총동원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재판이 끝나면 무리한 기소로 로마를 어지럽힌 키케로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끓을 것이다.

  '두고 보자.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내게 이빨을 드러낸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키케로를 쫓아내면 다음 타겟은 당연히 그를 사주한 폼페이우스다.

  폼페이우스 같은 거물을 실각시키는 것은 무리여도 자숙하라는 신호 정도는 충분히 줄 수 있다.

  그러면 폼페이우스를 눈에 가시로 여기는 원로원 의원들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터.

  원로원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아 차기 집정관 후보로 나서는 것도 결코 꿈이 아니다.

  한창 장밋빛 청사진을 꿈꾸고 있는 베레스의 상념을 깨뜨린 것은 막 시작된 키케로의 연설이었다.

  그는 베레스의 혐의를 설명하기에 앞서 배심원들에게 이 재판의 의의를 강조했다.

  "친애하는 배심원단 여러분. 원로원 의원들로만 이루어진 배심원단이 재판의 판결을 내리는 건 올해가 마지막입니다.

  내년부터는 이 권리를 기사계급과 평민들이 함께 누리게 됩니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요? 최근 부정행위가 적발되어 의원직을 박탈당한 자들은 전원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이들입니다. 부끄럽지만 우리 원로원은 스스로의 얼굴에 먹칠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

  키케로는 배심원단의 얼굴을 한 번 슥 둘러본 뒤, 다시 열변을 이어나갔다.

  "이 재판은 로마의 시민들만이 아니라 모든 동맹시와 속주의 주민들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선택에 따라 이 로마가 앞으로도 안정적인 속주 통치를 할 수 있는지가 결정됩니다.

  저는 원로원 의원들로만 이루어진 배심원단이 이번 재판의 판결을 맡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아직 우리가 스스로 자정작용을 해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기회를 얻었으니까요.

  속주민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릇된 판결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명백한 증거와 증인에 따라 공평한 판결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속주민들이 우리의 공정함에 감동하고 앞으로도 충성을 바칠 수 있도록, 로마 원로원의 명성이 다시 한번 지중해 전역을 뒤덮을 수 있도록! 배심원 여러분이 현명한 판결을 내려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키케로의 열정적인 연설이 끝난 이후 곧바로 호르텐시우스가 반론에 들어갔다.

  "우리들은 냉정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지역의 총독을 맡는다면 당연히 예상치 못한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집니다.

  행정관들 중 누군가가 일탈행위를 저지를 수도 있고, 속주 방위군이 부정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명백한 증거가 없이 사람들의 말만을 믿고 이걸 총독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이런 선례가 정착된다면 앞으로 누가 마음 놓고 최고책임자의 자리를 맡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기소인의 연설에서 한 가지 동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감정적인 면에 흔들리지 말고 객관적인 증거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

  양측의 주장이 모두 그럴듯하게 들렸기 때문인지 배심원들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하지만 계속 고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불필요한 연설은 모두 2차 공판 뒤로 미룬 덕분에 곧바로 증인신문이 개시된 까닭이다.

  키케로가 처음으로 소환한 증인은 시칠리아 남서쪽 해안가에 있는 아그리겐툼의 농부였다.

  농부의 얼굴을 확인한 베레스가 처음으로 동요를 보였다.

  보고대로라면 키케로는 아그리겐툼에 가지 않았어야 한다. 아니, 가지 못했어야 한다.

  아그리겐툼에서 5대째 같은 땅에서 농사를 지어왔다는 농부는 베레스를 쏘아보며 증언을 시작했다.

  "저희 가족은 2년 전 까지만 해도 대대로 물려받은 땅에서 밀을 재배해왔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총독의 밑에서 일한다는 행정관이 문서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제 땅이 팔렸다는 황당한 소리를 하더군요. 심지어 말도 안 될 정도로 헐값이었습니다. 제가 그럴 리 없다고 항의했지만, 그자는 증거랍시고 아버지의 유언장을 들이밀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맹세코 그런 유언장을 작성한 적이 없습니다.

  "

  키케로가 배심원단이 모두 볼 수 있도록 문서 한 장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이게 바로 문제의 그 유언장입니다. 참고로 이런 사례는 한 둘이 아닙니다. 제가 확인한 것만 해도 각 지역에서 서른 명이 넘습니다. 여기 다른 유언장들도 가지고 왔습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노른자위 땅을 헐값에, 그것도 하나같이 전부 총독에게 판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유언장을 조작한 것입니다!"

  "거짓말이오!"

  베레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가 키케로와 농부에게 삿대질해가며 입에서 침을 튀겼다.

  "전부 다 거짓말이오! 나는 유언장 조작 따위는 한 적이 없소!"

  "베레스, 소리를 낮추시오."

  재판장이 조곤조곤한 어조로 주의를 시켰다.

  "변호는 변호인에게 맡기시오. 그리고 할 말이 있거든 내가 물어봤을 때 대답을 하시오."

  베레스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는 호르텐시우스에게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런 건 다 거짓말이요. 자네라면 저런 거짓말 따위 전부 깔아뭉갤 수 있겠지? 내가 조작했단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하시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오."

  호르텐시우스는 증인에게 다가가 신문을 개시했다.

  "증인, 그 유언장이 조작된 거라 확신할 수 있소?"

  "물론입니다."

  "어째서? 확실한 물증이라도 있나? 단순히 그럴 리가 없다는 주장은 심증에 불과하네. 단순히 그런 정황만으로 사람을 처벌한다면 세상 사람의 절반 이상을 감옥으로 보낼 수 있을 거야."

  호르텐시우스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키케로가 문서 한 장을 더 제출했다.

  마르쿠스의 도움으로 손에 넣은 결정적인 증거 중 하나였다.

  "아그리겐툼에서 일하는 행정관에게 받은 유언장의 원본입니다. 파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지만, 일이 잘못되면 독박을 쓸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행정관이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이 원본에는 오히려 땅을 팔 생각은 없으니 누구에게도 넘겨줘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아들에게도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있군요."

  호르텐시우스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유언장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품이었다. 그가 베레스를 한 차례 돌아보며 이를 갈았다.

  정황상 베레스가 한 게 확실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죄를 인정할 수는 없었다.

  "배, 배심원 여러분! 유언장이 조작된 건 사실인 것 같지만 그게 전 총독이 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전 총독의 이름을 판 누군가의 비리일 가능성이 여전히 열려 있다는 겁니다. 총독의 명의를 사칭해 범죄를 일으킨 사례는 지금까지 숱하게 있었습니다."

  "행정관은 총독의 지시가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행정관이 자신의 비리를 총독에게 덮어씌우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변호인단은 일개 행정관이 총독의 이름을 팔아서 유언장을 조작하고, 그걸 또 덮어씌우려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토론 절차는 생략하기로 했으니 판단은 배심원 여러분에게 맡기겠습니다."

  키케로는 곧바로 다른 증인을 소환했다. 총독 관저가 있는 시라쿠사이에 거주하는 기사계급 남성이었다. 그는 밀을 운송하는 상인이었다.

  "베레스는 밀을 운송하는 사업에서 저를 배제하겠다는 협박을 하며 계속 대가를 요구해왔습니다. 게다가 한 번은 저녁 만찬에서 제 집에 있는 예술품과 금으로 만들어진 식기를 대놓고 갈취했습니다.

  대금 따위는 받지도 못했습니다. 올 때부터 작정하고 왔는지 커다란 포대를 가지고 와서 노예에게 전부 쓸어 담으라는 지시를 내리더군요. 베레스의 저택에 가면 제가 빼앗긴 물건들이 고스란히 비치되어 있을 겁니다.

  "

  "참고로 그 예술품과 금식기는 최근 떠오르는 장인인 폴리디아스가 제작한 것입니다. 여기 폴리디아스가 이 상인에게 자신의 작품을 팔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영수증도 있습니다."

  베레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배심원들과 호르텐시우스가 일제히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범죄의 악랄함은 둘째 치고, 너무나도 품위가 없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재판을 지켜보던 시민 한 명이 중얼거린 소리가 모두의 심경을 대변했다.

  "이건 뭐 거지새끼도 아니고······."

  호르텐시우스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키케로는 계속해서 증인들을 소환했다.

  법적으로 정한 이율을 넘어서는 고리대금업을 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던져졌다.

  호르텐시우스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첫날 공판은 그렇게 키케로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이 흐름은 둘째 날에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시라쿠사이에서 일하는 행정관이 제출한 문서입니다. 베레스와 도시가 짜고 온갖 탈법행위를 했다는 명명백백한 증거가 있습니다. 국고를 횡령하고, 그 수치를 조작해 로마에 보고했습니다. 여기 원본과 비교해보면 수치를 조작했다는 흔적이 너무나 뚜렷하게 남아있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호르텐시우스가 떨리는 손으로 문서와 서판을 받아들었다.

  그는 분노와 황당함으로 손을 떨었다. 베레스의 얼굴을 보면 쌍욕을 할 것만 같아서 뒤를 돌아보지도 못했다.

  사흘, 나흘, 그리고 이레가 넘어가도록 베레스가 저지른 횡령의 증거는 끝도 없이 쏟아졌다.

  결국 단순한 증거와 증인의 나열만으로도 열흘이 훌쩍 넘어버렸다.

  베레스는 8월의 이두스(13일)가 넘어간 뒤로는 분노한 군중들에게 맞아 죽지 않도록 노예들 틈에 섞여 자리를 떠야만 했다.

  베레스가 저지른 범죄 중 가장 심각한 행위는 1차 공판의 마지막 날에 집중적으로 밝혀졌다.

  특히 해적들을 시켜 신전의 예술품과 조각상을 약탈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의 반응이 걸작이었다.

  시민과 재판관, 배심원은 물론 호르텐시우스마저 입을 떡 벌린 채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 이 물건을 로마로 옮겨오기 위해 비밀리에 배를 건조했는데 그 과정이 가관입니다. 불법으로 건조했으니 임금을 줄 수 없다는 이유로 장인들에게 아무런 보수도 지급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증인으로 나온 장인은 베레스가 어떻게 불법적으로 배를 건조했는지 그 과정을 상세히 증언했다.

  호르텐시우스는 이제 변호를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그냥 증인들의 말을 듣기만 했다.

  베레스는 해적들이 제대로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을 떨었다.

  그의 마음속을 가득 채운 건 분노가 아닌 두려움이었다.

  해적들은 분명 키케로의 토가 자락을 잘라 증거로 보냈다고 들었다. 즉, 그들이 키케로와 접촉한 것까지는 분명한 사실이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자신을 배신했다면 그들이 어떤 이유로 키케로의 편에 섰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가 키케로를 납치하라고 명령한 게 전부 들통났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이내 현실이 되었다.

  키케로가 마지막 증인으로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람을 소환한 것이다.

  "제가 증언을 부탁할 마지막 증인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입니다! 현 집정관의 장남인 그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을 말해줄 것입니다."

  마르쿠스가 걸어 나오자 배심원단과 베레스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였다.

  옵티마테스 파벌의 영수격인 크라수스가의 장남이 어째서 키케로의 편에 섰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 의문은 이어지는 마르쿠스의 증언에 바로 해소됐다.

  "저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이번 사건을 객관적으로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베레스의 비리가 사실이라면 이후 속주 통치를 하는데 엄청난 걸림돌이 될 테니까요.

  베레스가 3년이나 시칠리아에서 총독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크릭수스가 일으킨 반란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니 로마 시민들이 반란군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동안 총독이란 자가 속주에서 수탈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면 이건 로마 전체의 수치입니다. 귀족의 명예가 걸린 일입니다!

  "

  마르쿠스의 비장한 연설에 배심원들도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명문 귀족 출신인 그의 말은 다른 증인들과는 무게감이 달랐다.

  "하지만 이 모든 사안이 베레스를 탄핵하기 위한 조작일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키케로 의원님의 옆에서 조사를 지켜보았습니다.

  혹시 증인이나 증거를 조작하지는 않는지, 무리한 수사로 없는 죄를 만들어내지는 않는지. 공정하게 모든 과정을 관찰했다고 자신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일체의 조작도, 부정도 없었습니다. 베레스의 모든 혐의는 앞선 증거와 증인들이 말했듯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곳에 선 이유는 아직도 한 가지, 최악의 범죄 행위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배심원과 재판을 지켜보는 시민들의 눈에 의문이 서렸다.

  지금까지 나온 증거만 해도 최악이라고 하기 부족하지 않은데 이 이상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좌중을 한 번 둘러본 마르쿠스가 베레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마지막 일격이 될 한 수를 던졌다.

  "베레스는 지금까지 밝혀진 이 모든 증거를 은닉하기 위해 갖은 수를 썼습니다. 하지만 기소인을 저지할 방법을 찾지 못한 그는 결국 자신이 부리는 해적들에게 의뢰했습니다. 지금 시칠리아를 헤집고 다니는 기소인이 더이상 증거를 모으지 못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다행히 그 자리에 저와 제 호위들이 있었기 때문에 기소인은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배심원 가운데 한 명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로마 원로원 의원을 습격하도록 사주한다는 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원로원은 로마를 상징하는 대표와도 같다. 그런 그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은 곧, 로마에게 칼을 들이미는 것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마르쿠스는 경악한 배심원들에게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지금까지 베레스가 저지른 죄는 들키게 되면 파멸이 확정적입니다. 파멸을 피하려고 기소인이 증거를 수집 못 하도록 수를 쓴 겁니다. 당장 내년까지만 재판을 끈다면 가문과 인맥의 힘으로 재판 자체를 무마시킬 수 있었을 테니까요."

  "즈, 증거가 있소?"

  "당연합니다. 베레스의 사주를 받은 해적을 생포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받은 이 문서를 보시면 베레스에게 명령을 받은 과정이 아주 상세히 적혀 있습니다."

  마르쿠스는 일부러 베레스가 자신들을 납치하려 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물론 원로원 의원을 납치하려고 한 것도 다시없을 중죄지만, 납치보다는 살인이 더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배심원들이나 시민들은 베레스가 키케로를 살인 교사했다고 받아들이고 충격에 빠졌다.

  거기에 해적들에게서 받은 증거까지 더해지니 베레스로서는 부정할 방도도 없었다.

  시민들은 물론 귀족도 크라수스의 안목이 옳았다고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귀족이 평민에게 끌려 내려오는 것보다는 귀족이 귀족을 단죄하는 게 훨씬 모양새가 좋다.

  배심원들은 사실상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재판관 글라브리오가 싸늘한 시선으로 베레스를 바라보며 한마디를 던졌다.

  "원로원 의원을 살해하려고 한 게 사실이라면 이는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요. 할 말이 있소?"

  완전히 궁지에 몰린 베레스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퀸투스는 물론 변호인인 호르텐시우스조차 그의 눈길을 슬쩍 피했다.

  시민들은 살인범을 단죄하라며 아우성이었다.

  정신이 반쯤 나간 베레스는 발악적으로 소리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나는 살인 지시 따위는 하지 않았어! 그냥 납치만, 납치만 한 뒤 풀어주라고 했다고! 나는······."

  되는 대로 말을 내뱉던 베레스는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황급히 입을 막았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스스로 죄를 자백한 꼴이 된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온몸을 찔러왔다.

  착란 상태에 빠진 베레스를 향해 키케로가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가이우스 베레스여, 그대의 추악한 범죄와 음모는 만천하에 드러났다! 법무관과 원로원, 모든 민중들이 이제 알게 되었노라.

  그대가 정녕 로마 귀족이라면, 그 안에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있다면 더는 추하게 부정하지 말고 떳떳하게 죄를 인정하라.

  베레스여, 그대는 로마 귀족으로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버렸다. 그 선은 결국 파멸에 이르는 죽음의 길일지니. 불멸하는 신들과 위대한 선조들의 영혼이 그대에게 마땅한 벌을 내리기를 원하고 계실 것이다. 위대한 로마의 수호신 유피테르와 법을 관장하는 미네르바시여! 이 끔찍하고 추악한 범죄의 민낯을 백일하에 드러나게 해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

  열정적으로 하늘을 향해 부르짖은 키케로는 이내 재판관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베레스는 죄의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일말의 재산이라도 지키기 위해 오늘이라도 야반도주를 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재판 결과가 나오는 날까지 그를 저택에 구금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명백한 도주의 우려가 있는 피고는 구속을 할 수 있다는 근거가 있습니다."

  이는 마르쿠스가 귀띔해준 것이었다. 역사대로라면 베레스는 오늘 밤중이라도 야반도주를 할 게 틀림없다.

  그러면 로마에 남아있는 재산은 몰수당하더라도 각지에 숨겨놓은 재산은 회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쿠스는 그 정도의 자비조차 허락할 마음이 없었다.

  베레스에게는 자신을 가리키는 키케로의 손가락이 마치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의 검처럼 보였다.

  정의의 여신의 왼손에 들려있다는 저울의 추가 마침내 한쪽으로 기울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나는 귀족이자 전직 법무관이다! 하찮은 범죄자처럼 자택 구금을 한다고?"

  광인처럼 소리를 쳐보았으나 베레스가 빠져나갈 구멍은 어디에도 없다.

  글라브리오가 눈을 감으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소인의 주장이 합당한바, 베레스는 2차 공판의 결과가 나오는 날까지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저택의 밖을 나올 수 없다. 저택의 주변은 누구도 허락 없이 출입할 수 없도록 감시를 세울 것이다."

  "안 돼! 그럴 수 없어!"

  베레스의 눈이 광기로 물들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정말로 끝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를 감행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미 법정 주변은 수많은 인파로 쉽게 몸을 뺄 수조차 없었다.

  "어엇, 저놈이 도망간다!"

  "잡아!"

  분노에 찬 군중들이 즉각 베레스의 앞을 가로막고 그를 포박했다.

  버둥거리는 베레스의 몸짓이 처참한 최후를 예상하게 했다.

  "안 돼! 나는···나는 전직 총독이란 말이다! 이 미천한 새끼들아, 당장 놓지 못하겠느냐! 나는 전직 총독이라고오오오!"

  시민들에게 질질 끌려온 베레스는 병사들에게 인도되었다.

  재판관의 엄숙한 목소리가 발버둥 치는 베레스의 위를 덮었다.

  "현장 도주를 감행했으니 이제 볼 것도 없군. 끌고 가서 판결이 날 때까지 구금해라.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도록 방비를 철저히 하도록."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