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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해적소탕 (48/326)

  # 48 47. 해적소탕 ──────────────── 폼페이우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전략을 쭉 설명했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해적들을 뿌리 뽑을 구상이 정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대략적인 설명이 끝난 막사 안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군단장 한 명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저기···죄송합니다,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정말로 가능한 전략입니까? 이론적으로는 될 것 같긴 한데 뭐라고 해야 할지······."

  "아아, 무슨 말인지 알았네. 하지만 걱정 말게. 방금 전에는 대략적인 개요만 말했을 뿐, 구체적인 실행방법도 전부 계획해 놓았으니까."

  폼페이우스는 탁자 위에 있는 넓은 지도에 거침없이 선을 그었다.

  지역을 크게 13 구역으로 분할한 그는 설명을 계속했다.

  "우리가 제압할 해역을 이렇게 13개로 나누었네. 작전 기간을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눠서 전기는 지중해의 서부 지역을, 후기는 남부와 동부를 집중적으로 공략하기로 하지. 지금 단계에서 질문 있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제 4군단장이 손을 들었다.

  "해역을 구분한 기준과 작전 기간을 나눈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목격된 해적들의 경로를 토대로 놈들의 기지가 있을 만한 지역을 추려냈고, 그것을 기준으로 해역을 나누었네. 그리고 해적들의 본거지인 킬리키아와 멀리 떨어진 서부는 아무래도 놈들의 세력이 빈약하지. 약한 쪽부터 천천히 조여 들어가는 게 효율적이라 판단했네."

  폼페이우스의 대답은 한순간도 막힘이 없었다.

  사실 군단의 총사령관이 군단장들에게 일일이 작전을 설명해야 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폼페이우스가 굳이 이런 수고를 감수하는 건 이번 작전은 전역이 지나치게 넓기 때문이다.

  지중해 서부로 한정 짓는다고 해도 히스파니아부터 북아프리카, 그리고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포함한다.

  군단장들이 폼페이우스의 손발이 되어 움직여줘야 효율적인 작전 수행이 가능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군단장들이 폼페이우스의 구상을 확실히 이해해야 한다.

  "한 가지 더 명심해야 할 사항은 눈앞의 해적들을 소탕하는데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일세. 이번 작전의 목표는 해적들의 뿌리를 뽑는 거지 고작 해적 몇 놈들을 처형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도록."

  "예? 하지만 소탕을 하려면 결국 놈들과 싸워서 격퇴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작전에서 해적 놈들과 싸울 일은 없네."

  "예?"

  소탕 작전을 하는데 싸울 필요가 없다니 궤변이 아닌가.

  만약 말을 꺼낸 사람이 폼페이우스가 아니었다면 모두가 조소를 흘렸을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군단장들 모두가 그의 구상을 이해할 때까지 차분하게 설명을 계속했다.

  "해적이 상대니 해전을 벌여 소탕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버리도록. 지중해 전역에 퍼져 있는 해적들을 상대로 일일이 요격전을 펼친다? 놈들을 모두 쓸어버리는 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하나."

  "아아, 과연 그렇군요."

  "······?"

  소수의 군단장은 폼페이우스의 뜻을 이해했으나, 여전히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결국 군단장들과 백인대장이 폼페이우스의 전략을 이해하고 체득하는 데는 하루가 넘게 걸렸다.

  폼페이우스가 군단장들에게 상황을 가정한 질문을 던지고, 적절한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단장들이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전략을 이해했다는 확신이 들자 폼페이우스는 명령서를 나눠주었다.

  "각 해역을 책임지는 군단장들은 이 명령서대로 행동하도록. 다시 강조하는데 절대로 개인적인 판단을 우선하면 안 되네. 철저하게 내 명령에 따르고, 돌발 상황이 일어났을 때만 임기응변을 발휘하도록 하게. 그리고 그럴 때가 오더라도 철저하게 내가 지시한 방침대로 따라야 하네."

  군단장들은 자신들에게 하달된 명령서를 읽어보고 연신 감탄사를 흘렸다.

  폼페이우스의 명령서는 놀라울 정도로 세세한 부분까지 지시하고 있었다.

  조금 과장을 섞자면 군단장들의 자리에 아무나 앉혀놔도 작전 수행이 가능할 것 같았다.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판단한 폼페이우스는 행동을 개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군단을 집결시키고 출진을 알리는 연설을 시작했다.

  원래 폼페이우스는 그리 좋은 웅변가는 되지 못했다.

  민중을 상대로 한 그의 연설 실력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군단의 사기를 끌어 올리는 재능만큼은 천성적으로 타고났다.

  12만에 달하는 대군에게 총지휘관의 목소리가 전부 들릴 리는 없다.

  그래서 폼페이우스는 최대한 많은 병사들이 자신의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말에 탄 채 군단을 가로지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들어라, 용맹한 로마의 군단이여! 그대들은 영광과 부를 거머쥘 수 있는 최고의 행운을 얻었다. 지금까지 해적들이 끼친 피해를 상기해 보라.

  그대들의 가족과 이웃, 더 나아가 로마와 지중해 세계 전체가 저 간악한 해적들에게 시달려 왔다. 그들이 이제 우리의 발 앞에 짓밟힐 것이다. 그대들은 로마와 지중해의 구원자가 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업적을 칭송하고 찬양할지 상상해 보라.

  "

  폼페이우스의 연설을 듣는 군단병들의 얼굴이 점차 기대와 환희로 물들었다.

  이 자리에 있는 병사들 중 해적들이 끼친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해적들을 소탕했을 때 그들이 얻게 될 영예가 자연스레 상상이 됐다.

  "물론 해전에는 익숙하지 않아 불안한 마음을 품는 장병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이 전쟁, 아니 나는 이 작전을 전쟁이라 표현하지 않겠다. 이건 우리 로마가 해적들에게 내리는 징벌이다! 나의 명령에 충실히 따라라. 그러면 그대들은 해적들이 마치 벌레처럼 우리의 발아래에 짓밟히는 풍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군신 마르스의 축복이 우리와 함께한다!

  "

  "우오오! 임페라토르!"

  아직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병사들은 임페라토르를 연호하며 발을 쾅쾅 굴렀다.

  지휘관의 자신감과 확신은 자연스레 병사들에게도 전해지는 법이다.

  사기충천한 군단은 대열을 갖춰 군함에 올랐다.

  마르쿠스는 폼페이우스와 함께 전선을 총괄하는 기함에 탑승했다.

  "대단하네."

  갑판의 위쪽에 올라오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시칠리아로 갈 때 탑승했던 배와는 규모부터가 달랐다.

  500척이 넘는 대선단을 이끌 군함이라서 괜히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군기가 꽉 잡힌 병사들까지 탑승해 있으니 존재감만으로도 압도적인 힘이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선수에서 당당한 모습으로 장병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이내 커다란 돛이 내려오고 바람을 받아 부풀어 오르자 거대한 기함이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노에 맞춰서, 해수면을 가르고 나아가는 군함들이 장쾌한 물결을 일으켰다.

  수백 척이 넘는 전선이 내륙을 등지는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장관이었다.

  마르쿠스는 여전히 여기저기 지시를 내리고 있는 폼페이우스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 기회에 배울 수 있는 건 전부 배워가야지.'

  이번 전쟁에 참여한 주된 이유는 약속된 영광과 군공을 쌓기 위해서였다.

  거기에 폼페이우스의 천재적인 전략수립 능력을 조금이라도 배울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었다.

  갈리아 전기를 전부 읽은 마르쿠스는 카이사르의 방식은 별로 참고가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카이사르의 전투 방식은 총사령관의 임기응변과 야전센스에 의존하는 부분이 너무 컸다.

  즉, 지휘관이 카이사르가 아니면 흉내 낼 수 없는 전투가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는 다른 유형의 장수였다.

  전쟁을 시작하기 전부터 군단장들에게 철저히 계획을 주입시킨 게 그 증거다.

  그는 사전에 커다란 그림을 그리고 그 흐름대로 전쟁을 이끌어가는 걸 선호했다.

  이런 부분은 마르쿠스도 충분히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훗날 전쟁을 한다면 세세한 전술은 우수한 부하에게 일임할 계획이긴 했다.

  꼭 카이사르처럼 모든 걸 혼자 다 해야 정점에 설 수 있는 건 아니다.

  훗날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되는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와는 달리 군사적 재능이 일천했다.

  그래도 그는 적재적소에 우수한 부하들을 배치해 로마의 모든 권력을 틀어쥐는데 성공했다.

  지도자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이런 방식이 더 이상적일지도 모른다.

  마르쿠스는 군단 지휘를 맡을 우수한 인력은 이미 후보 물색을 끝마친 상태였다.

  다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성장할 때까지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일단 최선을 다해 배워두자. 가장 중요한 국면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직 10년도 더 남은 일이긴 하지만 이제 서서히 운명의 분기점이 다가오고 있다.

  그 전까지는 모든 게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마르쿠스의 시선은 눈앞의 지중해를 넘어 저 먼 동방까지 뻗어나가고 있었다.

  ※※※※

  북아프리카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해적들은 최근 매일매일 행복해 미칠 지경이었다.

  예전처럼 로마의 눈치를 보며 해적질을 하는 나날로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배를 타고 나가서 지나가는 아무 상선이나 덮치면 그게 곧 그들의 재산이 됐다.

  우수한 항해사와 튼튼한 배가 갖춰지니 겨울철에도 마음껏 항해를 하며 약탈을 즐겼다.

  오늘날 리비아의 동부 지역인 키레나이카 속주는 이미 해적 소굴이나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동쪽으로 가면 바로 물산이 풍부한 이집트를 털 수 있고, 북쪽으로 가면 시칠리아와 히스파니아가 나온다.

  해적질을 하기에 이보다 완벽한 장소는 없었다.

  처음에만 해도 수십에 불과했던 해적은 어느덧 수백을 훌쩍 넘어 천 단위가 넘어갔다.

  키레나이카에 있는 속주 방어군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버린 것이다.

  "좋아, 오늘은 동쪽으로 가서 이집트 놈들을 손봐주자. 곡물선은 이제 호위 선단이 붙어 있을 테니 방비가 약한 다른 수송선을 털자고."

  "두목, 기왕이면 포로를 많이 잡죠. 요새 하도 서쪽으로만 다녔더니 콧대 높은 이집트 여자들을 품어본 지도 꽤 오래됐다고요. 노예로 팔면 수입도 짭짤하니 저희도 좀 즐기게 해주세요."

  "오냐, 그럼 오늘은 노예들을 잔뜩 건져보자꾸나."

  "오오오!"

  지금의 나날이 계속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해적들은 얼굴에 한 점의 구김살도 없었다.

  제법 규모가 있는 해적선을 이끄는 두목 히폴로스도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스 핏줄을 이어받은 그는 본래 폰투스 왕국 군의 병사였다.

  폰투스의 군대가 루쿨루스에게 박살이 난 뒤 킬리키아까지 흘러 들어가 해적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변변찮았지만, 미트리다테스의 지원을 받은 뒤로는 모든 게 잘 풀렸다.

  경쟁이 심한 동쪽에서 벗어나 일찌감치 서쪽으로 온 게 신의 한 수였다.

  요새는 해적질도 경쟁자가 많아 동쪽은 수입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기 때문이다.

  창밖으로 보니 오늘도 쾌청했다. 약탈하기 딱 좋은 날씨다.

  그 순간 밑에서 들린 소란에 히폴로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뭐냐, 무슨 소란이야?"

  "두목!"

  허겁지겁 위로 올라온 부하 한 명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로마 놈들입니다! 로마 놈들이 쳐들어왔습니다!"

  히폴로스가 등 뒤에 걸친 도끼자루를 꽉 잡았다.

  "속주 방어군이냐? 저번에 한 번 혼쭐을 내줬는데도 정신을 못 차렸나 보군."

  "아닙니다. 바다 쪽에서 군함이 오고 있습니다. 아마 로마에서 파견한 정규 토벌군 같습니다!"

  "뭣이? 놈들이 드디어 움직인 것인가?"

  히폴로스는 깜짝 놀라긴 했어도 절망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닥칠 일이라 생각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완벽한 퇴각 계획도 세워두었다.

  그는 군대에 있었던 지휘관답게 능숙하게 부하들을 지휘했다.

  "모두 식량과 물과 보물을 챙겨 승선해라. 너무 무겁고 큰 물건들은 싣지 말고 그냥 포기한다."

  "예!"

  "어차피 놈들은 우리 배를 따라잡을 수 없어.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후퇴하자."

  미트리다테스의 지원으로 마련한 해적선은 속도를 중시한 일종의 쾌속선이었다.

  거기에 무거운 물건은 거의 탑재하지 않았으니 로마의 군선보다도 더 재빠르게 움직이는 게 가능했다.

  실제로 이전에도 재수 없게 바다에서 로마의 군선과 마주쳤지만 무사히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히폴로스와 그의 부하들은 이번에도 그럴 거라 믿었고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해적들의 쾌속선은 로마의 군선을 따돌리고 무사히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로마 군선이 보이지 않자 히폴로스가 고개를 젖히고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굼벵이 같은 로마 놈들. 어딜 감히 우리를 잡으려고."

  "두목, 이대로 약탈에 나설까요?"

  "흠, 그래도 괜찮겠군. 하지만 일단 거점으로 삼을 만한 곳을 물색해 둬야 한다. 물과 식량을 얻을 수 있는 곳을 찾으면 곧바로 다시 약탈을 재개하자."

  "역시 두목! 정확한 상황판단이십니다!"

  히폴로스는 지도를 펼치고 나아갈 방향을 신중하게 탐색했다.

  어차피 이 근방의 항구는 전부 파악해놓은 상태다.

  보급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지천에 널려 있었다.

  일단 서쪽의 트리폴리타니아의 항구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목적지로 잡았던 항구에는 이미 로마 군단이 정박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방향을 튼 해적선은 다시 키레나이카로 돌아와 벵가지 동북쪽에 있는 항구로 향했다.

  여기에서부터 히폴로스는 뭔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이 가려고 한 항구마다 로마 군선이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던 까닭이다.

  "젠장, 약삭빠른 놈들 같으니."

  히폴로스는 북아프리카 해안가에 있는 거의 모든 항구를 다 둘러보았으나, 모든 항구가 로마군의 손에 떨어진 뒤였다.

  "우릴 직접 소탕하는 게 아니라 항구부터 제압하겠다 이건가? 그런다고 방법이 없을 줄 알고?"

  항구에서 보급받지 못하면 인근 지역을 약탈해서 물과 식량을 챙기면 그만이다.

  해적들은 방비가 허술한 마을을 덮쳐 필요한 물자를 조달했다.

  그리고 습격 보고를 받고 달려온 로마 군선에 덜미를 잡히기 전에 안전하게 몸을 뺐다.

  히폴로스는 언제나 한발 늦게 달려오는 로마 군단을 비웃으며 승리감에 취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같은 행동을 반복하자 점점 이동 경로가 로마군에 노출되기 시작했다.

  약탈의 빈도수를 줄이면 되는 문제였지만, 보급을 받을 수가 없으니 그것도 불가능했다.

  배의 무게를 가볍게 하려고 짐을 최소한도로 적재한 판이라 식량도 금방 바닥을 보였다.

  최대한 조심을 한다고 해도 점점 구석으로 몰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결국, 한 달이 채 되지 못해 히폴로스는 거의 떠밀리듯이 사르데냐 인근에 당도했다.

  이동 경로가 훤히 노출된 상태라 여기 외에는 갈 수 있는 장소가 없었다.

  "일단 여기서 한숨 돌리고 북쪽으로 가자. 거기서 로마 놈들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면 되겠지."

  히폴로스는 로마군을 무사히 따돌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안가에 정박해 있는 수십 척이 넘어가는 해적선을 본 순간.

  그는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에 몸을 흠칫 떨었다.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해적 한 명이 태평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우리 말고도 여기까지 온 해적들이 많나 보네요?"

  "···이런 말도 안 되는······."

  히폴로스는 미친 사람처럼 선수로 달려가 해안가에 있는 해적선들을 살펴보았다.

  그들이 있는 해안가에만 저렇게나 많은 배가 몰려 있다면 다른 곳을 둘러보지 않아도 상황은 명백했다.

  못해도 수백 척에 가까운 해적선이 사르데냐까지 밀려왔다고밖에 볼 수 없다.

  자신들은 완벽하게 몰이 사냥을 당한 것이다.

  "아니···그게 가능한가? 나는 언제나처럼 최선의 경로로 로마군을 피해왔을 뿐인데?"

  히폴로스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몇 번이고 해도를 확인했다.

  자신들만 유인을 당했다면 그건 어떻게든 이해해볼 수 있다.

  그런데 지중해 서부에 있는 해적들을 동시에 한곳으로 몰아넣는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도망을 온 게 아니라···끌려 들어온 거였나."

  창백하게 질린 히폴로스가 당장 배를 돌려 도망가자고 말하려던 찰나, 경악한 부하의 고함소리가 먼저 귓전을 때렸다.

  "로, 로마 놈들입니다! 로마 놈들의 군선이······!"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로마의 군함들이 해안가를 중심으로 부채꼴로 퍼져 있었다.

  얼핏 봐도 100척이 훌쩍 넘어가는 대군단이었다.

  도망을 칠 틈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히폴로스로서는 알 길이 없었으나 지중해의 다른 지역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지중해 서부 전역에 퍼져 있는 해적들은 빗자루에 쓸려나간 먼지처럼 커다란 덩어리로 뭉쳐졌다.

  그리고 그 먼지들은 도망칠 구석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로마의 대선단에 포위되었다.

  1달이 넘게 쫓기고 도망 온 해적들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당연히 반항할 만한 기력이 있을 리 없다.

  "대, 대장! 어떻게 하죠?"

  "······."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해적을 이끌어온 히폴로스는 그저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압도적으로 밀려오는 로마라는 악몽이 해적들을 모조리 빨아들였다.

  히폴로스와 그가 이끄는 해적들이 가장 먼저 그 안에 집어삼켜졌다.

  폼페이우스의 선언대로 이건 싸움이 아니었다.

  로마군은 철저하게 자신들을 괴롭혀온 해적들을 단죄했다.

  촤악!

  로마군의 자비 없는 칼날에 날아간 히폴로스의 머리가 뱃머리에 떨어져 내렸다.

  이제 그 무엇도 보지 못하는 눈동자에 무참하게 쓸려나가는 해적들의 말로가 덩그러니 담겼다.

  지중해 서쪽을 집요하게 괴롭히던 해적들은 이로써 완전히 제압되었다.

  직접 작전을 실행한 군단장들마저 자신들이 한 일을 믿을 수 없었다.

  티레니아해에서 해적을 격멸한 군단장 한 명이 감탄과 허탈함이 공존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리도 빨리···이렇게나 간단하게······."

  지중해 서부에서 나포한 해적선은 120척, 침몰시킨 배는 무려 400척에 달했다.

  해적들의 거점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1만에 가까운 해적이 포로가 되거나 사형을 당했다.

  이렇게 폼페이우스의 그림자가 지중해 서부를 완벽히 뒤덮을 때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40일이었다.

  이제 남은 건 남부와 동부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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