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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 여기까지가 무료연재분이었습니다. (52/326)

  < 51.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 여기까지가 무료연재분이었습니다. >

  회전에서 참패한 미트리다테스에게 후퇴하는 것 외의 선택지는 없었다.

  "폐하, 한시라도 빨리 아르메니아로 피하셔야 합니다. 로마 놈들의 속도가 심상치 않습니다."

  "알고 있다!"

  미트리다테스는 루쿨루스에게 패배했을 때와 같은 전략을 사용할 예정이었다.

  폰투스 동쪽 지대는 험준한 산악지대다. 대규모의 로마군단은 이곳을 통과하길 원하지 않았다.

  루쿨루스는 부하들의 압박 때문에 산악지대를 피해 멀리 돌아갔다가 시간을 너무 많이 낭비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의 실패를 이미 전부 조사한 뒤였다.

  그는 회전에 부르지 않은 1개 군단을 후방으로 돌려 미트리다테스의 퇴로를 차단했다.

  동쪽을 가로지르는 길이 막히자 미트리다테스 역시 먼 길을 돌아 아르메니아로 갈 수밖에 없었다.

  점점 전쟁의 양상이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라졌다.

  너무 많은 패배를 겪은지라 병력을 소집하기도 쉽지 않았다.

  싸웠다 하면 지는 왕에게 누가 충성을 바치겠는가.

  밑천이 서서히 바닥나고 있다는 뜻이었다.

  "허허허······."

  어렵게 소집했던 3만 3천의 군대 중 이제 5천도 남지 않았다.

  심지어 기병 중 일부는 막대한 보수를 준다는 말도 듣지 않고 도망가 버렸다.

  기병의 탈주.

  상상이나 했던 상황이던가.

  퇴각을 명하는 미트리다테스는 이 상황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희망은 해적들인가···놈들이 보급선만 끊어준다면 아직 가능성은 있다."

  "하, 하지만 폐하···해적들은 폼페이우스에게 소탕당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 그건 헛소문이다."

  지중해 전역의 해적이 89일 만에 격퇴당했다는 소문은 미트리다테스의 귀에도 당연히 들어왔다..

  물론 그는 믿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중해 전역을 배를 타고 돌아다니기만 해도 89일은 너끈히 잡아먹는다.

  그런데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숨어다니는 해적들을 전멸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로마 놈들이 우릴 교란하려고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린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해적들이 우리에게 보내는 연락만을 철저하게 끊고 있는 것이겠지."

  "과연···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래. 그래서 이미 킬리키아 쪽에 은밀히 연락병을 보내 놓았다. 그쪽에서 어떤 대답을 가지고 오느냐에 따라 이후의 전략을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예상보다 더 냉혹했다.

  우회하고 있던 미트리다테스에게 전령이 보낸 급보가 도착했다.

  "폐, 폐하! 킬리키아의 해적들은 이미 뿌리가 뽑혔다고 합니다. 심지어 해적들의 대다수는 폼페이우스에게 땅을 받아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뭐라!"

  머리를 둔기로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이 밀려왔다.

  "말도 안 돼···정말로 89일 만에 지중해 전역의 해적들을 격퇴했다고? 어떻게?"

  미트리다테스의 상식과 관념이 현 상황을 따라가지 못했다.

  전투에서 졌다는 사실조차 현실감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건 무언가가 이상했다. 신들이 뭔가 착각한 것이다.

  전황이 이렇게 돌아가서는 안 된다.

  분명히 어딘가에서 정보가 왜곡됐거나 착오가 생긴 것이다.

  "폐하! 퇴각 속도를 올리셔야 합니다. 로마군에게 언제 따라잡힐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아르메니아로···가자."

  미트리다테스의 입에서 무기력한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폰투스 군은 무작정 길을 서둘렀다.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병사 몇몇이 또다시 탈주했다.

  미트리다테스는 그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정면으로 싸워봐야 패배할 뿐인 병사들이다.

  탈영을 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저 이 악몽이 하루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만이 간절했다.

  폰투스군의 뒤를 쫓는 로마군은 서두르지 않았다.

  여유롭게 군단을 재정비하고 공을 세운 병사들을 치하하기까지 했다.

  적의 중앙을 허무는데 큰 공을 세우고 일곱이나 되는 전우의 목숨을 구한 스파르타쿠스는 시민관을 받았다.

  시민관은 떡갈나무 잎이 달린 가지를 엮어 만든 관의 일종으로 로마군이 받을 수 있는 두 번째로 명예로운 훈장이었다.

  마르쿠스는 스파르타쿠스가 이런 훈장을 받은 것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은을 섞어 만든 보존용 관을 제작해 두라고 로마에 서신을 띄울 정도였다.

  로마군은 이렇게 훈장 수여와 부상자 수습까지 전부 끝난 뒤에 움직임을 재개했다.

  폼페이우스는 미트리다테스를 물리적으로 죽이기는 쉽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 드넓은 동방에서 작정하고 도망 다니는 군주를 찾아내 포로로 잡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폼페이우스는 처음부터 미트리다테스를 사로잡을 마음이 없었다.

  만약 가능하다면 좋고, 불가능해도 그만일 뿐이다.

  대신 물리적이 아니라 외교적으로 미트리다테스에게 사망선고를 내리기로 했다.

  미트리다테스가 패배해도 계속해서 부활하는 건 아르메니아와 동맹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연결고리만 끊어놓으면 미트리다테스는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다.

  아르메니아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동쪽에 버티고 있는 파르티아를 움직이는 게 상책이다.

  폼페이우스는 폰투스에 진군하는 시기에 이미 파르티아로 사절을 보냈다.

  사실 이 점은 전임자인 루쿨루스도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 역시 아르메니아를 몰아칠 때 파르티아에게 동맹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다.

  파르티아는 로마와 폰투스의 전쟁에 끼어들 마음이 없었다.

  내실을 다지고 있던 당시의 파르티아로서는 누가 이기든 자신과 상관없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고작 3만의 군대만을 거느리고 있던 루쿨루스는 동맹 상대로 영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보다 훨씬 유리했다.

  그는 6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있었고, 지중해 전역의 해적을 쓸어버린 실적이 있었다.

  3달도 걸리지 않아 지중해를 평정했다는 믿기지 않는 보고는 파르티아의 왕실까지 전해졌다.

  파르티아의 왕인 프라아테스 3세는 진지하게 동맹을 검토했다.

  폼페이우스는 파르티아에게 부담이 될 만한 것은 하나도 요구하지 않았다.

  "로마와 원로원, 시민들은 프라아테스3세가 다스리는 파르티아가 메소포타미아의 지배자라는 사실과 그 정통성을 인정한다. 파르티아 역시 로마가 다스리는 영토의 지배권을 인정한다. 파르티아와 로마의 경계선은 유프라테스 강으로 삼고, 두 국가는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

  루쿨루스가 제의했던 것과 기본 골자는 같았으나 파르티아가 받아들이는 느낌은 달랐다.

  폼페이우스는 파르티아에게 아르메니아를 견제해 달라는 말 따위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냥 동맹만 맺고 존재감만 과시해주면 그걸로 끝이다.

  마침 폰투스 역시 파르티아에게 동맹을 제의한 터라 둘의 제안은 자연스럽게 비교 됐다.

  미트리다테스는 파르티아에게 자신들과 동맹을 맺고 로마와 적극적으로 싸우자고 설득했다.

  프라아테스 3세의 입장에서 폰투스와 로마 중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양측을 신중하게 저울에 매달아 비교해본 파르티아는 곧바로 결론을 냈다.

  이미 반쯤은 몰락한 헬레니즘 왕조 편을 들어 로마와 척을 질 이유가 없었다.

  파르티아가 현재 권력다툼으로 내부가 어수선하다는 점도 한몫을 했다.

  군대를 움직여달라는 쪽과 가만히 있기만 해달라는 쪽 중 어디가 더 끌릴지는 뻔했다.

  파르티아는 정식으로 로마와 동맹을 맺겠다고 선포했다.

  로마는 이 점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환영의 의사를 밝혔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니 이제 곤란한 건 아르메니아가 됐다.

  폼페이우스는 보란 듯이 대군을 이끌고 천천히 아르메니아의 영토를 향해 진군했다.

  그는 곧바로 전쟁을 시작하지도, 항복하라는 통첩을 보내지도 않았다.

  그저 6만이 넘는 대군을 국경선에 배치하고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

  여태까지와는 달리 시간은 폼페이우스의 편이었다.

  파르티아와 로마에게 둘러싸인 형국이 된 아르메니아의 귀족들은 극도로 불안해했다.

  만약 두 국가가 아르메니아를 분할 점령한다는 협약을 맺는다면 그 즉시 아르메니아는 멸망한다.

  파르티아와 아르메니아는 여러 번 충돌한 전력이 있어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로마라는 든든한 동맹국까지 생겼으니 이참에 아르메니아를 멸망시키고 싶을 수도 있다.

  귀족들은 자신의 야욕 때문에 미트리다테스와 동맹을 맺은 티그라네스 2세를 대놓고 비난했다.

  심지어 왕국이 망할 거라고 생각한 왕자가 반기를 들기까지 했다.

  이 왕자는 폼페이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을 지지해준다면 로마와 동맹을 맺겠다고 제안했다.

  폼페이우스는 이번에도 경거망동하지 않고 차분히 기다렸다.

  이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아무리 티그라네스 2세의 왕권이 흔들렸어도 한낱 왕자에게 밀려날 정도는 아니었기 떄문이다.

  그래도 티그라네스 2세가 느끼는 압박감은 이제 극에 달했다.

  왕자의 반란은 진압했으나 언제 이와 같은 사태가 또 일어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매일 같이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폐하! 로마와의 전쟁은 불가능하옵니다! 아르메니아의 존망이 걸린 문제이옵니다!"

  "폼페이우스의 군대는 루쿨루스보다 2배는 더 많고 강인함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파르티아마저 로마에게 붙었습니다. 미트리다테스와의 의리는 지금까지 해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지킨 것이 아니옵니까!"

  "···하지만 여기에서 로마에게 숙인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쭉 로마의 속국과도 같은 신세가 될 것이다."

  반박을 해보는 티그라네스의 말에는 별다른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속국 신세가 된다고 해도 국가가 망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선택지는 처음부터 하나밖에 없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건 자존심 탓이었다.

  티그라네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로마군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도 얼굴을 보지는 못했으나 폼페이우스라는 로마 지휘관이 두렵기까지 했다.

  루쿨루스도 엄청난 맹장이었으나 폼페이우스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전투로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점은 루쿨루스와 같았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티그라네스가 싸운다는 선택을 할 기회마저 박탈해 버렸다.

  항복 외에는 선택조차 할 수 없게 손발이 꽁꽁 묶인 것만 같았다.

  한참을 말없이 땅만 바라보고 있던 티그라네스는 이내 서기관을 불렀다.

  "로마군에···사신을 보내라. 내가 직접 방문할 테니 강화조약을 체결하자고."

  일국의 왕이 적군의 장수를 직접 찾아가겠다는 건 결국 항복의 의미나 마찬가지다.

  엄청난 굴욕이었으나 신하들은 왕의 결정을 반겼다.

  자신들이 직접적인 굴욕을 당하는 것도 아니고, 일단은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현명하신 결정이옵니다. 폐하!"

  "국익을 생각하신 영명한 군주로 길이길이 칭송을 받을 것이옵니다!"

  신하들의 속 보이는 아부가 티그라네스의 배알을 한층 더 뒤틀리게 했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옥좌에서 일어나 자신의 침소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든지 말든지 신하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켰다는 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

  직접 만나 강화조약을 체결하자는 제안에 폼페이우스는 기꺼이 그러겠다는 답신을 보냈다.

  그런데 우습게도 대답이 도착하기도 전에 티그라네스는 미트리다테스에게 막대한 현상금을 걸었다.

  아르메니아가 얼마나 급한 상황에 몰렸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덕분에 아르메니아에 들어갈 틈만 노리고 있던 미트리다테스는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야만 했다.

  흑해 서쪽 해안가에 바싹 붙어 있는 콜키스까지 갔지만, 거기도 안전하지 않았다.

  미트리다테스가 올 거라고 예측한 폼페이우스가 깔아둔 해군이 감시망을 번뜩이고 있었던 까닭이다.

  결국 그는 험준한 카프카스 산맥의 안까지 들어가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66세의 노구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도망 길이었다.

  정치적인 사망선고를 받은 미트리다테스가 재기할 가능성은 이제 거의 전무했다.

  폼페이우스는 이번에도 대전략가로서의 자신의 진면목을 아낌없이 보여준 것이다.

  폰투스와 아르메니아를 무릎 꿇릴 때까지 치른 전투는 단 한번이었다.

  미트리다테스와의 회전도 시작 전부터 끝까지 전부 폼페이우스가 설계한 대로 흘러갔다.

  전황은 단 한 차례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강화조약을 체결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티그라네스 왕을 맞이하는 로마군은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기다렸다.

  폼페이우스는 옥좌를 연상시키는 의자에 앉아 티그라네스를 맞이했다.

  마르쿠스는 폼페이우스의 뒤에서 역사적인 강화조약이 체결되는 모습을 생생하게 두 눈에 담았다.

  티그라네스는 전형적인 동방 왕조의 군주답게 화려한 왕관을 쓰고 나타났다.

  로마군의 진영 앞에 도달해 말에서 내린 그는 천천히 폼페이우스의 앞까지 걸어왔다.

  황금으로 만든 검을 호위병에 건넨 그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폼페이우스를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을 만든 적이 어떤 인물인지 잊지 않으려는 듯 보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굴욕을 억누르려 애쓰는 듯 보이기도 했다.

  결국 마음을 정리한 티그라네스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왕관을 벗었다.

  동방에서 왕관을 상대방에게 건넨다는 것은 패배를 인정하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마르쿠스가 앞으로 나와 양피지에 적혀 있는 티그라네스의 신상을 그대로 읽었다.

  "티그라네스 2세. 아르티시야드 왕가의 혈통이자 아르메니아의 국왕. 폰투스 국왕 미트리다테스 6세의 동맹자이며 셀레우코스의 군주를 칭하는 이입니다. 항복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폼페이우스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은 티그라네스에게 다가갔다.

  그는 넘겨받은 왕관을 다시 돌려주며 티그라네스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대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겠소. 아르메니아가 내가 내건 조건을 수락한다면 이제 우리 사이에 피를 흘릴 일은 없을 거요."

  "무슨 조건이라도···우리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소."

  "현명한 결정이오. 그럼 이쪽의 요구를 전달해드리리다."

  폼페이우스가 신호를 보내자 마르쿠스는 한 장의 양피지를 티그라네스에게 건네주었다.

  거기에 적혀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Ⅰ. 아르메니아는 전쟁의 배상금으로 1억 4천 4백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지불한다.

  Ⅱ. 배상금과는 별개로 폼페이우스의 군단병에게 1인당 200 세스테르티우스를 제공한다.

  Ⅲ. 아르메니아가 부당하게 점유하고 있던 모든 영토를 반환한다. 페니키아, 킬리키아, 유프라테스 강의 동쪽 연안 소유권을 더는 주장하지 않는다.

  Ⅳ.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모든 관계를 파기하고, 앞으로 일체의 협력 관계를 맺지 않는다.

  Ⅴ. 아르메니아는 더는 로마에게 적대행위를 하지 않고, 로마 역시 아르메니아에 군사행동을 하지 않는다.

  Ⅵ. 위의 사항을 어길 시 로마는 언제든 아르메니아에 협정이행을 요구할 권리를 지닌다.

  예상했던 제안이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너무나도 뼈아픈 내용이었다.

  1번과 2번 항목을 합치면 지불해야 할 배상액은 1억 6천만 세스테르티우스에 달한다. 풍족한 동방의 왕조라도 국고를 탈탈 털어야 마련할 수 있는 금액이다.

  3번과 6번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앞으로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했다간 즉각 군사보복을 할 거라는 엄포였다.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갔고, 남은 건 로마에 지불 해야 할 막대한 빚뿐이다.

  쌓아왔던 모든 걸 잃어버린 티그라네스는 그저 참담한 심정이었다.

  이 피해를 모두 복구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도 멸망은 피했다는 점이 최소한의 위안거리라고 해야할까.

  티그라네스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회담을 마무리 지었다.

  아르메니아의 항복까지 받아낸 폼페이우스는 곧바로 다음 행동에 착수했다.

  미트리다테스를 쫓아내고 아르메니아의 복종을 얻어냈으나 아직 동방을 평정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원하는 건 단순한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일대의 완전한 복속이었다.

  마르쿠스는 슬슬 자신이 나설 차례라고 판단했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자연히 수많은 피해가 발생한다.

  재물은 약탈당하고, 식량과 물자 부족으로 일반 평민들은 고통에 허덕인다.

  실제로 로마의 영역이 된 폰투스나 킬리키아는 물론 아르메니아도 전부 비슷한 상황이었다.

  마르쿠스는 배를 곪고 있는 하층민들과 전쟁에 피해를 본 농부들을 지원해주었다.

  각종 농사도구와 목재가 구호품이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에게 전달되었다.

  로마와의 전쟁으로 피폐해졌지만 어쨌든 앞으로는 로마의 영향력 안에서 살아야 한다.

  폰투스 주민들은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러나 도움을 주는 크라수스 가문의 클리엔테스들의 말에 그들은 감사하며 도움을 받아들였다.

  "전쟁은 윗사람들의 사정으로 벌어진 일이지만, 어쨌든 우리는 다 함께 살아가야 하지 않겠소? 올겨울을 나기 힘들 것 같다면 언제든 달려올 테니 도움을 구하시오."

  당장의 생활고를 겪는 이들에게 크라수스 가문의 도움은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이나 마찬가지였다.

  폼페이우스도 마르쿠스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었다.

  전후처리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이 바로 피지배 계층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마르쿠스 덕분에 로마와 가장 격렬하게 싸웠던 폰투스마저 별다른 저항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폰투스 국민 가운데는 미트리다테스보다 로마를 더 좋게 보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미트리다테스의 지배 하에서는 전쟁뿐이었는데 로마가 들어오니 오히려 생활이 안정됐기 때문이다.

  폰투스와 아르메니아가 평정되자 폼페이우스의 시선은 자연스레 남쪽으로 내려갔다.

  아직 동방에는 로마의 영향력이 다 미치지 못하는 수많은 지역이 남아있었다.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의 서쪽에 있는 키프로스 섬.

  유대의 예루살렘.

  페트라를 중심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나바테아인.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동의도 없이 이들을 모두 로마의 세력 아래에 편입시키기로 마음먹었다.

  필요한도에 따라 얼마든지 연장할 수 있는 임페리움을 지금 시점에서 반납하고 로마로 돌아갈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이렇듯 동방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이는 분명 폼페이우스였다.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덕분에 마르쿠스는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고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자신의 그림자를 동방에 드리우고 있었다

  < 51.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 여기까지가 무료연재분이었습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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