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동방의 지배자 >
마르쿠스는 2개 군단을 이끌고 셀레우코스 왕조가 통치하는 시리아로 향했다.
폼페이우스의 말대로 셀레우코스 왕조는 이미 시리아의 지배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마르쿠스의 임무는 폼페이우스의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최대한 많은 지역을 점령해 놓는 것이었다.
군단을 지휘하는 건 처음이라 내심 불안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시리아의 저항은 전무한 수준이었다.
오히려 주민들은 강대국인 로마의 지배를 환영하는 눈치였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얼마나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는지 여실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지배자가 허약하면 피지배인들은 자연히 침략자에게 시달리는 법이다.
시리아의 주민들은 연례행사처럼 쳐들어오는 외적들에게 해방되고픈 심정이었다.
로마의 속주가 되면 세금을 내야 하긴 해도 더 이상 쳐들어오는 자들은 없을 것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로마의 지배를 받아들일 이유는 차고 넘쳤다.
"로마에서 오신 해방군을 환영합니다!"
심지어 알렉산드리아에 버금가는 대도시 안티오키아 인근에서도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로마군은 자신들이 정말로 고통받는 소아시아를 해방하기 위해 온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마르쿠스는 신중하게 군단을 움직였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좋다고 적대하는 자들이 없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폼페이우스의 명령을 받은 군단장들은 마르쿠스의 의견을 잘 따라주었다.
사실 군단장들 입장에서는 마르쿠스를 꺼릴 이유가 없었다.
로마 최고의 재력을 지닌 가문의 장남이자 폼페이우스가 총애하는 청년이다.
장차 거물이 될 게 분명한 이와 연줄을 만들어 놓는 건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게다가 마르쿠스는 배경과 달리 겸손하고 성실한 청년으로 보였다.
폼페이우스와 친하다고 다른 군단장들을 아래로 보지도 않았다.
지휘하는데도 합리적이었기 때문에 딱히 지적할 곳도 없었다.
물론 마르쿠스가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찔러준 반짝이는 은화가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었다.
조심스레 진군한 로마군은 적군을 마주치지는 않았으나 몇 무리의 산적 떼를 전멸시켰다.
이런 행보 덕분에 시리아 주민들은 더욱더 로마군을 환영하게 됐다.
결국 마르쿠스의 군대는 안티오키아 내부까지 무혈입성하는 예상외의 성과를 거두었다.
군단장 한 명이 자신들을 열렬히 환호하는 시민들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둘러보았다.
"폼페이우스 님이 어째서 이 지역을 합병해야 한다고 하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마르쿠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수명이 다한 왕조였으니까요. 이곳을 합병하는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곳을 차지하지 않는다면 당장 내년이라도 파르티아가 밀고 내려올지도 모릅니다."
"폼페이우스 님의 혜안에는 그저 감탄만 나올 뿐입니다."
"그러게요."
마르쿠스는 묘한 어조로 맞장구를 쳤다.
확실히 군사적인 사안이 얽혔을 때 폼페이우스의 통찰력은 로마에서 따를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어째서 다른 측면으로는 그 능력이 발휘되지 않는지 심히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마르쿠스는 폼페이우스가 내린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냈다.
본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다마스쿠스를 제외한 전 지역의 제압이 끝난 상태였다.
딱히 한 일도 없는데 제삼자가 보면 상당한 군공을 세운 것으로 보였다.
폼페이우스는 마르쿠스의 공을 한 번 치하한 뒤, 대군을 이끌고 다마스쿠스까지 밀고 들어갔다.
이번에도 저항은 없었다.
군주는 감히 로마에 맞서기를 두려워했고, 시민들은 오히려 무능력한 왕이 교체되는 걸 환영했다.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귀족들은 자리를 보전해주겠다는 로마의 약속을 받고 스스로 성문을 열었다.
결국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를 자처했던 3왕조 중 하나인 셀레우코스 왕조는 역사에서 그 이름을 감추게 됐다.
안티고노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가 모두 로마에 멸망했으니 이제 남은 건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뿐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역시 이 시기에는 사실상 로마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그래서인지 폼페이우스는 아직 이집트를 어떻게 할 마음은 없었다.
대신 새롭게 로마의 속주가 된 시리아의 안정을 꾀하는 데 주력했다.
폼페이우스는 우선 약속대로 시리아 지배층의 기득권을 인정해주었다.
군주는 끌어내려도 나머지 기득권층은 되도록 남겨놓는 게 로마의 속주 통치 방침이었다.
이런 방식 덕분에 로마는 현지의 저항을 최소화하면서 지역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폼페이우스가 순조롭게 시리아 속주를 로마에 편입시키고 있던 무렵, 의외의 손님들이 다마스쿠스를 찾아왔다.
바로 유대인 최후의 왕조인 하스몬 왕조의 두 대표였다.
정교분리가 그나마 약간은 되어 있는 로마와 달리 이스라엘은 제정일치의 통치체제가 기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제사장과 왕이 권력다툼을 벌이는 게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바리새인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바리사이파를 중심으로 한 대제사장 힐카누스 2세.
그리고 사두개파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사두가이파를 규합한 유대의 왕 아리스토불루스 2세.
이 두 사람의 치열한 권력다툼으로 이스라엘은 하루하루가 혼란의 연속이었다.
그런 시기에 엄청난 힘을 가진 로마의 총사령관 폼페이우스가 시리아에 떡하니 나타난 것이다.
이스라엘의 두 지배자는 당연히 폼페이우스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현재 폼페이우스가 동방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사실상 황제에 가까웠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공식 문건에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라는 호칭을 자연스레 사용했다.
메가스라는 칭호를 썼던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자신이 비견될 만하다는 자부심의 발로였다.
이스라엘에서 온 사신을 접견할 때도 당연히 제왕을 연상시키는 태도로 임했다.
마르쿠스는 마치 왕의 충실한 심복처럼 폼페이우스의 옆에 자리했다.
"폼페이우스 님, 유대의 하스몬 왕조에서 온 사신이 뵙기를 청합니다."
"들라 하게."
마르쿠스가 신호를 보내자 문이 열리고 두 명의 사신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두 사신 중 한 명의 복장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마치 자신이 얼마나 위엄 있는 존재인지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화려한 의상과 장신구를 덕지덕지 걸치고 있었다.
게다가 걸음걸이 또한 오만하기가 짝이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패권국의 사신이 속국의 왕을 만나러 온 줄 착각할 법했다.
폼페이우스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
마르쿠스도 사신의 의도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정상적인 복장과 태도를 보인 첫 번째 사신이 먼저 정중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로마의 총사령관을 뵙습니다. 저는 유대의 대제사장 힐카누스 2세의 뜻을 전하기 위해 왔사옵니다."
다른 한 명의 사신은 고개를 까딱거렸을 뿐 여전히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입을 열었다.
"유대의 정당한 지배자 아리스토블루스 2세의 말을 전하기 위해 왔소."
마르쿠스는 이쯤 되니 저 사신은 어떤 자신감으로 저런 태도를 보이는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폼페이우스 역시 마찬가지인 심정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황당함과 불쾌함의 감정이 절반씩 섞여 있었다.
"그래. 무슨 일로 접견을 신청했는지 말이나 해보게."
이번에도 힐카누스의 사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제사장님은 선대 폐하의 부인이신 알렉산드라 님이 임명한 정통성 있는 지배자입니다. 그런데 무도한 아리스토불루스가 반란을 시도해 억지로 왕의 자리를 가져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정치 체제를 이해하지 못한 폼페이우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제사장이 정당한 지배자? 정당한 지배자라면 왕의 자리를 받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사실상의 통치자는 알렉산드라 님이셨기 때문에 힐카누스 님은 우선 대제사장의 자리만 받으신 겁니다. 저희 법률상 여인은 대제사장이 될 수 없으니까요."
로마에도 대제사장에 해당하는 직책은 있었다.
바로 최고 사제에 해당하는 폰티펙스 막시무스였다. 종교를 이끄는 최고 사제는 정치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대놓고 지배하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폼페이우스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문화의 차이는 이래서 무서운 법이다.
마르쿠스는 유대교에서 대제사장의 권위는 로마의 집정관에 버금간다고 확인해 주었다.
그제야 폼페이우스는 의심을 거두었다.
"그래, 그러면 자네가 따르는 대제사장은 현재 왕이 부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자신이 왕의 자리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바로 그렇습니다."
힐카누스가 보낸 사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자 거만한 태도로 일관하던 아리스토불루스의 사신이 날카로운 어조로 목소리를 높였다.
"헛소리! 현 폐하야말로 이스라엘을 이끌어나갈 정통성 있는 왕이오. 대제사장 일파의 간악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오. 아리스토불루스 폐하는 로마가 타국의 일에 어리석게 참견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 하셨소. 그러나 만약 누군가의 편을 들어야겠거든 당연히 정통성 있는 폐하의 편을 들어야 할 것이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방자한 사신의 태도에 폼페이우스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흘렸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물었다.
"자네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로마에서 파견된 사령관이 아니오?"
"허허,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이런 태도를 보인다라······."
"아리스토불루스 폐하는 전능하신 창조주께 기름 부음 받은 위대한 왕이시오. 로마는 마땅히 폐하의 편을 들어 저 무도한 반역의 무리를 징벌해야 할 것이오."
폼페이우스는 두통을 억누르려는 듯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으나 왠지 화를 내는 것조차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스토불루스는 로마가 이스라엘보다 월등히 강하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당장 최근에만 하더라도 그는 폼페이우스의 부장인 스카우루스에게 돈을 주고 수도방어를 의뢰한 적이 있었다.
당시 맹위를 떨치던 나바테아의 왕 아레타스 2세가 쳐들어왔던 까닭이다.
그런데 아레타스 2세는 로마군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싸워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퇴각했다.
이스라엘의 두 권력자가 로마의 힘을 실감한 건 바로 이 순간부터였다.
대제사장 힐카누스는 저자세로 바짝 엎드리는 전략을 취했으나 아리스토불루스는 달랐다.
신에게 선택을 받은 민족의 왕인 자신이 비굴한 태도로 나갈 수는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면서도 도움은 달라고 하고 있으니 폼페이우스로서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마르쿠스 역시 유대인이 선민사상이 강하다는 건 익히 알았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도움을 청하러 온 주제에 저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정말로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저러면 기분이 나빠서라도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못 하는 건가? 못할 리가 없는데······.'
마르쿠스의 예상대로 폼페이우스는 아리스토불루스의 편을 들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렇다고 힐카누스의 손을 들어주는 것도 조금 마음에 걸렸다.
종교의 최고 책임자가 국가를 마음대로 주무른다는 게 별로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폼페이우스가 이내 절충안을 제시했다.
"내가 볼 땐 이스라엘의 체제가 갈등의 근원인 것 같군. 누가 지도자가 되더라도 제정일치라는 비합리적인 제도는 재고할 필요가 있어 보이네."
"마, 말도 안 됩니다! 대제사장의 권한은 성서에서 보장하는 신성한 권리입니다. 누구도 이걸 침범할 수는 없습니다!"
"로마는 지금 우리 이스라엘의 존엄을 짓밟으려 하는 것이오!"
폼페이우스는 자신이 도출한 방안에 격렬한 거부반응이 나오자 마음이 차게 식었다.
누구의 편을 드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존속시켜야 할까에 대해 진지하게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내 제안을 받아들이기 싫다면 더는 논의를 지속할 필요가 없겠군. 둘 다 물러나게."
"하! 이리도 무도한 자들이었다니."
아리스토불루스의 사신은 끝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씩씩대며 몸을 돌렸다.
반면 힐카누스의 사신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파악하고 유보적인 태도로 전환했다.
"저, 저는 대제사장님께 사령관님의 의견을 전하겠습니다. 긍정적인 답을 가져올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두 사신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 마르쿠스는 어이없다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
폼페이우스는 아직 화가 다 식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몇 차례 호흡을 고른 그는 이내 헛웃음을 흘리며 중지와 검지로 눈가를 꾹꾹 어루만졌다.
"자네도 저들의 태도를 봤나? 내가 헛것을 보고 들은 게 아니겠지?"
"예. 문화충격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인가 싶더군요."
"문화충격이라···그래 자네 말대로일세. 아주 적절한 표현이로군."
"그래서, 어느 쪽 편을 들어주실 겁니까?"
폼페이우스는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자네는 누구 편을 드는 게 옳다고 생각하나?"
폼페이우스의 심경을 짐작한 마르쿠스는 그가 원하는 답을 들려주었다.
"사실 누군가의 편을 들어야만 하는 건 아니죠. 문화의 차이란 생각보다 큰 문제입니다."
"그래. 자네 말이 맞네. 그나마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는 자들조차 말썽을 일으키는데 이스라엘 정도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 저들을 그대로 놔둔다면 커다란 분쟁의 씨앗이 될 수도 있겠어."
"이스라엘은 유일신교의 제정일치 사회. 로마와 달라도 너무 다르죠. 그러니 방금 같은 어처구니없는 상황도 생기는 것일 테고요."
"그래. 그 말대로일세. 역시 한 번쯤은 제대로 손을 봐줘야겠어. 아니, 때에 따라서는 속주로 삼아버리는 것도 고려를 해봐야겠군."
단순히 사신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사신들이 그런 말도 안 되는 모습을 보인 근본적 원인을 고찰한 뒤에 내린 결론이었다.
로마의 속주가 된 시리아의 바로 남쪽에 이스라엘 같은 이질적인 국가를 가만히 놔둘 수는 없다.
두 사신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현 이스라엘의 지배자들에게는 안정적인 통치를 기대할 수 없었다.
누구의 편을 들어준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이 안정될 확률은 극히 적어 보였다.
분쟁의 싹을 틔울 수 있는 씨앗은 미리 제거하는 게 최선이다.
폼페이우스는 즉각 전 군단을 소집해 예루살렘을 향해 남하했다.
이스라엘의 허약한 군대가 로마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폼페이우스가 직접 이끄는 군단은 이스라엘의 도시들을 파죽지세로 점령하며 나아갔다.
아리스토불루스는 급히 군대를 모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알렉산드리움 요새에 진을 쳤다.
그러나 막상 눈앞에 로마의 대군이 보이니 아리스토불루스는 투지가 급속도로 식는 걸 느꼈다.
서방세계를 제패한 로마군의 위용은 이스라엘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에 반대하던 힐카누스를 강제로 유폐하고 전장에 나온 신하들도 뒤늦게 생각이 바뀌었다.
그들은 입을 모아 아리스토불루스에게 로마와 싸우는 건 자살행위라 진언했다.
결국 아리스토불루스는 기세 좋게 출병했던 것과는 다르게 강화를 제의했다.
"로마에 모든 요새를 넘기고 순순히 투항하겠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조약을 맺을 준비를 하게 해주시오."
직접 피를 흘리고 싸우기 전에 항복하면 일단 받아주는 게 로마의 관례였다.
폼페이우스는 아리스토불루스에게 준비가 끝나면 직접 자신을 찾아오라고 전했다.
그래도 어딘가 미심쩍어 군대를 완전히 물리지는 않았다.
예루살렘 동쪽의 예리코 요새를 점령한 로마군은 그곳에서 아리스토불루스의 연락을 기다렸다.
폼페이우스의 예감은 옳았다.
무사히 돌아간 아리스토불루스는 난공불락의 성인 예루살렘의 방어력을 믿고 항복을 무효로 돌리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계약의 민족이라고까지 불리는 로마인들은 약속을 무엇보다 중시했다.
그런 로마인들에게 국가 단위의 계약을 깨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금기와도 같았다.
격분한 폼페이우스는 즉각 예리코 요새에 주둔 중인 군단을 출병시켜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이스라엘을 지워버리고 로마의 속주로 삼겠다!"
군단장들은 물론 마르쿠스도 반대의견을 내지 않았다.
군단장들 가운데서는 더 강도 높은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분노로 사기가 끓어오른 로마군은 순식간에 공성전에 필요한 무기들을 만들어냈다.
성벽과 성문을 부수는 아리에스라는 파성추, 오나게르(오나거)라 불리는 투석기.
공성 탑의 일종인 투레스 모빌레스까지 전부 동원됐다.
로마군의 공성 무기에 심적으로 위축된 아리스토불루스는 또다시 자신의 판단을 뒤집었다.
"항복하지 않겠다는 것은 착오가 있었던 것이오. 배상금을 지불하는데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뜻이었소. 원하는 대로 배상금을 얼마든지 지불하고 예루살렘의 성문을 열 테니 서로 피를 흘리지 맙시다."
이런 상황이 되니 폼페이우스는 아리스토불루스의 목적은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자신을 기만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한 번 약속을 어긴 자의 말을 순순히 들어줄 마음은 없었다.
폼페이우스는 협정이행을 하는 순간까지 아리스토불루스를 볼모로 잡겠다고 선언했다.
이번에는 아리스토불루스도 순순히 말을 따랐다.
드디어 이스라엘 문제를 일단락 지었다고 판단한 폼페이우스는 포로를 데리고 일단 물러났다.
설마하니 왕의 신병을 확보했는데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리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폼페이우스의 명령을 받은 부관은 배상금이 준비될 때까지 사절단과 함께 예루살렘에 머물렀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예루살렘의 주전파들이 배상금을 지불하지 못하겠다며 로마 사절단을 쫓아내 버린 것이다.
폼페이우스의 인내심은 문자 그대로 한계에 달했다.
십 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숱한 전쟁을 치렀지만 맹세코 이렇게 화가 났던 적은 처음이었다.
"이제부터는 그 어떤 타협의 여지도 없다. 항복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로마를 기만한 현 국왕의 지지 세력을 전부 숙청한다."
분명히 원만하게 문제를 해결할 길이 있었던 예루살렘은 스스로 파멸의 길을 골랐다.
드높은 자존심에 비해 지닌 능력이 따라주지 않을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시였다.
< 53. 동방의 지배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