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격동의 전조 >
3년이나 지나서 귀환한 로마는 이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해적들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동방도 평정된 터라 사람들의 얼굴에는 아무런 근심이 없었다.
브린디시움에서 마차를 타고 로마로 돌아온 마르쿠스는 수많은 환영인파에 휩싸여 팔라티노 언덕을 올랐다.
집에 도착한 그는 오랜만에 그리운 얼굴들을 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부른 이름은 역시나 아버지인 크라수스와 어머니 테우토리아였다.
"아버지, 어머니.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그래. 너야말로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구나."
크라수스는 인자하게 웃으며 마르쿠스의 양어깨에 손을 올렸다.
테우토리아는 뛰어오다시피 해 마르쿠스를 꽉 안아주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약간의 물기가 고여 있었다.
"많이 늠름해졌구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무사히 돌아왔으니 됐다. 그 한 마디로 진심은 넘치도록 전해졌다.
동생 푸블리우스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형의 귀환을 반겼다.
눈부신 활약을 쌓아가는 마르쿠스는 동생에게 이제 거의 영웅과도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오셨습니까, 형님. 이번 전쟁에서도 대단한 공을 세우셨다고 들었습니다."
"저항도 하지 못하는 빈약한 땅 몇 군데를 점령했을 뿐이다. 오히려 전장에서 목숨 걸고 싸워 훈장을 받은 스파르타쿠스 쪽의 공이 더 크지."
마르쿠스는 가솔들 사이에서 스파르타쿠스를 보고 있는 셀리니를 발견했다.
그녀의 손에는 스파르타쿠스에게 줄 은으로 만들어진 시민관이 들려 있었다.
오랜만의 부부의 재회를 이 이상 방해할 만큼 눈치 없는 마르쿠스는 아니다.
그가 옆에 있는 스파르타쿠스 허리를 쿡 찌르며 눈짓을 보냈다.
"아내와 밀린 이야기가 많을 텐데 슬슬 가봐."
"예. 그럼 가보겠습니다."
스파르타쿠스는 환하게 웃으며 아내에게 걸어갔다. 셀리니도 마르쿠스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남편과 함께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갔다.
마르쿠스는 마지막으로 소중한 사람들과 재회의 시간을 가졌다.
이야기를 중간에 끊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마지막으로 순서를 미룬 것이다.
한쪽에서 차분하게 기다리고 있던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율리아가 마르쿠스의 품에 안겨 왔다.
"마르쿠스 님!"
"율리아, 그동안 잘 지냈지? 혹시 몸이 아프거나 불편한 곳은 없었고?"
율리아가 마르쿠스에게 안긴 상태로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열여덟 살이 된 그녀는 3년 전과는 또 많이 달라 보였다.
이제는 확실히 귀엽다는 느낌보다는 아름답다는 감상이 먼저 드는 여인이 되었다.
"그건 전장에서 돌아오신 남편에게 제가 해야 할 말인데 여전히 걱정이 많으시네요. 다른 분들이 배려를 해주셔서 아무런 불편 없이 잘 지냈답니다."
"걱정이 많다는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어. 아무튼 잘 지냈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키가 조금 크셨네요?"
"그래? 안 그래도 스파르타쿠스도 그런 말을 했었는데 아직 성장기가 다 끝나지 않았나 봐."
영양섭취를 확실히 해서 그런지 마르쿠스의 키는 전생보다도 훨씬 더 컸다.
고대인의 기준으로 보면 확실히 장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입가에는 살짝 미소가 걸렸다.
"원래도 멋있으셨지만. 이전보다 훨씬 더 듬직해 보이세요."
"하하, 당신도 누가 보면 비너스 여신이 잠시 세상에 내려온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인걸. 내 아내가 이렇게나 아름답다고 온 로마에 자랑하고 싶은 심정이야."
"그, 그 정도는 아니에요. 과장이 너무 심하시네요······."
화기애애한 부부의 대화가 오가는 사이 율리아의 뒤에서 셉티무스 와 다나에가 천천히 걸어왔다.
두 사람은 앞다투어 마르쿠스의 무사 귀환을 축하했다.
마르쿠스도 사업체를 관리하고 율리아를 잘 챙겨준 두 사람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날 저녁은 장남의 귀환을 축하하는 의미로 화려한 연회가 열렸다.
왁자지껄 먹고 마시며 한바탕 회포를 푼 다음 날부터 마르쿠스는 다시 정상적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일단 정계 변화부터 면밀히 검토했다.
기원전 63년은 정치적으로도 꽤 많은 변화가 있는 해였다.
원로원에서 꾸준히 정치력을 늘려간 키케로가 마침내 집정관에 당선되어 임기를 시작한 것이다.
지방에서 상경해 변호사로 성공하고 집정관까지 오른 키케로는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었다.
전쟁영웅으로서 성공한 전형적인 경우가 아니라는 점도 이색적이었다.
실제로 키케로는 자신의 이런 성공담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자신의 저택구입에 이어 선거비까지 빌려준 마르쿠스의 귀환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축사까지 보냈다.
그다음으로는 셉티무스와 다나에, 비트루비우스에게 간략한 사업보고를 들었다.
가장 고무적인 보고는 드디어 신형 고로를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제 드디어 강철을 대량생산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는 단순히 군사력의 증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농기구부터 각종 도구에 이르기까지 개선할 수 있는 품목이 한두 개가 아니다.
마르쿠스는 비트루비우스와 장인들의 성과를 크게 치하하고 두둑한 수고비까지 얹어주었다.
다른 분야의 보고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여성용 화장품 시장은 이미 사실상 저희가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장신구와 옷도 자본력을 내세워 성공적으로 점유율을 높이고 있습니다. 마님께서 이런 쪽으로 감각이 굉장히 좋으시더군요."
"맞아요. 유행이 될 만한 제품을 파악하는 안목이 굉장하다고 해야 할까요? 거기에 외모까지 받쳐주시니 귀부인들이 정신을 못 차리더라고요."
"그런 부분은 아버지 쪽 피를 이어받았나 보네."
아무래도 율리아가 카이사르에게 물려받은 건 뛰어난 지성만이 아닌 듯했다.
마르쿠스의 머릿속에서 비단을 유행시킬 구체적인 계획이 번뜩 솟아올랐다.
그는 보고를 전부 들은 뒤 율리아의 방으로 가 비단옷을 선물해주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옷감을 접한 율리아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세상에 어떻게 옷이 이렇게 가볍고 질감이 좋죠? 직접 입어보니 촉감도 훌륭하네요."
비단은 색깔도 화려했고 옷이 몸에 찰싹 달라붙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관능적인 느낌까지 풍겼다.
율리아 같은 미녀가 입으니 시선을 뗄 수가 없을 정도로 눈길을 잡아끌었다.
"어때? 로마에 유행을 몰고 올 수 있을 것 같아?"
"물론이죠. 다음에 예정된 연회에 이 옷을 입고 가도 될까요? 그냥 그러기만 해도 엄청난 입소문을 탈 것 같아요."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 다른 남정네들이 당신을 묘한 눈으로 볼까봐 좀 걱정되긴 하지만."
"에이, 농담도 참."
순도 백 프로의 진심이었으나 그렇다고 못 하게 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미래에 대유행할 텐데 비단옷을 아예 입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중에 수작 거는 놈이 나오면 가문째로 묻어버리면 되겠지.'
그리고 돈을 버는 건 좋지만 너무 비싼 비단 가격은 인플레이션을 불러올 수도 있으니 그런 점에 대한 대책도 마련해야 했다.
실제로 제정 시기의 로마는 비단이 너무 과한 사치를 유발한다며 금지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비단 가격이 폭등하는 원인은 당연히 동양의 제조법 독점과 파르티아의 중개무역이었다.
생산법이야 알아낼 수 있으니 누에고치만 빼내오면 된다.
실제로 미래의 동로마는 비단 직조를 자신들의 전매산업으로 삼았다.
로마라고 못할 이유는 없었다.
잠깐 상념에 빠져 있던 마르쿠스의 귓가에 율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마르쿠스 님, 한 가지 말씀드려야 할 게 있어요."
"뭔데?"
"원래 제 선에서 처리하라고 하셨지만 아무래도 마르쿠스 님이 오셨으니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아버지께서 곧 폰티펙스 막시무스(최고 사제) 선거에 나가시는데 선거비를 빌려달라고 하셔서요."
"당연히 빌려 드려야지. 원하시는 만큼 빌려 드려. 선거운동원도 넉넉히 동원해 드리고."
율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르쿠스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녀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굉장히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시네요."
"응? 장인어른의 선거를 도와드리는 건 사위로서 당연한 일 아닌가?"
"아니···그게 아니라 아버지가 최고 사제직의 후보로 나가시는 데에 놀라지 않으셔서요. 다른 분들은 전부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셨거든요."
최고 사제는 로마의 종교계에서 가장 높은 지위로 굉장한 권위를 지닌 직책이었다.
로마에서 엄청난 존경심을 받는 베스타 여사제들조차 최고 사제의 관리하에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미 명성을 쌓은 사람이 취임하는 일종의 명예직으로 여겨지는 것도 현실이었다.
당장 이번 선거에서 카이사르의 경쟁자가 된 두 사람은 모두 집정관 경력이 있는 60세가량의 노귀족이었다.
실제로 그가 출마하겠다고 하자 주변의 모든 이들이 깜짝 놀랐다.
원로원에서도 카이사르 정도 되는 인물이 어째서 그런 명예직에 막대한 빚을 쏟아붓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카이사르의 성향을 잘 알고 있는 마르쿠스는 대강 이유를 짐작할 수는 있었다.
"당신도 장인어른의 선택을 의외라고 생각해?"
"처음에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랬죠."
"그러면 지금은 아니라는 거군. 나도 비슷한 생각이야. 최고 사제직은 사람들의 인식보다 훨씬 더 쓸모 있는 직책이거든. 거기에 종신직이라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고."
독재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로마의 특성상 모든 관직은 철저하게 복수 구성을 원칙으로 했다.
그리고 선출직의 임기는 모두 1년으로 고정됐다.
이는 로마 최고의 관직인 집정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최고 제사장은 정치적인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올해 선거가 열리는 이유도 전임자인 메텔루스 피우스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야심가이기도 했으나 폼페이우스 못지않은 허영심 덩어리기도 했다.
로마 종교계의 수장 자리가 탐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아버지는 아마 먼 미래의 일도 염두에 두고 있을 거예요. 사실 최고 사제직은 마음만 먹으면 정치에도 꽤 관여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 로마는 종교의식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니까."
로마는 국가 단위의 행사를 할 때는 반드시 최고 사제의 주도하에 의식을 가졌다.
여기에서 최고 사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점괘가 좋지 않다고 행사 자체를 취소할 수도 있었다.
물론 이런 경우는 거의 없는 일이었지만, 최고 사제의 말에는 그만큼의 권위가 있었다.
카이사르는 명예도 명예지만 최고 사제의 정치적인 면까지 고려해 이 자리를 탐내는 게 확실했다.
권력보다는 명예라는 폼페이우스와 달리 카이사르는 저 두 개를 모두 원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버지는 경력이 짧아서 불리하지만 당선을 위해 여러 가지 수를 써두셨어요. 아마 당선 자체는 될 거로 생각해요."
"시민에게 인기는 좋으시니까."
"어쨌든 모두 마르쿠스 님 덕분이에요. 아버지를 대신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부부 사이에 무슨 이런 일로 감사를.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원래 최고 사제는 제사장들의 합으로 결정됐지만, 카이사르는 친한 호민관을 꼬드겨 법을 바꾸었다.
로마 종교계의 수장은 마땅히 시민들의 손에 의해 뽑혀야 한다는 내용의 법안이 민회에 제출되었다.
시민들은 당연히 쌍수를 들고 찬성했다.
거기에 마르쿠스의 자금까지 더해지자 카이사르는 대규모 선거운동원까지 동원할 수 있었다.
시민들의 지지와 압도적인 물량 공세까지 더해지니 원래 역사와는 달리 무난한 판도가 형성됐다.
선거 당일, 카이사르가 최고 사제에 선출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마르쿠스는 율리아와 함께 민회로 향했다.
원칙적으로 여성은 민회에 출입할 권한이 없었지만, 귀족 여성들이 민회를 구경하기 위해 오는 경우는 가끔 있었다. 이럴 경우 높은 확률로 선거에 출마하는 사람의 가족이라 통과되었다.
셉티무스와 다나에도 동행하지 않고 호위 역으로 스파르타쿠스 혼자만 따라붙었다.
민회가 열리는 포로 로마눔은 당연히 수많은 인파로 발 디딜 틈새도 없었다.
저 멀리 로마인들의 선망의 대상인 베스타 여사제들이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오는 게 보였다.
마침 신관용 토가 차림을 한 카이사르가 연설을 하기 위해 막 연단에 오르고 있었다.
수많은 그의 지지자들과 돈으로 고용된 선거인단이 열정적인 환호를 보냈다.
율리아는 당선확률이 높다는 걸 알아도 다소 긴장한 듯 손을 떨고 있었다.
마르쿠스는 그녀의 손을 잡고 미리 확보해 놓은 좋은 자리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광장의 중심으로 가까이 오니 카이사르의 목소리가 한층 더 잘 들렸다.
로마 최고의 웅변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사람답게 능수능란한 연설이었다.
다행히 카이사르의 상대 후보인 이사우리쿠스와 카툴루스의 연설은 썩 훌륭하지 못했다.
마르쿠스의 옆에 앉아있던 젊은 귀족이 분통을 터트렸다.
"답답한 인간들 같으니! 내가 그렇게 후보를 단일화하라고 했거늘. 이제 꼼짝없이 카이사르가 당선되게 생겼어! 허허, 저런 자가 최고 사제가 되다니 이 로마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가려고."
목소리만 들어봐도 카이사르를 싫어한다는 기색이 절로 느껴졌다.
마르쿠스와 율리아의 시선이 자연히 그쪽으로 돌아갔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젊은 귀족이 헛기침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시끄럽게 들렸소? 그렇다면 사과하리다."
"아닙니다. 그냥 어쩌다가 시선이 돌아갔을 뿐입니다."
마르쿠스와 율리아를 번갈아 바라보던 귀족이 난처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카이사르와 인척 관계시오?"
율리아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딸인 율리아 카이사리스입니다."
"허허. 딸이라···이런."
딸의 앞에서 아버지를 욕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귀족은 당황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카이사르의 딸이라면 현숙한 여인이라고 소문은 들었소···그러고 보니 크라수스 가문의 며느리로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귀족의 시선이 이번에는 마르쿠스를 향했다.
"그쪽이 크라수스 가문의 장남이오? 며칠 전에 동방 원정에서 돌아왔다는?"
"예. 제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입니다."
"아아, 반갑소. 자네의 이야기는 키케로에게 많이 들었지. 나는 포르키우스 카토라고 하오."
카토가 불쑥 팔을 내밀었다.
예상외의 만남에 당황도 잠시, 마르쿠스는 침착하게 카토의 팔을 맞잡았다.
"저도 소문은 많이 접했습니다. 공화정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뛰어난 학자시라고요."
"하하, 누가 그런 낯간지러운 소문을 퍼뜨렸는지."
카토는 마르쿠스가 키케로, 브루투스와 함께 가장 주의를 기울이는 공화주의자 중 한 명이었다.
앞의 두 사람과는 이미 좋은 관계를 구축한 상태였다.
카토와도 연줄을 만들어 두려고는 했는데 운 좋게 그런 기회가 저절로 찾아온 것이다.
"카토 님께서도 최고 사제직 선거 결과를 보러 오신 겁니까? 막 원로원에 들어가셨으니 일이 바쁘실 텐데요."
"아아, 내 말을 무시한 두 늙은이가 어디 얼마나 훌륭하게 선거에 임하나 한 번 보려고 자리했소. 그런데 역시 꼴을 보니 낙선이 확실할 것 같군."
"카이사르 님이 최고 사제가 되는 걸 좋게 보시지 않는 건가요?"
"최고 사제는 로마 종교계의 최고책임자요. 그런데 저렇게나 사생활이 문란한···아, 이런 건 딸 앞에서는 할 이야기가 아니로군. 미안하오. 어쨌든 난 카이사르가 최고 사제에 어울리는 품행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생각하오."
마르쿠스는 물론 율리아도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아무리 팔이 안으로 굽어도 카토의 지적은 반박할 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카토는 율리아의 표정을 한 번 살피고는 변명처럼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카이사르의 딸은 품성이 올바르고 현숙한 여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하오. 그래서 난 오히려 그 쪽에게는 호의를 가지고 있소. 내가 카이사르와는 성향이 극단적이라 그런 것이니 너무 나쁘게는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하오."
"아닙니다. 사실 저도 여성 관계에서는 아버지가 조금만 자제를 해주셨으면 하니까요. 따끔하지만 마땅한 비판이라고 받아들이겠습니다."
율리아의 대답에 살짝 감동하기까지 한 카토는 고개를 저으며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허허···이렇게나 훌륭한 딸이 있으면서 어째서 그자는······."
"그나저나 카토 님, 카이사르 님 외의 두 후보는 어째서 후보 단일화를 반대한 겁니까?"
"당연히 자신들이 당선될 거라 믿었기 때문이오. 멍청한 자들 같으니."
"단순히 사적인 이유만으로 카이사르 님을 반대하시는 것 같지는 않군요. 그분을 상당히 위협적이라 여기시는 것 같은데요."
"그대는 아니오? 그대와 부친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혼인으로 그를 제어하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카토는 율리아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마르쿠스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비슷합니다만 지금은 위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단 그분은 최대 채권자인 저와 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카토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지금이야 그렇겠지만 그자는 역병 같은 존재요. 그자를 그대로 놔뒀다가는 언젠가 원로원이 붕괴할 수도 있소."
카토의 혜안에 마르쿠스는 내심 놀랐으나 그는 태연한 표정을 가장하며 혀를 찼다.
"그건 너무 카이사르 님을 과대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원로원에는 제 가문과 폼페이우스 님이 버티고 있는데 어찌 카이사르 님이 그분들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폼페이우스는···그래, 나도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이길 거라 믿지는 않소. 하지만 그자의 정치력은 폼페이우스보다 최소 다섯 수는 더 위라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거요."
"정치는 정치력만으로 할 수는 없죠. 배경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이사르 님을 견제하는 카토 님이 이렇게 두 눈을 부릅뜨고 계신데 그분이 다른 마음을 먹을 수 있을까요?"
은근슬쩍 카토를 추켜올려주니 그는 썩 싫지 않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흠흠, 물론 나는 계속 감시의 눈길을 보낼 생각이긴 하오."
"예. 그리고 카토님만이 아니라 키케로 님도 그렇고 공화정을 사랑하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있습니다. 아직 원로원에 들어갈 나이는 아니어도 저나 제 또래에도 같은 뜻을 지닌 청년들이 많이 있고요. 선현들의 의지는 앞으로도 끊어지지 않고 쭉 이어져갈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허허허, 그렇군. 나도 너무 시야가 좁아져 있었나 보오. 그대들처럼 믿음직한 공화정의 씨앗이 이미 싹을 한창 틔우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이후로도 화기애애한 덕담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마쳤다.
카이사르의 당선으로 최종결과가 정해졌지만 카토는 처음보다는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었다.
마르쿠스는 저택으로 돌아간다고 떠난 카토를 배웅하고 율리아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도 슬슬 가볼까? 장인어른에게 축하 인사라도 건네야지."
"예. 생각보다도 훨씬 더 큰 표 차이로 이겼네요. 괜히 긴장했어요."
카이사르는 전 선거구에서 모조리 승리를 따내는 최고의 압승을 거두었다.
최고 사제직은 다른 명예로운 경력과는 달리 상당한 봉급을 받았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최고 사제에게 제공되는 관저로 이사할 계획이었다.
현재 주인이 없는 다른 대제관의 관저도 그의 관리 아래 하에 들어갔다. 그곳을 수리해 임대한다면 역시 추가적인 소득을 기대해볼 수 있다.
지금까지 마르쿠스가 빌려준 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지만, 어쨌거나 소액이라도 상환할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가문의 노예를 조금 동원해서 관저로 이사하시는 걸 도와드려야겠어. 그리고 임대를 할 건물도 가격을 더 올려 받을 수 있도록······."
율리아에게 앞으로의 일정을 이야기하며 걸어가던 찰나, 뒤쪽에서 조심스레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자네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맞나?"
고개를 돌려보니 꽤나 고지식하게 생긴 중년의 귀족 남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스파르타쿠스가 움직이려 하자 중년 귀족이 다급하게 손을 저으며 외쳤다.
"아니, 아니, 갑자기 불러 세워서 미안하지만 나는 수상한 사람이 아닐세. 전직 법무관이자 원로원 의원일세."
"원로원 의원이시라고요?"
"맞네. 아까 우연히 이야기를 듣고 자네의 신분을 알게 되었네. 마침 크라수스 가문에게 부탁할 게 있었는데 이참에 해결을 보는 게 좋겠다 싶어 이렇게 말을 걸게 된 걸세."
전직 법무관이라면 속주의 총독까지 지낸 거물이라는 뜻이다.
마르쿠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하라는 신호를 주었다.
중년의 귀족이 머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사실 이번에 집정관 선거에 출마할 생각인데···자네도 알다시피 선거에는 돈이 필요하지 않나? 그래서 대출을 부탁하고 싶네. 다른 채권자들은 나에게 돈을 빌려주려 하지 않아서 말이야."
"아니, 전직 법무관이신 분께 어째서 돈을 빌려주지 않는 거죠?"
"그게···어차피 거짓말해봐야 바로 탄로 날 테니 솔직히 말하지. 내가 작년에 좀 급진적인 공약을 걸어서 기사계급과 사이가 좋지 않네. 아 참, 아직 내 이름도 말해주지 않았군."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마르쿠스는 슬슬 상대방의 신상이 짐작이 갔다.
기원전 63년의 가장 큰 화두가 됐던 건 카이사르의 최고 사제직 당선 따위가 아니었다.
그런 것쯤은 사소한 가십거리조차 되지 못할 커다란 사건이 로마 전역을 휩쓸게 된다.
로마가 가진 구조적인 사회모순이 쌓이고 쌓인 끝에 결국 터져버린 사건.
그 사건의 주범이 된 중년 귀족이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일세."
< 55. 격동의 전조 > 끝